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말해 둘 것은 나는 수학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여튼, 몇 칠 전에 마이클 아티야란 수학자가 오늘 리만 가설의 증명에 대해 발표할 것이라는 뉴스를 들었다. 힉스 입자의 발견도 있었고, 그 이전에 페르마의 대정리의 증명도 있었기 때문에 관심을 기울여 두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전에 생중계를 잠깐 봤는데, 발표하시는 분이 무척 고령이라는 점에 우선 놀랐다. 수학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본론에 들어가면 어짜피 못알아 들을 것이기 때문에 시청은 거기서 끝냈다.


그리고 나서 그 발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서핑을 해보았는데, 대체적으로는 그 수학자분이 연로하셔서 정신이 희미해지신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런 넌센스 발표를 하도록 놔둔 주최 측을 비판하는 사람도 꽤 있었고... 그렇구나 했다.


그러다 이 분의 주 논리는 수론을 통해 미세 구조 상수를 유도해 내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 이 이야기를 듣고 이 글을 쓰기로 작정한 것이다. 만일 그게 정말이라면 우리는 대단한 역사의 순간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어판 호킹의 "시간의 역사" 끝 부분을 보면 한국의 어떤 과학자가 쓴 해설에 이 상수가 나온다. 수학적으로, 물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상수들, 즉 원주율, 빛의 속도, 플랑크 상수, 중력 상수 등의 조합이 어떤 매우 의미있는 값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상수가 진정한 상수는 아니고 시간에 따라 값이 바뀐다는 가정에서 우주가 자신의 관찰자를 탄생시킬 조건을 안고 시작되었다는, 인간 원리가 도출된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암튼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였기 때문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아티야란 분의 증명이 맞다면 일단 인간 원리는 틀린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놀라운 것은 수학이 물리 세계에 대해 뭔가를 말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 밝혀진다는 것이리라. 그것은 플라톤이나 케플러의 고대적 꿈이 실현되는 일일 것이다. 다른 측면을 보자면 수학은 물리 세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전혀 없다는, 많은 수학 기초론자들의 주장이 허물어지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수론과 물리 세계를 연결지으려는 착상은, 혹은 계획은 정녕 정신력이 혼미해진 사람이나 시도함직한 일이 아닐까? 아마 한 군데 걸라면 이쪽에 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기다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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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2018-09-25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생각해 보니 인류 원리에서 상수가 아닌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 것은 중력 상수였던 것 같다. 웹 검색을 해보면 더 정확하게, 그리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겠지만...

weekly 2018-09-27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현재까지 전해 오는 이야기들을 들어보자면 아티야의 증명은 거의 확정적으로 틀린 것으로 판정된 것 같다. 안타깝지만... 개인적으로는 리만 가설의 증명보다는 미세 구조 상수의 수론적 도출 부분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 상수가 흔히 얘기되는 것보다 훨씬 더 물리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예컨대, 조건에 따라 일정 부분 값이 달라질 수 있는. 어쩌면 아티야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플라톤주의가 얼마나 유혹적인가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노도와 같은 탈신비화의 흐름 속에서도 통속 과학 서적들에서 이러한 유혹의 흔적을 찾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아마도 그 유혹은 스파이더맨과 같은 영웅을 생산하게 하고 소비하게 하는 것과 비슷한 종류일 것이다.
 


"예술의 의미"를 리스트에 올려 놓았었는데 첫 페이지에서부터 쉽게 읽히지가 않았고 결국 읽기를 포기했다. 핑게를 대자면 할 말이 없지는 않은 데(도판 번호가 틀렸다든지 등등), 결론적으로는 내 취향이 아닌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안읽히는 책을 억지로 읽어야 할 이유는 없다.


저번에 우리 집에 놀러 온 대학생들이 컴퓨터 관련 학과를 전공하고 있어서, 관련하여 튜링 머신에 대한 세미나도 같이 하고 하여, 그런 류의 책을 읽고 싶어서 선택한 것이 "코드"라는 책이다.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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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메갈리아를 지지한다고, 메갈리아가 진정한 페미니즘 운동으로 발전해 나가기를 바란다고 이 블로그에 글을 써 올린 적이 있다. 남자인 내가 왜 페미니즘을 지지한다고 이야기했을까? 당연히 페미니즘이 남자들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페미니즘이 휴머니즘인 한, 페미니즘이 하나의 운동인 한, 페미니즘은 사회를 더 건강하게 하게, 그러므로 사회의 구성원을 더 건강하게 해 줄 것이라고 지금도 믿는다. 

