젖니를 뽑다
제시카 앤드루스 지음, 김희용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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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정말로 가능할지, 아니면 나는 그냥 항상 나일 뿐인지가 궁금해진다.


<젖니를 뽑다>는 제목 때문에 읽어보고 싶었다.

뭔가 시원한 느낌이 들어서..

인생에서 젖니를 뽑듯 삶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가 많지 않으니 이 이야기 속 주인공은 성공한 느낌이 들었다.

이십 대에 젖니를  뽑듯 과거의 기억들을 청산할 수 있었을까?

새롭게,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났을까?

어떤 이유로? 어떤 상황 때문에? 무슨 사연으로?

꼬리를 무는 질문들에 이 처음 보는 작가는 어떤 대답을 들려줄까?


사실 20대의 사랑 이야기는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그 감정까지 닿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걸 알기에 쉽게 빠져들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책태기를 지나 더 이상 닿지 않는 이야기들에 대해 감정을 분산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젖니를 뽑다>는 시작부터 뭔가 내가 과거에 버리고 온 감정들을 툭툭 건드린다.

나도 그랬었지... 의 그 한때를 소환해 내는 재주가 있는 이야기였다.



나는 언제나 내가 부족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내 몸속에 저장해두고, 내 실패와 불안을 온 조직과 세포 속 깊숙이 넣어둔 채, 경련을 일으키며 불태우다가 마침내 툭툭 두드려서 다 털어내곤 했다.





불안했던 시절.

나 자신을 알지 못했던 시절.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었지만 나서기는 두려웠던 시절.

사랑에서도 나를 알아주길 바랐지만 또 그만큼 숨고 싶었던 시절.

내 욕망마저도 꾹꾹 눌러 담아야 했던 시절.

그 시절로의 회기는 수치심과 잠잠해진 불안증을 다시금 불러냈지만 화자인 '나'의 생각을 따라가면서 치유되지 못하고 숨어있었던 습한 감정들이 드러나 햇볕에 말려지는 기분이었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이 감정적인지 육체적인지 알 수 없다.

남자는 자신의 꿈을 위해 영국을 떠나 스페인으로 떠나고 혼자 남은 나는 장거리 연애가 계속 이어질지 불안해한다.

그러다 남자친구의 초대를 받고 스페인에 도착하지만 미세한 균열을 느낀다.


나는 좌절감에 흔들리고 있고, 당신이 내게 와서 머물라고 청한 후로 당신의 마음속에 가닿을 수 없는 곳이 있다는 데 화가 난다.



두 사람 모두 과거 부모가 남겨준 흔적으로 세상을 본다.

자신들의 미래조차 부모의 흔적으로 지워진다.

그게 무엇인지 알지만 들여다보기 두렵다.

그러나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들의 사랑이, 그들의 미래가 과거의 고치 안에서 영글어 가고 있다.

그들이 화려한 나비의 날갯짓을 할 날이 곧 올 거라 믿고 싶게...


"그렇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정말 통제할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는 그저 상황에 끌려다니기만 하는 걸까?" 우리가 일어나고 있는 일을 통제할 수 있다고 너무나도 간절히 믿고 싶지만, 내 평생은 통제력과의 싸움이었고, 내가 주체성을 가지기를 원하지 않는 세상에서 주체성을 확고히 주장하기 위한 시도였다.

서로의 사랑을 갈망하면서 서로가 떠날까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

장거리 연애를 하면서 서로에게 자신 없어지는 사람들.

간절히 원하면서도 그것이 깨어질까 두려운 사람들.

같이 있지만 나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불안한 사람들이 읽어 봤으면 좋겠다.


끓어오르는 감정들을 꾹꾹 눌러 담아 꽃처럼 피워내는 필력을 가졌다.

20대에서 멀어진 나이에도 문장들 앞에서 살 떨리는 느낌을 받았다.

글들이 마치 살아서 내 감정 속으로 직진하는 느낌이다.


잊었던 감정들을 들춰내는 <젖니를 뽑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 주는 단어, 내가 붙잡고 매달릴 수 있는 명칭이 필요했다.


나는 아직도 나를 설명하는 단어와 매달릴 수 있는 명칭을 찾고 있다.

