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봉드리

레오 까락스

감독 이름 참 예쁘다.

영화도 재밌다.

현실에서 환상으로 넘어가는 경계가 자연스럽다.

-영화가 결국 소망 충족이라면

미셸 봉드리는 의자가 되기를(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기를)-일상에서 찾는 이상한 기쁨

레오 까락스는 하수도의 광인이 되기를 -신도 이제 늙었나 라고 말하는 하수도의 광인

봉준호는 히키코모리가 되기를 소망하는 건가-세상 밖으로 나오세요 라고 말하는 이중적인

이런 생각을 했는데 어딘가 들어맞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서사 속에서 풀어나가는 방식, 주제적인 측면과 상관없이 아주 단순하게...

사실 봉준호의 히키코모리 이야기는

히키코모리가 안되본 사람이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히키코모리는 저럴 거야 라고 상상하는 사람이 만든 영화.

그래서 재미가 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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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증명할 도리가 없고 모든 것은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고 미래에 지금 당장 이 순간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단지 무수하게 분할되는 끝없이 분할되는 순간이 있을 뿐이며 그 순간과 순간 사이의 접면을 분할하는 미시적 한계. 그 순간 미시는 무수한 숫자로 환원되며 거칠고 폭력적으로 힘을 휘두른다. 순간만이 영원에 닿아있다는 것. 기억은 나라는 것을 관통하는 어떤 상이지만, 이 기억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증명할 수 없다. 머릿속을 영화로 만들 수도 없고, 혹 그런 시도를 한다면 점점 빠져나가는 것들이 많아지고 만다.




이론에 따라 헐겁게 얘기하자면 우주가 지금과 같은 힘을 받아 팽창한다면 각각의 은하(?)는 점점 서로간에 중력이 작용해 가까워지며 빈공간이 커지고 언젠가 남는 것은 어둠 혹은 허공밖에 없게 된다고 한다.







불확정성을 통해,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코펜하겐>에 대하여




코펜하겐은 인과율이 적용되는 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해 대립되는 지점인 불확실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인과의 허울, 기억의 허울에 대해 두 저명한 과학자의 이론-불확실성의 원리, 상보성의 원리 등-을 직접 도입하며 과학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만나는 지점을 이야기한다.




보어: 이건 물리학이에요.

마그렛: 정치이기도 해요.




과학자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실성의 원리’에 대해 희곡을 통해 조금이나마 이해한 바에 따라 말하자면 우리는 전자의 속도와 위치를 동시에 정확히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속도를 알게 될 때는 미끄러지고 있는 물체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며 위치를 알게 되는 순간 속도는 이미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 도입한 어떤 힘을 받아 변했으며 따라서 명확한 속도가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록한 흔적은 두 힘이 충돌하는 순간의 기록일 뿐이지 순수한 전자의 기록은 아니므로. 그러나 이동하는 전자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기록 장치가 필요하므로 결국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확률일 뿐이다. 결국 모든 순간은 순간으로 존재할 뿐이며 그것을 규명하고 정의하려는 순간 그 힘에 의해 그 순간에서 미끄러져 나간 기록을 얻게 된다.




보어: 아인슈타인에서 시작되지. 과학에서의 모든 논의가 의존하는 바로 그 측정이란 게, 냉철한 보편성으로 이뤄지는 비인간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걸 보였어. 측정도 인간의 행동인 거야.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특정한 관점에 따라 수행되는 특정한 인간의 행동, 그리고는 20세기 중반의 그 3년 동안 우리는 명확하게 규정 가능한 세계가 없다는 걸 발견하지. 여기 코펜하겐에서. 세계는 근사의 연결로만 존재한다는 걸 밝힌거야. 보편적인 인간의 세계의 바깥에서 세계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는 없는 거지. 세계 안에서, 특정한 인간과 세계의 주관적인 관계로만 관찰할 수 있다고. 세계는 인간의 머리 속에 잠시 머무는 사고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거야.

