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도 걸어도 - Still Wal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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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빛은 암시적이다. 인간은 아무리 퍼내도 물이 솟아나는 우물과 같은 존재다. 증명이 불가능한 존재, 그래서 환한 빛은 아무리 비추려 해도 비출 수 없는 것들을 부각시킨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환한 빛을 좋아하는 감독이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환한 빛은 일본의 평범한 동네에 방치된 아이들이 죽음이란 사건에 내몰릴 때까지 아무도 알지 못했음을 더욱 안타깝고 부끄럽게 만들며 존재의 어둠을 직시했다. 이번 영화 <걸어도 걸어도>에서 역시 빛은 빛과 어둠 사이의 광활함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다. 실제로 빛을 통해 보여지는색이란 태양 에너지를 통한 가시 광선의 눈속임이다. 아무리 환한 빛도 인간 주체를 증명할 수 없다. 사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진짜라고 말해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어도 누구나 시각을 객관적으로 믿는다는 점에서 빛이란 아이러니하다. 밝은 자연광일수록 우리의 어둠과 아무도 증명해줄 수 없는 주관과 객관 사이의 줄다리기를 응시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화면이 종내 짙은 어둠만 응시한다면 아무것도 보여줄 수 없기에 환한 빛을 보여줄 수도 있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풍성한 빛.

<걸어도 걸어도>에서도 빛은 영화 내내 풍성하지만 그 빛이 비출 수 없는 우리 내면의 가닥들이 있다. 그 가닥들이 어긋나는 풍경. 풍성한 빛 덕에 그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내면의 미로는 영화가 끝난 뒤 더욱 도드라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빛으로 영상 미학을 실현한다.

<걸어도 걸어도>는 단 하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 후반부에 닿기 까지 근 한 시간 반 이상이 한 가족의 24시간을 담는다. 그 24시간은 준폐이의 기일이다. 영화가 끝난 뒤 가장 기억에 남는 이름, 준폐이. 그는 10년 전에 죽었으나 어제 죽어서 아직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처럼 그의 가족들은 준폐이란 이름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꺼내고 혓바닥에 굴린다. 이미 사탕을 먹은 지 오래 됐지만 아직도 사탕 맛을 쩝쩝거리는 아이들처럼.

어둠을 위해 빛이 사용된 것과 같이 죽음 때문에 모인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란 점 역시 이 영화의 아이러니다.

이제 10년 전 죽은 이를 위해 모여든 가족 구성원을 보자.

늙으신 어머니 토시코, 의사였던 아버지 코헤이 요코하마, 그 집안의 차남 료타와 그의 부인 유카리, 유카리의 아들 아츠시(유카리는 아들을 데리고 재가했다), 그 집안의 딸 유와 사위, 아이들. 이들은 각자 제 내면의 어둠을 안고서 관계를 맺고 그 어둠을 숨기거나 뜻밖의 순간에 드러낸다. 그래서 ‘무섭죠, 사람은’이란 유카리의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아이인 아츠시조차 어둠을 품고 산다. 그의 꿈은 피아노 조율사. 죽은 아버지의 직업이었기 때문이지만 그는 차마 새 아버지 집에서 그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유의 아이들 역시 호기심 섞인 어둠(혹은 어둠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 아이들끼리만 만났을 때 유의 아이들은 아츠시에게 죽은 아버지에 대해 묻는다. 수박 깨끼를 하고 키가 1.5㎝ 자랐다고 자랑하는 열 살 남짓한 아이조차 숨겨두었다가 헉하는 순간 내뱉고 마는 것이 있다. 순간 드러나 우리를 섬뜩하게 하는 심연. 이 어둠은 모두 관계 때문에 빚어지고 관계 때문에 깊어간다.

사회적 관계를 맺은 지 10년 정도 된 아이마저 숨겨야 할 것들을 품었으니 오래 산 어른들은 얼마나 품어둔 게 많을까. 그 관계가 깊어질수록 어둠은 얼마나 그들의 목을 조일까. 갈고 갈다 보니 매서운 칼이 될 만큼 날카로운 어둠이 서로를 벤다. 게다가 죽음이란 알 수 없는 심연. 죽음은 그림자까지 저곳으로 데려가지 못한다. 여전히 그 그림자를 느끼고 있는 살아있는 사람들 덕에 그렇다.

