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사막을 지나

앙리 미쇼

김현, 권오룡 옮김

열음사

 

이 세계는 비합리적인 곳이다. 누군가는 전쟁을 하고 누군가는 그 전쟁으로 죽는다. 전쟁으로 죽은 그는 결코 전쟁을 기획한 자가 아니며 인간의 합리화하는 능력은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짜여져 있다. 짧은 분노, 다시 어이없이 삶이 이어지고, 가끔 미칠 듯 끓어오르기도 하겠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음을 깨닫고는 그만, 허덕일 뿐이다.

앙리 미쇼의 시집은 비관적이고, 결코 호락호락하게 인간을 예찬하거나 값싼 희망을 부르짖지 않는다. 모든 희망을 값싸다고 비하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희망은 종종 속임수이거나 사기 그도 아니면 자기 과시일 수 있다. 그러므로 쉽사리 믿지 말자.

사실 결코 읽기 쉽지 않은 이 시집을 읽고 나면 그만, 우울해지고 만다. 인간이라는 이 동물의 비합리성이 얼마나 최악인가에 대해 계속해서 곱씹게 되는데, 그렇다고 앙리 미쇼가 따로 어떤 명확한 그림을 그려 제시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의 시는 과도한 모순 어법을 사용해 명료하지 않고 옛날 언어로 번역되어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렵다. 추상어들이 난무하고 이미지는 그만의 이미지인 경우가 더 많다. 특히 「나타남-사라짐」 같은 시는 연 사이의 단절이 극적인 채 대단히 길기까지해 더더욱 읽는 사람을 곤혹스럽게 한다. 하지만 이 단절 사이에서 어떤 미묘한 지점이 있다. 자꾸만 인간을 농락하는 생의 미끄러짐에 대해, 그는 붓터치를 하듯 쓴다.

그래서 다 읽고 나면 늪에 빠진 것처럼 그만 어딘가로 빠져들고 만다. 어지러운 이 세계가 뱅글뱅글 주변에서 돌고, 또한 나조차 돌아, 그만…….

결국 무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글을 읽은 뒤 시간이 지나면 의미는 다 잊혀진다. 몇 문장을 기억하기도 하겠지만, 정말 운이 좋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이에 비해 그 무늬는 새겨진다. 그것은 언어가 아니라 태도이며 자세로 나타나고, 말할 수 없는 어떤 지점으로 우리 내부를 떠돈다. 앙리 미쇼의 무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