이를 인간에게 적용할 경우 물리적인 현상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마찬가지 과정을 겪는다. 인간이 어떤 순간에 완전히 몰입해있을 때는 결코 자신이 지금 몇 시간을 지냈는지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하고 기억을 통해 그 순간을 되돌릴 때만 그 순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기억이란 불순물은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이미 주관적으로 굴곡이 진 통로를 통해 나온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그: 우리는 구멍 두 개가 아니라 구멍 스물 두 개를 동시에 통과해야 됩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지나간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돌아보는 것 뿐입니다.




이는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한계와 직접 연결된다. 나는 누구든 무엇이든 내 두 눈으로 보고 그 상을 확인할 수 있지만 나라는 상은 거울이라는 여과 장치를 통해 이미 한 번 걸러졌을 때만 볼 수 있다. 누구나 평등하게, 죽을 때까지도 넘어설 수 없는 한계다. 누구나 세계의 중심축으로 서있지만, 절대 자신만을 볼 수 없는 채로.




하이젠베르그: 세상 20억명의 사람들, 그들의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사람이 내가 볼 수 없도록 항상 감춰진 단 한 사람입니다.




마그렛: 하지만 그 한 명의 영혼이 세계의 황제였어요. 우리 하나하나하고 똑같았지요.




보어: 무엇에든 손이 닿기도 전에, 삶은 끝이 납니다.

하이젠베르그: 우리가 누군지 무엇인지 희미하게나마 보기도 전에, 우린 죽고 먼지가 되어 쌓입니다.




희곡의 진행은 이 논리를 그대로 적용해 죽은 뒤까지도 하이젠베르그가 보어를 찾아간 일에 대해 대화하고 대화 속에서 그 상황을 되돌려보지만 그 진실은 영영 알 수 없다는 것으로 끝이 난다. 확률적인 몇 가지 가능성이 제시되지만 확실하고 명확한 원인은 알 수 없다.

과학자 하이젠베르그가 전시 상황에서 보어를 찾아갔을 때, 원자 에너지를 실용적으로 개발하는 연구를 할 도덕적 권리가 물리학자에게 있는지 물었을 때, 그때 하이젠베르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그 순간 하이젠베르그조차 몰랐거나 몰랐던 것과 같다. 그 한 순간 존재했지만 그것이 보어에게 전달된 불완전한 형태의 언술 행위는 오해 속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중지시켰고, 하이젠베르그는 후일담으로 그 기억을 다시 되돌리며 자신에게 합리적인 몇몇 기억을 첨가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대화를 했던 날이 9월 마지막날인지 10월인 엇갈린 기억을 가지고 있으며 대화를 했던 장소에 대해서 조차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미 각자의 여과 장치에 걸러져 영영 진위를 가릴 수 없게 된 순간으로.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할 때, 어떤 선택을 할 때, 우리는 인과율이 적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전 순간의 명확한 지점이 결코 설명되지 않으며 따라서 현재의 선택이 어떤 원인의 결과인지 명확히 측정할 수 없다. 우린 아주 많은 생각을 동시에 하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어디서 오는지도 알 수 없다. 어떤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말할 수 없으므로 생각만 하지만, 분명 그것은 존재했다. 전달되지 않았기에 있지 않았던 것과 다름없을 테지만. 미시의 세계에서 우리가 관찰할 수 없는 입자들은 우리 생각하고 다르게 운동하고 마찬가지로 시각을 바꿔 거시의 세계에서 보자면 인간이라는 미시의 세계는 거시의 눈동자가 본 것과는 전혀 다르게 운동하고 있을 것이다. 단지 가능성의 세계라는 것. 그러나 그 가능성의 세계에 폭탄이 투하되면 누군가 죽고 누군가 상처입고 그 상처가 고스란히 가슴에 남는 세계. 결국 현존하는 순간만이 존재하고 현존하는 것들만이 존재하는 실존주의로 가는가? 실존은 본질에 앞서게 되는?




하이젠베르그: 주위에 갇힌 사람들을 둘러보면 사람이 타죽어가는 단계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타죽어가고 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곤, 이럴 때 신을 여벌의 신발을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을까에요.




