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잡담이다. 

<물질과 기억>을 다 읽었고 리뷰를 쓰려고 보니 이게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오해든 정해든, 사물을 어떤 식으로든 단순하게, 그리고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적어도 표면적인 걸림돌들은 제거가 되어야 한다. <물질과 기억>의 경우 내게 그 이해의 장애는 이미지라는 개념이다. 나의 직관은 베르그송이 이 책에서 하고자 한 작업이란 이미지라는 개념을 새로 정립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을 이렇게 잡아놓으면 책 전체를 이미지 개념의 전개에 따라 다시 읽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다시 읽어야 하나? 


그러다가 뉴스에서 chat gpt라는 것이 논문도 써준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물질과 기억>의 리뷰나, <물질과 기억>에 있어서 이미지라는 주제의 소논문도 써 줄 수 있을까?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풍요로워질 수 있을까? 베르그손이 슬쩍 슬쩍 애매하게 처리한 물질/이미지라는 개념 등을 선명하게 해설해 줄 수 있는 무엇(기계,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여기서 미적대지 않고 바로 그 다음 문제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케플러가 행성의 궤도를 계산하기 위해 온생애를 보낸 것에 대한 뉴튼의 미적분 발명 사례처럼, 이런 혁신은 우주에 대해 인간을 더 똑똑하게, 즉 같은 시간에 더 종합적인 일을 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하여 나는 바로 chat gpt 사이트로 날아갔다. 그런데 너무 많은 사용자가 몰려 사이트가 다운되어 있었다. 흠... 여튼 지금 바로 드는 생각은 저 사이트가 다시 열리기 전에 나 나름의 리뷰를 써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저 사이트가 다시 열리면 인공지능에게 리뷰를 부탁하고 둘을 비교해 봐야겠다.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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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2-03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질과 기억...정말 빨리 읽으셨네요!! 저는 번역 가독성이 현저히 떨어져 읽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1장이 가장 난해하고 어려운데, 이미지의 개념을 파학하면 책 전체를 다시 읽어야 합니다. 위클리 님의 직관이 맞아요. 그래서 일반적인 이미지 개념과는 괴리가 커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근데, 무지 빠르게 이해하셨네요. 역시 계속 연구하시는 분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하하 재밌는 발상이네요. 근데 chat gpt라는 것이 논문도 써주나요?? 되게 신기하네요.
베르그손이 슬쩍 슬쩍 애매하게 처리한 물질/이미지라는 개념 등을 선명하게 해설해 줄 수 있는 무엇인가 필요하다고 하셧는데, 물질과 기억을 읽으면서 정말 똑같은 생각을 반복했었습니다. 진짝 명확히 다가오지가 않아요.

물질과 기억 이전엔 모노의 <우연과 필연>이 매우 어려웠는데, 이 두 책이 극단적 대척점에 있다는 사실로 깜놀했던 적이 있습니다.

weekly 2023-02-03 18:19   좋아요 0 | URL
하하, 책 리스트를 계속 늘려주시네요. 두 책이 극단적인 대척점에 있나요? 솔깃한데요.:)
 
