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연인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2
찬 쉐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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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평생 읽은 소설의 이야기들을 다시 한번 더 읽고 난 뒤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자신이 책을 들기만 하면 한 이야기에서 또 다른 이야기로 끊기지 않고 들어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존 자신도 휩쓸려 들어가서 외부의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중국의 카프카라는 작가의 별칭에서 알아챘어야 했다.

이 책이 쉽게 만만하게 읽히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인물들 모두가 자기만의 세계에서 산다. 그들에게 현실은 눈에 보이는 것일 뿐, 딱히 어떤 의미를 두지 않는다.

아니 어쩜 모든 의미가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자신들이 침잠해 들어가 있는 무의식의 세계다.

 

내가 현실을 잊고 싶을 때 책이나 영화를 파고드는 것처럼 이들도 각자의 현실도피처가 있다.

존은 책 속의 공간에서 자신의 현실을 찾고

마리아는 카펫을 짜면서 현실을 맞추고

빈센트는 꿈을 꾸며 현실의 무언가를 쫓고

리사는 남편을 쫓아다니며 자신을 찾는다.

레이건은 상상 속에서 현실을 만들고

에다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찾는 것은 자신을 찾는 건지도 모른다.

 

빈센트는 몽환경의 교차와 관련해 늘 들었고 회사의 존도 그런 것 같았는데, 존은 독서를 통해 실험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경계 없는 도피를 따라가는 게 처음엔 쉽지 않다.

마치 카프카의 일기를 읽는 기분이었다.

그건 아마도 이 이야기를 소설이라는 전제하에 읽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소설이라는 틀을 버리고 그냥 읽히는 문장마다 떠오르는 이미지를 따라가다 보면 이 이야기를 즐길 수 있다.

내가 공상을 좋아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읽으니 이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좀 더 쉬웠다.

공상의 나래는 나를 다른 세상으로 데리고 가기도 하지만 현실을 분리 시킴으로써 나를 현실에서 보다 부드럽게 살게 만드니까.

이 인물들이 자신들의 방식대로 현실도피를 하지 않았다면 서로를 무지막지하게 괴롭히며 살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서 현실을 조금 외면했기에 서로에게 으르렁 거리지 못했으리라...

 

빈센트는 마침내 리사의 과거 삶으로 들어갔고 이는 그들의 사랑이 깊어졌음을 의미했다.

 

 

그렇게 자신들만의 세상에서 서서히 빠져나올 때쯤이면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이해의 시간은 인간사에서 항상 늦게 마련이다.

이해를 바탕으로 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확인하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 너무 늦은 건 없다지만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아는 건 언제나 늦은 후회뿐일테니까.

 

울타리를 넘어 보지 않은 사람은 자기만의 세상에서 다른 세상을 꿈꾼다.

찬쉐 역시 중국 울타리를 넘어 보지 못했지만 수많은 문학들을 섭렵하며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 냈다.

직접적이고, 보통적으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그녀의 세계는 그래서 몽환적이고, 현실성 없이 보이고, 완전한 꾸밈의 세계에서 명확하게 해석하지 못하는 세계를 만들어 내야 했다.

그것이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명확한 이야기였다면 그녀의 정체성이 그곳에서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모호하고, 어딘지 모르게 주류가 아닌 듯 보이는 것이야말로 그녀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는 무기가 될 테니...

 

노골적이고 그들의 욕망이 현실이고, 몽환적인 그들의 도피가 그들의 이상일 것이다.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은 법이다.

찬쉐는 인물들을 통해 다양한 자신을 찾아낸 게 아닐까?

 

무언가를 찾아내려 하지 않으면 찾아질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살면서 어느 날 문득 이 이야기를 떠올리며 찌릿할 수도 있다.

그때 내가 이해하지 못한 감정, 표현, 공간, 감각이 바로 이거였구나! 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 연인 속에서 나는 과거와 미래를 엿보았지만

줄곧 현실은 망각하고 있었다.

