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저녁 논문을 한 편 찾아 읽기 시작했다. 내가 관심있어 하는 주제에 딱 맞는 제목의 논문이었다. 그런데 저자의 이름이 인도 계통이었다. 읽지 말까? 시간 낭비일까? 여기 일종의 레이시즘이 있다. 현상학 등의 철학 논문 저자 이름이 서구 계통이 아니면 나는 그 논문을 접어두게 된다. 나 역시 비서구권 사람이면서도! 그래도 논문 제목이 내 관심사에 딱 들어맞아서 읽기로 마음을 먹었다. 몇 줄 읽어가다 고대 힌두 사상가에 대한 언급과 마주쳤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논문을 접어두려다, 잘 시간도 얼마 안남고 해서 잘 때까지만 읽기로 했다.


그러다 잘 시간을 넘겨가며 계속, 끝까지 읽었다. 침실에 가서 취침 시간을 넘긴 것을 아내에게 사과하고 자리에 누웠다. "근데 말이야 정말 잘 쓴 논문이더라고. 아마 노대가인 것 같아. 대가의 글은 딱보면 알지. 가장 근원적인 개념을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아이처럼, 정말 아이처럼 투명하고 담백하게 파고 들어가니까. 그런데, 캘커타 대학에서 나온 논문인 것 같던데. 잠깐, 미안, 저자 이름 좀 다시 확인하고 올께." 나는 침실과 서재를 들락날락 했다. 저자는 모한티. 검색해보니 1930년대 생으로 나온다. 그럼 지금 나이로 90세쯤 되었네. 저 논문은 몇 살에 쓴 걸까? 나는 연신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하고 다시 서재로 가고 하는 짓을 반복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그 논문은 1960년대에 나온 논문이었다. 그러니 모한티가 30대에 쓴 논문... 몰랐을 때는 몰랐지만 알고나니 모한티라는 이름은 후설 관련 논문집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내가 판단하기로 모한티는 가장 권위있는 후설 연구자이되, 다른 여타의 명망있는 연구자들과 다른 범주의 연구자이다. 정말 놀랍게도, 마치 아테네 여신이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한 채 태어난 것처럼, 혹은 노자가 백발인 채 태어난 것처럼, 모한티는 이미 30대에 완성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이 아직도 잘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뭐가 되었든 확실한 것은 나는 모한티도 너무 늦게 발견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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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2-03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한티! 알려줘서 감사합니다!! 반드시 구해서 읽어보겠어요!!

weekly 2023-02-03 18:08   좋아요 0 | URL
:) 저는 여전히 모한티가 후설 연구의 최고 권위자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느끼기에, 특히 대륙 철학계에 속하는 철학자 주위에는 묘한 안개가 피어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후설이 주제라면, 그의 개념들을 분석하는 대신, 그의 논리를 그대로 따서 옮겨 붙이는 경우가 허다한 것 같습니다. 이른바 대가라고 불리는 연구자들도 그런 식인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모한티는 기본적으로 정직합니다. 후설이라는 이름의 안개 속으로 숨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가끔은, 이렇게 명석한 분이 자기 류의 체계를 건립하려는 노력은 하시지 않네?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끝나고 말면 안되잖아? 하는 생각. 이 분의 책들을 다 읽어본 것은 아니라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weekly 2023-02-05 23:07   좋아요 0 | URL
아, 그런데 후설을 전문적으로 연구할 생각이 아니시라면 구태여 모한티를 읽으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접근성도 좋고 내용도 좋은 책으로, 혹 칸트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모한티의 순수이성비판 강의록을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지향성 개념을 축으로 연구하는 영국 철학자 한 분이 있다. 요즘 그 분의 책을 주로 읽고 있다. 굉장히 통찰력 있는 학자라는 느낌은 그리 들지 않지만, 어쨌든 성실하고 정직한 분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렇게 길잡이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연구자를 발견한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후설 철학에 대해서라면 모한티라는 분이 있다. 나는 그 분의 논문이나 책에 대해서라면 그저 신뢰한다. 정말 이럴까? 하면서 다른 자료를 찾아볼 필요가 없다.  