그래서 료의 부인은 죽은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숨겨야 하고, 료는 죽은 형에 대한 자신의 열등감과 더불어 그를 괴롭히는 것들을 숨겨야 한다. 10년 전 죽은 아들의 유품을 버리지 않고 보관하며 같이 사는 부모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숨겨야 할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사회적 위치나 가족적 위치 속에서도 살아남아 있는 개성이란 것을 잘 보여준다. 가족 관계에 끼기를 마다하며 혼자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는(실제로 그 안에서 별다른 일을 하지는 않는다) 할아버지는 아이들을 불러 이 집은 자기가 돈 벌어 지은 건데 왜 할머니 집이라 하느냐고 묻는다. 인자해 보이는 할머니는 순간 순간 섬뜩한 말을 내뱉는다. 새로 맞은 며느리와 식사 도중 음악을 틀기도 한다. 바로 영화의 제목 ‘걸어도 걸어도’란 노래다. 그런데 그 노래의 사연이 기가 막힌다. 할아버지가 외도할 때 아이를 업고 할아버지와 여자가 있는 아파트에 쫓아갔다가 문 앞에서 할아버지의 노랫소리를 듣고 그만 돌아오고 말았다고 식사 도중 말한다. 할머니는 걸어도 걸어도 하며 그 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한다. 할머니가 그 동안 무슨 마음으로 그 노래를 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쥰페이의 묘지에 다녀오는 할머니와 료, 아내 유카리와 아츠시의 이야기도 섬뜩하다. 그들은 두 발자국 정도 떨어져 걸으며 이별을 이야기하고 죽은 남편에 대해 말한다. 듣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숱한 말들이 쌓인 내면은 빛이 비추지 않는다. 종종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없었던 양 사라진다. 그뿐이다.

<걸어도 걸어도>는 극 사실주의 영화다. 나이가 들거나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원망과 미움의 부스러기들이 어떻게 드러나고 그럼에도 결코 깰 수는 없는 가족이란 관계 속에서 부딪히는지 과장도 하지 않고 미화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개인은 영원한 개인으로서 외롭고 아마 그 외로움을 품고 죽을 것이다. 또한 그렇다 해도 삶은 신비롭다. 영화 속에서 빛은 그런 역할도 한다. 삶이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것과 같이 <걸어도 걸어도>는 말로 다 이끌어낼 수 없는 사이를 남겨둔 채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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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윌 헌팅 - Good Will Hu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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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

극장에 가려다 실패하고

며칠 전 다운 받아놓은 굿윌헌팅을 봤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이미 내용에 대해 들을 만큼 들어서 궁금하지 않았다. 그래서 봐야지 하면서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며칠 전 새벽에 방송하는 라디오에서 로빈 윌리암스가 맷 데이먼에게 니 잘못이 아냐 라고 말했다는 그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아직도 안 봤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예상보다 좋았다.

맷 데이먼은 자아를 발견해나가는 순진한 청년이기 보다는 어릴 적 상처 입어 마음의 문을 닫아 건 청년이었다. 아마 더 영화에 공감한 것은 이 때문일 것 같다. 누구나 상처 입고 마니까. 진정한 천재라고 마음에 상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내용이 단순하지 않아 좋았다. 로빈 윌리암스의 과거라든가 맷 데이먼의 천재성을 발견한 교수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또 로빈 윌리암스가 맷 데이먼에게 육체 노동을 하고 싶다면 왜 MIT에서 청소부를 하느냐는 질문도 흥미로웠다.(이 부분도 친구가 예전에 이야기해줬다.) 목동이 되고 싶다는 맷 데이먼에게 그렇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유기하며 이리저리 핑계를 댄다. 세상에, 천재도 아닌데 그런 짓을 하며 자기 삶을 방기한다. 그것은 어느 정도 자아의 껍질 때문이고 어느 정도 세계의 껍질 때문이다. 그 둘이 적절하게 우리를 옭매고 만다. 껍질이 문제다. 툭 하면 깨지는 껍질이 아니라 신축성도 좋아 이리저리 늘어나는 껍질.

