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마침 40 파운드짜리 아마존 키프트 카드를 얻게 되어서 그것으로, 사고 싶었으나 우선 순위 때문에 살 수 없었던 책 두 권을 샀다. 그 중 한 권이 <하이데거-야스퍼스 서간집>이다. 킨들 버전으로 샀고 물리 책 버전으로는 500, 600 파운드나 한다. 


요즘 하이데거의 <현상학의 기초 문제들>을 읽고 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강의록이다. 강의록답게 반복되는 부분도 많고 중언부언하는 부분도 많다. 나는 그것을 일종의 현장감으로 받아들인다. 책 후반부에서 지나치게 중언부언하는 부분을 읽을 때면 하이데거가 강의를 질질 끄는구나, 강의의 전체 내용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는다. 


부정적이랄 수 있는 부분을 먼저 말했는데,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부분도 말하자면, 하이데거가 존재의 문제를 끌고 그 근원성을 향해 끊임없이 소급해 올라가는 과정은 여느 스릴러못지 않게 흥미진진하다. 그 강의실 현장에서 하이데거의 강의를 직접 들은 학생들은 그야말로 복받은 사람들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마 그 학생들은 신을 영접하는 기분이었겠지?


그런데 서간집을 보면 아직 30대 초반의 하이데거가 끊임없이 불평을 하는 장면이 많다. 내가 이렇게나 죽을 힘을 다해, 사적 즐거움 다 팽겨치고 몰두하여 강의를 준비했건만 강의실에는 바보들만 가득하도다... --- 나는 깨닫는다. 아, 그렇구나... 하이데거 눈에 학생들은 그렇게 비쳤을 수도 있겠구나...


저작들에서는 대체로 신중한 하이데거가 서간집에서는 아주 거침이 없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생생한 모습들을 보는 것이 대가들의 서간이나 일기를 읽는 즐거움이다. 어느 방향으로든 터져나갈 수 있는 그 에너지, 우리가 흔히 열정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내가 현재 읽은 하이데거의 편지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반면 야스퍼스는 신중하고 조심스럽다.) 그래서 그 열정이라는 측면에서, 스스로 받아안은 그 내적, 외적 압박감 속에서 작업하는 젊은 철학자라는 측면에서 나는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을 일종의 쌍둥이로 발견한다. 하이데거가 어느 서간에서 암시한 것처럼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하이데거가 끊임없이 불평하고 있는 것처럼, 그대의 진보가 크면 클수록 다른 사람들과 이해의 거리는 멀어질 것이라는 것, 즉 그러한 몰이해야말로 그대의 진보의 징표가 될 것이라는 것, 다시 말하면 그러한 몰이해야말로 그대의 노고의 보상일 것이라는 것...  ---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야말로 고독의 정의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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