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없는 십오 초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심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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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트릭트 9 - District 9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디스트릭트9의 서사는 꽤 단순하다. 익히 보아온 헐리웃 액션(로봇, 펑펑 터지는 피의 난무극, 테러 작전 등)도 존재하고 대의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비극적 파토스를 흠뻑 뿜은 주인공도 등장한다. 게다가 그가 처음부터 비극적 파토스를 가진 초인은 아닌 일상적인, 연약한 한 가장이었다는 설정도 이미 꽤 보아온 설정이다. 게다가 정부측과 진정성의 대결이 아니라 거기 끼어든 남아메리카 갱단의 설정은 3중 갈등 관계를 형성하는 그 설정 역시 이제는 새롭다고 할 수는 없다. 갈등이란 1:1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실은 다양한 집단들의 대립이라는 인식 속에 세워진 이 갈등 구조는 가이 리치의 <락스탁 앤 투 스모킹 베럴즈>의 영화를 봤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영화에 열광할까?

이 영화는 ‘공존이 존재할까?’ 라는 질문에 대해 현재적 우리로서는 힘들다는 비극적 결말을 맺는다. 공존이란 말의 달콤한 허구성 이면에는 정치적, 경제적인 갈등을 해소할 아무런 비전도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미국이 나빠서 강대국이고 착취하는 세력이며 아프리카가 착해서 약소국이 아니라 누구나 지배 본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얼마나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아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외계인이라는 설정을 통해 보여준다.

외계인이라는 약간은 역겹게 생긴 이 존재들은 지구의 방식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약탈이라는 가장 일차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생존 본능을 이어나간다. 이런 외계인들에 대한 아프리카인들의 냉대는 인상적이며 또한 현실적이다.

그런 외계인들과 전혀 가까워질 마음이 없던 주인공은 약간의 호기심과 붕뜬 마음 때문에 외계 약품(유동액)을 뒤집어쓰고 외계인의 유전자와 자신의 유전자가 결합하는 기이 체험을 하게 된다. 이 기이 체험은 극의 마지막 주인공의 다른 두 눈동자를 통해 잘 드러난다.(피터 잭슨은 눈 연기를 좋아한다. 킹콩에서도 킹콩의 눈으로 말하기 연기는 압권이었고 이번에 외계인 크리스토퍼의 눈도 깊은 말을 한다.) 대립된 양극 지점을 함께 가진 이에 대해 사회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회가 말하는 달콤한 공존은 실은 그것을 어떻게 상품화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갱들의 측면으로는 그의 힘을 어떻게 자기의 것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다. 말하자면 그는 소유의 문제로 취급되는 상품, 물건이다.  


그런 우리들에 대해 우리 자신이

얄팍한 희망인가 쓰디쓴 절망인가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지만, 영화는 얄팍한 희망 뒤편에 도사린 쓰디쓴 절망을 이야기한다. 중간자적 존재는 차츰 외계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혹은 왕따로서 이 사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풍문, 이름만 남은 존재가 되었다는 마지막은 씁쓸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들이 올지도 몰라. ‘날아와 머리 위로 날아와’(패닉의 <UFO>) 라는 그날에 대한 주문이 남는다. 외계인의 3년이 우리의 3년과 같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니 언젠가는.(지구의 시간은 지구적 차원일 뿐, 우주적 차원이 아니다) 그날은 맑스주의자들이 말했던 혁명의 그날일까?(물론 이조차 얄팍한 소리일 테지만) 언제 올지도 모를 혁명을 기다리던 그들처럼 우리도 혁명의 그날을 기다려야 할까.? 그 혁명은 단순한 경제적 착취 구조의 해소가 아니라 우리 본성에 대한 새로운 비전의 날일 테니 훨씬 더 지독할 것이다. 뿌리째 바꾸어야 할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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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io 2009-10-16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우리 본성의 바뀌는 날이란 표현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으니까요.
 
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이 소설은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처음엔 좀 작위적이구나 이제 보니 좀 그렇구나 했는데 결국 나의 마음을 완전히 지배해버리고 그리고 우울증을 가져다줬다. 이 소설을 일고 읽고 좋았던 부분이 어디인가 보니 이전엔 이 부분이 좋았는데 또 어느새 다른 부분이 좋다. 아이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중이군 하지만 어느새 어른이 하는 헛소리보다 훨씬 나은 목소리가 들린다. 게다가 이 모든 인물들, 그러니까 유태인, 아랍인들이 섞여 있고, 창녀, 포주, 흑인들, 트랜스젠더 등 모든 것들이 함께 한다. 그건 좋다. 그건 좋지만, 이번엔 울지 않았다. 사랑해야 한다. 이 말은 참 이상한 말이다. 로맹 가리는 이 말을 위해 이 소설을 썼을 것이다.

