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거미 여인의 키스』는 표범 여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키스를 하면 표범으로 변하는 여자의 서글픈 이야기. 그래서 사랑을 할 수 없는 여자의 이야기. 어찌보면 평범하고 식상할 수 있는 이 이야기는 몰리나와 발렌틴이라는 두 (생물학적) 남자의 대화 속에서 점점 색을 입고 궁금증을 자극한다. 천일야화에서처럼, 표범 여인은 진짜 표범으로 변해버리는 걸까, 궁금해지게 된다.

표범 여인 이야기가 끝난 뒤 소설의 중반부에 이르면, 다른 궁금증이 도진다. 작품 제목은 왜 표범 여인이 아니라 거미 여인일까? 작품 말미에서 이 질문은 해소된다. 발렌틴이 몰리나에게 넌 표범 여인이 아니라 거미 여인이야 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그 이유는 거미처럼 거미줄을 치고 먹이를 잡아들이기 때문.

그래도 왜 하필 거미일까?

몰리나와 발렌틴이란 두 (생물학적) 남성이 교도소에 갇혀 있다. 한 명은 아동 성추행이라는 혐의로 잡힌 동성애자이고 한 명은 사회 혁명 운동을 하는 운동가이다. 그리고 소설은 그 두 사람의 대화로만 이루어져 있다. 두 사람의 모든 행동은 대화 속에서만 나타난다. 종종 방백과 비슷하게 이 책에서는 이탤릭체로 표시되어 한 사람의 생각이 나타나거나 보고서 형식의 글이 있기도 하지만 그리 많지는 않다.

두 사람은 마치 천일야화처럼 영화 이야기를 한다. 영화를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몰리나고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발렌틴이다. 두 사람의 가족 관계나 그밖의 사회적 위치, 성격 등도 모두 중간 중간의 대화를 통해서 드러난다. 두 사람은 고인 시공간 속에 있다. 공간적으로 외부와는 거의 단절되어 있고 시간적으로 풀려날 날을 기다리지만, 그날은 형량으로 따지자면 까마득하다. 그들은 고인 시공간 속에 있다. 거미줄에 들어앉은 거미처럼.

이 작품의 중심은 서로 성향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해고 받아들이는 과정일 것이다. 낭만적인 동성애자와 이성적인 혁명 운동가 사이의 교감. 그 사이에 끼인 것 끝나지 않는 영화.

그리고 다른 이야기의 축은 몰리나가 풀려나기 위해 발렌틴을 이용하려 들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몰리나라는 인물은 입체적으로 확대되고 그녀의 고뇌가 살을 입으며 두 사람의 관계는 비틀리며 확장된다. 발렌틴을 아프게 만들어 정보를 캐내려던 계획에서 몰리나는 오히려 죄책감 때문인지 정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미묘한 지점에서 발렌틴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며(똥까지 치워주고 닦아주며) 발렌틴의 내면을 까발린다(자신이 도와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싫어서 몰리나의 도움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는 것). 대의명분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자세와는 어울리지 않는 철두철미한 자기 보호 의식 같은 것.

작품 말미에서 보고서를 통해 몰리나는 결국 그 관계 속에 빠져들어 출소한 뒤 발렌틴의 첩자 역할을 하려다 감시당하고 그만 살해당하고 만다는 게 드러난다.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말했던 자신의 이상형인 웨이터를 만나려고 약속을 잡았다가 실패한 뒤에도 몰리나가 적극적으로 그 웨이터를 만나러 가지 않는 부분에서 몰리나의 심리가 설명된다.

발렌틴은 감옥에서 고문을 당한 뒤 모르핀을 맞고 몰리나가 해준 여러 영화들의 장면 속에 놓인 채 죽어간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거미줄을 치고 있었으며 그 거미줄의 거미이자 먹이가 된다.




사회의 소수자이자 가장 반대편일지도 모를 동성애자와 혁명 운동가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운가는 주석으로 달린 여러 성 이론 문헌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 역할이라는 것도 결국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착취를 사회화한 것이라는 이 논문을 통해 몰리나와 발렌틴이 아주 가까운 사회적 입장에 서있음이 밝혀진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상에 가까운 혁명적 인물이며 자신들이 그것들을 완전히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가는 약간 다른 문제이다(우리의 생활이 그렇듯). 몰리나는 발렌틴이 부탁해야 할만큼,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여성상을 내면화 모델로 삼고 있으며(착취의 기본 구조를 깨뜨리는 입장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견고하게 유지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구성 인자로서) 발레틴은 의식적으로 혁명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 괴리를 겪는 인물이기도 하다(그가 옛날 여자친구 이야기를 하는 대목에서, 그가 그 여자친구 이름을 작품 말미까지 부르는 데서 나타나듯).