저 영국 철학자의 글들은, 모한티의 글들처럼 전폭적인 신뢰 속에서 읽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의 입장에 대해 나의 관점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읽는다. 그러니까 저 분과 나의 관점은 비슷하면서도 확연하게 달라야 한다. 그런 작업을 계속 하다가, 얼마전 문득 돌아보니 이제 나만의 고유한 이론적 입장이라는 것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당신은 이러 저러하게 생각하지만 나는 그에 대해 이러 저러하게 생각한다는 식으로 부정적으로만, 그러므로 단편적으로만 기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서사 구조  형태의 이론적 입장이 형성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나의 가장 큰 고민은 나의 이론적 관점의 대부분은 사르트르에게서 빌려온 것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가끔 내가 세상에서 사르트르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닐까 망상하기도 한다. 여튼 나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사르트르를 초월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초월이란 언제나 한 가지 방향만을 갖는다는 것이 문제다. 한 철학자에서 다른 철학자로, 혹은 한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옮겨가는 것은, 초월의 형태를 일부 그 안에 포함할 수는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관점에서는 진정한 초월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예컨대 사르트르에서 하이데거로 옮겨간다고 초월이 되지는 않는다. 초월은 그 문제 영역에 대해 끝장을 보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하여 초월은 헤게식으로 말하면 지양의 형태를 취해야만 한다. 지금 내가 나의 이론적 입장에 대해 느끼는 바가 그렇다. 사르트르의 존재론의 연장이 아니면서, 즉 그것과 다른 관점을 취하면서, 사르트르의 존재론을 포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나는 느낀다. --- 3월1일날 이에 관련해서 메모를 써두었는데, 아직 그 환상이 깨지지 않아, 그것이 혹 환상이 아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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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2-03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르트르에 관해서 찾아 읽을 때 개인적으론 우리나라에서 사르트르 권위자는 아마도 신오현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르트르 논문을 죄다 찾아 읽은 건 아니지만 관련 책들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었는데...위클리 님두 사르트르 연구자셨군요!!

weekly 2023-02-03 17:56   좋아요 0 | URL
아마 유일한 권위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오현의 <자유와 비극>은 아쉬운 점은 많아도 사르트르의 철학에 대해 유일하게 정공법으로 접근한 연구서라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이 포스트를 다시 읽으며, 음... 그때 내가 도대체 무슨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인생은 슬픈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그동안 내가 집중적으로 파고들고 있던 철학 문제는 고색 창연한 지향성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널부러져 있는 것들이었다. 애초의 순진한 생각으로는 후설의 이른바 선험적 전회까지 가지 않더라도 지향성에 대한 선명한 개념을 얻을 수 있겠다 싶었다. 물론 완전한 착각이었고 선험성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한전숙 교수님이 말한 후설의 질곡에 묶이고 말았다. 후설의 질곡은 후설 철학에 대해 체계적 이해, 혹은 전체적 조망을 도모하는 이에게 내려지는 형벌과 같다. 브렌타노의 저작들, 후설의 주요 저서들, (내게는 언제나 명쾌한) 하이데거의 강의록 등을 통해서도, 이러 저러한 해설서류를 통해서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둘 중 하나다. 첫째, 이러 저러한 해설서들이 제공해주는 개념을 따라 후설을 이해한다. 이 경우 후설은 매우 피상적인 사상가가 된다. 그렇다면 후설의 책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 그러나 자기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 사상가를 피상적인 사상가라고 판단하고 마는 것처럼 비겁한 태도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둘째, 후설의 심오함을 그대로 가정한다. 이럴 경우 후설의 질곡에서 헤어날 수 없다. 


