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혹은 더 정확하게는 그렇기 때문에 출발점이 필요하다. 이 출발점이 아르키메데스의 점과 같은 것일 수는 없다. 단지 좀 더 나은 전망을 제공해 줄 수 있으면 된다. 물론 이런 상대적으로 소박해 보이는 요구에도 우연성이 개입한다. 나는 노자나 붓다나 콰인에서부터 시작하게 될 지도 모른다. 나의 취향과 관심, 교육 이력 등등에 따라서. 그러나 어느 출발점이 더 나은 전망을 제공해 줄 거라고 믿을 근거는 없다. 다른 한편 내가 채택할 출발점은 이미 어느 정도 나의 초보적인 전망을 담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런 전망 하에서 나는 나의 선택에 근거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미국의 어느 대법원 판사의 말은 언제나 옳다. 


나는 아직 존재론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있다. 물론 푸코가 조롱한 것처럼 존재론에 개재해 있는 우연성을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실증 과학들을 기초할 제일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라는 데카르트-후설적인 기획은 폐기되어야 마땅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에서, 혹은 이론적 활동에서 사용하는 개념들이 놓이는 평면을 찾아 확정해 놓는 작업은, 이렇게 정리되지 않은 차원들의 혼란에서 빚어지는 사유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다. 즉, 사유에는 질서가 필요하다. 이러할 때 우리에게 도움이 되어 줄 철학자들로 하이데거라든지, 비트겐슈타인, 무어 등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나는 사르트르를 선택한다. 나는 철학이 항상 구체적인 현실을 비춰 줄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적당한 폭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후자에 대해서는 새삼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전자에 대해서만 간단히 말해보자. 예컨대, 철학자 중에는 감각 자료에서 실재를 구축하려 시도하는 사람이 있다, 혹은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그리 유망해 보이지 않는다. 그 대안으로 사르트르의 경우를 보자. "나는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이 흰 종이를 쳐다본다. 나는 그것의 형태, 색깔, 위치를 지각한다. 이 다양한 성질들은 공통된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즉, 그것들은 그것의 존재가 나의 변덕에 좌우되지 않는 것으로서 자신들을 나에게 드러낸다. 그것들은 나에 대하여 있는 것이지 내가 아니다."(사르트르의 "상상력"의 서론) 다시 말하면 여기 있는 이 흰 종이가 실재라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임의적이지 않은 채로(불투명한 채로) 거기에 있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결국은 같은 말이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모든 실재에 대한 경험에는 그런 불투명성, 혹은 관성이라 불리는 요소와 부정성(내가 아님)이라는 요소가 함께 섞여 있다. 사르트르는 존재론적으로 전자를 즉자, 후자를 대자 혹은 넓은 의미에서 subjectivity라고 부른다. 이 subjectivity는 데카르트류의 사유하고 의지하는 코기토와는 다르다. 차라리 먹이를 향해 접근하는 지네에서도 이 subjectivity가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하자. 이 경우에는 자신과 환경, 먹이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곧 subjectivity가 될 것이다. 나는 사르트르의 이러한 존재론이 앞서 말한 구성론자의 것보다, 혹은 무어-비트겐슈타인류의 상식-기반 명제들보다 유망하다고 생각한다. 혹은 자의적으로 선택되지 않은,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출발점은 출발점일 뿐이다. 사르트르 이후, 적어도 프랑스 철학계 내에서 철학적 흐름은 바뀐 것 같다. 예컨대 푸코나 데리다의 경우, 후기의 그 윤리적 전회를 차치하고 말한다면, 굳이 사르트르와의 연결점 하에서 이들 철학자들의 사고를 고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들뢰즈는 다른 것 같다. 들뢰즈의 경우에는 자아, 타자, 상상력, 그리고 앙상블(말하자면 인간들의 집합체) 등의 주제에서 사르트르와의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러한 관찰이 들뢰즈가 사르트르의 영향 하에서 철학을 수행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들뢰즈에게서 사르트르적 사유의 한계에 대한 비판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것 뿐이다. 사실 나는 상상력에 대한 사르트르의 경직된 이분법보다는 들뢰즈식의 유연함이 더 유망하다고 느끼고 있다. 사르트르가 워낙 경직된 구분들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똑같은 논리가 그의 철학 전반에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당연히 한다.