소설은 서사를 기본으로 삼는 장르다. 서사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이야기 진행 방식이다. 그러나 『거미 여인의 키스』는 소설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서사라는 진행 방식을 기본 구조로 삼지 않는다. 앞에서도 말했듯 이 소설은 감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거의 모든 이야기가 진행되며 두 사람에게 시간은 흐르지 않는 것과 같다. 시간은 서로를 통해서만 흐르며 따라서 그 흐름은 완전히 주관적일 뿐이다. 다른 어떤 지표도 없이. 따라서 서로에게 고인 시간 속에 있는 두 사람 이야기는 서사라는 진행 방식이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대신,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방식에 가깝다. 몰리나가 이야기하는 영화들의 면면 속에 두 인물이 녹아있고 주제가 녹아있기도 하다. 더불어 주석들도 적극적으로 이 방식에 개입한다.




몰리나가 소장에게 마지막 면담에서 음식을 부탁하는 몇 마디 말은 그 어떤 몰리나의 감정에 대한 기나긴 설명보다 더 애절하고 서글프다. 그녀가 놓인 아이러니한 상황과 더불어. 이 소설의 전체 방식이다.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기의 극대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솔라리스 (반양장) 렘 걸작선 2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김상훈 옮김, 이부록 그림 / 오멜라스(웅진)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 자신이 이 고난의 근원인 것이다. 바다는 우리의 사고에 대한 일종의 증폭 장치 역할을 정확히 수행했다.




타자를 마주치는 순간, 인간(혹은 존재)은 자기 자신에 대해 날카롭게 경계점을 설정해낸다. 차이점을 대두시키고 그 차이점을 통해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겸손한 척 할 때도 있지만, 사실 인간은 우리가 최고등 생물이라는 어떤 믿음을 가지려 애쓴다. 꼭 종의 문제가 아니라 개체의 문제에서도 거의 비슷한 일이 발생하는데-쉽게는 택시 기사 아저씨들이 운전을 그리 오래 하지 않았지만 저 놈보다 내가 몇 배는 낫다고 다른 택시 기사가 좀만 실수를 해도 말하곤 한다-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합리화하며 인간은 생명을 유지시켜 나간다. 동물이 되어보지 않아서 동물도 구차하게 살기 위해 자기 존재의 합리화라는 기능을 수행해야만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순간과 마주칠 때마다-통상 미쳤다고 부르는 이들조차 늘 자기 합리화를 위해 노력한다, 내가 옳아, 내가 맞아, 이를 발설하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든다-인간 존재의 끔찍함과 위대함은 바로 이 합리화에 있는 게 아닐까. 오욕의 역사를 아름답게 채색하는 능력.

지금으로서 나의 이해 수준이 올바르다고 생각되지 않는 게 사실이지만 『솔라리스』는 이런 인간 종에게 채찍을 휘두른다. ‘우리 상태에 대해 우리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고 하며.

불안 리스트를 작성해보도록 하자. 그 불안 리스트는 그동안 잊고자 했던 자신의 치사함과 언행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 본성을 까발릴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처음엔 한두 개, 그러다가 적을 수록 배가될 것이다. 그 중 무엇이 치명적일지는 자기자신조차 모를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무의식이라는 철저한 장벽이 한 겹 두텁게 쳐져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가장 치명적인 기억을 지워내며 생명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한다. 동물의 지독한 자기보존 본능으로서.