나이는 먹었어도 마음은 그대로라는 어른들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음을 또 확인했다.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하기를..

사랑에 확신 같은 건 없다는 걸

사랑은 늘 확인하고, 확인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 이름은 다 알지만 정작 주인공 이름은 모르겠는 <젖니를 뽑다>


그녀가

그가

다시 태어나는 선택을 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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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푸 1~2 초판본 The World of Pooh 스페셜 박스 세트 - 전2권 classic edition
앨런 알렉산더 밀른 지음, 어니스트 하워드 쉐퍼드 그림, 박성혜 옮김 / FIKA(피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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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좋아하는 푸.

노래를 잘 부르는 푸.

친구들을 도와주려는 마음이 예쁜 푸.

가끔 엉뚱한 일들을 벌이지만 그게 푸라서 용서가 되는 푸.

그러나 머리는 안 좋은 푸.


어릴 때 디즈니 만화로만 봤던 곰돌이 푸의 이미지가 각인이 되었기에 원작이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했다.

세트미 뿜뿜 거리는 곰돌이 푸의 이야기를 읽다 보니 그동안 사악한 범죄들이 판을 치는 장르소설을 탐독했던 마음이 살포시 다독여지는 기분이다.


곰돌이 푸 이야기는 아이를 키우는 작가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거 같다.

아이(책에서는 크리스토퍼 로빈)의 장난감 인형들을 총출동시켜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솜씨 있는 작가 앨런 알렉산더 밀른.

서문부터 마음을 몽글몽글 거리게 한다.

아이가 졸라서 즉석에서 지어내는 이야기라는 느낌 가득한 곰돌이 푸.



"자, 그러니까 이제 나 어딜 가려던 참이었지?"

단지 안의 꿀을 바닥까지 싹싹 핥아먹고 난 푸는 혼자 중얼거리며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어. 그러다 갑자기 깨달았지. 방금 자기가 이요르의 생일 선물을 먹어치웠다는 사실을!



꿀을 보면 사족을 못써서 자기가 파 놓은 함정인 줄도 잊어버리고 꿀단지에 머리부터 박고 보는 푸.

친구 래빗을 찾아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구멍에 끼어서 일주일을 굶어야 했던 푸.

당나귀 이요르의 잃어버린 꼬리를 찾아주는 푸.

이요르의 생일선물로 준비한 꿀을 싹싹 핥아먹은 푸~


하지만 밉지 않아~

그저 안아주고 싶은 곰둘이 푸~



"피글렛, 너는 별로 용감하지 못하구나."

래빗은 연필을 꺼내 끝에 침을 묻히며 말했어.

"몸집이 아주 작은 동물들은 용감해지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피글렛이 살짝 코를 훌쩍이며 말했어.

갑자기 래빗이 바쁘게 뭔가를 적기 시작했어. 그러다 고개를 들더니 말했어.

"넌 몸집이 아주 작은 동물이기 때문에 앞으로 펼쳐질 모험에서 아주 쓸모가 있을 거야."




곰돌이 푸와 친구들의 대화를 읽고 있으니 삭막하고 포악해진 어른의 마음이 부드러운 봄바람 마냥 살랑인다.

개성대로 서로를 대하지만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 주는 친구들의 모습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친구들 때문에 서로 다툴 일이 없는 평화로움 그 자체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서 남을 배려하는 태도가 세상을 더 좋게 만든다고.



쉽고 순수한 문장들 사이로 밑줄 긋고 싶어지는 문장들이 숨어있다.

그게 <곰돌이 푸>를 읽는 묘미가 아닐까..


앞으로 비가 오는 날이면 '푸의 천재적인 지능 호'가 생각날 거 같다.








곰돌이 푸 2편은 곰돌이 푸의 마지막 이야기들이 담겼습니다.

곰돌이 푸의 마지막 인사도 있어서 조금 쓸쓸했어요.

제 기억 속에서 곰돌이 푸는 영원했는데 말이죠..



2편은 서문이 아닌 반문으로 시작합니다.