그러다 어느 논문에서, 후설 당대에 그와 함께 연구하던 캐언스Cairns라는 사람이 후설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정말 그런 것이 남아 있을까? 실제로 있었다! Conversations with Husserl and Fink라는 책이다. 나는 아마존을 통해 괜찮은 가격으로 그 책의 중고판을 주문했다. 그런데 한 달 이상을 꼬박 기다렸지만 책은 오지 않았다. 알고보니 판매자가 나의 주문을 취소해버리고 책 가격을 5배 이상으로 올려버린 것이었다. 나는 미리보기를 통해 그 책의 앞 부분에 있는 hyle에 대한 기술을 읽었고 비로서 hyle과 그에 상관적인 개념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즉, 나는 그 책이 내게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던 차였다. 나는 패닉에 빠졌고 여기 저기에 신경질을 내고 다녔다. 불어 번역판으로 캐언스의 책을 구했지만, 영어판없이 불어판만으로 읽기에는 나의 불어 실력이 너무 저열했고, 책 내용 또한 난해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리 저리 해서 결국 캐언스의 책을 구했다. 그리고 후설이 스스로를 늘 새로 시작하는 철학자라고 말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후설은 끊임없이 사색하고 연구한다. 그런데 그 결과로 후설의 철학이 더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어떤 의미에서는 정처없이 떠돌게만 되는 것이다. 나는 후설이 자신의 어떤 중요한 철학적 테제에 대해 단 몇 칠 만에 입장을 바꾸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굳건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잠정적이다. 이것이 이른바 후설의 질곡의 배경인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 책이 후설을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책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내가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한 많은 주제들에 대해 매우 많은 시사를 받았다. 나는 후설의 철학이 체계적인 철학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게 된 상황의 근저에 어떤 문제가 놓여 있는지 파악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것은 두 말할 필요없이 선험성 문제 그 자체이다(더 구체적으로는 자아의 이중성 문제). 돌이켜보면 영국돈으로 100 파운드가 넘는 가격이 책정되어 있었더라도, 색인까지 포함해서 110 페이지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이 책을 꼭 샀었어야 했다고 본다. 이 책 덕분에 최근 몇 칠 동안 내가 이룬 진보를 이 책 없이도, 몇 년이 걸리더라도, 이뤄낼 자신이 없다. 그것은 신념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우연성의 문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연성의 제거를 진보의 척도로 삼는 것은 얼마든지 타당한, 혹은 고마운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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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2월31일이 EU와 영국이 합의한 브렉싯 이행 기간의 종료일이다. 이때까지 새로운 무역 합의안에 이르지 못하면 영국은 노-딜로 EU를 나가게 된다. 사람들은 대체로 노-딜 브렉싯을 예상하고 있다. 


관세 없이 무역을 계속 하고 싶어하는 EU와 영국의 협의가 교착 상태에 빠진 것은 크게 두 가지 문제 때문이다. 하나는 어업 문제, 다른 하나는 영국이 EU의 규제를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 그런데 둘 다 해결하기 힘들어 보인다.


어업 문제. 영국은 섬나라로 풍부한 어족 자원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영국이 EU에 가입하면서 영국은 자신의 바다를 다른 나라들과 나눠 먹어야 했다. 그러므로 어업은 영국이 EU 가입으로 입은 피해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브렉싯은 영국이 자신의 바다의 통제권을 다시 찾아오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국이 자신의 바다에 대한 배타권을 주장할 경우 EU는 영국이 EU의 수산 시장에 세금도 내지 않고 자유롭게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마침 영국은 어업량의 70%를 EU에 수출한다. 영국은 양보할 수 없다. 브렉싯으로 영국 바다의 통제권을 되찾아오겠다고 그동안 큰소리 치지 않았던가? EU 역시 양보할 수 없다. 영국에 둘 다를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영국이 EU 규제를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 EU는 영국이 EU와 관세 없는 무역을 하고 싶으면 EU의 노동 관련 규제나 환경 규제 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규제들은 기업에 곧 비용이기 때문에, 영국이 이런 규정들을 회피할 수 있다면 그것은 EU를 탈퇴하면서 선물을 받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즉, EU는 양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반면 영국도 양보할 수 없다. 영국에게 브렉싯이란 EU로부터 영국의 주권을 되찾아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영국이 EU의 규제를 계속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브렉싯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노딜-브렉싯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인다. 우리 집도 최근 쇼핑을 더 많이 하고 물건을 더 많이 사고 있다.


