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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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일요일(그러니까 내일 모레)에 3주 예정으로 한국에 가기 때문에 비행기 안에서 읽을 책을 찾아보았고, 그래서 고른 것이 디디에 에리봉의 이 책이었다. 이름이 생소하지 않다 했는데, 푸코의 전기를 썼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푸코의 연인이기도 했던. 내용은, 자신의 성정체성과 관련된 수치의 경험에 못지 않은, 노동자 계급 출신이었기에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수치심에 대한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아마 신좌파와 구좌파 사이의 갈등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을 것으로 짐작했었다. 그런데 그보다는 이런 수치심의 근원으로서의 자신의 가족사, 자신의 개인사를 드러내고, 그것이 무엇보다도 지배와 저항이라는 의미에서의 정치와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밝히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마치 소설을 읽듯 흥미롭게 읽혔기 때문에 읽다보니 어제 저녁에 배송받아서 오늘 하룻 만에 뚝딱 읽어버리게 되었다. --- 비행기 안에서 읽을 책은 다시 골라야겠다.


많은 이야기꺼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이야기를 시작했다가는 한도 끝도 없을 것 같다. 단, 하나만 이야기하자. 저 귀환의 의미는, 물론 저자도 이야기하고 있듯이 랭스에서의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의 과거 삶에 대한 이해의 모색이다. 그런데 그 이해는 철저하게 이론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러 저러한 개념들을 동원해가면서. 나는 저자가 개념적 틀에 갇혀 있는 것이 내내 안타까웠다. 예컨대, 저자는 진정으로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끝까지, 우리의 경험을 제대로 포착하게 해 줄, 우리의 경험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공해 줄, 그런 담론과 이론의 필요성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반복적으로 하는 이야기지만, 이런 칸트주의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런 이론 없이도, 오히려 그런 이론이라는 속박이 없어야 비로소 진리의 가능성이 열릴지도 모른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비로소 자신이 아버지의 장례식에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말한다. 바로 그 말인 것이다. 이 책은 참으로 잘 쓴 책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에필로그가 마지막에 집필된 장이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즉, 에필로그를 쓰고 나서 저자는 책 전체를 다시 써야 했다고 본다. 만약 그 귀환이 '진정한 이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만약 진정한 이해란 어떤 참신한 개념 틀에 의한 이해 등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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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기상이 번역한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책을 펴보았는데 그 안에 책갈피처럼, 대학 때 들었던 김태경 교수님의 플라톤, 혹은 그리스 철학에 대한 강의 노트 한 페이지가 끼워져 있었다. 나도 처음 보는 것인데, 어쨌든 내용이 나쁘지 않아 기록 삼아 올려 놓는다. (저기 노트된 것이 진짜로 다 강의된 것인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다. 이런 의심을 하는 이유는, 아랫 부분의 내용은 내가 기억하기로 거스리의 <희랍 철학사>에 나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김태경 교수님의 강의를 노트하다가, 내가 그 책에서 읽은 부분을 함부로 (즉, 출전 표시 없이) 뒤섞어 놓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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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마르크스가 그랬다던가, "나이가 들어가면 사람이 유해진다고 하던데, 그게 맞는 소리인가?" 마르크스가 자신의 말을 긍정하고 있는 것인지, 부정하고 있는 것인지, 혹은 그것에 당혹해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도 어제 아내에게 비슷한 소리를 했다가, 내가 나이가 들면서 유해진 것인지 어떤지 확정할 수 없어서 작은 당혹에 빠졌었으니까... 어쨌든 내 말의 의도는 이랬다. 예컨대, 나는 예전에 뮤지컬을 가장 저열한 예술 쟝르라고 생각했다. 스펙타클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예술이므로. 그래서 그동안 보았던 위키드, 레미제라블, 파우스트 등등은 내게 죄다 시간 낭비이자 돈낭비에 불과했다. 지금 나는 내가 그런 고정관념에 빠져 있었다는 점을 아쉬워 한다. 그냥 마음을 열어 놓고 즐기면 되었을 일을... 이런 강박을 찾으려면, 슬프게도, 너무 많다. 예를 들면, 모로코 여행 같을 때, 그곳 사람들에게 당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너무 꽁꽁 싸맸었다든지 등등... 