서문의 반대말이 무엇인지 푸에게 물어 봤지만 푸는 알지 못했죠. 잘난 척하는 아울이 대신 대답합니다. 서문의 반대말은 반문이라고~ 


2편에선 워라워라워라워라 라고 소리치는 새로운 친구 티거가 등장합니다.

티거가 젤 좋아하는 게 뭘까요?



누구나 사소하게나마 자기만의 방식이 있는 법이잖아.



곰돌이 푸, 이요르, 아울, 래빗, 캥거, 루, 피글렛, 티거 그리고 크리스토퍼 로빈

이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을 읽으며 각양각색의 개성을 지닌 나의 친구들이 생각났어요.

비슷한 거 같은데 전혀 다른 친구들.

나에게 없는 것들을 지닌 친구들을 통해서 보고, 배우는 일은 나이가 들어도 계속될 거 같네요.


크리스토퍼 로빈이 그들의 인형 친구들과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어느 순간 그 친구들은 모두 추억 속의 기억이 되어있겠죠..


그 어떤 책 보다

이 곰돌이 푸와 그 친구들의 이야기가 조금 지쳐있는 마음에 온기를 준 거 같네요.

곰돌이 푸를 읽는 동안 내 마음이 절로 순수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좋았던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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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 우리가 놓치는 민주주의 위기 신호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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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크로스 출판사의 ABC 북클럽 두 번째 도서로 읽은 책.

2018년에 나온 책이 이번에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다.

총선을 코앞에 두고 민주주의의 붕괴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읽으며 세계 최강국이었던 미국이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고 5년간 그 위상이 현저하게 떨어진 걸 보면서 우리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두 저자 역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였던 미국이 차별과 편견의 나라로 자신들의 위상을 망가뜨린 이유를 찾고자 이 책을 썼을 거 같다.



기존 엘리트 집단은 인기 있는 아웃사이더를 받아들여도 얼마든지 '제어'할 수 있으며, 나중에 자신들이 권력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어긋나고 말았다. 그들은 두려움과 야심, 그리고 판단 착오라는 치명적 실수로 파멸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그들은 권력의 열쇠를 잠재적 독재자에게 기꺼이 넘겨주었다.





트럼프가 대통령 선거에 나왔을 때 공화당은 트럼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대통령이 될 거란 생각을 못 했다. 잠깐의 인기몰이가 전부일 거라 안이하게 생각했고, 그 결과 선동꾼이었던 트럼프는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대통령이 되었다. 노련한 정치인들은 트럼프를 자신들이 제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만 트럼프는 불통의 달인이었다.

선동자이자, 차별과 편견을 퍼뜨리는 자이자, 안하무인의 권력자.

이민자들의 나라에서 이민자들을 쫓아내려 한 정치가.


정당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판단 착오를 해 문지기로서의 역할을 잘하지 못하면 생기는 일이 바로 민주주의의 붕괴다.

국민은 21세기를 사는데 정치는 50~60년대를 못 벗어나고 있는 이 시점에 우리는 총선을 앞두고 있다.

트럼프와 같은 과인 불통의 대통을 가진 우리는 정당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국민들이 해내야 했던 매 순간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


1) 말과 행동에서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하고

2) 경쟁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3) 폭력을 용인하거나 조장하고

4) 언론의 자유를 포함하여 반대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는 정치인


위 4가지의 경고신호는 바로 독재자를 감별하는 법이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인물들이 떠오른다.

이런 인물들은 국가의 위기를 좋아한다. 그래야 자신들의 말발이 먹히니까.

참으로 데자뷔를 느끼게 하는 감별 법이다.



자제의 규범이 무너질 때 권력 균형도 무너진다. 정당 간 혐오가 헌법정신을 지키려는 정치인들의 의지를 압도할 때 견제와 균형 시스템은 두 가지 형태로 무너지게 된다. 




지금 우리의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한 말 같다.

견제와 균형이 사라지고 혐오가 촉수처럼 뻗쳐있는 작금의 상황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 이 책의 묘미다.

2018년에 미국의 민주주의 붕괴를 얘기하고 있는데 2024년 대한민국이 이 책의 우려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이다.


"투표 잘 하자"


그러나.