대학생 때 서울의 한 시립 도서관에서 서고의 책들을 옮기는 아르바이트를 일주일 정도 했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는 동안 여성 직원이 단 한 권의 책을 옮기는 것도 보지 못했다. 책을 옮기는 것은 전적으로 남성 직원들과 아르바이트생들의 몫이었다. 왜 그래야 했을까? 온갖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근력이 약하고, 화장을 하고 있고, 남성 직원들이 만류했고, 원래 그렇게 해왔고, 여성 직원들이 사무실을 지키는 게 더 효율적이고 등등… 이런 이유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바로 안티-페미니스트다. 그때도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믿는다. 달리 말하면 남자인 내게 페미니즘이란 다양한 성의 사람들이 서로의 부담을 나누어 지고, 무의미한 갈등 요소들을 해소하고자 하는 운동일 뿐이다. 모든 휴머니즘이 그렇듯이…

그러므로 애초부터 메갈리아는 안티-페미니즘 사이트였다. 메갈리아의 기조는 미러링과 더불어, 이른바 개념녀라는 개념을 부수는 것이었다. 개념녀란 데이트 비용, 결혼 비용, 직장 업무 등에서 동등하게 책임을 부담하는 여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개념녀를 비판한다는 것은 안티 페미니즘을 표방한다는 것과 똑같다. 그러나 나는 안티 페미니즘이란 자체 모순이기 때문에 메갈리아의 안티 페미니즘 자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실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중요하게 본 것은, 여성 학계나 여성 단체들에 한정되지 않는 대중적인 여성 운동이 태동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그러한 흐름이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흐름은 이미 태풍을 형성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의지나 의도 등과는 동떨어지게 움직일 것이다.

안티 페미니즘이 전혀 말도 안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젊은 남성들은 (내가 알기로) 평균 7:3에 이르는 결혼 비용 부담에 힘들어 한다. 남녀 평등이라면서 왜 5:5이지 않은 걸까? 그러나 결혼 비용 부담이 사회적으로 7:3 정도로 정해져 있다면 그 분담률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현실적으로 결혼은 남성에 비해 여성에게 훨씬 심대한 사건이다. 결혼은 남성이 장가를 가는 것과 비교될 수 없이 높은 수준에서 여성이 시집에 들어가는 일이다. 여성은 아이를 낳게 될 때 경력 단절 등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데 정작 자신이 낳은 아이는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된다. 혹 이혼이라도 하게 되면 경력 단절에서 오는 경제적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결혼 비용 분담률 7:3을 정당화한다. 그렇게 본다면 7:3도 여성에게는 만족스러운 비율이 아닐 것이다. 이런 식으로 논리를 전개하면 거의 모든 사회 영역에서 여성들은 선험적 약자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여성이 남성보다 신체적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에 기인하는 온갖 문제들 등등과 더불어) 그러므로 메갈리아의 주장은 성이 사회적 구성체라는 관점을 넘어서 여성으로-세상에-태어남이라는 사실성에 근거하는 실존적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사실성에 근거하는 실존적 문제를 겪는다. 배우가 하고 싶은데 못생겼다, 프로야구 투수가 되고 싶은데 여자다, 미국 사회에 정치적으로 기여하고 싶은데 나의 정체성을 알 수 없다(오바마), 태어나 보니 부모가 둘 다 강력 범죄자이다, 등등. 현대 사회는 이러한 사실성(즉, 우연성)이 사람들의 삶의 전개에 있어 결정적인 요인이 되지 않도록 사실성을 완화하는 장치들을 마련하려고 노력한다. 빈곤층 위주로 복지 정책을 펴나간다든지, 남성 지배적인 사회라는 현실에서 여성이 좀 더 쉽게 진입할 수 있도록 할당제를 만든다는지, 이혼시 여성에게 경제적으로 유리하도록 법을 고친다든지 하는 등등.

