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가져갈 책들을 골라 내고 있다. 가능하면 한국어 책은 가져가지 않으려 하는데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는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기 힘들었다. 한국어 번역판이니 원칙대로라면 하차를 시켜야 옳지만 원서가 (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라서 머뭇거려졌다. 게다가 스피노자에 관한 참고 문헌 목록에 빠짐없이 이름을 내미는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반면 쪽수가 900여 페이지에 달하는데다 체감하는 물리적 두께는 그 이상이어서 부피상으로 꽤 부담이 된다. 전에 이 책을 읽다가 중간에 집어 던진 기억이 났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하나만 대자면 이 책에서 진지함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티카"의 자연학 소론을 가지고 이상한 수식을 꾸미는 대목을 읽다가, '이런 게 스피노자와, 에티카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람!' 하면서 미련없이 책장을 덮었고 그 후론 펴보지도 않았다.  

도서관에 들고 가서 차분히 읽어 보기로 했다. 할 수만 있다면 빨리 읽어 버리고 싶었다. 사실은 이런 철학책을 읽고 있을 시간 내지 여유가 없지만 말이다.

"여기에서 결과란 활동 자체와 다른 것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활동이 전개되면서 취하는 구조일 뿐이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결과는 활동에 의해 인식되며 마찬가지로 활동 안에 있다... 활동은 자기 구조의 내재적 원인이다."(24~25페이지)

역자가 말한 대로 마트롱은 스피노자에게서 개체성의 형이상학을 읽어내려 시도하고 있다. 위의 문장에서 활동 대신에 신이나 실체라는 단어를 써넣으면 문자 그대로 스피노자의 철학이 된다. 단, 주어는 실체나 신이 아니라 개체가 된다. 나는 마트롱의 해석이 대단히 독창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스피노자가 실제로 저런 식으로 사고했을까 하는 의문이 튀어 나왔다.

마트롱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이를 전통적인 어휘로 말해 보자. 이와 같은 순수 산출성이 곧 실체이며, 실체가 전개되면서 취하는 구조들이 바로 실체의 양태들이다. 그리고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 곧 실체가 자신의 구조들을 산출하는 방식이 곧 속성이다." (27페이지)

마트롱의 논증은 대단히 명료해 보인다. 그러나 첫째,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보이는 불투명성이 마트롱의 해석에서 명료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둘째,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대단히 불투명해 보이는 부분은 마트롱의 해석에서는 아예 회피되기도 한다. 위 문장의 경우를 보면 마트롱은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속성의 정의를 스쳐 지나간다. 그러면 스피노자가 속성을 "지성이 지각한 것"이라고 한 부분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마트롱은 이 부분을 해결하고 넘어간 걸까? 난 잘 모르겠다. 지금 그런 거 같지 않아서 꺼림직하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대목들이 내가 마트롱을 읽으면서 미심쩍어 하는 부분이다. 마트롱은 거칠 것 없다는 듯,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휘두르며 질주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 칼은 파란 페인트를 칠한 나무칼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예는 내가 읽은 페이지들에서 더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마트롱이 발생적 정의, 운동과 정지에 대해 너무 가볍게 얘기하고 넘어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적어도 홉스는 참조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며 소심해 하는 것이다. 적어도 17세기 자연철학, 요컨대 물리학과 의학은 참조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혹은 스피노자의 다른 저작, 요컨대 "행복에 관한 소론"은 참조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혹은 철학사의 한 부분, 요컨대 플로티노스는 참조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된다. 책의 뒷 부분에서 이런 것들에 대한 참조와 좀 더 진득한 해명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미 책장을 넘길 의욕을 잃어 버렸으니 책 뒷 부분을 뒤적거리지는 않았다. 책을 하차시킬 적당한 꼬투리를 찾고 있던 판국에 말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 포도는 시다, 가 될 것이다.

