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라는 인물에 호불호가 따를 것이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트럼프 현상의 분명한 장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가 이념의 장막을 걷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념은 최우선의 고려 가치가 아니며 실용이 그것이다. 즉, 미국 이익이 최고 가치라는 것이다. (혹은 그 자신이나 그의 가족들의 사회 경제적 이득이 최고 가치일 수도...)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트럼프가 하는 일들이 자유 민주주의 진영의 확장을 위한 것일 거라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봐 트럼프는 친절하게 동맹국에게도 미국 우선주의에 입각한 청구서를 보낸다. 행동으로 오해의 여지를 없애주는 것이다.
이념은 매우 추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 하는 일이란 감정을 고양시킨 채 고정하는 것이다. 우선 좋은 편 나쁜 편을 가른다. 그러면 나는 자동적으로 좋은 편이 된다. 그리고 내 편이 아닌 것은 자동적으로 나쁜 편이 된다. 그러나 세상 일에 좋은 편 나쁜 편이 그렇게 편리하게 나누어지는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는 나쁜 편이고 우크라이나는 좋은 편인가? 유럽 사람들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때문에 망해가고 있다. 현대의 현자인 트럼프는 좋은 편, 나쁜 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강한 놈--약한 놈, 혹은 지혜로운 놈--멍청한 놈이 있을 뿐이라고 가르쳐준다. 이번 전쟁을 기획한 미국은 분명 사악한 놈일 것이지만 사악한 놈이 멍청한 놈보다 더 나쁜 것은 아니다. 사악한 놈은 적어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 것이니까. 그러니까 우크라이나나 유럽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최근의 딥시크 모멘트도 이념의 환상을 깨는데 일조하고 있다. 사람들은 '중국'이라는 단어에 우리가 싫어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몽땅 밀어넣는다. 그러다 문득 객관적 실재로서의 중국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오자 그동안 자신들이 쏟아냈던 중국에 대한 조롱의 말들이 사실은 질투나 열등감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즉, 그것이 자신들의 약함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이념은 소중하다. 이념의 장막을 걷고나면 각자의 실력이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묻어갈 수 없다. 낭패다. 그러므로 이념은 어떻게든 자신의 역량을 과장해보려는 가련한 시도이다. 윤석열은 걸핏하면 반 국가 세력을 입에 올린다. 이해해주자. 그 말을 빼고나면 윤석열이 내보일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인성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에게 그 말을 앗아가면 무엇이 남을까? 그런 사람은 지루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윤리학은 이념의 가능 조건을 구축함으로써가 아니라 이념을 제거한 후에 비로소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