그렇더라도 사실성에 근거하는 실존적 문제는 궁극적으로 당사자의 실존적 결단이라는 형태로 해소되는 동시에 그런 형태로 온전히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다. 실존적 차원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개인적 결단의 문제일 수 밖에 없다. 만약 누가, 아이를 낳으면 남성의 성을 따르게 되잖아? 라고 말한다면 사회는 아이가 엄마의 성을 따를 수도 있게 법을 고치면 된다. 한국도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더 많은 아이가 엄마의 성을 따른다고 문제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회는 점차 그런 쪽으로 나아갈 것이고 그렇게 된다고 문제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누가, 아무리 사회에서 장치를 잘 만들어도 여자가 결혼을 하게 되면 경력 단절 위험 등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항변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꾸할 수 밖에 없다. 그럼 결혼하지 않으면 되잖아? 그럼 아이 낳지 않으면 되잖아? 궁극적으로 당사자들의 실존적 결단에 맡겨질 수 밖에 없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하게 이런 항변을 한다. 여름날 갑옷 뒤집어 쓰고 거대한 배 벽에 매달려 용접일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사무실에서 밤 늦게까지 모니터 전자파 맞아 가면서 눈 시뻘겋게 일하는 나를 왜 아무도 몰라주지? 아이가 밤에 잠을 안자서 나도 하루에 2시간 밖에 못잤는데 이런 애엄마의 고달픔을 도대체 왜 아무도 안알아주는 거야? 진심으로 궁금하다. 도대체 왜 이런 불평들을 하는 걸까? 누구에게?)

현대 사상의 진보의 근거를 말하라면 가장 먼저 이론 일반은 이데올로기적이라는 점을 밝혀냈다는 점을 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하나를 더 대라면 이론 일반, 그러니까 명제 일반은 정책 명제라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명제나 이론의 정합성은 실천에서 힘을 갖지 못하는 한 결코 참을 구성할 수 없다. — 우리가 이러한 기준을 갖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무용한 이론 논쟁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무용한 이론 논쟁에 거리를 두고 다른 유용한 일을 할 수 있으니. 

예를 들어 데이트 비용 문제를 보자. 데이트에서 비용을 더 부담하는 쪽은 관계에 있어 더 적극적인 사람, 돈이 더 많은 사람,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이었고, 그 모든 것이 우연히도 지금까지는 남자였다. 요즘은 여자가 관계에 있어 더 적극적이고, 돈도 더 잘 벌고, 나이가 더 많은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에도 데이트 비용을 남자가 더 부담해야 하는가? 이런 것은 형용모순과도 같다. 여자는 선험적으로 약자라는 관념은 이런 현실에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더구나 그 선험적 약자라는 관점이 실존적 문제까지 포함하고 있다면!

또 다른 예로 결혼 비용 문제를 보자. 여성 쪽이 결혼 비용을 덜 부담하면 할 수록 여성은 시집에 더 깊숙히 들어가게 된다. 남성 쪽에 더 종속적이게 된다. 가부장적 구조를 더 공고히 하게 된다. 여성이 선험적 약자라는 관념은, 이렇게 가부장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낳는다.