내가 마트롱의 책이 진지하지 못하다고 못마땅해 하는 부분은, 역자의 말에 따르면 마트롱의 방법론에 해당하는 것인 듯 하다. 역자에 따르면 마트롱은 텍스트 외부에의 참조는 가능한 억제하고 텍스트 자체의 내적 논증 구조를 철저하게 파고 들었다고 한다. 나는 이런 방법론의 의미나 장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소리를 하게 되는데, 내 생각에는 내게 어떤 텍스트가 주어진다면 그 텍스트 안에 있는 문장들만을 조합하여 그 텍스트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새로운 구조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예컨대, 마트롱은 "지성개선론"과 "에티카"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철저하게 정합적으로, 마치 두 텍스트가 한 텍스트인냥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실재하지 않았던 영원으로 완결된 스피노자를 창조하고 있을 뿐이 아닐까 하고 나는 미심쩍어 한다.

간단한 이야기를 길게 했다. 위의 얘기는 "마트롱의 책이 두꺼워서 영국까지 가져 가기 귀찮아서 짐짝에서 빼 버렸다."라는 문장에서 "두꺼워서" 부분을 길게 늘인 것에 불과하다. 그 정도 무게를 갖는 얘기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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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네와 강원도 인제로 휴가를 다녀왔다. 출국일이 가까와져서 이것 저것 챙겨둬야 할 일들을 챙겨두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하루 일정 정도로 홀로 강원도에 다녀올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나네와 여행을 떠나는 것에 많이 미적거렸었다. 어쨌든 막상 강원도에 도착하자 오길 잘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을 자는데 등에 전혀 땀이 배지 않아서 오랜 만에 푹 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튿날 아침에는 방태산에 다녀왔다. 꼭대기까지는 올라가지 못하고 휴양림까지만 갔다가 내려왔다. 내려 오는 길목에 있는 이단 폭포에 자리를 깔고 앉아 복숭아와 키티 과자를 안주로 맥주 한 캔씩을 마셨다. 여정도 음료도 음식도 공기도 부드러웠다.


(강원도 인제 방태산: 내가 직접 찍음)

오후가 되자 또 한팀이 합류했다. 누나의 동창네 가족이다. 민박하는 집 바로 옆에 있는 계곡에서 삽결살을 구워 먹었다. 그러는 동안 민박집 마당에 차들이 들어차기 시작했고 아이들 소리가 많아졌다. 바야흐로 휴가철의 절정인 듯 했다.

다음날은 라면으로 아침을 가볍게 해결했다. 그러나 내 코 밑에서는 전날의 삽겹살 냄새가 붙어 가셔지지가 않았다. 아침 먹고 쉬면서 계곡 벤치에 누워 아이리스 머독의 "그물을 헤치고"를 읽었다. 원제는 "Under the net"인데 역자가 지나치게 자신의 낙관성을 드러내려 한 것 같다는 생각을 꼬박꼬박하게 된다.

점심 무렵에 물이 잔잔한 계곡을 찾아내서 튜브를 타고 놀면서 배를 굶주린 후 송어회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나는 휴가 동안 홀로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올 즈음에는 몸은 거의 탈진하고 머리는 새로운 계획으로 가득차 있곤 한다. 반면 동반 여행은 늘 움직이고 늘 먹게 되는 것 같다. 돌아갈 시간이 되자 서울의 습기 많은 공기가 두려워졌다. 돌아오는 길에 내 머리를 지배한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서울에 돌아오자 공기가 확실히 텁텁해 졌다. 그래도 바람이 제법 불어서 그리 덥지는 않았다. 밤에는 제법 서늘하기도 하였다. 아침에 들으니 태풍이 올라온다고 하더라. 곧 영국으로 떠난다. 영국은 그리 무덥지 않다고 한다. 출국하는 날까지 열대야 없는 잘만한 밤들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내 머리를 가장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생각은 이런 것들이다. 물론 이번 휴가 여행의 영향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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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배우를 처음 본 것은 설특집극 "영도다리를 건너다"에서였다.

