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면서 화장실에서 두 여자가 하는 얘기를 들었다.

영화가 미적지근하다고 했다.

그래, 좀 미적지근하다.

왜일까, 왜 이런 사회고발이 미적지근한 걸까?

소를 풀어줘도 소들이 도망가지 않아서, 그런 해방감마저 없는

이 사회 구조의 시스템 자체에 대해

감독이 아무런 비전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다, 에단 호크를 통해 잠깐 비전을 제시하지만

너무 멀다고 해야 할까. 점진적인 발전, 실패하고 실패하지만

언젠가는 이라는 한줌의 희망 정도로)

근데 사실 이 구조는 인간의 구조와도 닮아있어서

어떤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기가 어렵다.

소고기를 먹으려면 어쨌든 어떤 소들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건 정말

보고 싶지 않지만 먹으려면 누군가는 소를 죽이고

소 가죽을 벗겨내고 고기를 절단하고

그래야만 한다.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

영화 말미에 주인공 역을 맡았던 버거회사 마케팅 간부가 이 모든

경악할만한 실상에 경악한듯 하다가도

짤리지 않기 위해 다시 회사로 복귀해 성공을 외칠 때

그 장면은 그다지 충격적이지도 않다.

그가 그런 선택을 하리라는 것은 대부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는 사회의 구조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발벗고 나서야 하는데

그러기엔 그의 편은 없고 그는 가정이 있는 가장이기 때문이다.

대체 왜 이렇게 세상이 썩은 걸까

자본가들의 욕심 때문인가 아니 근본적으로는 인간이라는 이기적 동물의

욕망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길 거부라도 할 건가

 

-집회에 다녀와 더 우울해졌다. 결국 며칠 전과 똑같은

구호"독재타도"를 외쳤는데 왠지 그 구호가 조금은 공허하기도 했다.

대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 걸까

우리가 아무리 외쳐도 걔들은 30초만에 거대 방송사 사장으로

지네 종복을 심어 지네껄로 만들 수 있는데

대체 아무리 비를 철철 맞고 거리를 돌며 독재타도를 외친들

뭐가 된단 말인가

자본주의의 무서움은 숫자라는 물증의 압박이다

결국 있는 놈이 합리적인 척 할 수 있다는 것

어떻게 해야 할까

왠지 집회도 점점 어떤 틀에 가두어진다는 느낌이다

그 틀을 깨부수어야 할 텐데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또한 나는 얼마나 진지할까?

어쨌든 아무곳에도 집중이 되지 않는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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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공포 영화

중독이 당신의 인생을 사로잡아 송두리째 빼앗아버릴 수도 있다.

지금 내가 중독되어 있는 것? 나도 모르게 질문이 머릿속으로 빠르게 스쳐간다.

그 다음, 왜 우리는 중독되는가?

텔레비전 쇼가 불러온 환상으로 말미암아 빨간 드레스를 입기 위해 다이어트 약-마약-에 중독된 엄마는 아들에게 자신이 왜 중독될 수밖에 없는지 말한다.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지금 그녀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바로 텔레비전 쇼에 나가 누군가로부터 주목받고 자신의 삶에 대해 낙관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지금 외롭고 아무도 그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나는 왜 중독되어 있지? 중독이 중독을 부른다-결국 생각이 중독을 부르고 집착이 중독을 부르고

어쨌거나 이 시대의 공포 영화, 게다가 편집도 몹시 뛰어나다. 반복되는 텔레비전 쇼 호스트와 게스트의 목소리, 약을 투여할 때의 이미지, 냉장고가 쿵쾅거리는 환상, 점점 중독 증상이 심해져가며 모호해져가는 현실의 경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여자친구가 대머리 의사에게 몸을 팔고 나서 돌아올 때 그녀는 걷는 게 아니라 지이이잉-좀 빠른 평행 에스컬레이터를 탄 사람처럼- 이동한다. 이 장면이 그녀의 심리와 정신을 잘 보여준다.

원제는 requiem for a dream -중독의 시작은 꿈에 대한 열망 때문인가, 이룰 수 없는 열망에 대한 열패감을 모르는 척 하기 위해 다른 반복에 몸을 맞기는 건가???