안티 페미니즘이 자체 모순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안티 페미니즘은 현실 속에서 지속될 수 없다. 사실 지금 한국에서 페미니즘을 표방하고 있는, 이른바 운동이라는 것들은 내가 보기에는 이익 집단적 행위에 불과하다. 예컨대, 노조는 사회적 약자들의 결사이고, 사회적 개혁의 한 세력일 수 있다. 이런 보편성에 기반하여 우리는 이들을 노동 운동 세력이라고 부르고 이들에 동조한다. 다른 한편으로 특정 사업장에서 어떤 노조가 비정규직에 대해 특권적 위치를 사측에 지속적으로 요구한다면 이때 이 노조는 이미 이익 집단에 불과하다. 이런 양면성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현실에서 이익 집단적 모습이 강하게 드러나는데 노조는 사회적 약자들의 결사라는 선험적 정의에 따라 그 집단을 운동 세력으로 간주해야 할까? 홍대 몰카 사건에서 비롯된 여성들의 시위는 어떻게 봐야 할까?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해자를 옹호하고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로 피해자에게 수 없는 이차 가해를 가하는 행위는 도대체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언론에서는, 간혹 과격한 주장들이 있지만 그곳에 모인 여성들이 그동안 얼마나 몰카 공포에 시달렸으면 그럴까… 하고 이해해 주려고 한다. 그러나 항시 그렇듯이 여기에도 모순이 있다. 영어로는 패트로나이징한다고 표현하는데, 이러한 언론의 태도는 여성을 독자적인 판단 능력을 갖춘 성인이 아니라 다독거려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하는 감성적 존재로 보는 것이다. 몰카 단속을 강화하는 것과 홍대 몰카 시위에 비판적 관점을 유지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어야 했다고 본다. 페미니즘을 지지한다는 진보 언론들이 보이고 있는 태도는 내가 보기에는 심각하게 가부장적이다.

그래서 나의 결론은 똑같다. 모순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성은 선험적 약자일까? 그래서 항시 조심스럽게 보호되어야 하는 수동적 존재일까? 아니면 여성에게 적대적인 여건들이 개선되면 남성과 최소한 동등한 수준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동적 존재일까? 물론 둘 다 이념적이다. 그리고 양립 불가능하다. 내가 보기에 한국 페미니즘의 전반적인 취지는 전자이고, 후자를 간혹 섞는 것 같다. 즉, 퇴행적이거나 모순적이다. 그러므로 사람들, 특히 남성들을 설득시킬 수 없을 것이다. 100년 전 유럽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를 반대하는 남성들도 가슴 한켠에서는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여성 참정권자들이 옳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하여 여성 참정권 운동은 성공할 수 있었다. 지금 일련의 소동들 속에서 한국 남성들은 한국 페미니즘에 대해 어떻게 느낄까? 아마 여성 이익 단체 이상의 이미지는 아닐 것이다. 더불어, 한국 페미니즘이, 여성이 약자임을 주장하기 위해 남성이 강자임을 부각시킨다면 남성은 스스로 그 강자성을 내려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남자이기 때문에 감수해야 했던 많은 일들에 의문을 표시할 것이다. 왜 남자만 군대를 가야 하지? 여자가 때리는데 왜 남자는 맞고만 있으라고 하지? 왜 아줌마들이 엉덩이를 만지는데 경찰에서 신고 접수를 안받아 주지? 어릴 때부터 온갖 동화, 만화, 애니매이션, 히어로물, 어른들이 주입하던 남자는 강해야 한다든지 하는 관념에 의문을 표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남자들도 이러한 굴레를 벗고 좀 더 가벼운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의 한국 페미니즘이 좋은 페미니즘이든 나쁜 페미니즘이든 상관이 없다. 현대 이념의 방향은 개인들이 삶을 좀 더 가볍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니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가부장적 구조의 해체야 말로 현대 세계가 남성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헤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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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 둘이 삼 주 동안 우리 집에 머물렀고, 떠나고 난 뒤에도 흔적을 좀 남겼다. 그리하여 보게 된 영화 둘.


캡틴 아메리카(시빌 워):

영화는 캡틴과 아이언맨의 두 개의 갈등 구조 속에서 전개된다.


첫 째 갈등: 어벤저스가 유엔의 규제 하에서 활동해야 할까? 아이언맨은 이를 받아들이고 캡틴은 거부한다. 이 갈등은 치명적이지는 않다. 둘이 편을 갈라 싸우기도 하지만 아이언맨은 결국 독자 활동에 나선 캡틴을 돕는다.


두 번째 갈등: 캡틴의 친구가 아이언맨의 부모의 살인자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아이언맨은 그러므로 그 친구를 죽이려 한다. 그러나 캡틴은 그 친구를 보호하려 한다. 몇 십년 동안 동면 생활을 한 캡틴에게 유일한 정체성의 끈이 되어 주는 것이 바로 그 친구이기 때문이다. 이 갈등은 거의 치명적이다. 그러나 둘은 차마 서로를 파멸시킬 수는 없다. 


