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들르는 어느 블로그에 도스토옙스키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다. 도스토옙스키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글이었다. 솔직히 좀 놀랐다. 얼마 전 한 친구와 도스토옙스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도스토옙스키가 신적인 위치에 있는 소설가, 철학으로 말하자면 플라톤의 위치에 있는 소설가라는 데 거의 순간적인 동의가 이루어졌었다. 다른 시각도 있을 수 있다는 걸 그 글을 보고 깨달았다. 취향 탓도 있고, 관점 차도 있을 테니...

여튼 나는 도스토옙스키를 좋아한다. 예컨대 나는 "카라마조프"가 정말로 위대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카라마조프"는 정말 재미있다. 엄청 두터운 소설이지만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가고 나면 도저히 손을 뗄 수 없는 작품이다. 특히 후반부는, 여느 통속 소설보다, 해리 포터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 말하자면 도스토옙스키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다.

"카라마조프"에 등장하는 인물들 하나 하나는 다 개성이 있고 에피소드 하나 하나는 다 흥미롭다. 작가가 삶의 구석 구석에 주의 깊은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면 결코 간파할 수 없었을 삶의 작은 진실들이 거기 녹아들어 있다. 예를 들어 조지마 신부가 사람들을 맞으면서 인사를 하는데, 상대가 숙인 고개를 미처 들기도 전에 다음 사람을 향하는 장면이 있다. 이런 장면은 정말 웃기다. 왜냐하면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도 그와 똑같이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 조지마 신부가 아닥들을 맞아, 한 아낙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장면은, 도스토옙스키가 삶에 얼마나 깊은 눈길을 두고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기에 한 사람의 소설가가 있고, 그가 곧 도스토옙스키라는 것을. 또, 가난한 집 아이 에피소드도 정말 아름답다. 나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 이상의 삶에 대한 낙관을 거기서 본다. 

대심문관 에피소드는 지금 관점에서는 그닥 강렬하다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뻔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으니까. 어쨌든 거기엔 하나의 사상이 들어 있다. 어쩌면 위화감을 야기할 수 있는 이런 대목을 어떻게 소설 속에 집어넣을 생각을 했을까? 위화감이 나지 않도록 쓰면 된다. 프루스트는, 작가는 쓰고 싶은 이야기는 뭐든지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능력만 있다면 말이다. "카라마조프"에는 있음직하지 않은 인물들, 있음직하지 않은 사건들로 범벅되어 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그것으로 아름다운 건축물을 지어 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삶의 진실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사실 성경이나 불경 등이 이런 것 아닐까? 있음직하지 않은 것들 속에서 현실의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 나는 진정으로 "카라마조프"를 한 사람의 인간이 쓴 성경이라고 생각한다.  

위의 친구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도스토옙스키 정도의 박력과 스케일과 깊이를 동시에 갖춘 이야기꾼이 다시 나타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 친구는 두 말 없이 동의. 나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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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튼햄 재즈 페스티벌에 다녀 왔다. 커다란 공원에 커다란 천막을 몇 개 치고 그 안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었다.

 

이렇다. 사람들이 엄청 많이 왔다. 하늘은 전적으로 영국적이다. 미국에서 온 뮤지션 하나가 영국 날씨에 대해 뻔한 조크를 날리더라. 나는 영국 날씨를 사랑한다.

 

저 혼잡한 틈에서 사 갖고 간 포도주와 올리브를 먹었다. 보안 요원이 돌아다니는데, 나같은 밀수꾼을 잡는 게 임무였나 보다. 우리 옆에서 대놓고 캔맥주를 까던 일행은 경고를 받았다. 결국 포도주 병 네 개 정도 압수해 가더라. 다행히 우리는 용의주도하게 포도주 병을 가방 속에 넣어두고 먹었다.

 

이런 춤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진에는 안나왔지만 앤 해서웨이 닮은, 정말 모두의 눈을 잡아끄는 매력적인 여자분이 있었는데, 우스운 것은 사람들이 이 분에게 춤을 쉬 청하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이 분은 춤을 추고 싶어하는데 파트너가 없어서 쉬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무료 공연장도 있다. 보통 공연을 여럿 예매하기 때문에 중간 빈 시간을, 먹고 마시며 놀거나 이 무료 공연을 즐기거나 한다. 무료 공연팀의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꽤 괜찮은 팀 공연을 보다가 예매했던 공연에 늦은 적도 있었다.

 

무료 공연 팀 중 꽤 괜찮았던 팀. 그러면 사람들이 이렇게 집중한다. 솔로 파트들이 진행되면서, 나는 아 이 사람들이 왜 온 몸을 던지지 않지!!! 하며 좀 더 에너지를 뿜어줄 것을 요구했었다. 아직은 거기까지가 이 사람들의 실력이려니 싶다.