하이데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철학의 희화화를 경계한다. 즉, 그 말장난을. 나는 하이데거를 서양 철학사에 대한 가장 탁월한 교사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후기 저작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을 읽어보지도 않고, 말장난일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사르트르적 의미에서 말하는 코기토를, 혹은 어떤 경험적 기초를, 혹은 여하한의 검증 방법을 떠나 있는 영역(흔히, transcendental하다고 하는) 주변에선 무성한 말들이 자유방임적으로 자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나름 꼼꼼하게 하이데거를 읽으면서(<예술 작품의 기원>), 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 있다고 느낀다. 그것은 사실 <존재와 시간>과 단절적으로 놓여 있지 않다. 똑같은 관점에서 보면서 다른 강조점을 주고 있을 뿐이다. 그 둘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하이데거의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고 느낀다. 내가 배운 것은 기술description에 절대적 가치를 두는 것이 우둔한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고집하던 또 하나의 편견이 스그러져 가는 것 같다. 


경험의 확장은 시간 속에서 벌어진다. 그래서, 이제 나도 나이를 먹어서... 라는 말과, 좀 더 경험을 해보니... 라는 말이 비슷한 용례로 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 관건은, 이런 평균적인 의미에서의 시간과 전혀 다른 데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열려있음'이라는 말로 잘 표현될 것이다. 아이는 가장 잘 열려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나이가 듦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아이의 시간성으로의 회귀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운명이라는 것은 (내가 과거의 나에 대해 한탄하는 것은 운명의 흔한 에피소드이다), 바로 그 열림과 닫힘의 변증법적 운동을 지시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마 그 상대적으로 견고한 닫힘 속에 놓여있음을, 생물학적 죽음 등과 상관없이, 우리는 죽음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까뮈는 <패스트>라는 책에서, 아침마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어떤 노인에 대해 기술한다. 그리고 묻는다. 그는 성인일까? 이 질문은 까뮈를 당혹케 하고 독자를 당혹케 한다. 아마 우리는 이제 이렇게 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지 않아, 성인은 살아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니까. 우리는 지금 객관적인, 평균적인 시간성과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시간성이라는 개념 위에서 이런 잡담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쉽게 영원에 대한 논의로 이끌어져 들어가게 된다. 영원이란 삶이고 열려있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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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 분석과 서술의 기초 - 여덟 번째 개정판
실반 바넷 지음, 김리나 옮김 / 시공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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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킨에 대한 영화를 보고 생각이 나서 읽은 책. 미술 미평에 관해 많은 것을 아우르고 있다. 논문 쓰는 법, 실제 비평문의 예들, 간단한 사조사, 등등, 한 권의 책이 담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상을 담고 있다. 특히 좋았던 것은 학생들의 비평문을 싣고 있다는 점이다. 그 중의 한 편은 아주 인상적이었고 내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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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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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에 이 책을 첫 번째로 읽은 것은, 지금이 두 번째이고, 중2때였던 것 같다. 무척 충격적인 책이었다. 루팽 대 홈즈 수준의 독서에서 넘어갔으니 그랬을 수도 있는데, 첫 문장의 장황함, 충격적일 정도로 적나라한 인간 실재에 대한 묘사, 그러다 후반부의, 전혀 다른 분위기의 사상범들, 늙은 현자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신약에 대한 강독까지... 이런 것이 소설이구나 하는 깨달음에서, 이런 것이 소설인가 하는 의구심 사이를 오가게 하는, 쉽게 갈피를 잡기 힘든 작품이었다. 


이번에 다시 읽었는데 충격은 여전했다. 톨스토이 개인의 주관이 불쑥불쑥 끼여드는 것에 대해서는 선호나 평가가 엇갈릴 수 있겠지만, 그 점을 제하고 보면 이 책은 시간의 풍화를 전혀 겪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19세기에 톨스토이가 이 책을 출간하여 중2인 내가 그 책을 읽으면서 느꼈을 시간적 괴리감과 현재의 내가 부활을 다시 읽으며 중2적 시대를 되돌아보았을 때 느끼게 되는 시간적 괴리감 중 어느 것이 더 클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말도 안되는 엉뚱한 이야기일까? 종종은 우리가 사는 지금의 시대는 참으로 노회한 시대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부활의 곳곳을 장식하는 이상주의적 귀절들은 때로는 참을 수 없는 위화감을 주지 않는가? 그러나 아이러니는 부활은 철저하게 사실주의적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상은 어디에서 배어나오는가? 그것은 도저한 사실주의와 노회함 속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부활이라는 작품은 이에 대해 긍정의 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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