그게 찬쉐의 마음이고 내 마음이었다...

 

평생 혼신의 힘을 쏟아 자신을 이야기의 숲으로 만들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우리에게 속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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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사 - 신화가 아닌 보통 사람의 삶으로 본 그리스 로마 시대
개릿 라이언 지음, 최현영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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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불결한 거리는 질병의 온상이었다. 일반적인 로마인은 체내 기생충이 득실댔고 종종 심한 위장염으로 인한 설사에 시달렸으며 매년 말라리아에 동반되는 고열과 오한을 앓았다. 로마에서의 삶을 죽음으로 향하는 전주곡으로 만들었던 주역은 화재나 도둑이 아니라, 하수구에서 부화한 모기와 보이지 않는 병원균이었다.

 

인류가 살아오면서 많은 나라들과 도시가 흥하고 망했지만 21세기에도 가장 널리 알려지고 자주 사용(?) 되는 나라는 그리스와 로마라고 생각한다.

신화를 통해서 가장 많이 활용되는 이 고대 도시를 '신'들이 관계된 신화를 통해서가 아닌 보통 사람들의 생활 기록을 통해 유추한 책이 바로 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사다.

36가지 질문에 대한 답으로 구성되어 있는 책은 부록과 주석만으로도 얇은 책 한 권을 만들 수 있을 거 같다.





로마인들은 인술라이라는 공동주택에서 살았다.

거의 8층 높이로 이루어진 이 공동주택들은 때로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그런 사고가 일어난 뒤에는 각종 도둑들이 솜씨를 발휘했고, 그냥 길거리를 다닐 때에도 소매치기들이 먹잇감을 노렸다고 한다.

로마시대에 비길레스라고 불리는 소방관들이 있었는데 오늘날의 경찰과 비슷한 업무까지 맡아 했다.

말하자면 소방관 겸 경찰관이었다.

그리스 로마 사람들은 바지를 야만적인 것으로 여겼는데 그 이유가 그리스를 침략한 페르시아인들 때문이란다.

수염은 남성성을 나타내는 훈장으로 여겨졌다. 그러니 면도를 한다는 건 뭔가 튀는 행동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면도를 함으로써 잠시 면도가 유행되기도 했지만 말끔함보다는 덥수룩함을 남성성과 유식함의 대명사로 여겼던 거 같다.

그 당시 의사들은 두개골 시술도 했다고 한다.

천두술이 시술된 흔적이 있는 청동기 시대의 두개골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고대 아테네와 후기 로마 공화국의 인구 3분의 1은 노예였다. 자유인과 다름없는 일상을 누렸지만 경고 없이 팔리고, 살해당할 위험이 있었다. 주인과의 관계에 따라 해방되는 노예도 있었다. 해방된 노예는 정식 시민으로 등록할 수 있었다.


 

그리스.로마 여성은 대부분 10대 중반에 결혼했다.

남성은 대부분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에 결혼했다.

결혼의 시작은 비즈니스적인 고려 사항이 다분했지만, 이상적인 결혼 생활이란 조화로우며 평생 유지되는 관계였다.

 

 

이 시대 이혼은 간단했지만 여성에게는 그 권한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친정아버지가 대리인으로 신청할 수 있었다.

아내가 이혼을 신청할 경우 친정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남편은 지참금을 반환해야 했다.

 

돌이나 납으로 된 길쭉한 기구인 할테레스는 아령으로도 사용되었고, 아령 운동으로 사람들은 근육을 다졌다.

특히 로마시대에 인기가 많아서 모든 욕장 시설에서 사람들이 할테레스를 들어 올리며 운동을 했다.

제국의 우편 기지들을 오갔던 배달원은 프루멘타리라는 군인들이었다. 이들을 통해 황제는 원로원 의원들의 서신 내용을 파악하고, 반체제 인사나 기독교인들을 잡아들였다.

 

고대인들의 생활을 읽다 보니 그들의 문명이 지금 우리들 보다 열악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기계적인 지금 보다 훨씬 낭만적으로 삶을 살았다고 생각된다.