현상학의 이념 -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
에드문트 후설 지음, 이영호 이종훈 옮김 / 서광사 / 198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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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에 대한 최고의 입문서? 이렇게 적고나니 스스로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든다. 최고의 입문서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쉬운 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학부 때 동기가 읽고 있던 책을 물물교환을 통해 입수한 후, 책 두께가 만만해 보이길래 한달음에 읽어내려 했지만 실패했었다. 이해해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현상학의 이념>과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을 번역해 묶은 것이다. 이렇다는 것도 이 번에 책장 구석에 낑겨있는 것을 찾아내어 먼지를 털고 살펴 본 후에야 알게 되었다. <현상학의 이념>은 이미 여러 판본으로 여러 번 읽었기 때문에 한국어 판으로 다시 읽을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다. <현상학의 이념>은 후설이 현상학적 환원을 주제로 강의한 것을 묶은 것이다. 내가 만약 후설의 저 강의를 당시의 강의실에 앉아 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후설에게 넘어갔을까? 그에게 설득되었을까? 아마 두 가지 태도를 보였을 것 같다. 우선, 환원을 통해 절대 순수 영역을 획득할 수 있다는 주장에는 의구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것은 기괴한 생각이다. 지금도 그렇고, 아마 그때에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환원을 통해, 제5강에서 특히 잘 드러나듯이, 어떤 광대한 탐구의 영역이 새로 열릴 수 있다는 가능성에 무감할 정도로 그 당시의 내가 우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렇게 우둔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후설에게 설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환원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환원을 실재(reality)에 대한 주체성(subjectivity)의 기여 부분을 측정하는 한 방편으로 간주했을지도 모른다. --- 지금의 내가 그렇게 생각하듯이.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은 이번에 이 한국어판으로 처음 읽은 것이다. 전혀 예기치 않게도 매우 감명 깊게 읽었다. 아마 철학에 대한 나의 생각, 고민들을 새롭게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말하자면 이렇다. 사람들 중에는 스피노자를 마지막 철학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삶과 동행하는 것으로서의 철학은 스피노자에서 끝났다는 것이다. 예컨대, 칸트나 헤겔은 철학 교수, 혹은 철학 전문가이지 철학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하므로 철학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을, 그런 것이 혹 있다면, 시야에서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른바 테크니컬한 철학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후설은 세계관으로서의 철학과 엄밀한 학이라는 이념으로서의 철학을 구분한 후, 전자에 십분 동의하는 가운데, 후자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내가 느끼기로는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하나의 저작에서 저자의 인격, 고민, 고투가 독자의 가슴으로 이렇듯 곧장 와닿는 경우는 매우 드물 것이다. 물론 나는 여전히 후설의 이념에 설득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후설의 진정성, 그 울림은 책을 덮은 후에도 계속 나의 가슴에 남아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네덜란드의 고흐 미술관에서 고흐의 그림들 앞에 섰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다. 도대체 그 그림 조각들이 무엇이 그리 대단할까? 고흐의 삶, 고흐의 동생 테오의 삶, 그리고 테오의 부인의 삶의, 고민, 오해, 갈등, 사랑, 고단함, 결단들의 종합으로 지금 거기에 고흐의 그림들이 걸려 있다는 그 사실 말고 무엇이 예술 작품의 존재를 지시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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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1-21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클리 님 오랜만입니다!!
이 책 저도 있어요!! 근데 번역이 좀..
그래서 읽다 말았습니다요..ㅎㅎ

설 연휴 잘 보내시고 복 많이 받으셔요~~

weekly 2023-01-22 04:0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야무님, 오랜만이예요! 아직 절 기억하고 계시군요.:)
야무님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내 건강하세요!
올해도(야무님), 그리고 올해는(저), 책을 많이 읽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2023-01-30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31 0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03 1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03 18: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3-23 2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3-23 2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4-05 0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떤 유튭 채널에서 2023년에 함께 읽을, 즉 혼자 읽기에는 좀 버겨운, 책들 리스트를 소개하는 걸 봤는데 나도 따라 읽으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그 채널에서 소개해 준 책들이다. 

전쟁과 평화.

카라마조프 형제들.

올란도.

알리스 먼로의 단편들.

반지의 제왕.

몽테 크리스토 백작.

투명인간.

제인 에어.

실락원.

그라버티즈 레인보우. (토마스 핀천)


(리스트 중 셋은 이미 읽은 것이다. 다시 읽으면 감상이 새로울까? 얼마전에 톨스토이의 부활을 다시 읽었다. 중학교때 읽고 얼마만인지... 다시 읽고 보니 내가 기억하고 있고 느꼈던 그대로 였다. 물론, 처음 읽었을 때의 그 충격을 다시 느끼지는 않았다. 사실주의에 익숙해져 있을 나이이므로.)


