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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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여인의 키스』는 표범 여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키스를 하면 표범으로 변하는 여자의 서글픈 이야기. 그래서 사랑을 할 수 없는 여자의 이야기. 어찌보면 평범하고 식상할 수 있는 이 이야기는 몰리나와 발렌틴이라는 두 (생물학적) 남자의 대화 속에서 점점 색을 입고 궁금증을 자극한다. 천일야화에서처럼, 표범 여인은 진짜 표범으로 변해버리는 걸까, 궁금해지게 된다.

표범 여인 이야기가 끝난 뒤 소설의 중반부에 이르면, 다른 궁금증이 도진다. 작품 제목은 왜 표범 여인이 아니라 거미 여인일까? 작품 말미에서 이 질문은 해소된다. 발렌틴이 몰리나에게 넌 표범 여인이 아니라 거미 여인이야 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그 이유는 거미처럼 거미줄을 치고 먹이를 잡아들이기 때문.

그래도 왜 하필 거미일까?

몰리나와 발렌틴이란 두 (생물학적) 남성이 교도소에 갇혀 있다. 한 명은 아동 성추행이라는 혐의로 잡힌 동성애자이고 한 명은 사회 혁명 운동을 하는 운동가이다. 그리고 소설은 그 두 사람의 대화로만 이루어져 있다. 두 사람의 모든 행동은 대화 속에서만 나타난다. 종종 방백과 비슷하게 이 책에서는 이탤릭체로 표시되어 한 사람의 생각이 나타나거나 보고서 형식의 글이 있기도 하지만 그리 많지는 않다.

두 사람은 마치 천일야화처럼 영화 이야기를 한다. 영화를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몰리나고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발렌틴이다. 두 사람의 가족 관계나 그밖의 사회적 위치, 성격 등도 모두 중간 중간의 대화를 통해서 드러난다. 두 사람은 고인 시공간 속에 있다. 공간적으로 외부와는 거의 단절되어 있고 시간적으로 풀려날 날을 기다리지만, 그날은 형량으로 따지자면 까마득하다. 그들은 고인 시공간 속에 있다. 거미줄에 들어앉은 거미처럼.

이 작품의 중심은 서로 성향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해고 받아들이는 과정일 것이다. 낭만적인 동성애자와 이성적인 혁명 운동가 사이의 교감. 그 사이에 끼인 것 끝나지 않는 영화.

그리고 다른 이야기의 축은 몰리나가 풀려나기 위해 발렌틴을 이용하려 들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몰리나라는 인물은 입체적으로 확대되고 그녀의 고뇌가 살을 입으며 두 사람의 관계는 비틀리며 확장된다. 발렌틴을 아프게 만들어 정보를 캐내려던 계획에서 몰리나는 오히려 죄책감 때문인지 정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미묘한 지점에서 발렌틴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며(똥까지 치워주고 닦아주며) 발렌틴의 내면을 까발린다(자신이 도와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싫어서 몰리나의 도움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는 것). 대의명분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자세와는 어울리지 않는 철두철미한 자기 보호 의식 같은 것.

작품 말미에서 보고서를 통해 몰리나는 결국 그 관계 속에 빠져들어 출소한 뒤 발렌틴의 첩자 역할을 하려다 감시당하고 그만 살해당하고 만다는 게 드러난다.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말했던 자신의 이상형인 웨이터를 만나려고 약속을 잡았다가 실패한 뒤에도 몰리나가 적극적으로 그 웨이터를 만나러 가지 않는 부분에서 몰리나의 심리가 설명된다.

발렌틴은 감옥에서 고문을 당한 뒤 모르핀을 맞고 몰리나가 해준 여러 영화들의 장면 속에 놓인 채 죽어간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거미줄을 치고 있었으며 그 거미줄의 거미이자 먹이가 된다.




사회의 소수자이자 가장 반대편일지도 모를 동성애자와 혁명 운동가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운가는 주석으로 달린 여러 성 이론 문헌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 역할이라는 것도 결국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착취를 사회화한 것이라는 이 논문을 통해 몰리나와 발렌틴이 아주 가까운 사회적 입장에 서있음이 밝혀진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상에 가까운 혁명적 인물이며 자신들이 그것들을 완전히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가는 약간 다른 문제이다(우리의 생활이 그렇듯). 몰리나는 발렌틴이 부탁해야 할만큼,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여성상을 내면화 모델로 삼고 있으며(착취의 기본 구조를 깨뜨리는 입장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견고하게 유지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구성 인자로서) 발레틴은 의식적으로 혁명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 괴리를 겪는 인물이기도 하다(그가 옛날 여자친구 이야기를 하는 대목에서, 그가 그 여자친구 이름을 작품 말미까지 부르는 데서 나타나듯).




소설은 서사를 기본으로 삼는 장르다. 서사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이야기 진행 방식이다. 그러나 『거미 여인의 키스』는 소설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서사라는 진행 방식을 기본 구조로 삼지 않는다. 앞에서도 말했듯 이 소설은 감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거의 모든 이야기가 진행되며 두 사람에게 시간은 흐르지 않는 것과 같다. 시간은 서로를 통해서만 흐르며 따라서 그 흐름은 완전히 주관적일 뿐이다. 다른 어떤 지표도 없이. 따라서 서로에게 고인 시간 속에 있는 두 사람 이야기는 서사라는 진행 방식이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대신,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방식에 가깝다. 몰리나가 이야기하는 영화들의 면면 속에 두 인물이 녹아있고 주제가 녹아있기도 하다. 더불어 주석들도 적극적으로 이 방식에 개입한다.




몰리나가 소장에게 마지막 면담에서 음식을 부탁하는 몇 마디 말은 그 어떤 몰리나의 감정에 대한 기나긴 설명보다 더 애절하고 서글프다. 그녀가 놓인 아이러니한 상황과 더불어. 이 소설의 전체 방식이다.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기의 극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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