솔라리스의 캘빈에게는 지독한 기억으로 사랑하던 아내-자신의 실수인지 잔혹함 때문인지 우연인지 모를 일 때문에 자살한-가 나타난다. 물질적으로 그녀가 죽기 전 열아홉 살의 모습을 복원한 채로. 스테이션 안의 또다른 인물인 사토리우스에게는 밀짚모자가, 죽은 기바리안에게는 덩치 큰 흑인 여자가 찾아온다. -밀짚모자가 치명적으로 느껴지려면 무슨 일이 벌어져야 할지 나는 잘 모르겠다. 사토리우스의 허세스러운 성격과 맞는 상관물인 듯 하긴 하지만- 스노우에게는 누가 찾아왔는지 모르며, 이들의 치명적인 과거, 이들이 그 방문자를 대하는 방식이 어떠했는지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들을 아무런 틈도 없는 스테이션에 들여보낸 것은 누구일까? 소설 초반부부터 그것이 행성 솔라리스의 유일한 생명체 바다라는 것은 드러난다. 2장에서 솔라리스의 젤리 같은 느낌이 나는 바다에 대한 여러 다양한 연구 결과들이 나열되며 이 바다가 생명체 혹은 지성체일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방문자는 로켓으로 발사해 보내도 다시 돌아오며, 자신을 기억하는 상대방의 기억이 투사된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로 자신의 목적-방문한 이를 따라다니려 한다-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괴력이 발휘되고 자신도 왜 그렇게 행동한지 논리적으로 혹은 합리성을 가장해서 설명할 줄 모르며, 죽지 않는다. 현미경으로 이 방문자의 표본을 들여다본 결과 그 궁극 요소는 미세한 소립자로 인간의 궁극적 요소를 이루는 원자보다 훨씬 작은 뉴트리노(중성미자)이며 탁월한 재생 기능이 있다.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왜,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대체 어떤 목적으로 이들을 여기에 보낸 걸까? 헐리우드 서사에 익숙해진 결과, 당연히 이 스테이션 내에 자체 교란을 일으키기 위해서 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왜 이다지도 복잡하게 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부터 막막함이 시작된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괴롭히는 이유는 무언가. 사실 소설도 이 질문을 도입하고 바라볼 때부터 어려워진다. 하지만 이 일을 시작한 지성체(?)는 인간들이 납득할 만한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목적 없이 어떤 학습의 단계로서 이 방문자를 보낸다.

이전에 솔라리스의 바다를 탐사하던 중 한 명이 실종되었고 이 인간을 통해 인간의 시스템 체계를 빠르게 학습한 바다는 거대한 아이를 만들어 인형을 다루듯 인간의 여러 동작을 만들어보고는(베르통이라는 탐사원의 임상기록에서 나타난다. 그의 임상기록은 위원회에서 정신착란으로 취급받는다) 인간의 무의식에 투사된 어떤 기억까지도 물질화시킬 수 있는-먹거나 자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어쩌면 좀 더 성능이 좋은- 능력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8장에서 솔라리스의 바다가 의태 능력으로 반경 8~9마일 내의 것을 모방해 다양한 형상을 만들고-여기에 대칭이 어쩌고 비대칭이 어쩌고 하는데 사실 이 부분을 읽을 때 상태가 좋지 않아 잘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넘겼다- 지워내고 있음이 나타나며 이 바다의 능력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솔라리스는 자연은 모방하지 않고 기계만 모방한다. 기제라는 솔라리스학 연구자는 ‘완전한 성숙을 위한 과정’이라는 가설을 제기한다.

그렇다면 방문자는 기계와 같은 존재일까? 라는 의문이 들지만 그렇지 않다. 시스템 상에서 몇몇이 인간과 다르지만, 그 방문자 중 한 명인 레아는 점점 자아에 대한 의식을 쌓아가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고 급기야 캘빈에게 “그러면 당신은 여기 있는 사람이 그녀(죽은 부인)가 아니라 나라는 사실을 언제까지나 앚지 않을 테니까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결국 스스로 소멸을 택하기까지 한다. 여기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인간이란 무엇이지? 과역 그녀의 소멸을 도운 스노우는 자살 방조인가, 아닌가? 저 정도로 자아에 대한 개념이 완벽하며 자살할 수 있는 생물체를 과연 인간이 아니라 해야 할까. 인간은 이기적으로 종족 보존을 위해 그 경계는 정확히 말로 할 수는 없지만(물론 각종 말들이 있긴 하나 완벽히 믿을 수는 없는) 자기 종에 대한 경계를 친다. 자신보다 우월해도 안 되고 하등해서도 안 된다.

