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은 상상력의 즐거움을 누리는 동물이다. 옛날 옛적엔 오늘처럼 번개가 치는 날이면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 사는 엄청난 남자가 화를 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 남자는 화가 났을까? 답은 무수히 많다. 하찮은 인간 세상의 누군가가 자신을 험담했기 때문일수도 있고 자기 아내가 그를 화나게 했을 수도 있다. 또? 또? 너무 많다. 누구나 다른 답을 댈 수 있다.
이 상상의 세계를 눈앞에 재현하는 예술인 영화, 그러나 영화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 CG가 아무리 발달했다해도 자금 조달과 물리적인 한계를 뚫을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애니메이션은 인간 상상력의 장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장르이다. 좌석에 앉아 <UP>에 그려진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가면 애니메이션의 이러한 가능성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풍선을 타고 날아가는 상상, 누구나 한번쯤 해보지 않았을까? 예전에 <비타민>이란 프로그램에서는 몇 개의 풍선이 있어야 우리가 그 풍선을 타고 날 수 있는지 실험까지 했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내면에 풍선을 타고 나는 로망이 잠자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UP>은 칼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 사랑에 빠져 평생을 함께 한 엘리 (할머니)가 죽은 뒤 혼자나마 두 사람 사이에서 그들을 풍성하게 하던 꿈을 현실화시킨다는 이야기다. 할머니가 죽자 칼은 자신 주변의 빈 공간을 깊이 느끼며 살아가게 됐으므로 꿈 속으로 날아갈 수 있었을 것일 게다.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피터 닥트는 “우리는 풍선을 달고 공중을 나르는 집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건 ‘세상에서의 탈출’이라는, 우리가 추구하는 테마에 꼭 들어맞았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관계’를 의미한다. 극중 ‘칼’은 꿈꿔온 탐험 여행을 통해 잃어버렸던 세상과의 관계를 회복해간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함과 동시에 현실로 돌아온다.
친구들과 영화 이야기를 하던 중 M이 영화를 보는 내내 울었다며, 그 무거운 집을 질질 끌고가는 칼 할아버지의 모습이, 마치 집 한 채 마련하겠다고 갖은 고생을 한 뒤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이란 황당한 사태로) 그 집이 평생의 짐이 되어버린 현실과 겹쳐졌다고 한다. 알록달록한 색으로 대변되는 내 집이라는 환상은 실은 텅 비어 있는 풍선과 같다. 현실은 온힘을 다해 낑낑 거리며 끌어야 할 짐덩이인 셈이다. 엘리와 칼의 삶을 빠르게 보여주는 초반부 역시 그들이 현실 앞에서 꿈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결국 무거운 짐이었던 집은 파라다이스 폭포라는 꿈의 공간 곁에 영영 서있게 된다. 그들이 꿈꾸던 그 그림 그대로.
개발과 끝없는 시장 프로젝트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속에서 칼은 점점 소외되어 간다. 그렇다면 그가 꿈꾸던 탐험가 먼츠의 모습은 무엇을 의미할까? 먼츠가 떨어져 죽는 장면은 내게는 좀 아쉬웠다. 나름대로 위대한 발명가(개에게 목소리를 준)인 먼츠가 왜 그렇게 죽어버려야 하는지, 아무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다는 게 억울했다. 게다가 먼츠의 비행선은 칼이 소유하게 된다. 독재자 먼츠는 주체성이 결여된 개들과 함께 살며 그들 위에 군림한다. 이는 파라다이스 세계라 믿으며 공산주의를 꿈꾸던 국가들이 점점 독재체제로 변질되어감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먼츠가 만든 회색 비행선은 칼에 의해 자본주의 세계 한복판으로 귀속되고 만다. (그것말고 다른 결론이 가능할까?)
<UP>은 마음껏 꿈꾸는 영화지만, 결국 꿈과 현실은 유리된다. 엘리와 칼이 만들어간 사랑의 물질체인 집은 파라다이스 폭포라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남겨진다. 칼은 끝없는 시장 한복판에서 소일하듯 러셀과 자동차 개수를 세는 소박한 삶을 산다. 칼이 얻은 것은 함께 여행한 꼬마 한 명과 강아지이다. 우리가 실현시킬 수 있는 꿈은 유대로 이루어진 소박한 사랑이라는 이 결론은 쓸쓸한 것일까? 행복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