 

 

-“나는 절대로 정상인은 안 될 거예요, 선생님. 정상이라는 작자들은 모두 비열한 놈들뿐인걸요.”

“정상인을 말하는 거다.”

“나는 정상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예요, 선생님…….”

그는 다시 일어났다. 난 이때가 그걸 물어볼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를 심각하게 괴롭힌 문제였으니까.

“말해주세요, 선생님. 내가 열네 살인 건 확실한가요? 스무 살이나 서른 살이나 혹시 그 이상은 아니겠죠? 처음에는 열 살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열네 살이라고 하잖아요. 나이를 좀더 올려줄 수는 없나요? 혹시 내가 난장이는 아니겠죠? 아무리 정상이 아니고 남다르다고 해도 난쟁이가 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거든요.”

카츠 선생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내게 좋은 소식을 들려주게 된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아니다. 모모야. 넌 난쟁이가 아니야. 의학적으로 말해주는 건데, 너는 열네 살이 맞다. 로자 부인은 가능한 한 너를 오래 붙들어두고 싶어했어. 부인은 네가 떠날까봐 두려웠던 거야. 그래서 네가 열 살밖에 안 되었다고 했던 거란다. 내가 좀더 일찍 말해줄 걸 그랬구나…….”

그는 미소지었다. 그것이 그를 더욱 슬프게 보이게 했다.

“하지만 그건 아름다운 사랑이었기 때문에 내가 말을 할 수 없었던 거야.”




 

면접을 보러갔을 때 원장이 어떤 책을 가장 재밌게 읽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자기 앞의 생이라고 이야기했다. 사실 매번 바뀌지만 어쨌든 그때는 이 소설이 생각났다. 그 이후 다시 읽어봐야지 라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아무런 타의의 강요 없이 가장 많이 읽은 소설이긴 하다. 세 번 봤다.

나는 로맹가리를 좋아한다. 어쩌면 그의 독특한 이력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의 독특한 이력 속에 숨겨진 생각들, 그가 했다는 말, 나는 인정을 받지 못한 게 아니라 무명이었을 뿐이네, 라는 그의 술회가 좋은지도. "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익명의 시골 마을에서 익명의 여자와 익명의 사랑을 나누어 역시 익명의 가족을 이루고 익명의 인물들을 모아 새로운 익명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라는 술회.

그 때문에 에밀 아자르라는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지만 결국은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그런 참담함이 그 사람 속에 깃들여 있어서 인지도 모른다. 좋아한다기보단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결국 우리는 모두 익명으로 죽어갈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생에는 연극이 필요하다. 때때로 환상이 필요한 것과 같이. 질 낮은 비유로서가 아니라 누구의 생에나 왔다 가는 것들이다.

왠지 학원 원장에게 잘못 말했다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인지 오늘 그 학원 원장이 꿈에 나왔다. 그곳과 지금 다니는 학원이 합병했다. 제길, 이라고 생각했다. 성녀란 테레사 수녀님만이 아니란 것을 알려주는 소설이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아니다. 결국 사랑이 성녀를 만든다는 점에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소설이란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

예전에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테러리스트가 될 거야 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대학도 졸업한 시점에 어쩌다 그런 소리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그때 그 말을 듣고 같이 놀던 사람이 좀 화를 냈었다. 그때는 왜 그가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몇 달 전 어떤 아이가 전 테러리스트가 될 거예요, 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다면 너희 어머니가 너의 테러 행동으로 가장 먼저 죽을 거야, 그래도 된다면 테러리스트가 되라고 하자 그 아이는 겁을 먹었다.

모모는 종종 테러리스트가 되겠다고 말한다. 사랑이 테러리스트의 꿈을 만든다. 하지만 진짜 테러리스트가 된다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이제 안다.

자연 법칙 따윈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항변하는 모모. 사랑이 자연법칙을 이길 수 있나. 나는 잘 모르겠다만 종교에선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자연법칙이란 게 있다. 유일한 자연법칙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늬가 남는 것은 맞다. 그 무늬마저 지우면 다 끝인가? 그럼에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불가능하니 사랑하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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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사람이 원하는 게 보인다.  

그 안에서 행동하거나 밖에서 행동하거나(??? 무슨 뜻으로 썼지?) 

  

2. 마음은 안에서 노는데 

이야기는 그것을 밖에서 볼 수 있도록 한다. 

 이야기 속에 마음을 새겨넣어야 한다. 

 

3. 마음이 뭔가에 사로잡히면 검이 나오지 않는다.  

보려하지 말고 전체를 보아라.  