현재를 기준으로 그 시대를 평할 수는 없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어갈수록 고대인들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그려지면서 우리의 삶과 비교가 되었다.

그들은 현대인들 보다 훨씬 단순하게 살면서도 더 융통성이 있었던 거 같다.

법이 발달하고 문명이 발달했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쩜 그리스 로마 시대의 사람들이 지금 현대인들 보다 훨씬 다양한 삶을 누리며 훨씬 자유로운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갔다는 생각이 든다.

문명이 고도화될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더 닫히고, 생각의 틀은 더 좁아지는 거 같다.

그래서 현대인은 그리스 로마 시대를 자꾸 재생하는 가 보다.

그 시대 사람들의 자유와 낭만을 가져오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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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
에리크 스베토프트 지음, 홍재웅 옮김 / 교양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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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부터 심상치 않은 그래픽노블 스파.

읽으면서도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간다. 이 그림과 이야기들을 해석하기 위해서.

읽고 나서도 머릿속은 바쁘다. 도대체 이 모든 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 얼굴이 그 얼굴 같은 그림체는 아주 사소한 것들로 구분을 해야 하고

매 페이지마다 마주하는 기괴하고 흉측한 그림들은 무엇을 말하는지 알쏭달쏭하다.

그래서 일단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보고 쓰인 대로 읽기로 했다.





최고급 스파.

손님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파 호텔.

그러기 위해 종업원들은 항상 청결해야 하고, 손님들의 비위를 맞춰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돼지코를 달고 동료들에게 놀림을 당해야 한다.

이 스파에 신입사원이 들어오고, 신혼부부가 묵고, VIP가 스위트룸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 스파 곳곳에는 어둠이 내려앉듯 곰팡이가 창궐하고있다.

무얼 하는지 맨날 바쁜 사장은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큰소리는 치지만 알아서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호텔 매니저는 그런 사장을 짝사랑하며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줄 날만 기다린다.

 

손님들은 스파 곳곳에서 기괴한 현상과 마주하지만 아무도 아는 체를 안 한다.

마치 자신들과는 다른 세상의 것들처럼 보고도 안 보이는 척, 듣고도 안 들리는 척, 알고도 모른 척을 한다.

그렇게 하면 보이고, 들리고, 알게 된 모든 것들이 사라지기라도 하듯이...

어쩜 최고급 스파 호텔의 약점을 얘기하는 건 자신들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과도 같다는 암묵적 합의 같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벌거벗은 임금님" 동화가 생각났다.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모두 '거짓말'을 하는 그 풍경과 이 스파 호텔에서 벌어지는 일은 다른 거 같지만 같다.

 

무관심으로 일관된 손님들.

검게 퍼지는 곰팡이.

돼지 취급받으며 점점 스스로를 돼지로 생각하는 신입사원.

회사 동료들에게 없는 사람 취급받는 사람은 그 스파에서 혼자 매일 길을 잃어버리고, 길 잃은 사람 눈에는 봐서는 안될 것들이 보인다.

VIP는 점심으로 나온 음식에 불만을 표하고, 화가 난 주방장은 살인을 한다.

그러나 아무도 VIP가 사라진 걸 눈치채지 못한다.

주방장이 완벽하게 처리했기에.

 

어린 아들에게 스파 경영권을 맡겼던 아버지는 느닷없이 나타나 경영권을 가로채지만 이사 회의에서는 아들이 경영권을 유지하게 만든다.

아버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던 아들은 나이만 먹었지 아직 어린 소년에서 자라지 못했다.

 

이야기를 다 읽고 책을 덮고 나니 굉장히 찝찝하다.

 

이것은 지금 사회 전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축약판이다.

무관심, 직장 내 괴롭힘, 세습경영, 갑질, 살인, 무시와 괄시, 가진 자의 횡포, 폭력.

타인에 대한 배려가 결여된 세상이다.