알맹이는 보이지 않고 껍질은 두터우니

삶이 어려울 수밖에.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우리 탓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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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 - Terminator Sal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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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딩 때 처음으로 극장가서 봤던 성인 영화는 터미네이터2다.  엄마아빠가 어디 간다고 오빠랑 둘이 극장 가라고 돈 주고 갔을 때 <나 홀로 집에>인가 <터미네이터2>인가 고민하다 결국 터미네이터2를 보러 갔다.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으니 그 영화 내용이 하나도 이해가 안 갔다. 눈 앞에서 뭔가 펑펑 터지고 너무 현란해서 완전 정신이 나갔던 것 같다. 그때 역시 엄마아빠가 없던 날 오빠랑 사촌오빠랑 <터미네이터 1>을 보고 완전 충격에 빠졌었다. 그때 처음으로 미래랑 현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미래에서 우리를 찾아올 수도 있구나 하는 것. 텔레비전은 화면이 작아서 이해가 됐는데 극장은 화면이 너무 커서 당시 즐겨보던 <우뢰매>랑은 비교할 수 없이 이해가 안 됐다.  

그리고 다시 커서 본 <터미네이터 2>는 감동적이었다. 물론 텔레비전에서 봤지만. 

그래서 나는 터미네이터를 좋아한다. 당시 초딩들을 열광시켰던 그 영화. 

오늘 아침에 조조로 보려다 실패하고 낮에 극장에 가서 봤다.  

역시 초딩들이 보면 깜짝 놀랄 만큼 현란했다. (사실 초딩 아닌 내가 봐도 현란하다.) 

이미 어느 정도 정보도 있어서 내용이 엉성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역시 터미네이터는 대단하다. 나는 맨날 인간이 뭔지 생각하는 피곤한 사람인데, 결국 기계와의 대비를 통해 터미네이터는 인간성을 이야기한다.  

사실 오늘 나는 인간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인간은 의리가 있고 사랑이 있고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지금 세상도 그런지 모르겠다.  (요즘 내가 사는 세상은 더욱)

그래도 인간은 꿈을 꾼다. 욕망하고 좌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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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 Moth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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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된 주제를 전달한다. 도준(원빈)이네 엄마는 왜 그렇게 도준이를 좋아할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영화는 관객이 맞추도록 하나 하나 힌트를 제시한다. 각각의 디테일은 서사와 각각의 인물이 사건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위해 드러난다. 이 영화는 직소퍼즐 맞추기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어려운 퍼즐 게임은 아니다. 쉽게 들어맞는 퍼즐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누구나 쉽게 퍼즐을 맞출 수 있다. 대부분 극장에서 일어서는 순간 바로 퍼즐 맞추기를 끝낼 수 있다. 그러나 퍼즐을 다 맞춘 뒤 그림을 보자마자 불쾌해진다.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불쾌한 존재니까. (봉준호는 그런 말을 하는 건가? 너네를 좀 들여다봐, 너네라는 불쾌한 존재를! 이라고) 인간이란 이기적 동물이 개체의 영역을 넘어설 수 있는 방식이며 그래서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는 모성애조차, 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에 다름아니라는 불쾌한 결론으로 우리 함께 달려가자.

사랑은 개체로서의 인간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지만 이 방식이 어떻게 실패로 끝나고 좌절을 남기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영화는 부모가 자식을 망치고 자식이 부모를 망친다는 것을 모자 가정의 두 인물, 엄마와 아들을 통해 보여준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세계가 바로 악무한의 구조로 짜여져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아무래도 그 구조를 달아날 수 없다. 거미줄에 걸린 듯 움직일수록 줄은 팽팽하게 당겨져 온몸을 옭죈다.




