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에 뒷마당에 나타난 다람쥐. 입에 무슨 열매를 물고 있다. 예전에 다람쥐가 마당 한가운데에 열매를 파묻는 것을 봤었다. 1년 정도 있다가 그곳을 파보니 열매가 그대로 있더라. 동물이라고 다 완벽한 것은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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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6-10-03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른트 하인리히의 홀로 숲으로 가다란 책 읽으면 다람쥐가 자기가 저장한 먹이를 기억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하더라구요.....

weekly 2016-10-04 16:4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아, 그런가요? 외진 곳도 아니고 마당 한가운데 땅을 파서 열매 딱 하나를 숨기길래 이상타 하는 생각이 들긴 헸습니다. 하인리히의 책은 읽어 봐야 겠네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변증법적 이성비판 1 - 실천적 총체들의 이론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65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자 외 옮김 / 나남출판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한국 다녀오신다는 분이 책 부탁할 거 있으면 부탁하라고 하셔서 알라딘에서 검색해 보다가 우연찮게 발견한 책. 한국어판 제1권이 오랫 동안 품절 상태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었다. 출판사에 감사!

사르트르 생전 발간된 제1권, 그리고 사후 발간된 제2권, 합하여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또, 한도 끝도 없이 이어져서 독자들이 따라가다가 기어이 길을 잃게 하고 마는 심란하고 난해한 논증들. 게다가, 예컨대 "비판"의 서론 격인 "방법의 문제"의 가장 유명한 문장인 "마르크스주의는 우리 시대의 뛰어넘을 수 없는 철학이다"가 보여주듯이 너무도 사르트르 당대적인, 그 마저도 푸코가 한껏 조롱했듯이 그의 시대에 이미 시대 착오적이라 비판받은 주제들... 이 모든 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역자들의 노고다. 아무도 사르트르의 철학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지금 시대에 사르트르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저작을 권당 600 페이지가 넘어가는 3권의 책으로 번역해 내신 역자분들의 노고에 존경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존재와 무"와 "비판" 사이에서 단절을 읽어내는 것이 한때 유행이었던 것 같은데, 이러한 단절론은 이제 의미도 없고 지지될 수도 없다고 본다. "비판"이 마르크스주의적 저작이냐에 대해 사르트르 자신의 의견도 계속 왔다 갔다 했지만, "존재와 무"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비판"에 "존재와 무"의 저자의 논리 회로가 그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놓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는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수행한 기획을 따라하려 했다. 즉, 존재론-인식론-심리학-윤리학을 하나의 체계 안에서 종합하려 한 것이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심리학까지의 단계를 마쳤고 후속하는 저작에서, '이어서' 윤리학을 다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윤리학에 관한 저작을 써내는데 최종적으로 실패했다. 그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윤리학을 존재론에 기반해서 설립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심리학, 윤리학이 그 자체로 사회, 역사적인 차원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철학에 사회, 역사적 차원을 도입하려는 노력이 바로 "비판"이고, 예컨대 마르크스주의는 사르트르가 "방법의 문제"에서 말한 것과는 정반대로 사르트르의 철학(실존주의라 부르든 어떻든)의 체계에 부속하게되는 학문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내 생각에 이러한 결론에 별 이견이 없을 것 같다. 

그러면 "비판"에서 사르트르가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역사의 가지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역사에 하나의 의미가 있는가, 혹은 역사의 (대문자) 진리가 있는가 하는 문제. 이러한 문제 설정, 혹은 문제 설정에 대한 표현 방식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한 것처럼 작위적인 것처럼 보인다. 푸코가 비꼰 것처럼 사르트르는 헤겔의 유령일 뿐인가?