현실에서 지겹게 보아 온 세계가 이 그로테스크한 그래픽노블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포커에 포자도 모르면서 포커판에 앉아 있는 자들은 바로 우리의 모습 같다.

매번 길을 잃고 헤매는 자는 다수의 대중을 말하는 거 같다.

다수결의 원칙이 언제나 옳은 건 아니니까.

다수의 대중은 문제를 보았을 때 나서서 해결하기보다는 누군가 나서서 외치기 전까지 침묵한다.

그것이 비겁이라는 걸 알면서도 묻어가고 싶은 것이 인간이니까.

 

스파의 문제점을 보고도 자기랑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손님들의 모습은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나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라고 고집을 부리는 거 같다.

무관심과 무반응이 곰팡이를 키우고, 최고급 스파를 잠식해간다.

곰팡이가 번져가고, 기괴한 형상들이 나타나는 것은 침묵해도 음식 타박은 하게 된다.

어쩜 그 음식 타박도 사장이 직접 영접하는 VIP 손님이니까 가능한 거다.

세상은 그런 거니까.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는 사람은 있을까?

 

현실에서 탈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냥 그 현실에 맞춰서 살 뿐이지...

 

책을 읽기 전 잠시 훑어보면서 그림들만 보고는 공포와 호러물이 내게 작동하는 원리처럼 내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줄 책이라고 생각했다.

매운 것을 먹으면 스트레스가 가시는 원리처럼.

책을 읽고 난 내 감정은 버려지지 못했다.

오히려 벼려지고 있을 뿐.

 

지금 나는 최고급 스파에 있지만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시간이라는 걸이 책이 말해주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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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 - 50주년 기념 에디션
린다 노클린 지음, 이주은 옮김 / 아트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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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는 간단한 질문이지만, 적절하게 대답만 한다면 일종의 연쇄반응을 일으켜 어떤 한 분야에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가설들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역사, 사회과학, 심지어 심리학과 문학 분야까지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린다 노클린의 논문 발표 50주년 기념 에디션이다.

1971년도에 발표된 논문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와 그 후 30년이 지나 그것을 기념하기 위한 글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 30년 후" 가 같이 담겨 있다.

 

1971년 아트뉴스에 발표된 린다 노클린의 논문은 페미니즘 미술사의 신호탄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시집 크기의 작고 얇은 이 책을 읽으면서 노클린의 70년대와 2000년대의 시점을 동시에 읽을 수 있었다.

노클린이 쏘아 올린 페미니즘의 이슈가 30년이 지난 시점에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같은 필자의 글로써 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색다른 의미를 가진다.

 

가장 중요한 질문들을 제기함으로써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우리의 의식이 조건화-종종 왜곡되어-된다는 걸 깨닫게 시작할 때, 그때가 바로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시점이다.

 

 

미술계에 만연한 남성중심주의 그것도 백인 남성우월주의에 대한 문제점을 콕 집어 낸 이 글은 "위대함"이라는 미술계의 고정적인 과념을 통째로 흔들었다.

누구나 동등하게 성취할 수 있고 사회제도적으로 평등한 세계가 되어야 했지만 여성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평등과 공정의 세계는 비단 미술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 글이 그런 점들을 이야기한다. 감정이 배제된 논리로써 이야기하는 글이기에 읽는 이들에게 이성적으로 다가온다.

이런 글을 읽으면 자꾸 흥분하게 되는 게 나인데 이번에는 흥분보다는 어떤 흐름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성 평등 문제는 우리 사회의 제도적 구조 자체가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그 제도에 소속된 인간들에게 강요되는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의해 좌우된다.

 

여성은 항상 결혼과 직업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듯 보인다. 이를테면, 성공의 대가로 고독을 얻거나, 직업을 포기한 대가로 성관계를 하고 동반자를 얻는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우리는 과거의 업적뿐만 아니라 미래에 놓여 있을 위험과 어려움에 대해 알아야 한다.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들의 작품이 보이고, 글로 읽히도록 우리의 모든 재능과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이것이 미래를 위한 우리의 과제이다.