아무 생각없이 보게된 드라마였는데 사람을 잡아끄는 뭔가가 있었다. 첫째는 물론 주연을 맡은 정은채의 독특한 분위기였다. 나이를 종잡을 수도, 가끔은 성을 종잡을 수도 없었다. 아수라백작마냥 각도에 따라 얼굴이 달라지곤 했다. 그리고 그의 연기는 비에 젖은 옷처럼 몸에 착 들어붙었다.

이 드라마의 주된 매력은 극본에서 나왔다. 모든 대사들이 살아있었다. 그 대사들을 듣는 것이 너무도 즐거웠다. 급기야 나는 반수면 상태에서 드라마를 보고 계시던 어머니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엄니, 경상도 사람들은 진짜로 저렇게 얘기해!" 그랬다. 대사 하나 하나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지극히 시적이었다. 이런 이중적 구조는 좋은 글의 징표다. 나는 이렇게 살아있는 대사들이 시종일관하는 한국 드라마를 본 적이 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드라마의 각본은 극본공모 최우수작이란다!

어쨌든 이리하여 이 배우를 기억하게 되었는데 얼마 전에 어머니랑 함께 드라마를 보는데 그 드라마에 이 친구가 나오는 것이었다. 나의 솔직한 마음은 실망. 일일드라마의 뻔한 설정들, 입에 발린 대사들, 과장된 연기들은 내게는 거의 공해였기 때문이다. 웬지 저 속에서 재능있는 한 배우가 소비되고 말 것이라는 편견.

어제 "우리집 여자들"이란 정은채 주연의 드라마 전편을 처음으로 다 보았다. 일일연속극이란 것이 보기 시작하면 계속 보게 되기 때문에 앞으로 더 볼 마음은 전혀 없다. 어제 방송편에서 양희경은 정은채의 얼굴에 컵에 든 물을 끼얹었다. 그후 일분여 동안 정은채는 앵글에는 잡히되 대사는 없는 연기를 했다. 공들여 연구한 것임에 틀림없는 과장없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나는 정은채가 참 매력적인 배우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감독이나 작가라면 저런 배우를 제대로 써먹을만한 작품을 하나 쓸텐데... 하는 뜬금없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는 뜬금없는 생각을 계속 한다. 나는 스피노자라는 철학자를 제대로 써먹을 만한 데가 어디일까를 계속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궁리는 그리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니체말대로 한 철학자의 철학이란 그 철학자의 생리학이다. 그리고 사르뜨르의 말대로 나는 내가 선택한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말대로 그 선택은 언제나 필연적이다. 나는 내가 스피노자에 끌리는 이유를 안다. 그것은 나와 스피노자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에게서 내가 발견하는 것의 진폭은 상대적으로 작을 것이다. 나는 스피노자에게서 놀라운 것을 발견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리 재미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관념과 실재 사이의 관계와 같을 것이다. 사르뜨르는 실재를 항상 초월하는 것을 관념(의식)이라고 말했던가? 나는 거꾸로 말하겠다. 관념을 항상 초월하는 것이 실재다. 실재는 항상 우리가 관념한 것 이상을 건네준다. 그러면 관념은 주섬 주섬 그 실재의 그림자를 자신의 구조 안으로 구겨 넣는다. 그렇게 관념화된 실재는 이제 우리에게 지루함을 준다. 지루함이 바로 관념의 징표다. 새로움, 즐거움, 당혹감, 좌절감, 안절부절 등등은 실재의 징표다. 예를 들면 영화 감독에게 독특한 분위기의 한 배우가 바로 그런 실재일 것이다. 그런 독특함, 특수함, 묘함 등이 실재임을 드러내는 징표일 것이다.   

그리고, 아다시피 스피노자에 있어서 관념과 실재는 대등하다. 그러므로 거기에 새로움이란 없다. 스피노자의 철학이 활기없어 보이는 이유가 이런 것일테다.

