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다가 명문당에서 나온 "대학 . 중용"을 발견했다. 아마 지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 아버지께 사다드린 것이었다. 하루 종일 멍하니 테레비젼만 보시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아버지는 철없는 아들을 바라보며 어이없어 웃으셨다. "너는 내가 지금 이런 책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냐?"


그래도 보시긴 했나보다. 아니 보시려고 노력은 하신 것 같다. 많이는 아니지만 여기 저기 줄이 그어져 있고 어려운 한자에는 동그라미도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보다 의미로운 것은 책갈피에 끼여 있는 종잇장이었다. 위임장이었다. 허리가 아파 병원에 갈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어 약을 받아오게 하겠다는... 2022년 4월7일.


아버지는 돌이킬 수 없는 육체적, 정신적 퇴락의 과정을 겪고 계셨다. 그 과정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끝에 무엇이 놓여있는지를 완벽하게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 퇴락의 과정은 철저하게 개인적이다. 그것은 타자에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자에게 죽음이란 남의 일, 혹은 자연적 현상일 뿐이다. 이 소통 불가능성은 일종의 절대고독을 구성한다. 혹은 절대고독의 원초적 의미를 구성한다. (예컨대 나는 어떤 성인들, 어떤 현인들이, 이를테면 노자가 토로하는 류의 그러한 절대고독은 허언이라 생각한다.)  


이 무자비한 죽음의 과정은 즉자가 최종적으로 대자를 잡아먹는 과정이다. 그렇게 인간은 완전한 사물이 된다. 이 완전한 사물화라는 회피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고대인들은 상상력을 발휘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완전한 탈-사물화를 위한 과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아이디어이다. 하나의 관념이다. 검증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믿음이기도 하다. (지식과 대비되는 의미로 믿음을 정의한다는 것은 얼마나 궁색한 이해인가?)


그러나 그에 어떤 서사를 덧붙이든 상관 없다. 우리에게는 고유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망자 앞에서, 성당에서 미사 드릴 때 등등에서 우리를 가능한 수동적인 사물로 침잠시키는 그 경험. 아마 종교적 체험이라 부를 수 있는. 아마 이 체험을 또한 절대고독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고유한 것도 원초적인 것도 아니겠지만. 


아마 그것은 무에 대한 것일 수 있다. 아마 그것은 삶의 의미에 대한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삶의 의미에 대한 학적 논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의미란 무엇일 수 있을까를 궁리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무화의 가능성 앞에서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로댕의, 지옥문 앞에 선 생각하는 사람처럼. 그러니까 여기서 완전한 무화의 가능성이란, 나를 향해 덮쳐오는 호랑이 앞에서 그러하듯, 내가 그 관념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념이 나를 덮쳐 사로잡는, 그런 전면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대학 . 중용"을 아버지의 유품으로 영국에 챙겨가지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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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라는 인물에 호불호가 따를 것이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트럼프 현상의 분명한 장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가 이념의 장막을 걷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념은 최우선의 고려 가치가 아니며 실용이 그것이다. 즉, 미국 이익이 최고 가치라는 것이다. (혹은 그 자신이나 그의 가족들의 사회 경제적 이득이 최고 가치일 수도...)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트럼프가 하는 일들이 자유 민주주의 진영의 확장을 위한 것일 거라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봐 트럼프는 친절하게 동맹국에게도 미국 우선주의에 입각한 청구서를 보낸다. 행동으로 오해의 여지를 없애주는 것이다.