이렇게 생각해 보자. 한국 프로 야구에 어떤 감독이 있다. 사람들은 그 감독이 선수를 혹사시킨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 감독은 선수가 성장하려면 한계를 넘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투수를 벌투시켰다고 비판한다. 그러면 그 감독은 그 투수가 길게 던지면서 밸런스를 잡기를 바랬다고 말한다. 지친 선수들을 특타로 벌을 준다고 비판한다. 그러면 그 감독은 스포츠에서 위기를 타개하는 길은 연습 뿐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 감독의 말이 앞뒤가 안맞고 모순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그 감독의 말은 모순되는 것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모순은 없다. 그 감독의 논리는 두 가지 보호막 아래서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하나는 관점의 다수성이다. 이런 저런 다양한 관점들이 있는데, 어떤 관점이 다수를 이룬다고 해서 그것이 현장의 감독의 관점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근거가 있는가? 다른 하나는 상황성이다. 똑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날 수는 없다. 모든 사건은 다 최초이며 고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반적인 기준(보통은 경험적으로 귀납된 것)을 가지고 어떤 특수한 상황을 평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비판하고 싶어하지만 그 노감독은 빠져나갈 수 있다. 이 노감독과 똑같은 비판을 받는 인간 과학의 영역 하나를 대라면 바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현상이든 다 이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기서 "억지다", "아전인수적인 논리다"라는 느낌을 받는다. 다시 말하면 거기에 가지성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비슷한 경우는 많다. 서구의 인류학자가 브라질에 가서 현장 조사하고 발간한 보고서, 그 자신 역사 안에 있는 역사가가 써낸 역사학 저술... 이런 텍스트들이 소설이라는 쟝르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인가? 차라리 인간학적 텍스트들의 과학성을 선험적으로 규정하지 말고, 소설 등과 함께 하나의 담론의 공간 안에 넣고 그 안에서의 다이나믹을 관찰하는 것이 더 나은 일 아닐까? 아마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방법이 더 세련되고 현대적인 방법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을 취할 때 우리가 포기하게 되는 것이 바로 "진리"라는 개념이다. 진리란 담론들에 위계를 도입하는 폭력에 불과한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그런 개념을 포기할 때가 되었는가? 사르트르는 바로 이 입장에 반대한다. 그러므로 현대에 반대한다. 만약 우리가 현대적인 사고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느낀다면, 내 생각에, 제일 먼저 참고해 보아야 할 철학자 중 하나가 바로 사르트르일 것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어떤 답을 내놓았는가? 안타까운 소식 두 가지를 알려야 하겠다. 첫째는, 사르트르가 자신의 기획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역사의 가지성을 본격적으로 다룰 것으로 광고된 "비판" 2권은 미완성의 상태로 유고로 출간되었다. 둘째는, 사르트르의 철학이 사상의 역사의 지층 아래 파묻혀져 아무도 그것을 거들떠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 후자는 좀 과장된 이야기일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비판"이 사회 철학에 관한 저작이지만 사회학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고 단언하는 책을 하나 읽었다. 그러나 이를 반박하는 증거들은 많다. 또 이렇게 물어보자. 68 혁명에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했고, 68을 예견했으며 68 직후 이를 분석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적 틀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받았던 철학자와 그의 저작은 무엇인가? 답은 사르트르와 "비판"이다. 사르트르나 "비판"이 위대하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것의 현대성이 매몰되고, '구태여' 외면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나는 주체성과 타자성의 관점에서 프랑스 현대 철학사를 총괄하는 책을 하나 읽었다. 놀랍게도 거기에 사르트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왜 놀라운가? 