어떻든 우리가 실재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것이 어떤 배우이든, 어떤 그림이든, 어떤 음악이든, 어떤 철학이든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윤리를 지시한다. 즉, 어떤 배우이든, 어떤 그림이든, 어떤 음악이든, 어떤 철학이든 스스로를 실재로서 유지하여야 한다는 것. 당연히,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그래야 한다는 것.

(물론, 모든 것을 지나치게 관념화해서는 안된다. 꼭 이런 식의 안티 테제를 내거는 것에 나 스스로도 답답함을 느끼지만... 카프카에 대한 영화에서 제레미 아이언스는 이렇게 묻는다. "왜, 어제와 오늘이 똑같지요?" 그의 편집장은 무뚝뚝하게 응답한다. "왜 달라야 하는데?"
이런 변증법은 존재한다. 언제나.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실재이기 때문이다. 즉, 실재는 새로움,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당혹감, 좌절감도 준다. 그런 것이 실재이고 현실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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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칠 전에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근처로 신발을 사러 갔었다. 예전에 동대문운동장이 있던 곳인데 많이 바뀌었더라. 대형 구조물들이 공사 중에 있었고 못보던 쇼핑몰 빌딩이 여럿 들어서 있었다. 혹시나 싶어 헌책방 거리로 가봤는데 헌책방들이 변함없이 그곳에 죽 늘어 서 있다. 천천히 걸으며 아이 쇼핑을 하다가 할머니 주인장한테 끌려 들어갔다. 딱히 살 책이 있는 게 아니라서 서가 이곳 저곳을 목표없이 두리번거리는데 파란색의 익숙한 장정이 눈에 확 들어왔다. 꺼내 들고 보니 최재희 번역의 "실천이성비판". 한번도 펼쳐 보지 않은 듯 깨끗했다. 살 책이 생겨서 기뻤고 할머니, 할아버지 주인장에 면목이 서서 또 기뻤다. 1992년에 16000원 정가를 달고 중판으로 나온 책. 할아버지 주인장이 8000원을 불러서 쾌히 책을 사들고 서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찬찬히 살펴보니 "실천이성비판", "철학서설(프롤레고메나)" 등 칸트의 주저와 칸트 철학의 이해를 위한 묵직해 보이는 논문들이 합본되어 있었다. 이걸 횡재라고 해야 하나!

요즘 주로 스피노자를 읽으면서 칸트의 비판철학을 살펴 봐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예를 들면 스피노자는 시간을 정신의 구조물이라고 말한다. 반면 연장은 정신 밖의 무한한 실재다. 예를 들면 보통의 물체는 3개의 차원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규정성을 갖는다. 연장이 무한이라는 말의 의미는 연장이 무한 차원을 갖는다는 뜻일까? 물론 아닐 것이다. 연장은 무규정적이다. 그런데 이 말은 연장이 보통의 물체와 다른 존재론적 위상을 갖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그렇다면 연장을 일종의 범주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장도 정신의 구조물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스피노자는 이런 고민을 했을까? 그에게 어떤 것은 정신의 구조물이라고, 어떤 것은 실재라고 판별하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스피노자를 읽으면서 든 의문들이다. 혹은 칸트를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들이다.

"프롤레고메나"는 칸트가 쓴 "순수이성비판"의 해설서 격이라고 한다. 잘 되었다 싶어 머리말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최재희 번역이 초판을 찍은 것이 1975년이라는 사실을 환기시켜 주는 옛스러운 문장들 사이로 철학사에서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는 칸트의 터질 듯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말은 "순수이성비판"이 출판되고 그에 대해 숱한 비판이 있었음을, 그리고 그러한 비판들에 대한 칸트의 반응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칸트는 칸트이고 그러므로 철학자인지라 그러한 비판에 대한 감정적 반응들을 보편적인 통찰로 바꾸어 머리말에 가득 실어놓았다.

"[소위] 학자는, 이성 자신의 샘에서 길러내려고 노력하는 철인이 할 일을 끝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런 이후에 철인이 한 일을 세간에 보고하는 순번이 학자에게 생긴다."