노-딜 브릭싯이 세상의 종말은 아니다. 누구 말대로 브렉싯의 실제적 의미는 EU와 영국 사람들이 이전보다 더 비싼 가격에 물건을 사는 것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주권, 자유라는 매우 비현실적인 이념을 내세우는 경우의 현실적 귀결은 항상 이렇다. 앞서도 보았지만 세상은 서로 너무도 얽혀 있어서 주권이라는 개념은 매우 한정적인 분야에서의 정책이나 행위의 정당화로 사용될 수 있을 뿐이다. 


여튼, 브렉싯은 영국 국민들이 두 번이나 선택한 사항이다. 첫째는 국민투표로, 두번째는 브렉싯 강경파인 보리스 존슨의 내각에 어머어마한 표를 몰아줌으로써. 그러니 일단은 보리스 존슨의 주장대로 일을 처리할 수 밖에 없다. 일단 일을 겪고나서 나중의 일은 나중에 다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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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침 40 파운드짜리 아마존 키프트 카드를 얻게 되어서 그것으로, 사고 싶었으나 우선 순위 때문에 살 수 없었던 책 두 권을 샀다. 그 중 한 권이 <하이데거-야스퍼스 서간집>이다. 킨들 버전으로 샀고 물리 책 버전으로는 500, 600 파운드나 한다. 


요즘 하이데거의 <현상학의 기초 문제들>을 읽고 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강의록이다. 강의록답게 반복되는 부분도 많고 중언부언하는 부분도 많다. 나는 그것을 일종의 현장감으로 받아들인다. 책 후반부에서 지나치게 중언부언하는 부분을 읽을 때면 하이데거가 강의를 질질 끄는구나, 강의의 전체 내용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는다. 


부정적이랄 수 있는 부분을 먼저 말했는데,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부분도 말하자면, 하이데거가 존재의 문제를 끌고 그 근원성을 향해 끊임없이 소급해 올라가는 과정은 여느 스릴러못지 않게 흥미진진하다. 그 강의실 현장에서 하이데거의 강의를 직접 들은 학생들은 그야말로 복받은 사람들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마 그 학생들은 신을 영접하는 기분이었겠지?


그런데 서간집을 보면 아직 30대 초반의 하이데거가 끊임없이 불평을 하는 장면이 많다. 내가 이렇게나 죽을 힘을 다해, 사적 즐거움 다 팽겨치고 몰두하여 강의를 준비했건만 강의실에는 바보들만 가득하도다... --- 나는 깨닫는다. 아, 그렇구나... 하이데거 눈에 학생들은 그렇게 비쳤을 수도 있겠구나...


저작들에서는 대체로 신중한 하이데거가 서간집에서는 아주 거침이 없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생생한 모습들을 보는 것이 대가들의 서간이나 일기를 읽는 즐거움이다. 어느 방향으로든 터져나갈 수 있는 그 에너지, 우리가 흔히 열정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내가 현재 읽은 하이데거의 편지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반면 야스퍼스는 신중하고 조심스럽다.) 그래서 그 열정이라는 측면에서, 스스로 받아안은 그 내적, 외적 압박감 속에서 작업하는 젊은 철학자라는 측면에서 나는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을 일종의 쌍둥이로 발견한다. 하이데거가 어느 서간에서 암시한 것처럼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하이데거가 끊임없이 불평하고 있는 것처럼, 그대의 진보가 크면 클수록 다른 사람들과 이해의 거리는 멀어질 것이라는 것, 즉 그러한 몰이해야말로 그대의 진보의 징표가 될 것이라는 것, 다시 말하면 그러한 몰이해야말로 그대의 노고의 보상일 것이라는 것...  ---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야말로 고독의 정의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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