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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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석을 알았던 게 언제 일까?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쥬』를 보고 재미있어 했던 게 5년 전 즈음인 것 같다. 만화가 이런 사회 고발 역할을 할 수도 있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지금 드는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그리고는 잊고 지냈던 이름인데 웹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게 된 그 이름의 필모그래피에 어느새 만화책 몇 권이 더 따라붙어 있었다. 책 없기로 학생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한 우리 학교 도서관에 있는 것만 해도 세 권이니 그 사이 쉼없이 작업을 했구나 싶어 부럽기도 했다.

최규석 만화의 최고의 장점은 단연 솔직함이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얘기를 향해 바로 달려들어가는, 치장 없는 솔직함. 그리고 아마도 그 솔직함이 가장 빛을 발하는 작품이 『대한민국 원주민』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과거를 꾸밈 없이 술술 풀어나가면서도 어떤 감정의 울림을 전하는 그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이 부러웠다. 게다가 그가 그려낸 가족들의 현재 모습-마트를 하거나 학원 원장을 하는 누님들-은 어느 도시 여기저기서나 볼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인물들이었다. 이야기 속에서 인간이 사회의 부속품이나 원자로 취급되고, 나라는 주체 속에서 타인들이라는 존재가 점점 정체 불명으로 변해가는 요즘 시대여서인지 이런 부분이 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대한민국 원주민』 후기에 김혜리 기자가 말하기를 최규석은 궁상 맞지 않은 가난을 그려낸다고 했는데 정확한 표현이다. 가난에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자기 연민이 최규석 만화에는 전면화되지 않는다. 긍정이나 부정을 넘어서 있는 삶이라고 해야 할까. 실제로 긍정이나 부정이란 판단보다 삶은 늘 한 발자국 앞서 있다. 자기 긍정이나 부정 전에 삶이라는 것은 거칠고 투박하고 알 수 없는 미지인 채 영영 함께이므로.

대학 시절에는 제 2의 가족과도 같은 친구들과 매일 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지냈다. 서로의 상처를 이야기하고 보듬어 주고 결국 그것들이 상처나 붕대 같은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냥 나라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해주었고 그래서인지 이제와 가족 이야기를 한다거나 하는 게 왠지 궁상맞은 짓 같기도 해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최규석 만화는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지지 않는 그 삶의 뿌리를 더듬어 스케치하는 일이 가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주었다.

김혜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최규석만의 그림체가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대화를 보았다. 요근래 스타일에 대한 말을 자주 들어 생각이 많았는데 최규석 만화를 보다 미학이라는 것은 지켜나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스타일은 겉모습이나 형식이 아니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직구를 던지는 것이 최규석의 스타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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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토르 폴레오 ‘위원들’
 

20081030

라틴 아메리카 거장전을 다녀와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틴 아메리카 거장전에 다녀왔다. 그리고 나는 글을 써야 한다.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우선 라틴 아메리카 혁명의 역사와 미술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1910년 멕시코 혁명, 인디오와 백인 사이의 갈등, 검게 채색된 사람들, 억압받은 이들을 그린 어두운 톤의 그림들, 이와 대조적으로 뚱뚱하고 거대하게 그려진 백인들에 대해. 혹은 유럽 미술과 라틴 아메리카 미술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체로 유럽 화가들의 그림보다는 선이 굵고 투박하며 흙빛이 감도는 그림톤에 대해서. 아니면 여러 블로그들을 돌아다니며 몇몇 인상들을 짜깁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세키엘 네그레테 리라의 〈점심식사>, 혹은 페르난도 보테로의 <시인>이란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던 사람들이 어떤 사진을 찍었는지 확인해보며. 2층 의자에 앉아 바라보니 어떤 이는 사진을 찍으라고 세워둔 복제판 그림의 가장자리에 섰고 어떤 이는 그림 가운데 섰다던가 하는. 그러다 미술관을 찾는 이들의 일상에 대해 어느 정도 상상을 전개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각도를 조절해 셀카를 찍던 여자들의 표정. 영상 통화로 그림을 보여주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야금 소리가 낮게 울려퍼지던 저녁의 덕수궁이 영화에서나 보던 미래 사회의 궁으로 변하던 순간에 대해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시간 여행자가 되어서 지구 반대편에 사는 이가 그린 그림을 바라보고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대해 떠올리는 어느 이상한 하루에 대해서.

혁명의 믿음을, 또는 민중을, 혹은 자신만의 네모진 상을, 불이 난 산을 몇날 며칠이고 그렸을 사람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무엇이 저 화가를 저 자리에 붙들어맸으며 무엇이 저 그림을 라틴 아메리카 정반대편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의 옛 궁 안에 있는 미술관 벽에 매달려 있게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예술은 무엇인가. 나는 요새 도통 예술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상상력이 없다면 삶은 결핍되고 마는가. 물질로만 이루어진 세계에서 예술은 물질 아닌 것과 물질 사이의 어떤 길항 관계를 표현하는 것인가. 물질 아닌 것을 물질로 만드는 재주. 그럼으로써 예술은 이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이러다 예술의 의무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괴로워진다. 교언영색인가 아니면 조금씩이나마, 기어가더라도 인간의 윤리를 지켜야 한다며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인가.