현대 철학에 주체성과 타자성을 주제로 들여온 철학자가 바로 사르트르이기 때문이다. 메를로-퐁티의 철학을 현상학과 구조주의의 긴장 안에서 규명한 책을 하나 읽었다. 메를로-퐁티에게 후설 다음 가는 유령은 사르트르다.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는 역사에는 의미가 없는 것 같다고 말했고, "지각의 현상학"에서 메를로-퐁티는 피상적인 논리로나마 이를 반박했다. 그리고 이후 이 문제를 꾸준히 거론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메를로-퐁티가 준 힌트를 사르트르가 "비판"에서 수행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뿔싸, 그 책은 "비판"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넘어갔다! 이 모든 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비판"은 현재 '맹목적'으로 잊혀진 저작이라는 것이다. "비판"은 적절한 이론적 평가를 받고 철학사의 적당한 선반 위에 놓여진 것이 아니라, 마치 부정타는 물건인 것처럼 긴 서가의 바닥에 내팽겨져 있다는 것이다. 왜일까? 방대하고 난해하다. 구 세대의 철학하는 방식을 대표한다. 이론적 성패와 상관없이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사르트르의 그림자가 후대 사상가들에게 너무 길고 진하게 느껴진다... 다 맞는 말들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다른 데 있다. 푸코는 학창 시절 사르트르를 읽었느냐는 질문에, 자신이나 주변 학생들은 사르트르보다는 메를로-퐁티를 주로 읽었다고 말했다. 메를로-퐁티가 학적으로 더 치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르트르의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가 싫다는 것이다. 아마 사르트르의 철학에 혐오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존재와 무"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르트르의 이러한 총체화하려는 태도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자들이 철학자들을 싫어하는 이유와 똑같다. 그러나 혹 우리 시대의 파편화 경향에 질려서 뭔가 종합적인 이해 방식을, 그러나 관점의 다수성과 사건의 고유성을 포기하지 않은 채, 그 우연성, 우발성, 만남의 방식에 주의한 채 도모하려 한다면 최고의 참조점은 바로 사르트르일 것이다. 그리고 사르트르에 대한 그 독해는 사르트르에 대한 최초의 독해일 것이다. 이 점은 여러가지 관점에서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르트르의 "비판"을 사자. 그리고 읽자. 난해하다고 느낀다면, 그리하여 좌절을 느낀다면 이렇게 생각하자. 나는 "비판"의 최초의 주석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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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올리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었는데 다 지나가 버렸다. 여유를, 좀 더 좋은 언어로 말하자면 루틴을 찾아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왕성하게 사고한다. 왕성하게 책을 읽고 왕성하게 노트를 한다. 주제는 사르트르다. 사르트르가 오늘날에도 의미 있는 철학자인가? 나는 이 질문을 좀 더 포괄적인 질문 아래서 다루려고 한다. 오늘날 철학이 가능한가? 혹은,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이 요구하는 대답의 형태는 철학에 있어 진리란 어떤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형태와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르트르가 현대에도 의의를 갖는다면 바로 이 질문과의 관련성 때문이다. 즉, 시간화의 문제, 다시 말하면 역사에 대한 사유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유는 좀 더 넓고 좀 더 깊어질 것을 요구한다. 안달은 거기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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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U2를 좋아한다. 그런데 내가 U2를 발견했을 때 U2는 이미 정점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그게 항상 아쉬웠고 같이 성숙해가며 같이 늙어갈 음악인을 찾고 싶었다. 그러다 어느날 BBC의 음악 프로그램인 쥴스 홀랜드 쇼를 보다가 벤자민 클레멘타인을 발견했다. 위에 걸어놓은 동영상이 바로 그 쇼의 그 장면이다. 당시는 아직 데뷰 앨범도 나오지 않아서 잘 기억해 두었다가 앨범을 샀다. 깔끔하게 잘 뽑은 앨범이라기보다는 마치 홈 레코딩한 것처럼 막,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만든 음악이었다. 근래 보기 드물게 영혼에 발길질을 해대는 노래들...

