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평생 읽은 소설의 이야기들을 다시 한번 더 읽고 난 뒤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자신이 책을 들기만 하면 한 이야기에서 또 다른 이야기로 끊기지 않고 들어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존 자신도 휩쓸려 들어가서 외부의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중국의 카프카라는 작가의 별칭에서 알아챘어야 했다.
이 책이 쉽게 만만하게 읽히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인물들 모두가 자기만의 세계에서 산다. 그들에게 현실은 눈에 보이는 것일 뿐, 딱히 어떤 의미를 두지 않는다.
아니 어쩜 모든 의미가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자신들이 침잠해 들어가 있는 무의식의 세계다.
내가 현실을 잊고 싶을 때 책이나 영화를 파고드는 것처럼 이들도 각자의 현실도피처가 있다.
존은 책 속의 공간에서 자신의 현실을 찾고
마리아는 카펫을 짜면서 현실을 맞추고
빈센트는 꿈을 꾸며 현실의 무언가를 쫓고
리사는 남편을 쫓아다니며 자신을 찾는다.
레이건은 상상 속에서 현실을 만들고
에다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찾는 것은 자신을 찾는 건지도 모른다.
빈센트는 몽환경의 교차와 관련해 늘 들었고 회사의 존도 그런 것 같았는데, 존은 독서를 통해 실험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경계 없는 도피를 따라가는 게 처음엔 쉽지 않다.
마치 카프카의 일기를 읽는 기분이었다.
그건 아마도 이 이야기를 소설이라는 전제하에 읽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소설이라는 틀을 버리고 그냥 읽히는 문장마다 떠오르는 이미지를 따라가다 보면 이 이야기를 즐길 수 있다.
내가 공상을 좋아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읽으니 이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좀 더 쉬웠다.
공상의 나래는 나를 다른 세상으로 데리고 가기도 하지만 현실을 분리 시킴으로써 나를 현실에서 보다 부드럽게 살게 만드니까.
이 인물들이 자신들의 방식대로 현실도피를 하지 않았다면 서로를 무지막지하게 괴롭히며 살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서 현실을 조금 외면했기에 서로에게 으르렁 거리지 못했으리라...
빈센트는 마침내 리사의 과거 삶으로 들어갔고 이는 그들의 사랑이 깊어졌음을 의미했다.
그렇게 자신들만의 세상에서 서서히 빠져나올 때쯤이면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이해의 시간은 인간사에서 항상 늦게 마련이다.
이해를 바탕으로 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확인하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 너무 늦은 건 없다지만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아는 건 언제나 늦은 후회뿐일테니까.
울타리를 넘어 보지 않은 사람은 자기만의 세상에서 다른 세상을 꿈꾼다.
찬쉐 역시 중국 울타리를 넘어 보지 못했지만 수많은 문학들을 섭렵하며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 냈다.
직접적이고, 보통적으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그녀의 세계는 그래서 몽환적이고, 현실성 없이 보이고, 완전한 꾸밈의 세계에서 명확하게 해석하지 못하는 세계를 만들어 내야 했다.
그것이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명확한 이야기였다면 그녀의 정체성이 그곳에서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모호하고, 어딘지 모르게 주류가 아닌 듯 보이는 것이야말로 그녀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는 무기가 될 테니...
노골적이고 그들의 욕망이 현실이고, 몽환적인 그들의 도피가 그들의 이상일 것이다.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은 법이다.
찬쉐는 인물들을 통해 다양한 자신을 찾아낸 게 아닐까?
무언가를 찾아내려 하지 않으면 찾아질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살면서 어느 날 문득 이 이야기를 떠올리며 찌릿할 수도 있다.
그때 내가 이해하지 못한 감정, 표현, 공간, 감각이 바로 이거였구나! 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 연인 속에서 나는 과거와 미래를 엿보았지만
줄곧 현실은 망각하고 있었다.
그게 찬쉐의 마음이고 내 마음이었다...
평생 혼신의 힘을 쏟아 자신을 이야기의 숲으로 만들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우리에게 속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