이 영화는 반전 영화다. 물방개 한 마리 못 죽이는 도준이 살인죄로 잡혀간다. 아마 애가 너무 멍청해서 누가 뒤집어씌운 것 같다. 도준이도 그렇게 말한다. 자기는 죽이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 동네의 형사들은 너무 후져 보인다. 살인사건은 거의 일어나지 않던 동네고 그저 도준의 이름이 적힌 골프공이 하나 띡하니 떨어져있었다는 이유로 도준을 범인으로 몰아간다.(도준이 현장을 지나간 것은 맞다. 그 사이 골프공이 떨어졌을 수 있다거나 누군가 그 골프공을 던져놓았을 수도 있다는 그런 암시를 주도록 범행 사건은 처리된다.) 그렇다면 다른 범인을 찾자, 하면 좋겠지만 형사들은 그 사건을 도준의 범행으로 처리한다. 그래서 엄마(김혜자)가 나선다. 우선 도준과 가장 친했던 진구가 용의선상에 오른다. 진구는 도준의 모자람을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기에 그럴 수도 있다.(영화 초반의 골프장 사건은 이런 의심을 부추긴다. 진구가 깨뜨린 백미러는 도준의 소행으로 사건이 처리되고 진구는 싸움 중에도 골프채까지 건지도록 미리 준비한다. 진구는 약은 놈의 전형이다.) 엄마 혼자 찾아간 진구의 후미지고 외딴 집은 그런 진구의 범행을 의심하도록 해준다. 저런 곳에 사는 범인이라면,이라고 생각하도록. 관객은 엄마의 편이 되어 진땀 흘리며 영화를 본다. 진구의 책상에는 마침 대학민국 과학수사라는 책이 펼쳐져 있고(진구가 범인의 물망을 빠져나가기 위해 혼자서 준비중이라는 듯) 진구네 집에서 엄마는 붉은색 무언가가 묻은 골프채를 발견한다. 관객은 계속 진땀 흘리며 영화를 본다. 잠이 든 진구와 그의 여자친구를 피해 도망가는 엄마가 혹시 걸릴까봐 안절부절하며. 그러나 진구의 골프채에 묻은 붉은색 흔적은 여자친구의 립스틱으로 밝혀진다. 그래도 의심을 놓을 수 없다. 어쩌면 약은 진구가 준비해놓은 그물은 아닐까. 수사는 그 동네 형사들의 방식대로 진구의 진술과 동영상에 기초해 엉성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진구는 그렇게 악랄한 놈은 아니다. 단지 약았을 뿐이다. 진구의 목적은 돈이지 그 외의 무엇도 아니다. 그래서 진구는 돈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되어 자신을 의심했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말도 안 될 위자료를 청구한다. 엄마는 겁이 나서인지 그 돈을 주기로 한다. 진구는 그 보답인지 좀 더 머리를 굴려서인지 엄마에게 정보를 준다. 무식하게 아무나 마음 가는 대로 족치지 말고 피해자(죽은 여고생)의 주변을 조사하라는 정보다. 엄마는 진구의 말을 믿고 주변 조사에 착수한다. 동네 아이들에게 동전을 뿌리며 여고생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여고생 친구에게 돈을 뿌려 여고생 핸드폰을 추적한다. 여고생은 막걸리를 좋아하는 치매 할머니와 함께 사는 가장이며 그녀의 핸드폰 속에는 범인에 대한 귀중한 정보가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난무한다.

핸드폰은 어디에 있는가 찾던 도중 또다른 용의자가 나타난다. 엄마 혼자 어찌해볼 수 없기에 엄마는 또 돈을 뿌려 진구를 행동 대장으로 삼는다. 그들은 본드에 취한 동네 조무래기 고등학생이고 그들로부터 여고생이 쌀떡소녀라는 것을 알아낸다. 쌀을 받고 몸을 팔아야 했던 아이라는 것. 그 여고생의 핸드폰 사진에 그 여고생과 잔 남자들 사진이 모두 있다는 것.