하이젠베르그: 그때가지는, 이 가장 소중한 동안에는, 존재합니다. 팰리트 공원의 나무들, 하머팅겐도 비베라흐도 민델하임도. 우리 아이들도 아이들의 아이들도. 가능성일 뿐이지만, 코펜하겐에서의 그 짧은 순간이. 절대로 규정되거나 정의되지 않을 어느 사건이. 사물들의 중심에 있는 그 불확정성의 마지막 핵심이. 그것들을 지켜냅니다.




결국 작품은 과학과 사회가 만나는 지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론이 사회와 혹은 인간과 만나는 지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 동안 이야기는 몇 번이나 중첩된다. 보어가 그의 아들을 구하지 않아 죽었을 때의 과거가 대화의 형태로 중간중간 삽입되는가 하면-보어의 인간적 윤리, 보어가 그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있을 수 있었던 물리학 이론들- 하이젠베르그와 보어가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그들이 물리학계의 중심이 되던 3년 동안 함께인 듯 했지만 실은 모든 이론을 혼자 있을 때 완성했다는 것, 하이젠베르그가 독일 패전 이후 겪었던 두 번의 상처. 거기서 보았던 눈물들. 그런 와중에 누가 진정 죽음의 선을 잡아당겼고 누가 잡아당기지 않았는지 마저 엇갈린다. 몇 번이나 역설의 도가니에 빠져들어 이미 진실은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보어의 아내인 마그렛은 두 과학자들의 대화를 좀더 쉽게 만들어주는 우리와 같은 청중이며 그녀에게 전달할 수 있는 평범한 언어로 두 사람이 대화하도록 유도하는 제 3자이다. 그녀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으며, 결국 전달되지 않은 것은 없는 것과 같아지는 한계에 대해 떠올리도록 해준다. 그런가하면 전달이란 문제를 통해 인류가 연결됨을, 세계의 중심이 손을 맞잡게 되는 광경이 그려지기도 한다. 타인이 없으면 자신도 없는 이 세계. 이상한 일이다. 철저한 고립과 철저한 연대의 세계가 공존하는. (마치 빛처럼 입자인 동시에 파동인 건가?)

히로시마 원폭 투하 기획 연구소였던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연구소장 오펜하이머는 청문회장에서 ‘이제 나는 세계의 파괴자, 죽음의 신이 되었다’는 독백을 남겼다고 한다. 가능성의 세계 속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택했던 그가 맡은 역할에 대한 자조가 담긴 그의 독백이 이 희곡을 보고나자 훨씬 커다란 울림으로 들려왔다. 그런가하면 전쟁 뒤 고통에 빠진 이들에 대한 하이젠베르그의 묘사도 잊을 수 없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이 희곡의 논리를 따라 좀 더 생각하자면, 지나간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증명할 도리가 없고 따라서 모든 것은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다. 곧 미래에는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장자지몽은 이런 얘기인가 싶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결국 나의 우주의 끝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거대한 심연과 마주치게 된다. 먼 미래에, 이대로 우주가 팽창을 계속하다보면-대체 왜 우주의 팽창을 이끄는 힘의  원인조차 알지 못하지만- 남는 것은 암흑과 허공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우주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그만 대체 왜 사는지 알 수 없어지는 것이다. 불확정성은 결국 허무주의와 맞닿을 수 있다.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강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랑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순간의 울림이 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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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갔다가 커피 내려주시는 분 소개로 우연히 보게 된 영화

누군가 그분께 반납한 DVD를 바로 빌려 주셔서 즉석으로 봤다.

처음엔 혼자 노트북으로 이어폰 끼고 보다가 점점 그분과 다른 손님 한 분과 같이 보게 됐다. 물론 이어폰은 빼고.