어쨌든 출발점으로서 사르트르의 저작들을 차분히 다시 읽어나가려 한다. (다음 주부터 크리스마스 전까지 집 공사를 하여야 하기 때문에 당분간 메모를 여기 남길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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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사르트르적 구도는 지지될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덜 확정적으로는 많은 보완이 필요하리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예를 들면, 감정을 행동과 동일한 평면에 두는 이론은, 사르트르의 철학에 일관성을 부여할 수는 있을지언정, 감정 현상의 다양성을 포괄하는데 커다란 한계를 보일 수 밖에 없다. 예컨대, 뇌의 특정 영역에 생겨난 종양의 영향으로 사람의 인격(퍼스낼리티, 아이덴티티) 자체가 변한 사례가 수 없이 많은데, 사르트르적 이론으로는 이를 설명할 수 없다. 심리학자, 생리학자, 혹은 신경생리학자들이 의식에 관한 철학자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으며, 이 영역에서만 보건대도 철학이 그 수명을 다했거나 다해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철학이 언어 분석의 영역에서만 겨우 연명하고 있는 사정을 대강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측면을 보자. 사르트르적 구도에서는 수치심을 인식과 동일한 평면에 둔다. 그러나 사실 수치심은 사회적 감정이라 불리는 것 아닌가? 이것에 그토록 중대한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하는 것은 과도한 것 아닐까? 수치심을 타자의 존재, 혹은 자신이 아닌 주관성에 대한 직관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쨌든 좋다. 그러면 이 직관은 본유적인가? 예컨대, 아기가 그러한 직관을 갖고 태어나는가? 분명 그렇지 않다. 수치심은 자아의 성장과 관련되는, 인간 아이의 발달의 한 계기일 뿐이다. 데카르트가 철학적 회의를 실행했을 때 그는 그러한 실험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한 성인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인이란 무엇인가? 인간 성장의 한 단계라는 우연성일 뿐이다. 동시에, 데카르트가 추구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성이라는 개념이었는데, 이 개념 역시 어떤 시대, 어떤 사회라는 우연성에 속한다. 그렇다면 데카르트 이후 수 백년이 흐른 지금 우리가, 더 정확히는 내가 본질적으로 데카르트적인 것에 속하는 사유를 계속하고 있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가장 흔한 대답은 우리가 데카르트가 속해 있던 그 우연성에 여전히 속해 있거나, 혹은 그것을 습관적으로 계속 고집하고 있다는 것일 테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우리가 수 많은 우연성들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러한 우연성을 어떻게 사유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물론 우연성의 사유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우연성은 비질서를, 사유는 질서를 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헤겔은 우연성에 방향과 형식을 주기 위해 이성을 절대화시켰다. 이러한 헤겔의 방법을 그대로 따라간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러나 개념의 자연사에 대한 탐구와 개념의 사회사에 대한 탐구가 헤겔적 아이디어, 혹은 스피노자적 아이디어와 전혀 별개인 것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발생사라는 관점을 무시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관점을 안고 사유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매우 쉬운 방법에 정착하고 마는 경우들이 왕왕 있다. 예를 들면 진화론적, 자연주의적 관점에 머무는 경우. 또다시 난관에 봉착한 것 같다. 그러나 계속 나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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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쓰 베네딕트는 수치심 기반 문화와 죄의식 기반 문화를 구분한다. 전자는 "rely on external sanctions for good behavior", 후자는 "rely on an internalized conviction of sin." 여기서 오리엔탈리즘적인 관심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은 정도차의 문제일 것이다. 


위의 구분에서 수치심이니 죄의식이니 하는 것은 문화적인 것, 혹은 문화에 상대적인 것이 되고 만다. 이는 개념의 혼란, 혹은 차원의 혼란을 야기케 한다. 바로 말하자면 이러한 개념들이 놓이게 되는 심리학적 차원, 존재론적 차원, 사회학적 혹은 인류학적 차원을 구분해야 한다. 


존재론적 차원에서 수치심은 내가 다른 주관성(타자)에 의해 사물화되는 경험을 의미한다. 사르트르의 시선 이론이 그렇다. 이를 다시 말하면 수치심은 타자의 존재가 드러나는 현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수치심은 인식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인식이 사물들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수치심은 주관성들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치심 등을 위한 용어가 따로 있어야 한다. 사르트르는 감정을 세계에 대한 어떤 태도로 정리한다. 그렇다면 감정은 행동과 같은 평면에 있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수치심을 감정의 하나로 분류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내가 호랑이 앞에서 공포에 떠는 것과, 공공 앞에서 나의 치부가 까발려져 수치심에 몸을 떠는 것은 다른 현상이다. 후자를 위한 적당한 용어로,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affect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때 사물화되는 그 나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고찰이 요구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데카르트적인 단순한 코기토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존재론적 차원에서 보았을 때 죄의식이라는 개념을 독자적인 것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차적인 것은 수치심 등일 것이고 죄의식 등은 이차적인 것에 속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베네딕트의 분류를 평가해 볼 수 있다.


존재론을 심리학에 그대로 투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자가 제시해 주는 길을 하나의 아이디어로 받아들이고 이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통합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존재론의 문제일 수 있다. 인류학적 혹은 사회학적 차원에로의 확장에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만일 존재론에서 수치심이나 자부심을 근원적인 범주의 하나로 제시한다면 심리학에서는 이를 모델로 하나의 이론을 만들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얼핏 보기에 이런 이론은 프로이트보다는 아들러 쪽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혹은, 근원적으로 다분히 스피노자적인 아이디어로 보인다. 예컨대, 수치/자부심 모델은 억압 가설 이상의 설명력을 보일 수 있을까? 그러면서, 예컨대 이 모델은 특정 시대의 특정 사회에 매우 종속적인 프로이트 이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이런 이론의 구축은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인생 동안 책상 머리에 앉아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방향을 따라 탐구해 볼 가치는 있을 것이다. 만일 그 도정에 깔려 있는 엄청나게 복잡한 문제들을 충분히 의식할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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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이름은 무성히 들었지만 최근에야 찾아보기 시작한 뮤지션이다. 이 노래를 듣고 충격을 먹었다. 나는 돈도 없고 아빠도 없고 애인도 없어. 그래, 그럼 뭘 갖고 있니? 응 나는 머리카락이 있고 귀도 있고...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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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한 권 쓰자고 마음을 먹었고 이 블로그를 메모장으로 이용하자는 생각을 했다. 주제와 방향은 머리 속에 있지만 쑥스럽기 때문에 여기에 밝혀 두지는 않겠다. 매일 매일 메모를 남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 일년 쌓아나가면 정돈된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언제나 작정만 하다가 늙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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