레야의 소멸 뒤로 힘들어하던 캘빈은 스노우와 이야기 도중 ‘불완전한 신’이라는 개념을 내놓는다. 스노우는 이 의견이 또 다른 솔라리스에 대한 가설-쌓이고 쌓이며 결국은 구원을 위해 손을 내미는-이라고 말한다. ‘속죄나 구원의 목적이 아닌, 아무 목표도 없이 다만 그곳에 존재할 뿐인 신’이며 ‘차츰 성장해가며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고 있는 신’이며 ‘물질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그럴 능력이 없’는, 스노우의 말에 따르면 인간과 닮았으나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므로 인간과는 다른.

솔라리스를 떠나려던 캘빈은 솔라리스와 직접 촉각적으로 접촉한 뒤 솔라리스에 남을 것이라는 예감을 남긴 채 소설이 끝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잔혹한 기적의 시대가 영원히 과거의 것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다’는 아주 미약한 희망을 남긴 채.

이것은 혁명에 대한 희망인가? 스타니스와프 렘이 사회주의 체제의 소설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맑스의 혁명적 요소가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나의 일천한 지식으로는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솔라리스는 가장 기본적으로는 며칠 전에 읽은 400년 전 셰익스피어가 쓴 리어왕의 질문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하는 존재론적 질문을 다른 행성을 탐험하는 과학소설 형식을 빌려 하고 있는가 하면-실제로 꿈에서 만난 기바리안과의 대화에서 이 비슷한 질문이 반복되기도 한다. “아니. 너(기바리안)는 꼭두각시에 불과해. 그렇지만 그 사실을 너는 몰라.”/ “그럼 자네 자신은 누구라고 생각하나?”- 이 존재론적 질문을 개체뿐 아니라 종의 개념으로 끌어올린다. 우리의 이해 능력의 한계 지점에 대해서.

인간의 감각과 상상의 한계를 초월하는 극대와 극소의 영역에서, 수천, 수백만의 변화가 마치 수학적인 대위법에 의해 연결된 음악의 악보처럼 동시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느낄 수 있겠는가? p.17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라큘라
브램 스토커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4월
평점 :
절판


 

예전에 이 소설을 읽긴 했다. 5년쯤 전 인것 같다. 재밌게 읽었다고 기억하고 있지만, 세세한 내용은 거의 잊었다. 그저 용감하고 정의에 대한 강렬한 신념과 믿음으로 무장한 이들이 드라라큘라 백작과 맞서는 이야기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 의례 그렇듯 권선징악에 대한 이야기인가 싶은데 어째서 브램 스토커라는 이름은 이다지도 공포 문학에서 뚜렷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러다 소설을 읽으며 다시금 그 이유를 확인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의 기록과 몇몇 잡지, 전보 등을 발췌한 이 소설의 형식이 엄청난 흡입력으로 나를 문장 속으로 끌어들였다. 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임에도 소설을 읽는 속도가 따라붙어 금세 페이지가 넘어갔다. 조너선 하커가 드라큘라 백작의 성에 갇히는 초반의 기록 뒤로 그들의 첫 번째 희생자 루시에 대한 이야기, 루시와 관계된 이들이 어떻게 이 사건과 관계를 맺게 되는가에서 개연성이 점점 분명해지며 각각의 인물들의 일기-특히 환자 랜필드에 대한 수어드 박사의 기록-는 그 관계망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켜 나갔다.

특히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프란시스 코폴라의 영화 <드라큘라>를 보고나자 이 소설의 형식이 얼마나 적합한가 다시금 감탄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했음에도-어쩌면 더더욱 그래서인지도 모르지만, 원작에 매이다 보니- 영화는 사건 전개가 훨씬 시시하게 느껴지고 특히 10년 전 영화라 그런지 촌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러나 100년 전 소설임에도 이 소설은 별로 시시하거나 촌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독특함은 각각의 내면을 기록하는 일기 형식에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 공포는 결국 개인적 영역에서 동심원을 그린다. 또한 많은 것이 변한다 해도 인간의 내면은 별로 변하지 않는 면이 있으므로. 공포를 느끼는 방식이라든지 공포에서 헤어나는 방식이라든지 하는 면에서 말이다. 물론 소설도 숭고미를 끌어들이며 주인공들이 이 사건에 접근하는 것이 좀 과하다 싶긴 했지만 이해가 아주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조너선 하커가 전반부 드라큘라 성에서 겪은 일들에서 헤어나오는 방식-그가 겁이 났으며 그 사건으로부터 퇴행을 겪은 것은 그 사건 자체의 괴기스러움 때문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겪은 일을 스스로 현실인가 의심하는 데서 나타난다-이나 소설 후반부에서 그들이 그런 엄청난 일을 겪고 있음에도- 그들 중 한 명인 미나 하커는 드라큘라의 희생자가 될 위기에 처해 있으며, 그들 각각도 엄청난 피로를 느낄 것임에도- 하루가 지나자 그 일들을 꿈처럼 느낀다거나 하는 대목이 충분히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말하자면 사건을 느끼는 각각의 인물들의 내면의 밀도가 과장돼 있거나 작가의 억지나 강요가 아니다. 대단히 사실적이다. 물론 풍광에 대한 세세한 묘사도 빛난다. 마치 그 지역을 여행하는 듯한 묘사가 소설의 호흡을 일정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며 점점 사건 속으로 끌고 간다.