(찾아보니 벼룩 시장에서 사놓은 전쟁과 평화가 집에 있긴 하다. 그런데 900여 페이지로 만들려 해서 그런지 활자가 너무 작다. 아마 1400 페이지 짜리 문고본을 사게 될 것 같다. 이런 데서도 노안을 의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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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1-30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부활을 작년엔가 처음 읽었는데, 정말 좋았습니다! 톨스토이...명불허전이더라구요~~ㅎ 전쟁과평화도 사서 대기해 놓고 있습니다. 안나 카레리나도 읽어야하는데...읽을 책이 워낙 많아서요..ㅎㅎ

개인적으론 부차티의 <타타르인의 사막>이 정말 좋았습니다. 지금까지 읽었던 세계문학 중 제겐 원탑에 꼽을만했습니다..^^

weekly 2023-01-31 04:23   좋아요 0 | URL
아, 이렇게 또 리스트가 느네요.:)
전쟁과 평화를 시작했는데, 읽고 있던 레미제라블은 아직 끝이 보이지 않아서, 일단 레미제라블을 끝내야 하나 하고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타타르인의 사막이 그렇게 좋다고요? 흠...

yamoo 2023-01-31 09:51   좋아요 0 | URL
네...실존에 대한 고민을 조금이라도 했던 사람이라면 부차티의 작품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거라 확신합니다. 모든 문학작품을 통털어 제겐 부차티와 안나 제거스는 탑5에 꼽는 대문호라 생각해요...저도 하도 좋다길래 읽었는데....남들 좋다고 해서 내가 좋은 경우는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와 부차티의 <타타르인의 사막> 등 손에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근데 그게 정말 대박이었다는 거에요..ㅎㅎ
 

영국에서 부자 감세로 한바탕 난리가 난 것은 전세계가 다 아는 일일 것이다. 영국의 총리나 재경부 장관은 그러한 정책들이 영국 경제의 성장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영국 총리는 한술 더 떠서 "성장에 반대하는 연합 세력"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갈수록 태산이다. 영국에서는 보수당이 너무 오래 집권하다보니, 또 직전 선거에서 사상 최대의 승리를 거두다 보니, 국민 여론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 이번 부자 감세 정책의 본질은 총리 경선에서 현 총리가 당선되도록 표를 몰아준 부자 원로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들 하는데,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 프로그램도 없이 내세운 "성장" 이라는 단어는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일 뿐인 것이다.


영국에서 브렉싯 당일 아침 발간된 "썬"이라는 대중, 황색 저널리즘 신문 헤드라인은 딱 세 단어였다. "이민자, 이민자, 이민자". 즉, 브렉싯 선거는 이민자 문제에 대한 선거라는 것이다. 브렉싯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상당 수는 이런 틀거리 안에서 자신의 의견을 정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브렉싯의 본질은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는 유럽식 규제주의가 아니라 미국식 자유주의 시장 원리를 강화하자는 것이 그 골자이다. 어떤 사태를 한 두 개의 본질로 설명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일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순간 마르크스주의의 진리성을 거부하기가 힘들다. 파운드화의 급락으로 숨고르기에 들어갔지만 영국 재경부의 애초 의도는 부자에게 세금을 깍아주고, 공공지출은 줄이는 것이었다. 그러면 가뜩이나 힘든 서민들은 더 힘들어지지 않겠는가? 그에 대한 영국 내각의 한 장관의 말은, 그렇게 힘들면 직업을 하나 더 가지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 농담이 아니다.