국민들이 투표로 자신들의 뜻을 전달한다 해도 그것을 자기들 입맛대로 해석해 버리는 정치인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모든 걸 좌지우지하려는 행태를 멈추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의 가면을 쓴 독재국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금 나는 민주주의 국민으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이 책에 실례로 나온 나라들의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과정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는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여당은 자신들이 충분히 요리할 수 있는 인물을 인기에 편승해서 대선후보로 내세웠다.

그리고 자신들이 실수했음을 아마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더더욱 끔찍한 것은 지금 미국은 대선을 앞두고 그들의 민주주의를 박살 낸 트럼프의 지지율이 또다시 상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언론을 잘 다룬다.

언론은 그를 비판하면서도 그의 도구가 되었다.



트럼프가 또다시 당선된다면 미국은 어떤 모양새가 될까?

4월 총선에서 우리는 우려와 걱정을 덜어낼 수 있을까?



무엇이 우리에게 자꾸 악수를 두게 하는 걸까?


정치에 관한 책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 책은 너무 흥미롭고 재밌었다.

아마도 내가 가려워하는 것들을 박박 긁어주었기 때문인 거 같다.


민주주의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민주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신이 올바른 정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나는 투표로 나의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순수한 국민의 의지를 꺾어 버리는 더러운 정치의 뒷면들을 몰아내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봄은 결코 오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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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알 환상하는 여자들 1
테스 건티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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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장의 벽은 굉장히 얇아서 모두의 삶이 나아가는 것을 라디오 드라마처럼 들을 수 있다.


은행나무 출판사의 <환상문학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 <우주의 알>을 가제본으로 읽었다.

이 이야기는 한 소녀의 영혼이 유체이탈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죽음일 수도 있고, 하나의 성장과정의 끝일 수도 있다.


토끼장이라 불리는 빈민가의 닭장 아파트는 옆집의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온다.

위탁가정을 전전하던 머리 좋은 소녀는 장학금을 받고 그들만의 리그에 입성한다.


연고 없는 아이.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

그러나 어딘지 외계인 같은 아이.

어른스럽지만 결국 아이인 소녀.

그런 소녀들을 먹잇감으로 노리는 선생.


아역 배우로 성공한 어머니의 아들은 버림받은 고아나 다름없이 자란다.

오십이 넘은 나이가 되었어도 어른이 되지 못한 아들은 기행을 벌인다.


한 소녀와 동거 중인 세 명의 소년들

배우가 꿈인 소년과 방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리는 소년과 개 산책 아르바이트를 하는 소년에겐 그들만의 취미가 있다.

그들 중 두 명은 소녀의 관심을 끌고 싶어 안달이지만 소녀는 본체만체한다.

선생님을 사랑했던 소녀에게 그 소년들은 너무 어리다.


"난 승인의 형태로 가장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정말 지긋지긋해요." 블랜딘이 말한다.



티퍼니였던 블랜딘은 한때 사랑이었다고 믿었던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

학교를 자퇴하고, 이름을 바꾸고 세상으로 숨어든다.


화려한 도시와는 동떨어진 쇠락한 동네.

재개발에 들썩이는 개발자들과 하루하루 고단한 삶을 마감하기 위해 토끼장이 필요한 사람들.

불공평한 사회에 경종을 울리려는 어떤 시도.

사춘기 소년들의 빌어먹을 일탈.

유명한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남자.

손쉬운 먹잇감을 노리는 선생.


익숙한 플롯의 이야기지만 색다르게 엮어내는 작가 테스 건티.

티퍼니와 제임스의 사랑 이야기는 빤하지만 서로의 감정을 표현하는 그 간단하면서도 신랄한 사랑의 요약은 읽는 동안 가슴이 일렁였다.

아슬아슬하지만 다가가고 싶고,

서로를 꿰뚫어 보지만 이해하고 싶고,

전부인 거 같지만 얻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그래서 나조차도 속은 이야기.


그러나 소녀는 여성이 되고, 선생은 자신의 수를 들키고 만다.

커 보였던 남자가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순간.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을 때

그 비명이 들렸을 때 사람들은 무심했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또 그러는 게지...


그러나

그런 사람들 속에서도 조앤 같은 사람이 있어 단절된 관계들이 이어지기도 한다.