예술은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어떤 표현과 기록을 위해 존재하는가 등등 많은 문제들로 늘 머릿속은 괴롭고 그래도 삶은 이어져나갈 뿐이다.

지난 해 겨울, 라틴아메리카 역사에 대한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간략하게나마 멕시코 혁명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와 떠올려보면 겨우 판초 비아라는 이름밖에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하지만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이나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 그때 찾아봤던 영화 <올드 그링고> 같은 것들을 떠올리면 아주 조금이나마 멕시코 혁명이란 사건이 일어났다는 실감이 난다. 그림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와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누군가가 그 혁명 중에 꿈꾸고 숨쉬고 아파했다는 것이 믿겨지는 것이다. 정리된 문서 속에서는 이미 시효가 지나버려 아무런 가치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던 역사가 실은 여전히 숨을 몰아쉬며 꿈틀거리고 있으며 그 역사가 꾸는 꿈이 실존하는 누군가에게 전이될 수도 있다는 것을 믿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언젠가 먼후일 나는 혁명을 마주하고 덕수궁 벽에 걸려있던 그림 한 점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예술은 주체와 대상 사이의 거리를 가깝게 해준다. 점점 더 가까워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서로 지켜야 할 윤리를 가진다는 뜻일까?


디에고 리베라의 <테완페텍의 목욕하는 사람>,1923

페르난도 보테로 ‘브래지어 차는 여자’


막스 히메네스 우에테 ‘창가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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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아스와 멜리쟝드 20세기 프랑스 희곡선 12
모리스 마테를링크 지음, 유효숙 옮김 / 연극과인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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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언뜻 보면 형의 아내를 탐하던 펠레아스, 잘못된 사랑에 빠진 멜리장드와 골로의 비극을 다루고 있는 희곡처럼 보인다. 그러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서로간에 말을 통해 사랑을 고백하긴 했지만 정말 그들이 죽임을 당할만큼 잘못된 관계를 맺고 있는가는 자세히 나타나지 않는다. 골로가 없을 때면 함께 시간을 보내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무엇을 했는지는 명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빛을 보고, 어둠 때문에 울고, 문 때문에 울었다는 것이 골로의 아들 니올의 말을 통해 드러나지만, 무슨 뜻인지 명확히 알 수 없고 그래서 골로 역시 화를 낸다.

이 희곡에서 거인의 외모를 갖춘 어른인 골로(1막 1장 ‘당신은 거인이세요?’)와 어린애 같은 펠레아스, 멜리장드(3막 1장 ‘어린애들 같아! 어린애들!), 실제 어린애인 니올은 반대편에 서있는 인물들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어린애들의 세계와도 같은 멜리장드와 펠레아스의 세계를 골로는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래서 괴로워한다.

이런 세 인물들의 대립은 멜리장드의 긴 머리카락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잘 드러난다. 펠레아스가 멜리장드의 머리카락을 갈대에 묶으며 장난을 치듯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달리 골로는 그 머리카락을 잡고 휘두르며 힘을 행사하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 나간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어떤 것, 손에 쥘 수 있는 진실을 원하는 골로는 깊은 심연으로 펠레아스를 데려가지만 펠레아스는 그 심연에서 단지 숨막혀 할 뿐이며, 그들이 원하는 행복 혹은 진실은 빛 속에 드러나는 어떤 것일 뿐이다. 골로는 결국 동생을 죽이고 아내마저 죽게 만든 채 결코 어린아이들이 보는 어떤 것을 볼 수 없는 남자로 남아 장님처럼 어둠 속에 남겨진다.

그러나 이 비극적 운명의 씨실을 엮어내는데 골로 역시 역할을 한다. 멜리장드가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했을 때 골로는 펠레아스와 함께 찾아올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 반지를 잃어버린 대목에서도 멜리장드의 어린애다운 이해할 수 없는 습성을 그대로 드러난다. 그녀는 반지를 가지고 연못 같은 데서 장난을 치다가 그만 물에 빠뜨린 뒤 골로에게는 다른 곳에서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마치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가 실수한 뒤에는 이리저리 다른 핑계를 대듯. 또는 거추장스럽게 자신을 옭아매는 것을 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자신도 모르게 행동으로 옮기고는 나중에는 딴청을 피우듯.

작품의 전체적 분위기는 어둡고 맑은 하늘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또한 머리가 하얗게 센 거지나 바닷가에서 굶어죽은 농부, 외양간이 아닌 다른 곳을 가는 양들과 같은 대사 속에 드러나는 주변 상황을 통해 이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어 간다.