지난 대선 운동 기간 나는 한국의 재경부가 방역 지원금이나 손실 보상금 등으로 재정을 확장하는 것에 적극 반대하는 것이 일견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재경부 입장에서는 재정건전성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큰 관심사일 터이니 말이다. 내가 보기에 지난 한국의 대선은 문재인이 재경부의 입장에 끌려다니는 것으로 결판이 난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보니 재경부의 최고 가치는 재정건전성 따위가 아닌 것 같다. 예컨대, 법인세 인하 등의 문제에 대해 한국의 재경부는 어떤 태도를 취했나? 즉슨, "재정건전성" 이란 말은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재경부가 돈을 쓰기 싫어하는 항목에 대해, 예컨대 일반 국민들에게 돈을 퍼주는 것에 대해, "그런 데에 돈을 쓰기 싫다" 라는 말을 "재정건전성이 위협을 받는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렇게 하면 부자들 세금을 깍아줄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말은 멋진 말이다. 국가 단위에서 보면, 그것은 국가가 스스로에서 말미암게 된다는 것, 즉 독립한다는 것, 주권을 완전히 회복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브렉싯 선거 기간 중 어떤 영국 서민 할머니는 이 자유와 독립으로 브렉싯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눈문을 흘렸다. 그런데 보자. 미국의 어떤 주에서는 한파가 몰아쳐서 전기고 가스고 다 끊겼다. 그러므로 지역에 고립된 사람들은 주정부나 중앙 정부의 긴급 대책을 간절히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 짜증이 난 사람이 있었다. 바로 그 주의 주지사였다. 사람들이 스스로 나가서 땔감을 찾는다든지 하는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고 정부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한심함과 짜증을 느낀 것이다. 책임이라는 모랄 의식의 타락의 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주의 시민들은 도덕적 각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엉뚱한 곳에 짜증을 낸 주지사를 사임하게 했다. 그 주지사의 짜증의 본질이 특정 모랄의 타락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주지사는 단지, 극빈층도 아니고, 장애를 가진 사람도 아닌, 사지 멀쩡한 일반 사람들을 돕고 싶지 않았던 것 뿐이다. 자기가 도울수록 사람들을 더 타락시킬 것이라는 자기기만 속에서. 자유라는 말은 멋진 말이고, 멋진 삶의 태도를 의미할 수 있다. 동시에 정부가 시민을 돕지 않으려 수작을 부릴 때 이데올로기로 사용될 수도 있다. 브렉싯은 기업에 규제를 풀어주고, 세금을 깍아주고, 일반 국민들은 웬만하면 스스로 알아서 살아라는 말로, 내가 보기에, 정리된다. 그러므로, 자유와 주권 독립과 브렉싯을 사랑하는 저 영국 서민 할머니는 보건소에 가서, 간호사가 없어서 텅빈 그 보건소가 자신의 선택의 결과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물론 깨닫지 못할 것이다). (영국에는 엄청난 간호사 인력난이 현재 진행형이다. 엊그제 사상 처음으로 파업도 했다. 파업에 참여한 간호사들은 어떤 의미로 참 간호사라 할 수도 있다. 간호사 월급보다 마트 캐셔가 일도 더 편하고 벌이도 더 좋기 때문에 그쪽으로 전직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다고 한다. 여튼 영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국립의료체계와 같은 '비생산적인 일'에 돈을 쓰고 싶지 않은 것이다.) 


우주론의 근원적 질문 중 하나는 우주가 영원히 팽창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적어도 우주의 특정 단위의 특정 시점에서는 팽창을 멈추고 있거나 수축에 돌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세계화로 요약되는 팽창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린 것 같다. 이러한 때에, 엊그제 영국 총리가 한 말, "이제 파이를 키워야 합니다" 는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 이데올로기는 뭔가를 가리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기만이 가능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자기기만이라는 마술적인 힘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한에서 이데올로기는 거짓말, 위선 등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지금의 시대는, 매우 독특한 의미로 이데올로기의 종말 시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주 수축의 여파로 어떤 이념이 이념 형태가 아닌 적나라한 현실 형태 그대로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바이든의 미국을 보라. 자본주의, 자유 무역의 수호자인 척 하다가, 그네들이 그동안 떠벌린 이념에는 어떠한 필연성도 없었다는 것을, 단지 우발성이나 편의성이 적당히 포장된 채 선전되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만천하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 나는 항상 이것이 궁금했다. 미국 일방주의 세계 질서에서 중국이 두 번째 극으로 등장하는 체계로, 즉 이강 체계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세계사는 다시금 냉전적 시대로 갈까? 그렇게 가는 것이 필연적인가? 아니면 어떤 자유의 여지가 인간에게 남겨져 있을까? 여기서 변수는 지금이 수축의 시대라는 것이다. 그것이 상황을 호전시킬까, 아니면 더 암울하게 할까? 또 지금은 수축이 시대이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는 종말을 맞았다고 봐야 한다. 예컨대,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의 대결 이런 것은 없다. 자본주의의 수장으로서의 미국의 정치적 지도력, 이런 것도 없다. 그냥 모두가 리얼리티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이데올로기의 종말이 세계사의 운동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너무 장황함을 인정한다. 급하게 쓰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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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프 케네디 공항에 내려서 숙소가 있는 브룩클린으로 택시를 타고 가면서 첫 번째로 느낀 것은 도로가 매우 지저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닥 부유해 보이지 않는 동네들을 빠른 속도로 내달리다가, 저녁이 내리기 시작한 하늘 저편으로 맨하튼의 무수한 고층 빌딩군들이 눈에 들어왔을 때는, 어떤 기괴한 느낌, 비-현실적이라거나 초-현실적이라 할 수 있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압도적인 규모라니! "런던의 시티 빌딩들은 아기네, 아기." 