햄릿을 보고 있나 하는 생각에 빠지게 하는 영화였다. 블록버스터 히어로물에 이처럼 깊이 있는 갈등 구조를 만들어 넣을 수 있다니!  


너의 이름은:

영화를 보고나서 이 영화가 한국에서 370만 흥행에 성공했다는 인터넷 기사를 찾아보고, 우선 놀랐고 다음에 화가 났다. 영화가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첫째, 나는 작가가 신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캐릭터에, 살아 있는 개성이 부여되면 스토리는 저절로 필연성을 갖게 된다. 캐릭터 각자가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신의 개입 따위는 필요치 않다. 예컨대 캡틴 아메리카의 행위는 그 캐릭터에 있어 필연적으로 보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행위에 공감한다. 외부적인, 부가적인 신의 손이 전혀 필요치 않다.


그런데 "너의 이름은"에서는 작가가 신이다. 남자 주인공은 평소엔 심약하고 어버버거리는 소년이지만 여자의 몸이 되면 갑자기 씩씩한 남자 성향이 된다. 이런 식으로 캐릭터가 제멋대로 바뀌는 것도 용남되지 않는데 이런 제멋대로의 변용이 드러내는 것이 여성성, 남성성에 대한 작가의 퇴행적 관점이라니! 이 영화 불과 몇 년 전에 나온 영화 아니던가!


둘째. 우리는 종종 어떤 주제, 대상에 뜻 모르게 집착을 할 수 있다. 영화 주인공 소년의 경우에는 어떤 마을에 대해 그런 집착을 보인다. 왜? 그 누구도 모른다. 소년 자신도 모른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이런 집착의 이유를 밝히는 것이 이 영화의 내용이다. 그리고 그 내막으로 소년의 장대한 모험이 드러난다. 소년이 결코 기억해 낼 수 없는, 누구도 증인이 되어 줄 수 없는, 그 어떤 물적 증거도 남아 있지 않은, 객관 세계로부터 철저히 단절되어 있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자폐성을, 자폐성에 대한 낭만화를 좋게 평가할 수 없다. 나의 선입관 속에서 이러한 자폐성은 일본이라는 나라의 특성을 구성하고 있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건강하지 못한 측면을 구성하고 있다.


이런 영화도 있고 저런 영화도 있다.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370만 흥행을 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작가가 신이 되고, 성에 대해 고답적 관점을 갖고 있고, 자폐에 대한 낭만화를 시도하는 등의 헛점이 그냥 허투른 헛점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 런던의 어학원에서 만난 서울대 학생 생각이 난다. 훤칠하게 생긴 친구였고, 유럽 여행은 그때가 두 번째였단다. 한국 돌아가면 공시 준비를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 친구의 말이다: "우리 세대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세대예요. 나도 지금까지 나의 의지로 뭔가를 선택하고 결정해 본 적이 하나도 없었어요." 나는 듣고만 있었다. 말하자면, 이 친구는 지금 자신의 세계관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세계관이 대단히 자폐적이라고 느꼈다. 내가 뭘 원하는지, 내가 뭘 선택하고 싶은 것인지 나 스스로도 알 수가 없고, 지금의 선택도 나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니... 나는 이러한 자폐는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단순히 자페는 건강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폐를 낭만화하는 일체의 시도들을 불순하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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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는 다 읽었다. 리뷰를 써야 할 텐데, 한번 읽고 리뷰를 쓰기도 그렇고, 한번 더 읽고 쓰자니 벅차고 그렇다. 


두 번째 책은 쉽게 갈 수 있는(?) 것으로 골랐다. 아내의 책장에서 뽑은 것이다. 예전에 한국에서 화가 부부가 놀러 온 적이 있었는데, 아내가 이 책에 대해 이러 저러해서 좋게 읽었다고 이야기하자 부부가 서로를 바라보며, 대학 때 이 책 읽고 리포트 쓰느라 지겨웠었다며 웃더라. 그때 나는, 아 미대생들 필독서인가 보구나 하고 기억을 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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