이제 사건은 점점 압축되어 간다. 문제는 핸드폰만 찾으면 될 것 같다. 엄마는 또 돈을 뿌려 핸드폰을 입수한다. 핸드폰은 어이없게도 여고생의 서글픈 일생을 압축하듯 쌀통 속에 들어있다. 그 핸드폰 속에는 그녀와 잔 남자 사진이 가득한다.

점점 용의자선상을 좁혀가는데 도준도 한 몫 한다. 계속 기억을 해내려 애쓰던 도준은 그날밤 한 노인을 봤던 것을 겨우 깨닫는다. 마침 핸드폰 속에는 노인의 사진이 있다. 변태 새끼! 라는 마음 속 비명과 함께 이제 관객은 엄마와 함께 그 노인을 찾아나서게 된다. 마침 그 노인은 엄마가 이천 원 주려고 사려던 고물 우산 값을 천 원만 받았던 할아버지다. 가난할지언정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반전인가, 하며 영화를 쫓아가게 된다.

노인은 고물상을 하며 진구처럼 또 혼자 외딴집에서 살고 있다. 진구네 집보다 더하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연쇄살인범이 살던 곳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엄마는 노인을 슬슬 구슬린다. 대체 그는 그날밤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한 것일까?

그러나 그의 대답은 터무니없다. 그는 도준이 범인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왜 도준이 그 여학생을 죽였는지 수긍할 수 있다. 이제까지 영화는 그것을 수긍하도록 거미줄을 쳐나갔던 셈이다.

도준에게 엄마가 가르친 것은 많지 않다. 그는 지능이 모자라고 그래서 엄마는 누군가 그를 쉽게 보고 놀릴 경우 어떻게 해야하는지만 가르쳤다. 도준은 누군가 자신을 바보라고 할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멘트를 달달 외울 만큼 엄마에게 교육받고 자랐다. 여고생은 그날밤 재수없게도 도준에게 해서는 안될 말을 했던 셈이다. 바보라고. 심연에서 날아온 돌은 여고생이 도준에게 던졌던 것이고 도준은 역반응으로 돌을 던져 여고생을 맞춘다. 마침 새로운 범인이 잡혀 도준이 풀려났을 때 도준은 말한다. 자기가 생각을 해봤더니 여고생이 피가 많이 나니까 병원에 데려가라고 시체를 위에 올려놓았을 거라는 말도 한다. 결국 엄마는 그렇게 자식을 키우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교육을 주입함으로써, 도준을 살인범으로 만들었다.

도준이 살인을 한 다른 이유는 바보이기 때문인데, 도준을 바보로 만든 것 역시 엄마라는 게 밝혀진다. 도준이 갑자기 생각났다며 한 말, 엄마가 도준이 다섯 살 때 독이 든 박카스를 먹였다는 말로 도준의 지능 저하를 영화는 설명한다. 가난한 가정에서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 너도 죽고 나도 죽자라는 심사로 약을 먹여 자식을 죽이려는 부모 이야기는 종종 들려온다. 그러나 그 일가족 자살에 실패한 뒤 도준은 바보가 되었다. 말하자면 부모는 몇 번의 잘못된 계획과 교육으로 자식을 바보에 살인자로 만든다. 말하자면, 영화 초반 엄마는 왜 그다지도 도준을 아끼는가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그런 도준이 바로 엄마가 만들어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다른 방식으로 표출한 셈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엄마는 고물상 노인을 죽여 증거를 인멸한다. 어느 정도 우발적이라 할 수 있지만, 그때 엄마가 내뱉는 말은 섬뜩하다. ‘우리 도준이 발톱의 때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말한다. 대체 어떤 근거로?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런 생각들 속에 산다. 자기 자식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다른 말로 자기가 우선시해서 강요한 가치가 최고라는 생각을 끝까지 유지하려 든다. 실제로 엄마의 세계 속에서 노인은 도준의 발톱의 때만도 못할 것이다. 문제는 그 가치 체계를 세계에 납득시키기 위해 살인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데 있다. 그 피해자들은 대부분 자신들보다 가난하고 그래서 힘없는 이들이다. 영화에서 피해자인 세 사람은 가난하다는 도준네 형편보다 못한 이들이다. 모자에게 살해당한 여고생과 고물상 노인 이외에 범인으로 잡혀들게 된 남자(엄마조차 없는)도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이 세계는 자신보다 못한 계급을 갈취하고 죽이며 계속되고 있다. 그 살인이 우발적이건 의도적이건 관계없이 살인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다고 영화는 항변한다.