(아, 철학책을 읽으면서 웃음보를 터뜨릴 수 있다니! 이렇듯 날키로운 냉소를 고급한 통찰인 듯 말할 수 있다니!)

"사실 형이상학의 나라에서는 심원한 지식과 피상의 요설을 준별할 확고한 표준이 없기 때문에, 딴 방면의 일에서도 무지한 자가 결정적인 단안을 내리는 불손이 있다."

(음... 웃음으로 시작했지만 점점 정색을 하게 되는 나.)

"형이상학에 대한 인간의 소질은 도저히 없어질 수 없다. 인간의 일반적 이성이 형이상학과 아주 밀접하게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평심하게 말하는 듯 하지만 심원한 통찰. 나는 자세를 바로 잡는다.)

"준재(흄 - weekly의 주)는 여기서 사변적 이성의 월권적 요구를 억제함에서 얻게 되는, 소극적 효과에만 착안했고, 인류를 사도에 인도하는 끝없는 집요한 논쟁을 완전히 폐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소극적 효과 이상의 적극적 손해를 간과했다. 이 적극적 손해는 의지에 그 전노력의 최고 목표를 제시할 수 있는 유일의 가장 중요한 희망[전망]을 이성에서 박탈할 때 생기는 것이다."

(칸트의 진지함 혹은 무거움 혹은 깊음.)

"무릇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자신이 못하는 일을 타인에게 요구하고, 자신이 그보다 더 잘하지 못하면서 남을 비난하며, 자신은 어디서 그것을 발견해야 할지 모르는 일을 타인에게 신청함에 의해서], 자신은 마치 독창성이 있는 천재인 척 하는 그런 사치스럽고 과장적인 인간이 흔히 하는 일이다."

(강조는 칸트 자신이 한 것이다. 나는 칸트에게 심하게 야단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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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의 화집을 보러 서점엘 갔다. 정물화. 어제 처음 펼쳤을 때의 그 강렬한 색감이 주는 충격은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 그림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배제하고 기법에만 주의해 찬찬히 살펴 보았다. 어제는 세잔의 저 정물화에서 확고함과 단단함을 보았었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상식의 예상을 이리 저리 깨고 있더라. 나는 실험이 단호함과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았다. 가슴이 쿵꽝 쿵꽝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바로 화집을 닫았다.

종일 세잔의 그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무척 보고 싶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서점엘 들렀다. 오늘은 세잔이 내게 그닥 강한 존재감을 주지는 못했다. 대신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서 세잔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해 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잔이 나를 부지런하게 만드는 구나. 어제 본 그림 몇 장을 또 보기 위해 나는 길을 돌아 이삼십 분을 더 걸었다. 길 양편으로 드리워진 처마들의 구도가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다. 벽에 붙은 전시회 광고 내용을 암기하고 있는 나를 느낀다. 세잔의 단단하면서도 어설퍼 보이는 붓터치는 내게 뭐든 맘껏 휘둘러 봐, 라고 속삭인다. 피카소의 그 무궁한 작품들, 나를 기겁하게 한 그 무지막지한 창의의 생산물들은, 피카소야말로 스피노자의 그 신임을 증명한다.

스피노자의 단호함은 나의 게으름을 정당화한다. 그것은 스피노자의 본질에 관한 이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실존에 관한 이론 또한 가지고 있다. 즉, 실존이란 표현된 것의 총체이며,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표현될 수록 더 많이 실존하는 것이며, 더 완전한 것이며 더 많은 힘을 갖는 것이라는 이론. 사실 이 이론은 신에 관한 이론이다. 그리고 신에 있어 실존과 본질은 같은 것이다. 인간에 있어서는 실존과 본질이 분리되어 있다. 인간은 본질에 관한 장에서 주로 논해진다. 아다시피 인간의 본질은 코나투스, 즉 삶에의 맹목적 욕구다. 다시 피카소를 떠올려 본다. 스피노자는 피카소의 관점에서, 피카소의 환경에서 읽혀져야 한다. 왜? 지금은 21세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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