생은 종종 지독하다.

-20080714  학교 멀티실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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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새벽에 집중도 안 되고

해서 집에 와 맥주를 홀짝이며

6권 완결인지 알고 봤는데, 아니었다-_-

대체 언제 완결이 나오는 걸까?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난 뒤 세계는 산산조각나지만

우리는 그 유리 파편을 밟고 살아가야 돼

발바닥에선 피가 흘러도 모르는 척 아닌 척 하며

중학교 수영부였던 하루가 자신과 절친했던 남자친구 아키라의 죽음 뒤

겪게 되는 일상을 섬세하게 그린다

어떻게 보면 꽤 진부할 수 있는 감정인데도

어딘가 그렇지 않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그래서 희안한 방식으로 사람의 감성을 자극한다

오래전에 잃어버린 것들이 다시 떠오른다 툭툭

모르는 척 하고 있지만 발바닥은 피투성이인건가

나는 아닌 척 하려고 필사적으로 굴고 있는 건가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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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가족
공선옥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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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정직하다. 정직함이 언제나 미덕은 아니지만 지금 그녀의 정직은 미덕이다. 이제 더 이상 정직이 미덕이 아님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꾸만 다르게 보기를 시도하고 그러다 보니 진짜 현실이란 게 뭔지는 잘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눈은 사람마다 대부분 두 개, 이 지구상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고 우리나라에만도 사천만 명이 넘는 사람이 있으니 눈은 그 두 배, 그 중 공선옥이 『유랑가족』에 그려놓은 풍경이 정녕 생소하기만 한 사람들도 있긴 하겠지만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아주 많은 눈이 저 풍경을 목격했으나 상투성이라는 틀 속에 저 풍경을 밀어넣어 버리고 다시 꺼내보려 하지 않는 찰나, 공선옥의 시도는 내게는 뭔가, 내 두 눈에게는 뭔가, 죄책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을 마구 들쑤셨다. 왜 나는 보고도 보지 않은 척 하는가. 아, 그래 가난한 사람은 정말 많고 내가 그들을 다 어떻게 해줄 수는 없잖아, 그건 맞지만, 그래도 뭔가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닌가,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게다가 나도 가난하고 조금 배워서 겨우 이 가난을 헤쳐나가려고는 하지만 쉽지는 않고, 그것이 시스템의 문제인지 나의 체질의 문제인지도 헷갈리고, 세상은 너무 거대하고 그렇지만, 대체 나는 왜 직무유기를 하는가. 아, 물론 이런 나의 의견에 대해 반발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말하자면 내가 선택한 삶, 결심한 삶에 비쳐보면, 나는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도 몹시 익숙한 저 풍경은, 거리 어디에나 널려있고, 조그마한 호프집에 들어가 잠시만 앉아있어도 옆 테이블 아저씨들의 불콰해진 얼굴과 목소리 속에 새겨진 그런 풍경이기 때문이다. 서울 변두리에서 어떻게든 삶이란 것을 살아내보려 애쓰는 상경한 노동자들의 고독을-또한 자신의 고독과도 매우 비슷한 그 고독을- 우리는 다들 알지만 모르는 척 하고 싶어하거나 상투적이라고 하거나. 우리를 죽이는 건 상투적인 가난과 상투적인 자연의 상투적인 아름다움, 상투적이나 뼈까지 시려오는 외로움. 아니, 마음 속에 똬리를 튼 상투성의 독. 실은 바로 그 상투성이 지금 당신이 살고 있고 진흙바탕이라고, 당신이 상투적이라고 느낄 때 그것은 당신과 가장 가까이 닿아있는 것이라고. 2008년 한국은 실은 그렇게 다들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아비규환 속이라고. 그 속에서 다들 외로움에 치를 떨며 누군가를 만나려고 소외되지 않으려고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존재마저 사라져가는 이 현실이 우리의 목을 조르고 있다고.