이념은 매우 추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 하는 일이란 감정을 고양시킨 채 고정하는 것이다. 우선 좋은 편 나쁜 편을 가른다. 그러면 나는 자동적으로 좋은 편이 된다. 그리고 내 편이 아닌 것은 자동적으로 나쁜 편이 된다. 그러나 세상 일에 좋은 편 나쁜 편이 그렇게 편리하게 나누어지는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는 나쁜 편이고 우크라이나는 좋은 편인가? 유럽 사람들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때문에 망해가고 있다. 현대의 현자인 트럼프는 좋은 편, 나쁜 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강한 놈--약한 놈, 혹은 지혜로운 놈--멍청한 놈이 있을 뿐이라고 가르쳐준다. 이번 전쟁을 기획한 미국은 분명 사악한 놈일 것이지만 사악한 놈이 멍청한 놈보다 더 나쁜 것은 아니다. 사악한 놈은 적어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 것이니까. 그러니까 우크라이나나 유럽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최근의 딥시크 모멘트도 이념의 환상을 깨는데 일조하고 있다. 사람들은 '중국'이라는 단어에 우리가 싫어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몽땅 밀어넣는다. 그러다 문득 객관적 실재로서의 중국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오자 그동안 자신들이 쏟아냈던 중국에 대한 조롱의 말들이 사실은 질투나 열등감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즉, 그것이 자신들의 약함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이념은 소중하다. 이념의 장막을 걷고나면 각자의 실력이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묻어갈 수 없다. 낭패다. 그러므로 이념은 어떻게든 자신의 역량을 과장해보려는 가련한 시도이다. 윤석열은 걸핏하면 반 국가 세력을 입에 올린다. 이해해주자. 그 말을 빼고나면 윤석열이 내보일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인성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에게 그 말을 앗아가면 무엇이 남을까? 그런 사람은 지루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윤리학은 이념의 가능 조건을 구축함으로써가 아니라 이념을 제거한 후에 비로소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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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한국 뉴스를 잘 보지 않는다. 유튭도 로그 아웃 상태로, 내가 외우고 있는 채널명을 일일이 입력하여 주기적으로 체크한다. 삼프로 채널, 김영익 교수 채널 등등. 


그러다 오늘 삼프로 채널에서 이재명이 토론하는 것을 보았다. 1시간 반이나 되는 것을 끝까지 다 보았다. 그리고 기분이 좋아졌다. 요즘 시대 사람답게 표현하면 한국 주식이 사고 싶어졌다...


이재명과 삼프로 진행자들 사이의 토론, 대화는 한국에서는 도대체 희귀한 것이었다. 모두가 자기 말을 더 하고 싶어하는, 약간 떠들썩하고 혼잡스러운 분위기마저 좋았다. 방어적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말하고, 상대편 말에 귀기울이고, 그러면서 자신의 아이디어에 살을 붙이고, 또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정치인을 앉혀놓고 하는 토론이 생산적일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이번 편이 보여준 것 같다.


나는 이재명이 지난 번 대선 시절보다 업그레이드된 것 같아 놀랐다. 박영선이 국회의원이 되고 나니 책 읽을 시간이 도저히 나지 않더라는 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이재명은 무려 당대표다. 거기다가, (아직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일주일에 세 번 재판을 받으러 다닌다고 했다. 그러면 주기적으로 최신 동향을 파악하고, 정책 개발을 하고 등등을 할 시간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럴려면 많이 읽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런 시간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아마 거의 불가능하리라. 이재명의 지적 역량은 이미 수십년 간 변호사, 투자자, 행정가 등의 일을 하면서 축적되어 온 것일 것이고, 정치인이 되면서부터는 전문가 집단들과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에서 토론해 온 결과일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이번 편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재명은 상대편의 지식을 자기화하는데 매우 능숙해 보였기 때문이다. 작은 예를 들면, 이재명이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을 진행자가, "시장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거죠?" 라고 깔끔하게 정리해주자 이재명은 "세련된 언어로 정리해주셔서 감사하다" 며 웃었다. 아마 다음에 비슷한 주제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생기면 이재명은 분명 '성숙'이라는 말을 써서 간명하게 표현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느꼈다.


탄핵된, 그리고 탄핵될 두 명의 대통령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둘 다 토론을 할 수 없고, 지적 호기심이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둘이 대통령이 되고자 한 이유도 한없이 어설펐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윤석열은 부인의 사법 처리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뭘 하겠다는 비젼이 없다. 그러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토론하고 거기서 아이디어를 끌어올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어떻게든 유능한 사람을 찾아쓰겠다는 동기도 없다. 이것이 둘의 비극의 원천이자 한국의 비극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일정한 수준의 지적 역량을 갖춘다고, 또 토론을 좋아한다고 만사가 풀리는 것이 아님은 당연하다. 그것들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고난의 이유 중의 하나는 한국이라는 민주주의 국가이자 자본주의 강국의 대통령들 중에서 그런 자질이나 성향을 전혀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종종 등장한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퇴행적 정치 인사들의 등장에 대해서는 한국인들 전체가 스스로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현대 민주주의 시민으로서의 역량을 갖추고 있는가? 그러나 이를 도덕적 차원에서 접근하여 스스로를 반성하고 등등을 할 필요는 전혀 없다. 나는 위대한 정치인은 위대한 교사라고 생각하며, 좋은 정치인이 진영 논리라는 편함에 안주하지 않고 모든 것을 투명하게 열어놓고 토론하고, 반론하고, 받아들이고, 포기하고, 실행하고 등등의 모습을 보여주면 사회 전체가 그것을 새로운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그걸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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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동서문화사 월드북 27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권기철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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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옛날에 이 책을 읽고 이 블로그에 리뷰를 쓴 기억이 나는데 찾을 수 없다...