누군가는 '사소해 보이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누군가는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에게' 관심을 준다.


그게 시작이다.

잘못되어 버린 이 세계를 다시 잘 돌아가게 만드는 에너지는 '누군가'의 사소한 관심으로부터 불꽃이 된다.






조앤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말한다. "깨어 있네요."

방 안에 기묘하게 번쩍이는 빛이 스친다.

"네." 블랜딘이 말을 잇는다. "당신은요?"





이 책을 읽은 나는 깨어있을까?

당신은...?


아무런 정보 없이 읽었던 이야기.

그래서 한 장 한 장 뒤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궁금했던 이야기.

각각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그들의 삶이 하나의 시간에서 마주치게 되는 이야기...


미국을 이야기했지만 결국 우리의 이야기로 해석되는 <우주의 알>...


이 세상 모든

블랜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렴.

조앤, 화이팅~

모지스, 이제 좀 성장하면 안 되겠니?

소년들, 니들이 그럴 줄 몰랐다.. 정신 차릴 거지?

제임스, 지구를 떠나거라~ 




캐릭터들의 감정을 몰입감 있게 묘사한 작가의 시선이 즐거웠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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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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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것은 영원한 것의 반대말이 아니에요. 영원한 것의 반대말은 잊히는 것이죠.


전자책으로 읽으면서 종이책이 갖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종이책을 구매하고 언제 읽을까 싶었는데 이번에 #독파챌린지 에 올라와 있길래 이때다 싶어서 재독했다.

몇 년 사이에 내 마음이 변했을까?


처음 읽었을 때의 그 절절함과 애절함 대신에 그들이 처한 현실에 더 관심이 갔다.

편지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감옥에 있는 연인에게 쓴 아이다의 편지와 그 편지 뒷장에 쓰인 남자의 메모가 대조를 이룬다.

아이다의 절절한 그리움에 대비되는 남자의 글들은 정치적이고, 이성적인 생각들이다.

처음 읽었을 때는 그 점에 스스로 상처를 받았던 거 같다.

아이다에게 너무 이입이 됐었나?


재독하면서 사비에르가 처한 상황에 좀 더 몰입하면서 그가 남긴 메모들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하는 거 같았다.

독방에서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괴로운 현실을 잊기 위해 끝없이 자신을 다그쳐야 했던 사비에르는 아이다의 편지를 받고 그녀를 그리워하는 만큼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믿는 신념들을 적어갔으리라...



존 버거는 이 편지 뭉치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소설적 장치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현실처럼 느껴진다.

아이다와 사비에르가 어딘가에서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고 있을 거라는 느낌은 재독 후에도 여전하다.


우리나라에도 저런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의 아이다와 사비에르가 어느 시대에 살았었다고 생각하니 정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잘못된 리더의 신념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넘쳐나야 하는 세상.

<A가 X에게>를 다시 읽으며 단순히 절절한 연애편지로 대했던 첫 번째 읽기를 업데이트한 기분이다.



불의를 합법화하는 악법들이 있다. 그런 법은 어설프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법들이 적용되면 그 법들이 가용하려는 바로 그것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법들에 대해서는 저항하고, 무시하고, 도전해야 한다. 하지만 물론, 동지여, 그런 법들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어설프다!



그때 당신의 그 손등만큼 나에게 확신을 준 말은 없었어요. 


우리를 두렵게 하는 건 작은 일이에요. 우리를 죽일 수도 있는 거대한 일은, 오히려 우리를 용감하게 만들어 주죠.


"어떤 역사도 침묵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역사를 아무리 많이 점유하고, 깨부수고, 그에 대해 거짓말을 하더라도, 인간의 역사는 입을 다물기를 거부한다. 무관심과 무지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시간은 현재의 시간 속에 계속해서 째깍째깍 소리를 내고 있다."


내가 아는 건 나의 인생이 온통 나를 당신에게로 이끌었다는 것.




존 버거를 처음 만난 작품이기도 한 <A가 X에게>.

뭔가를 강요하지 않아서 좋다.

그저 온전히 그들의 감정을 혼자 음미해 보며 그들의 고통과 희망과 애정과 용기를 느껴보는 시간이 좋았다.


종이책의 물성이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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