엄청난 굿타이밍이라고 느꼈던 건 영화 시청 도중 온 손님들은 테이크아웃만 해가는 센스를 발휘해주신 것. 그리하여 끝까지 주인장님과 다른 손님분과 즐감할 수 있었다. 마지막 엔딩으로 들려오는 뇌태풍의 ‘첫사랑이 생각나는 이 밤’을 몇 번이나 반복해 들었는데 기분이 좋아지는 노래여서인지 내내 흥겨웠다. 영화가 끝나자 마치 기다렸던 듯 커피 마시러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말과 침묵 사이에 대한 영화일까 생각해봤지만-당연히 대조되는 의미로서- 이 영화는 침묵을 이용하지 않는다. 말과 의미의 전달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간극에 대해서 영화는 이야기하는가? 글쎄.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

영화 내에 영화를 찍는 사람들이 출연하고 그들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겪게 되는 과정 속에서 의미 전달이 비틀리게 되며 실제 의미가 달아나는 구조를 코믹하게 보여주고 있다. 말의 게임, 언어의 게임을 풀어나가지만 영화는 결코 무겁고 침체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즐겁다. 또한 재미있는 것은, 우리의 언어가 의미 전달에 실패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주지시키기 위해 영화 내에서 엄청나게 많은 말이 오간다는 것이다. 대화뿐 아니라 복화술 하는 배우, 실어증에 걸린 주인공이 음악을 내뱉으면 그것을 통역해주는 과정, 채팅 등의 다양한 언어 형식을 빌려가며 대화가 오가고 이 사이에 연애의 과정이 뒤섞이며 누구나 겪을법한 소소한 에피소드가 삽입된다. 결국 주인공이 은하와 헤어진 뒤 만나게 되는 것은 벙어리 소녀.

말과 말이 오가며 욕망이 욕망과 만나는 과정. 결국 점점 의미는 사라지고 태도만 남게 되는.

용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하기 위해 과감하게 취하고 자기 자리를 바라보면서도 무거워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벼움으로 끝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찍을 영화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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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워낙 원작이 뛰어나니 당연히 원작만 따라가도 어느 정도 성공적이리라고 기대했다. 그리고 영화를 봤다. 소설의 설정은 단순하다. 한 도시 전체가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백색 실명에 걸린다면, 그리고 그 실명이 전염병이라는 설정부터 충분히 암시적이며 사회적인 메시지(전염병)를 담고 있다. 이 사회적 메시지가 어떻게 전달되느냐가 관건이다. 영화는 화면톤을 전체적으로 백색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원작에 충실한 서사 재현을 하고 있다. 따라서 어느 정도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어설프게 튀는 장면도 없고 내용 전개를 위해 과도하게 건너뛰었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누구도 주제 사라마구가 짜놓은 구조를 넘어설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눈물을 닦아주는 개나 성상이 눈을 가린 장면과 같은 후반부는 책만큼 감동을 전해주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비를 맞는 세 여자가 나오는 장면은 책에서는 거의 숭고 그 자체로 느껴졌지만, 영화에서는 그만큼 극대화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어느 정도 충족은 시키지만, 거기서 멈춰버렸다는 느낌. 기대 심리가 없이 봤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내용을 알고 있고 어느 정도 기대가 있기에 그보다 더 나아가길 은근히 바랬던 것 같다. h와 영화를 보고 돌아오며, 차라리 영화가 완전히 더러웠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얘기를 했다. 거의 똥칠이 되고 토사물로 치장을 해서 역겹게 만들었다면 하는. 물론 가설일 뿐이지만 그랬다면 더 충격적으로 다가오며 후반부가 살아나지 않았을까.

나는 여자가 당연히 검은 단발컷트머리일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금발 머리 여성이었지만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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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륜을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 어른들은 악마가 씌었다는 말을 종종 한다. 그리고 눈에 뭐가 씌인 것처럼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악마가 씌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악마와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이다.

여기 뱀파이어와 사랑에 빠진 한 아름답고 순수한 소년이 있다. 이름은 오스칼.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함께 사는 왕따 소년 오스칼은 나무에 칼을 휘두르며 살인을 흉내내던 도중, 옆집으로 이사온 이엘리란 여자아이와 친해진다.

이엘리는 겉에서 보기에 아빠로 보이는 남자와 살고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여자애가 뱀파이어라는 것. 입가에 피를 질질 묻히고 나타나는가 하면 들어오라고 하지 않았는데 그 장소에 가면 온몸이 터져나가며 피범벅이 되기까지 하는 진짜 뱀파이어. 게다가 이엘리에게 피를 먹이기 위해 아빠 같은 남자는 살인을 저지르고 현행범으로 잡힌 뒤 결국 이엘리에게 마지막 피를 주고 죽는다.