그래서 드라큘라는 무엇일까. 어떤 설명할 수 없는 힘, 생과 사라는 자연의 섭리를 넘어서는 생명에 대한 갈구? 이 소설뿐 아니라『뱀파이어 걸작선』에서도 꿈은 드라큘라와 희생자를 매개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꿈이라……. 억압된 것이 돌아오며, 끊임없이 못 이룬 것을 다른 방식으로 충족시키는 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뱀파이어 걸작선
브램 스토커 외 지음, 정진영 편역 / 책세상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어릴 적 큰이모 댁은 고지대의 골목을 몇 번이나 꺾어들어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외가는 명절 때마다 큰이모 댁에 모여서 흥성거리는 잔치를 벌였으므로 그곳에 갈 일이 종종 있었는데 나는 그 가로등조차 몇 개 없는 골목길을 혼자 가다가 길을 잃는 게 아닐까 늘 무서웠다. 실제로 길을 잃은 경험이 있었는지는 잊었지만 밤에 그 길을 혼자 걷는 일을 상상하는 것만로도 늘 두려움이 솟구쳤다.

그런 두려움이 깊이 각인되어서인지 나는 종종 그 골목길에 서있다. 꿈속에서. 너무 많은 꿈을 꿔서 이제는 그 골목길의 실제 모습이 어떤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매번 꿈에서 그 골목길은 조금씩 형태가 바뀌는데 어쨌든 비좁고 약간은 음산하며 낡은 돌로 된 하수구가 있고 곧 모퉁이가 나오도록 되어 있다. 겹겹이 모퉁이가 있는 미로 같은 골목인 셈이다. 며칠 전 꿈에서는 그 골목길을 혼자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는데, 길 여기저기 개들이 무리지어 있어서 차마 발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오십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나 앞서 가기 시작했다. 나는 마침 잘됐다 싶어 그 남자를 따라 걸었다. 어쨌든 그 길을 지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털이 듬성듬성 빠진 사이사이로 상처가 드러난 개 한 마리가 앞서 걷던 그 남자의 다리를 물었다. 몹시 천천히 일이 벌어졌는데, 남자는 그 개를 떼내기는 커녕 물린 채로 가만히 그 상황을 음미하듯 서있는 것이다. 그 남자를 초연히 지나쳐가지 않고 비명을 지르거나 조금만 관심을 보여도 곧 그 개떼가 모두 내게 달려들 것을 알았다. 나는 아주 천천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한 그런 몸짓을 지으려 안간힘을 쓰며 그 남자를 지나쳐서 몇 발 자국 더 갔다. 그런 채로 꿈에서 깨어났다. 기분이 몹시 안 좋게 깨어난 뒤로 몇 번이나 그 꿈에 대해 생각했기 때문에 아직도 생생하다.

『뱀파이어 걸작선』. 제목만 봐서는 그렇고 그런 피를 빠는 죽은 시체 이야기겠거니 했는데 읽다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뱀파이어에게 영혼을 빼앗긴다는 것은 미로에 빠진 것처럼 비슷한 곳을 맴돌다 그만 길을 잃는 일이 아닐까 싶었고, 그 뱀파이어와의 만남이 우연이건 운명이건 결국 그 안에 빠져들면 자꾸만 그 굴레를 맴돌 수밖에 없도록 되는 어떤 미묘한 힘의 지배를 받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특히 「카르밀라」, 「뱀파이어」, 「피는 내 생명」, 「죽은 연인」의 주인공들은 어떤 거부할 수 없는 지배를 받는 듯 수레바퀴를 굴리느라 허덕이며 차츰 죽음 쪽으로 향해가는 것 같았다. 매번 계속되는 악몽이 그렇듯. 그런데 실제로 어떤 이상한 일에 이끌리기 시작하면 마치 모든 게 정해진 운명처럼 점점 이성이나 판단력이 흐려지며 그 중심부로 흘러들어가게 되는데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보면 자신이 그때 대단히 우둔한 판단을 하며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지속했음에 깜짝 놀라게 된다.