 

논문 발표 이후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상황은 나아졌을까?

그 사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페미니즘 미술사가 구축되고 있고, 페미니즘 비평이 주류 담론에 들어갔다.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은 멀다.

그래도 나는 희망적이다. 내가 자라오면서 몸소 느낀 "여성"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전반적으로 점점 변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으니까.

그러니 갈 길은 멀지만 발걸음을 떼기 전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슬슬 달릴 준비를 끝내고 출발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비단 페미니즘을 '여성'에 국한된 시각으로 보지 않고 '소수자'의 시점으로 본다면 많은 문제들에 대해 앞으로 어떻게 바라보고, 그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는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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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법 1~2 세트 - 전2권
야마다 무네키 지음, 최고은 옮김 / 애플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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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빛나는 거 아니겠나. 죽음의 상실은 삶의 상실이나 다름없어. 이 나라에 결여된 것. 그건 바로 '죽음'이야!

 

 

인간은 HAVI 시술을 20세가 되면 받을 수 있다. 영원한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이로써 불로불사의 시대가 왔다. 일본은 원폭 투하 이후에 미국의 기술을 받아들여 이 시술을 시작했다.

HAVI 시술을 받은 사람들은 패밀리 리셋이라 부르는 친자관계를 해소한다.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가족관계는 불필요하다.

 

백년법은 그로 인해 늘어가는 사회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법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생존제한법을 시행해 사회의 신진대사를 촉진시켜서, 국가의 붕괴를 막고 부활시켜야 하네.

 

백년법은 HAVI 시술을 받고 100년 후에 무조건 사망해야 하는 법이다.

정부는 그 사망자들을 위해 안락사 터미널을 만들었다.

백년법을 반대하는 측과 백년법을 주장하는 측들이 팽팽하게 대결하는 모습과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를 이용해서 제 뱃속만 챙기려는 정치가들의 모습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가면 더 좋은 세상이 될 거 같지만 죽음이 없는 삶은 사람들에게 더 이상 어떤 의욕도 주지 않는다.

살아도 산 게 아닌 사람들은 어떤 희망도, 어떤 열정도, 어떤 감정도 전부 시들하다.

 

무한대의 시간이 주어진 인간에게 삶이란 어떤 것일까?

 

책을 읽으며 마음이 복잡해진다.

이런 세상이 온다면 나는 HAVI를 받게 될까?

자연스레 늙어가는 삶을 피하고 영생을 얻는 방법을 택하게 될까?

영원히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예상치 못한 선택을 하는 인물들을 보며 착잡한 생각이 든다.

인간 수명 100세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이 백년법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을 뜻하는 걸까..

 

"사회의 공정성"

 

이것이 지켜져야 법을 지키는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백년법의 주제는 바로 이 '사회의 공정성'이다.

그 공정성을 지키고 수호해야 하는 자들이 그걸 위해서 법을 비켜가는 행태를 보는 맛이 참 쓰다.

이 소설에서 보이는 정치의 행태가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것과 한치의 오차도 없음이다.

테러를 조장해서라도 자기의 권력을 지키려는 자들이 승리하는 모습을 보는 건 고구마 천 개를 먹은 것과 같다.

 

한 인간의 진가를 알 수 있는 건 바로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일지도 모른다.

 

 

죽음이 없다면 삶에 있어서 반성이란 걸 모를 것이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죽음이 없는 세상이라면 무엇을 하든 살 수 있으니 인간이 가져야 하는 인간성도 유지되기 힘들 것이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일에 손댄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을 읽어서 좋은 이유는 바로 미래를 조금이나마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이 없는 세상을 다녀온 소감은 미리 다녀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다.

인간이 자연의 순환을 거스르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알고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할 때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도 간접경험했다.

적어도 이 책에서만은 한국이 영리하게 보여서 다행이었다.

 

영원히 이어지는 생은 생각만 해도 지친다.

모든 생명에는 자연이 준 마지막 숨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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