마지막까지 애처롭게 진실을 갈구하던 골로에게 할아버지 아르켈이 ‘침묵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며 작품은 끝난다. 마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침묵인지도 모른다는 듯이. 우리가 손에 쥐고자 하는 진실은 ‘다른 사람들처럼 신비로운 연약한 존재’인 우리들 앞에 머리카락까지 꼭꼭 숨기며 영영 숨바꼭질을 즐기는 심술궂은 녀석이므로.




대사: 이 애에게는 지금 침묵이 필요해… 자, 이리와… 끔찍한 일이야, 하지만 네 잘못이 아니야… 이 아이는 너무나 고요하고, 수줍어하고, 조용한 작은 존재였어… 다른 사람들처럼 신비로운 작고 연약한 존재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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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체크
게오르그 뷔히너 지음, 최병준 옮김 / 예니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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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첵』은 살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묻고 있는 희곡이다. 한 남자가 살인을 했을 때, 그는 모든 죄를 뒤집어쓰지만 그를 둘러싸며 원을 그린 사회가 원을 조금씩 좁히며 숨 막히게 함을, 그를 살인자로 양성해나감이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려진다. 보이첵의 가난-너무 가난해서 의사의 실험 대상이 되어 완두콩만 먹어야 하는-과 더불어 그의 아내 마리가 죄악에 빠진 것도 돈 때문임이 마리가 악대장에게 받은 귀걸이를 팔 생각을 하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이는 보이첵이 살인을 한 뒤 주점에서 하는 대사 “내가 누굴 죽인 것 같아? 내가 살인자야? 무엇을 쳐다보고 있지? 너희 자신들을 돌아봐라”를 통해 잘 드러난다. 인간의 생활에 있어서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물질적 부가 한 인간의 인간성(도덕의 영역인 영혼에 대해서까지)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는 이 부조리한 사회에 적응한 채 아무렇지 않게 잘 먹고 잘 살며 윤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도덕에 대해 설교하는(중대장의 대사에서 볼 수 있듯) 것은 얼마나 이중적이며 모순적인가. 누구나 조금만 예민한 인간-예민해지지 않으려 노력하지 않았으니 어리석은 지도 모르지만-은 이 세계의 비극성을 깨달을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회에서 터무니없이 예민한 인간은 종종 정신이상으로 분류되며 실제 보이첵 역시 정신이상적 징후를 보인다.

또한 이 희곡은 종교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이며 인간이 진화의 산물일지도 모름을, 종교의 거짓된 속성(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왜 이다지도 모순되었다는 말인가, 왜 신은 가난한 인간을 거들떠 보지 않고 그대로 두는가-중대장과의 대화-, 이건 너무 하잖아! 라는 방식으로) 까발리고 있기도 하다.

희곡 마지막 부분에서 할머니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동화는 가장 순수한 동화의 세계에서조차 실현할 수 있는 희망이 없는 비극적 세계관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 세계에 희망이라 불리는 것들이 눈속임임을, 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혼자 엉엉 우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 영원한 고독과 갈 데라곤 그 어디도 없는, 구원 없음임을 역설한다.


옛날 옛적 옛적에 엄마도 아빠도 없는 아주 불쌍한 어린 아이가 있었더란다. 세상에 만물이 다 죽고, 하나도 살아있는게 없었지. 만물이 다 죽었어. 해서 어린애는 밤낮으로 울며 다녔더란다. 세상엔 아무것도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어. 그애는 하늘나라엘 올라가려고 했지. 달님이 아주 귀엽게 비춰주고 있었으니까. 드디어 달님한테로 가서 보니 달은 한쪽에 말라 썩은 나무였더란다. 그래 다음엔 해님에게로 갔데. 그런데 그건 아주 시들은 해바라기였다나. 이번엔 별님에게 갔지 뭐야. 그랬더니 그건 때까치가 들벗나무에 나뭇가지를 찍어다 놓은 것 같은 작은 황금파리들이었더란다. 그래서 다시 땅으로 내려오려고 하니 거긴 아주 뜨거운 용광로가 되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혼자서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는데 지금 까지도 혼자서 엉엉 울고 있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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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여쁜 아가가 등장하는 영화

그 어여쁜 아가가 헤쳐나가는 어두운 세계

전쟁 폭격으로 부모가 죽어버리는...

그리고 알고보면 그 아가도 무서운 아이인...

 

여자 아가를 위해 십자가를 훔치는 남자아이

여자 아가가 떠나자 십자가를 강물에 버리는 남자 아이

그 아이들이 정말로 동물들을 죽였는지

아닌지는 가려지지 않는다.

자신의 사랑을 위해 무엇을 희생시켰는가는

-전쟁에 대한 다른 사유

여기에는 종교(구원과 희생, 사랑)에 대한 사유가 담겨있는 듯 한데 잘은 모르겠소이다.

종교에 대해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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