다음날 아침, 맨하튼을 브룩클린 다리를 걸어서 건너가고 싶었다. 그러므로 숙소에서 브룩클린 다리까지 어떻게 갈 것인가가 문제였다. 심하게 관광객 티를 내면서 지도를 들고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차에서 경적을 울리며 물었다. "어디 가려고?" 미국 드라마 소프라노스의 등장 인물 중 하나처럼 생긴 아저씨였다. 브룩클린 다리까지 간다고 하고, 차비 등이 일사천리로 합의되었다.   


기사 아저씨가 떠벌이였다. 지금은 휴가철이라 사람이 별로 없다. 곧 사람들이 직장으로, 학교로 돌아올 것이다. <스마일리의 사람들>의 첫 페이지가 떠올랐다. 여름의 열기를 피해 파리 사람들이 휴가를 떠나고 빈 곳을 가방을 멘 관광객들이 어슬렁거린다더니 우리가 그 꼴이었다. 기사 아저씨는 말을 계속 했다. 나는 자유롭다. 일하고 싶으면 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안한다. 누구도 내게 명령하지 않는다. 오직 나의 뇌만이 나에게 명령한다. 나는 뉴욕에서 태어났고 뉴욕을 사랑한다. 서울의 택시 기사님에게서 나는 서울을 사랑한다, 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나는 놀랐고, 어쩌면 그때 미국이라는 나라의 이념성을 발견하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중학교 때 윤리 선생님이 이야기한, "민주주의란 삶의 한 방식이다" 라는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자유라는 이념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예컨대 총기 소지의 자유에 대해서도?  


맨하튼은 경이적인 곳이다.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도로들(avenue라고 부른다)과 동서로 그것들을 관통하는 도로들(street)이 직조하고 있어서 눈에 띄는 자연물이 없음에도 길을 잃기 쉽지 않은 구조이다. 곳곳이 공사판이었는데, 역시나 공사가 끊이지 않던 서울이 생각났다. --- 더 이상 공사판이지 않는 도시는 죽어가는 도시라고 보면 될 테지?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가사가 생각나서 59th 스트리트를 지도에서 찾아보았더니 센트럴 파크 쪽에서 시작하여 블루밍데일 백화점을 거쳐 맨하튼 동쪽 강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따라 걸었는데 전혀 가사처럼 그루비해지지 않았다. 블루밍데일 근처도 온통 공사판이고, 온갖 도시의 소음에, 먼지에, 햇빛은 살인적으로 따가왔다. 블루밍데일에 에어컨 바람을 쐬러 들어가야 했다.