 

아래는 런던 서머셋 하우스에서의 공연 장면이다. 청중이 많이 들어올 수 없는 야외 무대였는데, 십여 명의 퀄리티 높은 현악단을 동원했다. 본전을 뽑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벤자민 클레멘타인이 음악하는데 돈이 많이 든다, 표값을 얼마까지 감당할 수 있느냐... 등등으로 궁시렁대드라. 나는 그것을 벤자민 클레멘타인의 음악적 욕심으로 읽었다. 덕분에 벤자민은, 신디사이저로 대충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앨범에서 들려준 것 이상의 꽉찬 소리를 거기 모인 청중들에게 경험시킬 수 있었다. 절대 타협하지 말기를!

 

오프닝 뮤지션. 불행하게도 이름을 까먹었다. 한국의 이은미처럼 무대 위에서 자유롭고 편하게 움직이더라. (사진으로 알수 있듯이 나는 맨 앞 자리에 있었다.)

 

무대 전경. 뛰어난 현악 연주자들. 그리고 탁월한 드럼 연주자. 드럼 연주자는 연주할 때가 아니면 드럼 셋에 앉지 않고 주변을 서성였다. 클레멘타인이 연주자 이름을 소개할 때 마침 드러머는 자리에 없었고 클레멘타인은 "드러머가 지금 저 뒤에서 담배피고 있다..."고 이실직고를 하였다.

 

벤자민 클레멘타인. 위키피디아에 있는 소개글을 보면 재미있다. 어릴 때 프랑스로 건너가 노숙을 하기도 했다고. 스스로를 시인으로도 소개한다. 그리고 데뷰 앨범 첫 곡을 보면 "... no man can be a prophet in his own country..." 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하, 그의 음악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삶, 그의 삶이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음악을 만들기 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굳건하게 계속 음악으로 만들어 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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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서방 세력의 이라크 침공이 정당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영국의 참여 몫에 한해서 영국의 특별 위원회가 조사한 결과가 어제 발표되었다. 결과는 물론 이라크 전쟁은 총체적으로 잘못 결정되고 잘못 수행된 전쟁이라는 것이다. 

전쟁에 참여하기로 한 블레어의 결정은 한참 열받아 있는 세계 최강국 미국의 비위를 맞춰 영국의 국익을 도모하려 한 것이었을 것이다. 거기까지는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 결정으로 이라크에서는 민간인만 10만에서 20만명이 죽어야 했다. 어제 인터뷰한 이라크 시민의 말을 빌자면 "한 명의 후세인이 사라지자 천 명의 후세인이 생겼다." 사실 이러한 결과는 충분히 예상되고 경고된 것이었다. 그러나 블레어는 아랑곳 않고 전쟁을 밀어부쳤다. 문명의 고도 바그다드에 사는 사람들은 유럽인이 아니고, 바그다드는 아테네나 로마와 같은 유럽 문명의 발상지가 아니기 때문에 그 위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우리의 이익을 위해 희생되어야 할 사람들이 마침 저들이라면 그것은 감수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영국과 미국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는 이처럼 추악하다. 영국과 미국은 이러한 파괴 행위를 민주주의 가치의 전파와 실현이라는 이름 하에서 수행한다. 그러므로 서방이 말하는 민주주의란 조크일 뿐이다. 서방이 말하는 인류애 등등은 위선일 뿐이다. 그러므로 엡도 테러 때 파리의 시민들이 들고 나온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플랭카드를 보고 경악한 나의 반응은 정당화된다. 

테러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이렇게 정의한다. 즉, 테러란 비서방인이 서방 민간인에게 행하는 가해 행위라는 것. 서방이 비서방의 민간인에게 행한 가해 행위는, 인간 세계란 원래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것이 현실이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다 비서방인이 서방 민간인에 가해 행위를 하자마자, 그것은 갑자기 휴머니즘의 핵심에 대한 심대한 침해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묻게 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서구 문화권의 백인인가? 어제 블레어의 기자회견을 보니 블레어는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어제 테레비젼으로 관련 뉴스들을 보면서 느낀 것은 영국 사람들은 아직도 정신 못차렸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네가 이라크 사람들에게 얼마나 크나큰 재앙을 가져다 주었는지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이라크에서 전쟁의 후퐁풍 속에서 죽어간 수많은 민간인들보다 자국의 200명도 안되는 군인의 죽음에 더 많은 애도를 보내고 있었다. 유일하게 순서에 맞게 사과와 애도를 표한 사람은, 자당 의원들의 80%가 나가라고 아우성 치는, 노동당 리더 제레미 코벤 뿐이었다. 영국의 카메런 총리가 "모든 개입이 나쁜 것은 아니다"라고 헛소리를 하는 가운데 코벤은, 먼저 이라크 국민들에게, 그리고 나중에 영국의 희생된 군인과 그 가족들에게 노동당을 대표하여 사과한다고 말했다. 물론 그 순간에도 노동당 의원 하나는 코벵더러 닥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어쨌든 나같은 이방인에게 영국을 혐오의 지옥에서 건져낸 것은, 오직 하나 제레미 코벵의 영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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