 

무료 공연 팀 중 엉망이었던 팀. 아무도 집중하지 않는다. 기타 소리를 들리지도 않고 베이스 연주자도 오지 않았다. 게다가 무슨 배짱인지 박수 부대도 대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수 부대가 되어 주었다.

 

재즈 자메이카. 대편성이어서 지휘자도 있었다. 밥 머리의 곡을 주로 연주했던 것 같다. 코러스도 두 파트고, 내가 듣기에는 좀 산만했던 것 같다. 관객의 2/3는 백발의 노인들이었는데 기어코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춤을 추게 하더라.

 

오마 소사 쿼텟. 각 멤버들이 어마어마한 테크닉을 선보였다. 아프로-쿠바 음악이라 하지만 내 귀에는 실험적인 현대 음악처럼 들렸다. 관중을 일으켜 세워 춤을 추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내가 다녀본 웬만한 영국 공연장의 이용자 대부분은 노인분들이다.

 

베카 스티븐스. 원래 공연장 내에서 사진 찍는 건 금지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 올린 사진들은 다 부적절한 행위의 결과들이다. 그래도 모든 공연을 다 찍은 건 아니다. 그래서 베카 스트븐스의 사진은 없다. 예쁘게 생긴 백인 여자분이고, 포크 계열의 곡들을 주로 연주했다. 투명하고 청아한 목소리가, 우리가 주로 즐기고 있던, 아프리카, 캐러비안 음악들과 대비되었다.

 

크리스챤 소콧. 트럼펫과 색스폰이 경합하면서 압도적인 연주력을 보여 주었다. 우리가 본 공연 연주자들 가운데 가장 젊었고 그만큼 에너지도 넘치고 중간 중간 우스개도 많았다.

 

Mulatu Astatke. 이티오피아 재즈의 대부라고 하더라. 그런데 연주 악기는 실로폰에, (드럼도 아닌) 작은북이었다. 솔로를 할 때는 별로 복잡한 리듬을 연주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멤버들이 다 같이 일어나 환호를 하며 한없는 존경을 표하였다. 이 밴드는 소리의 마술사였다. 각 악기 파트를 종합해도 낼 수 없을 것 같은 소리를 내더라. 공연 끝나고 사인회를 한다고 했는데, 집에 올 길이 멀어서...

 

휴유증. 글쎄... 갔다오고 나니 음악에 대한 편견이 싹 사라지는 것 같았다. 설겆이 할 때 유튭이 추천해주는 것으로 러브송 모음같은 것도 그냥 듣게 된다. 올디스 송 모음을 듣다, 오리지널 곡이 아니라 이름도 없는 가수들이 부른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도 그냥 듣게 된다. 예전 같으면 이런 것에 질색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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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영국 맨 부커상 국제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기에, 예전에 읽다 만 것을 다시 꺼내 읽어 보았다.

 

<채식주의자>는 세 편의 중편으로 이루어진 연작 소설이다. 어느날 갑자기 고기를 먹기를 거부하고 나무가 되기를 원하는 영혜라는 인물을 중심에 설정하고 있다.

 

즉각적으로 이 소설은 타자성, 육체성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현대적 고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이 소설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고기로서의 자신의 육체를 거부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나무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반항은 무엇에 대한 것일까? 그것은 삶의 어느 자락의 어느 한편에 어떤 빛을 비추어 줄까?

 

미리 말하자면 이에 대한 답은 없다. 아마 작가는 이런 문제 의식 자체를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작가는 단지 고기를 먹기를 거부하고 자신을 식물적인 삶으로 향하게 하는 한 인물에 대한 간단한 아이디어밖에는 갖고 있지 않은 듯 하다.

 

작가에게 정신분석학자나 심리학자가 되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작가는 더 깊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소설적 완성도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그 깊이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세 편의 중편들은 허다한 결점과 아쉬운 점들을 남기고 있다. 그것들을 세세하게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러한 것들은 작가가 작품의 깊이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주제에 이런 허술한 이야기는 꽤나 실망스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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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2016-05-21 0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영국의 맨 부커상 국제 부문을 수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이 포스팅을 한 것도 한강이 수상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얼마 전에 런던 시내의 가장 커다란 서점인 호일스 서점에 갔을 때 입구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한강의 책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았었다. 뿐만 아니라 3층 벽면에 광고 패널이 여러 장 붙어 있기도 했다. 거기에는 ...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는 구절이 있었다. 지금 ...가 누구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를테면 젊은 비평가들이라든지 그런 것이었을 것 같다.