오스칼은 이엘리가 뱀파이어임을 안 뒤 입을 삐죽거리며 넌 사람을 죽이잖아 라고 비난해보기도 하지만 이 비난은 도덕적 비난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기대했던 여자친구가 될 수 없는 데서 오는 열두 살 소년의 심술에 가깝다. 이엘리가 뱀파이어임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엘리와 관계를 지속하며 오스칼은 이엘리를 죽이러 온 남자를 말리는 과정에서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되는가 하면 오스칼이 위기의 순간에 처해있을 때 이엘리가 나타나 오스카를 괴롭히던 남자아이들을 처참하게 죽인다. 뎅그렁 잘려나가는 목, 팔. 수영장에서 혼자 남아 우는 오스칼.

마지막 장면은 오스칼과 이엘리가 모스무선전신부호로 대화를 나누며 기차를 타고 가는 것이다. 햇빛을 보지 못하는 이엘리는 상자 속에 들어간 채. 결국 둘은 오스칼이 칼로 손을 그어 맺자는 것보다는 훨씬 농도가 짙은 피의 계약을 맺은 셈이다. 타인의 피를 뒤집어쓴 계약.

몹시 아름다운 열두살 소년 오스칼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까?

영영 나이를 먹지 않는 이엘리에게 피를 먹이기 위해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며 늙어갈 것이다. 이엘리의 제 2의 (어쩌면 제 3, 제 4인지도 모른다) 아빠가 되어서.

이엘리가 자신의 아빠로 보이는 남자에게 막 대하는 장면이나, 오스칼이 연쇄살인범 파일을 몰래 모으던 장면이 왠지 더 비참하게 느껴진다. 그것이 곧 오스칼의 미래일지도 모르므로.

훗날 오스칼이 연쇄살인범으로 잡히게 되면 동성애자인 아버지, 괴롭히던 아이들 모두가 피범벅이 되었던 외로운 어린 시절 등등이 그의 범죄에 동기를 부여했다고 신문에 날 것이다. 피의 계약의 대가로 결국 자신의 피를 바치며.

눈이 쌓인 주변환경과 오스칼의 파란 이미지, 이엘리의 붉은 이미지가 대비되며 아름다운 영상을 연출한다. 게다가 이엘리란 소녀는 회색 눈빛을 빛내며 고혹적인 매력을 내뿜고 오스칼은 아름답고 순수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오스칼이 살인의 충동을 흉내낸 순간 나타난 뱀파이어 소녀라는 설정 자체가 어쩌면 이엘리란 소녀는 오스칼의 환상일지도 모르겠다는 암시로 읽힐 수 있다. 어린 소년 오스칼이 자신의 살인의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대체물로 만들어낸 환상. 물론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많은 사건들이 이엘리와의 관계, 이엘리의 존재에 사실성을 부여하지만 영화이니까.

특히 이 영화는 생각할수록 무섭다. 살인자의 논리에 근접해있기 때문. 헤어나기 힘든 첫사랑이 악마라면, 어쩔 수 없다. 몸도 마음도 바치게 된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를 위해서. 물론 이것은 자신에게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낸 논리구조일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사랑에 빠질 수 있고 그 대상이 악마가 안 되라는 법은 없다. 결국 누구나 자기 자신의 어떤 면과 사랑에 빠지고 누구나 악마적인 면을 가지고 있으므로. 분노나 미움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을 때, 악마에게 들어와 라고 말하면 들어와서 친구가 되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

게다가 이 악마는 죽지도 않는다.


 

연쇄살인범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 불행한 과거를 보낸다.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타인에 고통을 주는 것으로 대신 보상을 받으려 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연쇄 살인범의 정신세계에 씌워놓은 가설이다. 하지만 <렛미인>은 이 논리를 약간 뒤집는다. 어쩌면 살인범이 살인을 하는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몰라 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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