 

4. 단 한가지 걸리는 것은 

마음이, 너무도 평온하다. 생애 최강의 적을 앞에 두고 이게 뭐지? 필살의 싸움 중에 이래도 되는 걸까?  

머리가 차다.  

뒤에 있는 나뭇잎까지 똑똑히 보인다.  

 

5. 我 

우리가 추구하는 검은 그렇게 작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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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인간은 상상력의 즐거움을 누리는 동물이다. 옛날 옛적엔 오늘처럼 번개가 치는 날이면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 사는 엄청난 남자가 화를 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 남자는 화가 났을까? 답은 무수히 많다. 하찮은 인간 세상의 누군가가 자신을 험담했기 때문일수도 있고 자기 아내가 그를 화나게 했을 수도 있다. 또? 또? 너무 많다. 누구나 다른 답을 댈 수 있다.

이 상상의 세계를 눈앞에 재현하는 예술인 영화, 그러나 영화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 CG가 아무리 발달했다해도 자금 조달과 물리적인 한계를 뚫을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애니메이션은 인간 상상력의 장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장르이다. 좌석에 앉아 <UP>에 그려진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가면 애니메이션의 이러한 가능성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풍선을 타고 날아가는 상상, 누구나 한번쯤 해보지 않았을까? 예전에 <비타민>이란 프로그램에서는 몇 개의 풍선이 있어야 우리가 그 풍선을 타고 날 수 있는지 실험까지 했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내면에 풍선을 타고 나는 로망이 잠자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UP>은 칼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 사랑에 빠져 평생을 함께 한 엘리 (할머니)가 죽은 뒤 혼자나마 두 사람 사이에서 그들을 풍성하게 하던 꿈을 현실화시킨다는 이야기다. 할머니가 죽자 칼은 자신 주변의 빈 공간을 깊이 느끼며 살아가게 됐으므로 꿈 속으로 날아갈 수 있었을 것일 게다.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피터 닥트는 “우리는 풍선을 달고 공중을 나르는 집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건 ‘세상에서의 탈출’이라는, 우리가 추구하는 테마에 꼭 들어맞았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관계’를 의미한다. 극중 ‘칼’은 꿈꿔온 탐험 여행을 통해 잃어버렸던 세상과의 관계를 회복해간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함과 동시에 현실로 돌아온다.

친구들과 영화 이야기를 하던 중 M이 영화를 보는 내내 울었다며, 그 무거운 집을 질질 끌고가는 칼 할아버지의 모습이, 마치 집 한 채 마련하겠다고 갖은 고생을 한 뒤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이란 황당한 사태로) 그 집이 평생의 짐이 되어버린 현실과 겹쳐졌다고 한다. 알록달록한 색으로 대변되는 내 집이라는 환상은 실은 텅 비어 있는 풍선과 같다. 현실은 온힘을 다해 낑낑 거리며 끌어야 할 짐덩이인 셈이다. 엘리와 칼의 삶을 빠르게 보여주는 초반부 역시 그들이 현실 앞에서 꿈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결국 무거운 짐이었던 집은 파라다이스 폭포라는 꿈의 공간 곁에 영영 서있게 된다. 그들이 꿈꾸던 그 그림 그대로.

개발과 끝없는 시장 프로젝트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속에서 칼은 점점 소외되어 간다. 그렇다면 그가 꿈꾸던 탐험가 먼츠의 모습은 무엇을 의미할까? 먼츠가 떨어져 죽는 장면은 내게는 좀 아쉬웠다. 나름대로 위대한 발명가(개에게 목소리를 준)인 먼츠가 왜 그렇게 죽어버려야 하는지, 아무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다는 게 억울했다. 게다가 먼츠의 비행선은 칼이 소유하게 된다. 독재자 먼츠는 주체성이 결여된 개들과 함께 살며 그들 위에 군림한다. 이는 파라다이스 세계라 믿으며 공산주의를 꿈꾸던 국가들이 점점 독재체제로 변질되어감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먼츠가 만든 회색 비행선은 칼에 의해 자본주의 세계 한복판으로 귀속되고 만다. (그것말고 다른 결론이 가능할까?)

<UP>은 마음껏 꿈꾸는 영화지만, 결국 꿈과 현실은 유리된다. 엘리와 칼이 만들어간 사랑의 물질체인 집은 파라다이스 폭포라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남겨진다. 칼은 끝없는 시장 한복판에서 소일하듯 러셀과 자동차 개수를 세는 소박한 삶을 산다. 칼이 얻은 것은 함께 여행한 꼬마 한 명과 강아지이다. 우리가 실현시킬 수 있는 꿈은 유대로 이루어진 소박한 사랑이라는 이 결론은 쓸쓸한 것일까? 행복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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