전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한강을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 오늘의 한국 작가에 대해 묻는다면, 나의 빈곤한 독서와 안목에도 불구하고 누구 한 두 명을 반드시 지목해야 한다면, 나는 한강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 말은, 적어도 내 생각에는 오늘의 한국을 이야기할 줄 아는 젊은 한국 작가가 그만큼 희소하다는 뜻이다. 누군가 용기를 내겠지...
 

총선날을 몰랐다가 늦게 결과를 알게 되었다. 여소야대라니!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야권의 승리가 가능할 수 있었을까? 이삼십대의 투표율 증가와 여당의 공천 파동에 따른 여권 지지자들의 소극적 투표 등등 때문이라고 하더라.

 

그러면 여권의 공천 파동이 없었다면 거의 무정부적인 국정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여당이 이겼을까? 이겼겠지...

 

한국에는 국가나 정부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이 있는 것 같다. 첫 번째는 국가는 국민의 행복에 책임을 진다는 입장이다.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것이고, 다수 국민들이 이 입장에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국가는 사실상 국민의 행복에 책임을 질 수 없으며, 국가의 책무는 무엇보다도 국가의 정체성을 수호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철저한 반공 노선을 고수하는 정부라면 정부로서의 책임을 거진 다한 셈이 될 것이다. 내가 관찰하기로, 일베가 바로 이런 입장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다수의 노년 세대 또한 그렇다. 국가가 어떻게 국민의 행복을 책임지나?

 

이런 입장들은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더 옳은가를 놓고 논쟁할 필요는 없다. 그런 논쟁은 시대착오적이기도 하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어떤 입장을 향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첫 번째 입장이다. 한국에서는 정부가 잘못하면 정권을 교체한다는 관념이 아주 충격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정권 교체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아시아에서 아주 흔한 일은 아니다. 독립 운동의 경험과 419의 경험, 민주화 투쟁의 경험, 정권 교체의 경험... 이러한 경험들은 한국 민주주의의 커다란 성과이자 자산이다. 그런데 새누리당 세력이 줄기차게 지워내려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자산이다. 그러므로 이 싸움은 본질적으로 이념 싸움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야권이 이념 싸움으로 가면 백퍼센트 진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봐서 그렇다. 그러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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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에 브룩랜드라는 커다란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이 곳에는 자동차 박물관과 비행기 박물관이 있다. 자동차 박물관은 매주 기획이 바뀌는데 이번에는 클래식 이층버스였나 보다. 사람들이 잔뜩 모여 들었다. 나는 물론 안가봤다. 돈 내야 하기 때문에...

 

오솔길을 따라 걷는데 앞 쪽에 꼬부랑 할아버지 할머니가 다리를 절며, 휘척 휘척 걷고 계셨고, 강아지 한 마리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강아지가 심심했는지 내게 뛰어들었고, 노인들은 미안하다며 강아지를 제지했다. 뒤에서 볼 때는 한국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백발 노인들이었는데 앞에서 보니 할아버지는 잘 생겼고, 할머니도 손톱을 잘 손질한 멋장이셨다. 날이 정말 좋지요? 할아버지가 영국인들이 애용하는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브룩랜드는 원래 자동차 경주로였고, 그 후에 비행기 공장이 세워졌다고 한다. 그때 우리가 걷던 오솔길은 거대한 자동차 경주로의 일부였다. 할아버지는 그 비행기 공장에서 일했었고, 할머니 말에 의하면, 이곳에 좋은 추억이 서려 있어서인지 자꾸 여기로 산책을 나오자고 하신단다. 아, 비행기요? 그럼 콩코드도? 콩코드도 여기 공장에서 만들었단다. 공원 입구 쪽에 거대한 콩코드 모형이 있는데, 그래서였구나...

 

산책길에서 만난 할머니는, 이젠 모두 추억이지... 라는 말을 반복했었다. 이런 말은 듣는 사람을 아련하게 한다. 동시에, 추억이라는 말에는 윤기가 있다. 사랑스러움, 자랑스러움, 약간의 아쉬움 등등. 그러나 모든 기억에 다 윤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가난으로 고생을 겪은 사람은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과거를 추억으로 기억하게 될 세대에 속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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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6-04-22 05: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부분...가난으로 고생을 겪은 사람도 윤기 있는 추억을 가질 수 있어요. 가난했던 시절이 풍요로운 지금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고 아름다우며 행복했다고 추억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weekly 2016-04-23 01:23   좋아요 1 | 수정 | 삭제 | URL
제가 너무 단정적으로 쓴 것 같습니다. 사실은 예전에 어디에선가 읽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과거에 대해 훨씬 적게 기억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떠올리며 쓴 대목이었습니다. 음... 그리고 그 `윤기`라는 것은 현재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 현재 여유롭고 너그럽고 성숙한 인격을 가진 분에게는 힘들었던 과거도 윤기 있는 순간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