뉴욕에는 많은 노숙자들이 있다. 그들의 눈에서는, 마치 약을 먹은 것처럼, 아무 영혼을 느낄 수가 없었다. 모로코에서 본 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그 눈빛과 같았는데, 그것을 뉴욕에서도 보게 된 것이다. 때로는 대낮에 넝마같은 외투를 입고 젖은 빨래처럼 길가에 널부러져 있는 사람도 있었다. 또,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도 있었다. 벌건 대낮에 소화전을 향해 고추를 내어놓고 오줌을 싸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흑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사정이 이러므로 저 유명한 맨하튼에 대해 사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맨하튼을 이루는 평면은 고저가 거의 없다. 말 그대로 평면이다. 내게는 이것이 미국적 삶의 형식성을 의미한다. --- 열흘도 안되는 관광을 다녀온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반면, 맨하튼을 수직으로 수놓는 고층 빌딩군들은 어떤가? 그것은 내게 압도적인 계급성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다. 예컨대, 누구나 몇 십 달러면 양키스 경기를 볼 수 있다. 양키스 셔츠를 입고, 아들, 딸, 또는 손녀, 손자까지 데리고 양키스 구장에 간다. 유치한 응원가에 맞춰 환호하고, 함께 입을 모아 상대팀을 조롱한다. 옆자리에 앉은 아무나와 너털거리며 손바닥을 마주치거나 포옹을 하기도 한다. 물론 관람석에는 비싼 곳도, 싼 곳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본질적인 것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인종이건 성별이건, 심지어 세대 구분까지 포함하여 완전히 동등한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사회를 이루며 사는 우리들은 경기장에 모인 사람들 사이와 같은 그런 외면적인 관계들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만일, 우리의 관계가 그런 외면적인 관계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면, 저 초고층의 빌딩을 올린 사람은 참으로 기적을 행사한 것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그걸 믿는 것 같다. 저 초고층을 올린 사람은 그러므로 영웅이라 불리고, 아메리칸 드림의 구현자로 불린다. 저 대낮에 길거리에서 쓰러져 자는 사람들, 혹은 지하철 역 쓰레기를 뒤지는 사람은 자유의 한 양상일 뿐이다.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개인적으로라면, 그 사람들은, 예컨대 30, 40년 전에 길거리에서 쓰러져 자는 것을 선택했을 뿐인 것이다. 


나는 미국 사회의 원자성, 혹은 평면성과, 이 가공할 만한 계급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원자성, 혹은 평면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병적인 민감성을, 외부인으로서 느낄 수 있다고 믿는다. 예컨대, 뉴욕 지하철들은 하나같이 성조기를 달고 다닌다. 미국 영화에서는 뜬금없이 성조기가 펄럭이는 장면이 나온다. 뉴욕의 택시 기사는 뜬금없이 자신이 뉴욕과 자유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등등. 내가 보기에 이것들은 이념화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념화, 즉 내면화는 그것이 항상 외부에서 주어진 것임을 의식한다. 그 의식성이 제3자의 사람으로 하여금 거기에서 약간은 병적인 민감성을 느끼게 만든다고 나는 생각한다. 음... 이건 좀 심한 것 같은데... 이렇게 말이다. (<콰이어트>에서 읽은 것 같은데, 미국 사람들이 내향적 사람이나 내향적 태도에 대해 약간은 병적인 지적질을 마다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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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2022-09-08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위의 경기장에 모인 사람들의 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내가 사르트르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나의 의도는 사르트르의 집단 이론을 해설하거나, 그것의 예를 제시하자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쓰고 나서 생각하니 그것들이 사르트르적이었을 뿐이다.

이준학 2022-09-13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러 재미있고, 유익한 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알라딘 이성비판 리뷰 잘 읽었습니다. 그러게요, 작자님은 사르트르적이시네요. 존재에 대한 무를 가진 현상학적 관찰자. 그렇게 보기를 갈망하는. 그리고 약간은 방랑하는 귀족 사상가 같은.... 그러나 그 눈길의 따스함이 느껴지는...^^

weekly 2022-09-13 17:2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예, 말씀대로 <변증법적 이성 비판>이 문제의 그 참조점입니다. 알게 모르게 저를 적시고 있던... 하하, 그러나 ‘방랑하는 귀족 사상가‘ 라는 표현은 사양하고 싶어지는군요.:) 혹 제가 제 글들에서 그런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면, 저 스스로를 심각하게 되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냉정하게 말해 저의 현재는 어떤 한계(재능)에 갇혀 고투하는 철학도 정도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