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 걸작선
브램 스토커 외 지음, 정진영 편역 / 책세상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어릴 적 큰이모 댁은 고지대의 골목을 몇 번이나 꺾어들어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외가는 명절 때마다 큰이모 댁에 모여서 흥성거리는 잔치를 벌였으므로 그곳에 갈 일이 종종 있었는데 나는 그 가로등조차 몇 개 없는 골목길을 혼자 가다가 길을 잃는 게 아닐까 늘 무서웠다. 실제로 길을 잃은 경험이 있었는지는 잊었지만 밤에 그 길을 혼자 걷는 일을 상상하는 것만로도 늘 두려움이 솟구쳤다.

그런 두려움이 깊이 각인되어서인지 나는 종종 그 골목길에 서있다. 꿈속에서. 너무 많은 꿈을 꿔서 이제는 그 골목길의 실제 모습이 어떤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매번 꿈에서 그 골목길은 조금씩 형태가 바뀌는데 어쨌든 비좁고 약간은 음산하며 낡은 돌로 된 하수구가 있고 곧 모퉁이가 나오도록 되어 있다. 겹겹이 모퉁이가 있는 미로 같은 골목인 셈이다. 며칠 전 꿈에서는 그 골목길을 혼자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는데, 길 여기저기 개들이 무리지어 있어서 차마 발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오십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나 앞서 가기 시작했다. 나는 마침 잘됐다 싶어 그 남자를 따라 걸었다. 어쨌든 그 길을 지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털이 듬성듬성 빠진 사이사이로 상처가 드러난 개 한 마리가 앞서 걷던 그 남자의 다리를 물었다. 몹시 천천히 일이 벌어졌는데, 남자는 그 개를 떼내기는 커녕 물린 채로 가만히 그 상황을 음미하듯 서있는 것이다. 그 남자를 초연히 지나쳐가지 않고 비명을 지르거나 조금만 관심을 보여도 곧 그 개떼가 모두 내게 달려들 것을 알았다. 나는 아주 천천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한 그런 몸짓을 지으려 안간힘을 쓰며 그 남자를 지나쳐서 몇 발 자국 더 갔다. 그런 채로 꿈에서 깨어났다. 기분이 몹시 안 좋게 깨어난 뒤로 몇 번이나 그 꿈에 대해 생각했기 때문에 아직도 생생하다.

『뱀파이어 걸작선』. 제목만 봐서는 그렇고 그런 피를 빠는 죽은 시체 이야기겠거니 했는데 읽다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뱀파이어에게 영혼을 빼앗긴다는 것은 미로에 빠진 것처럼 비슷한 곳을 맴돌다 그만 길을 잃는 일이 아닐까 싶었고, 그 뱀파이어와의 만남이 우연이건 운명이건 결국 그 안에 빠져들면 자꾸만 그 굴레를 맴돌 수밖에 없도록 되는 어떤 미묘한 힘의 지배를 받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특히 「카르밀라」, 「뱀파이어」, 「피는 내 생명」, 「죽은 연인」의 주인공들은 어떤 거부할 수 없는 지배를 받는 듯 수레바퀴를 굴리느라 허덕이며 차츰 죽음 쪽으로 향해가는 것 같았다. 매번 계속되는 악몽이 그렇듯. 그런데 실제로 어떤 이상한 일에 이끌리기 시작하면 마치 모든 게 정해진 운명처럼 점점 이성이나 판단력이 흐려지며 그 중심부로 흘러들어가게 되는데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보면 자신이 그때 대단히 우둔한 판단을 하며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지속했음에 깜짝 놀라게 된다.

친구들에게 이 책에 실린 「탑실」 이야기를 해주니 우리나라 전설의 고향과 몹시 비슷하다고 했다. 문득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다. 결국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혹은 일어날 수 있는 공포는 비슷한 건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소설 중 제일 재밌었던 이야기는 「시튼의 이모」와 「비이」였다. 「시튼의 이모」는 어딘가 몹시 이상야릇한 분위기가 소설 전체에서 풍겨나오며 결국 실제 사건의 전모는 베일에 가려지는데 오히려 그게 더 매력적이었다. 「비이」는 민담의 효과를 활용해 느긋하고 걱정해야 할 상황이 분명함에도 금방 그 사실을 잊고마는 민중들의 모습이 나오는가 하면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희생자가 되고 마는 철학 수도생의 심리-보지 말아야 돼 하면서도 보고 마는 것,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해보려 해도 잘 말을 할 수 없는 점, 도움을 청할 수 없게 되는 이상한 심리 같은 것-가 사실적이었다.

이모네 댁 골목길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제 그 골목길은 완전히 공사가 다시 돼서 그 골목의 전모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몇 번이고 다른 듯 비슷한 장소를 꿈속에서 헤매는 수밖에. 대신 아스팔트 직선 대로로 길이 났는데 오랜만에 이모댁에 갔을 때 그 거리가 내 생각과 달리 너무 짧아서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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