여튼 오랜만에(어쩌면 10년 정도 만에) 쇼펜하우어의 이 대작을 다시 읽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공감을 하느냐 여부를 떠나 읽는 재미를 주는 몇 안되는 철학 저작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저작을 이해하기 위해 미리 읽어놓아야 한다고 일러준 책들을 읽지 못했다. 내 생각에는 그 책들을 꼭 읽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제1권의 중반부 정도까지 읽어낼 수 있으면 나머지 부분을 독파하는데 큰 문제는 없는 것 같다.


이 책은 두 가지 형이상학적 사유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첫째는, 세계가 나의 표상은 아닐까, 세계는 내가 꾸는 꿈이 아닐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삶, 이 우주의 드라마는 어떤 우주적인 맹목적인 힘에 의해 전개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기본적인 발상을 칸트 철학에서 빌어온 개념과 구도로 짜맞춘다. 쇼펜하우어는 칸트 철학 전문가로 자처하고 있고, 칸트에 많이 빚진 것으로 이야기하는데, 내가 읽기로 그의 철학과 칸트 철학은 별 연관이 없는 것 같다. 개념적으로나 분위기적으로나 둘은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다른 방향에서 이야기하자면 그의 철학의 주된 기조, 그 뼈대와 분위기는 인도 철학에서 직접 빌어온 것 같다. 인도의 철학자가 서구에 유학하여 칸트 철학을 연구하고 쓴 책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렇게 말하면 쇼펜하우어가 좋아할라나?)


이 책의 백미는 예술론을 다루고 있는 제3권, 그리고 윤리학 일반을 다루고 있는 제4권이다. 3권까지는 어느 정도 도식적이지만 4권의 첫 중반은 매우 풍부한 사상을 담고 있다고 느꼈다. 4권의 나머지 절반은 대놓고 인도 철학적이기 때문에 그다지 흥미를 끌지는 않는다. 4권의 첫 중반이 풍요한 사상적 영감을 주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쇼펜하우어가 그리고 있는 구도에 잘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 혹은 그러한 구도를 전제하지 않고도 충분히 철학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몇몇 현대 철학자들의 영감의 원천이 거기였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이 책은 쇼펜하우어 스스로 말하듯 아주 단순한 사상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책의 부피는 결코 만만치 않다. 그러니 무수한 반복은 피할 수 없다.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저자는 페이지 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기 템포에 맞추어 아낌없이 하고 있구나. 그러므로 독자로서 이 작품을 최대한 즐기는 방법은 그 여유로움을 느슨하게 따라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같은 세상에 이런 여유로움은 도대체 시대착오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두툼한 저작을 몇 십 페이지로 요약했을 때, 그 요약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정신적 경험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마치 관광 버스를 타고 지리산 노고단에 오르는 것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들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경험일 것이다. 노고단에 버스를 타고 오르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곱 고비를 기어오르며 거기에 도달하는 길도 있다는 사실이 잊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문명의 진화가 이 후자를 삭제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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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상성'. 물론 폭력적인 말이다. 그러나 그에 너무도 적절한 맥락이 있다면? 


요즘 AI 도구들을 이거 저거 테스트해보고 있다. 어떤 거대 언어 모델을 써서 어떤 책을 요약시켜 보았다. 다음은 그 결론 부분이다. AAA는 그 책의 저자, BBB는 그 책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원저작이다.


"AAA's guide is both an introduction to BBB and a resource for deeper engagement with its [philosophical, psychological 등등 아무 말이든] implications. By unpacking the intricate arguments and addressing potential challenges for readers, the guide fosters a greater understanding of BBB and its significance within the broader landscape of contemporary [philosophy, economics 등등 아무 말이든]."


일단은, AI가 아직 한계를 드러내고 있음을 보면서 안도감과 실망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러면서 어떤 윤리적 관념에 예민해진다. 위 인용문에 포함되어 있는 빛좋은 낱말들을 보라. deeper engagement, implications, unpacking, intricate arguments, potential challenges, foster a greater understanding, its significance, broader landscape... 아름다운 말들이지만 내용은 하나도 없다. 말이 아니 되지는 않지만 껍데기 뿐이다.


그리하여 도달한 윤리적 교훈. 타에 대해 피상적이라 지적하게 되는 바로 그 부분에 스스로를 머무르게 해서는 안된다. 간단하게, 피상성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피상성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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