도준은 자신의 범행 사실을 알고 있는가 모르고 있는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그가 너무나도 이기적인 동물이라 엄마에게조차 그것을 숨겼는지 아니면 기피하고 싶은 마음과 기억력 장애로 실제로 범행 사실을 완전히 기억 속에서 은폐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단지 지독한 가능성만 남겨둔 채 영화는 끝난다. 도준은 엄마가 불지른 고물상에서 침통을 가져와 엄마에게 내민다. 이런 것을 잊어버리면 어떡해, 라는 도준의 대사는 그가 엄마를 증인 인멸을 위해 이용했던 것인지 아니면 머리가 너무나도 나빠서 그저 엄마의 중요한 침통이기에 그런 말을 한지 모른 채 끝이 난다. 그러나 형사의 말은 맞다. 누구나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물방개 한 마리 못 죽일 망정 제 몸, 제 안위를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누구나 악마를 품고 있다. 영화를 보는 당신 역시 마찬가지다, 라고 봉준호는 말한다.

봉준호는 시종일관 피해자의 입장에서 동조하며 영화를 보던 관객이 실은 가해자를 옹호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러한 반전 구조를 택했다. 대부분 우리는 자신이 어느 정도 선하고 어느 정도 정의로운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 세계가 우리를 착취할 때 힘없이 우리는 당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그 체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우리는 우리보다 조금 더 못한 계급을 착취하고 있다고 폭로한다.

봉준호는 이와 같은 폭로를 위해 가난에 대한 우리의 심리를 이용한다. 가난이 유발하는 공포 심리는 진구네 집, 여고생 집, 고물상 노인 집에서 반복적으로 관객에게 작용한다. 우리는 그 가난이 그들의 죄를 입증하는 물증일 수 있다고 우리도 모르게 생각한다. 각 장면은 그런 심리를 부추기도록 돼있다. 그러나 결국 영화 종반부에 이르면 이 뒤틀린 심리는 죄책감을 유발한다. 봉준호는 영리하다. 그는 가난에 대한 공포 심리를 최대한도로 이끌어낸 뒤 이 심리를 비판한다. 또한 영화는 도준의 가정이 가난하기에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는 초반 전제를 통해 동정심과 감정이입을 유발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선한 감정이나 정의에 이끌리는 게 아니라 서사에 따라 적당히 동정하고 적당히 공포하는 속물일 뿐이다. 엄마가 영화 내내 맺힌 속을 풀어준다고 말하던 침은 그녀가 맞아야 할 침이며 또한 이 세계의 구조를 견뎌내기 위해 우리가 맞아야 할 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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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츠와의 대화 

 

인생은 항해와 같다고 말해도 좋지만 

다만 대화의 시작은 부츠와, 부츠와의 대면을 

혀가 딱딱하게 굳고 침을 삼키기 어려워진다면 

부츠와의 대화를 시도해 

철갑을 두른 듯 검고 푸른 대화를 이어나가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구두를 신은 것 같다고 

흑인에 대한 인상을 말해도 좋아 

순서가 바뀌었어 하이힐, 하이힐과 대화를 

맥없이 툭 떨어지는 팔처럼 

깊은 수렁에 빠진 듯 경련하는 다리처럼 

순간 사라져도 좋지만 되돌아와도 좋아 

 

골목이 삼키는 뜨거운 발자국들 

그러나 상관없어 

대화의 미학은 다리에서 시작되지 

부츠, 부츠와의 대화를 

뾰족한 것은 언제나 열쇠와 같다 

나는 대화를 시도해 

 

-이근화, <<칸트의 동물원>>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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