시선이 각도가 지금 한국문학을 사로잡고 있지만 저 묵직한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 있구나. 늘 저기 그대로 있구나 라는 그래, 또 어쩌면 상투적일지도 모르는 깨달음에 나는 한 대를 얻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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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1
강도영 지음 / 문학세계사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만에 다시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해 생각해본다. 『봄날』을 읽으며 흥분했던 게 3~4년 전이니 세월 속으로 묻혀가는 것은 무섭다.

강풀의 『26년』이 문학적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광주민주화항쟁을 대중에게 알린 <화려한 휴가>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정치적인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정치적인 해석을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정치적이다. 아무리 자신이 정치적이지 않다고 해도 정치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순간 그는 정치적인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누구나 위험한 정치적 결단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 결단을 자신의 작업으로 옮길 수 있는 강풀의 의식을 존경한다. 적어도 <화려한 휴가>보다는 더 위험하고 그래서 더 나은 작품이다.

전두환을 사랑하는 모임이라는 다음 카페에는 여전히 만 명이 넘는 사람이 가입해있다. 글이 비공개라서 볼 수는 없었지만 국가를 위해 애쓰시는 전두환 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가 국가의 무엇을 위해 애썼다는 거지? 한강시민공원을 만든 거? 좀 더 공부해야겠다. 그가 대체 국가의 무엇을 위해 애썼기에 만 명이 넘는 사람이 거기 모여드는지 공부해야겠다. 요즘 우파와 좌파에 대해 생각해보긴 하는데, 아직 헷갈린다. 우파가 원하는 것,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우파 같은 1% 집단이기주의 뉴라이트 말고 진짜 우파가 원하는 것에 대해.

역사는 2008년을 기억할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렇게 될지 아닐지 아직 잘 알 수 없다. 역사는 스스로 쓰는 것이므로 장담할 수 없다. 지금 마치 대한민국의 서울은 눈 뜬 자들의 도시가 된 것처럼 정치에 대해 모든 이들이 눈을 떴다. 권력자들의 거짓과 망발, 아전인수격 논리에 대해 눈치챘다. 한 시간만 웹을 돌아다니다 보면 온갖 부정부패를 들추어내고 사람들은 그에 대해 최선을 다해 자본주의적으로 동조하지 말 것을 결사한다. 이 불안한 흐름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미래를 너무 깊이 우려하지 말자. 사람들은 지금 최대한 현명하며 앞으로도 현명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나는 지금 이 상태만으로도 너무 기쁘다.

집회에 나가며 광주민주화항쟁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왜 그들이 나오는지. 거대한 역사적 소명 의식에서가 아니라 정의에 대한 열망이거나 이웃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자그마한 정신이 역사적 소명 의식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 나보다 조그마한 소녀가 나와 당당하게 맨 앞자리에 서있을 때 그 모습을 보고 얻는 깨달음 때문이라는 것. 역사가 기억 못 해도 집회에 나왔던 많은 이들이 기억할 것이다.

극적으로 꾸미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 작품이지만, 그래서 흥미진진할 지언정 현실감은 떨어지지만, 한 인물의 복잡한 생애를 단순하게 압축해버렸지만, 그렇다 하여도 강풀은 이렇게라도 말하고 싶었던 거다. 29만원밖에 없다는 그에게(차마 인간이라 하고 싶지 않다), 들이밀고 싶었던 거다.

그때 봄날을 읽었는지 5.18 관련 희곡을 읽었는지 모르겠으나 전두환이라는 존재 때문에 흥분해있는 내게, 5.18 때문에 흥분해 있는 내게
선생님이 그렇다면 너는 그들과 다를 게 뭐냐고, 결국 복수하고 역사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생명을 없애는 거 아니냐고 했던 것 같다. 나는 이제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전두환을 죽여야 하는지 그가 우리 역사와 정의를 증언하기 때문이다. 미래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롭지 않아도 폭압으로 다른 생멱을 억압해도 괜찮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잊지 말자, 그래야 기어서라도 나아간다. 나아가다 보면 기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어느 날 언젠가 날아갈 날도 올지 모른다. 인간은 희망으로 살고 신념으로 산다.



-임철우의 <<봄날>> 추천!

-다음 아고라에 올라온 윤리 선생님의 6분 정도 되는 우리나라 정치에 대한 강의이다. 이런 선생님이 있어서 다행이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1525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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