친구들에게 이 책에 실린 「탑실」 이야기를 해주니 우리나라 전설의 고향과 몹시 비슷하다고 했다. 문득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다. 결국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혹은 일어날 수 있는 공포는 비슷한 건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소설 중 제일 재밌었던 이야기는 「시튼의 이모」와 「비이」였다. 「시튼의 이모」는 어딘가 몹시 이상야릇한 분위기가 소설 전체에서 풍겨나오며 결국 실제 사건의 전모는 베일에 가려지는데 오히려 그게 더 매력적이었다. 「비이」는 민담의 효과를 활용해 느긋하고 걱정해야 할 상황이 분명함에도 금방 그 사실을 잊고마는 민중들의 모습이 나오는가 하면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희생자가 되고 마는 철학 수도생의 심리-보지 말아야 돼 하면서도 보고 마는 것,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해보려 해도 잘 말을 할 수 없는 점, 도움을 청할 수 없게 되는 이상한 심리 같은 것-가 사실적이었다.

이모네 댁 골목길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제 그 골목길은 완전히 공사가 다시 돼서 그 골목의 전모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몇 번이고 다른 듯 비슷한 장소를 꿈속에서 헤매는 수밖에. 대신 아스팔트 직선 대로로 길이 났는데 오랜만에 이모댁에 갔을 때 그 거리가 내 생각과 달리 너무 짧아서 깜짝 놀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다와 사막을 지나

앙리 미쇼

김현, 권오룡 옮김

열음사

 

이 세계는 비합리적인 곳이다. 누군가는 전쟁을 하고 누군가는 그 전쟁으로 죽는다. 전쟁으로 죽은 그는 결코 전쟁을 기획한 자가 아니며 인간의 합리화하는 능력은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짜여져 있다. 짧은 분노, 다시 어이없이 삶이 이어지고, 가끔 미칠 듯 끓어오르기도 하겠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음을 깨닫고는 그만, 허덕일 뿐이다.

앙리 미쇼의 시집은 비관적이고, 결코 호락호락하게 인간을 예찬하거나 값싼 희망을 부르짖지 않는다. 모든 희망을 값싸다고 비하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희망은 종종 속임수이거나 사기 그도 아니면 자기 과시일 수 있다. 그러므로 쉽사리 믿지 말자.

사실 결코 읽기 쉽지 않은 이 시집을 읽고 나면 그만, 우울해지고 만다. 인간이라는 이 동물의 비합리성이 얼마나 최악인가에 대해 계속해서 곱씹게 되는데, 그렇다고 앙리 미쇼가 따로 어떤 명확한 그림을 그려 제시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의 시는 과도한 모순 어법을 사용해 명료하지 않고 옛날 언어로 번역되어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렵다. 추상어들이 난무하고 이미지는 그만의 이미지인 경우가 더 많다. 특히 「나타남-사라짐」 같은 시는 연 사이의 단절이 극적인 채 대단히 길기까지해 더더욱 읽는 사람을 곤혹스럽게 한다. 하지만 이 단절 사이에서 어떤 미묘한 지점이 있다. 자꾸만 인간을 농락하는 생의 미끄러짐에 대해, 그는 붓터치를 하듯 쓴다.

그래서 다 읽고 나면 늪에 빠진 것처럼 그만 어딘가로 빠져들고 만다. 어지러운 이 세계가 뱅글뱅글 주변에서 돌고, 또한 나조차 돌아, 그만…….

결국 무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글을 읽은 뒤 시간이 지나면 의미는 다 잊혀진다. 몇 문장을 기억하기도 하겠지만, 정말 운이 좋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이에 비해 그 무늬는 새겨진다. 그것은 언어가 아니라 태도이며 자세로 나타나고, 말할 수 없는 어떤 지점으로 우리 내부를 떠돈다. 앙리 미쇼의 무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