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도서는 열린책들에서 진행한 서평 이벤트에 당첨돼 제공받았습니다.>동사 “하다“를 주제로 우리가 하는 다섯 가지 행동 ‘걷다, 묻다, 보다, 듣다, 안다’에 관해 25명의 작가가 참여한 앤솔러지 중 네 번째 <듣다>이다.다섯 명의 작가가 전하는 듣는 행위에 관한 이야기는 과연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얼마나 귀를 기울여 집중해 들었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7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지만, 이제는 멀어진 ‘L‘과 ’나‘의 이야기인 <사송>은 둘이 내뱉는 언어가 대화보다는 독백에 가까워 그들이 만나온 세월이 더 서글펐다.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내가 하는 말소리를 나만 듣지 못하는 상황에 내몰린 <전래되지 않는 동화>는 실제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잘 들으려 노력하면서 내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는 무심한 우리의 모습처럼 느껴져 쓸쓸하다.엄마와의 갈등으로 가출 후 삼촌과 지내게 된 아이의 이야기 <폭음이 들려오면>은 한 번 어긋나면 다시 되돌리기 어려운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며 나는 얼마나 아이들 말에 귀 기울였나 되돌아보게 된다.엄마가 다쳤다는 소식에 오랜만에 찾은 <나의 살던 고향은> 엄마의 비밀을 알게 된 ‘영지‘는 약속을 실행하지 않고 되돌아올 수 있는 길이 아닌 마음의 소리에 따라 일을 저지르게 된다.가장 선명하게 읽혔던 이야기 <하루치의 말>은 ‘애실’과 ‘현서’의 관계가 내내 불안불한하더니 기어코 생각했던 방향으로 진행돼 서글퍼진다.애실이 끝까지 현서가 했던 말을 믿었고, 사정이 있을 거라 이해하려 하는 모습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마지막 남긴 현서의 말은 비수처럼 꽂혀 입을 다물게 된다.조용하다는 거야. 원하는 만큼 조용하게 있을 수 있다는 거. 아무 이야기도 안 들어도 된다는 거.현서는 결심한 듯 자세를 고쳐 앉고 마지막 말을 건넸다.애실아, 그동안 네 이야기 들어 주는 거 나 너무 힘들었어.어쨌든 일이 이렇게 되어서 미안하다. 돈은 어떻게든 갚을게. 더는 오지 마. (p62) 나이가 들어가면서 말하기보다 어려운 게 제대로 듣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누군가가 하는 말을 오해 없이 듣기가 어려워 차라리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고 하루를 보낸다면 평안해질 수 있겠다 싶기도 하다.그래서인지 원하는 만큼 조용하게 있을 수 있어 좋다는 현서의 말은 특별하지 않은 어떤 말인가를 뱉으려는 내 입을 막고 귀를 열게 한다.
새 학년이 시작되는 첫날엔 어떤 친구들과 같은 반이 될까도 궁금하지만 새롭게 만날 담임 선생님이 누굴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학교에 가게 됩니다.초등학교의 마지막 학년을 시작하는 날 새로운 선생님을 맞이하게 될 아이들 앞에 기대와는 다르게 뚱뚱하고 흰머리가 사방으로 뻗치고 코끝에는 조금만 안경을 걸친 할아버지 선생님이 등장합니다.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선물 꾸러미를 하나씩 주는데 그 안에는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카드와 비슷한 카드가 들어있습니다.“잠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을 때 쓰는 조커,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을 때 쓰는 조커, 지각하고 싶을 때 쓰는 조커, 숙제를 하고 싶지 않을 때 쓰는 조커, 떠들고 싶을 때 쓰는 조커……“조커 카드에 적힌 글을 읽고 난 후 아이들은 황당해하면서도 흥분합니다.아이들이 기대했던 선생님과는 전혀 다른 노엘 선생님은 아이들의 하루하루를 선물처럼 만들어 줍니다.어른이 보기에는 위태위태해 보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꽉 막힌 숨통을 조금은 틔워주는 선생님입니다.하고 싶지 않은 걸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걸 해도 천재지변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준 노엘 선생님의 교육관에 모두 찬성할 수는 없지만 조커가 필요한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었습니다.“인생에는 조커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너희가 사용하지 않는 조커들은 너희와 함께 죽고 마는 거야.” (p42)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소년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할아버지의 죽음을 비밀로 할 결심을 하고 친구를 부른다.야구를 즐기는 이웃집의 함성과 울음마저 삼키며 ‘냉장고’를 비우는 소년의 모습이 대조적이라 더욱 마음이 아파진다.끝을 알 수 없는 ‘깊고 검은 구멍’ 같은 입속 반짝이는 금니를 매입하는 구둣방 남자에게 금니를 팔러 오는 큰 단골이 생긴다.처음에는 많은 양의 금니를 가져오는 남자의 정체를 궁금해하던 남자는 짭짤한 수입에 그를 기다리게 되고 어느 날 그의 진짜 모습을 만나게 된다.어린 시절 잦은 이사와 부모의 야반도주로 초등학교 시절 친구가 없는 승주는 카페에서 어릴 적 친구인 유미라는 이름의 사원증을 걸고 있는 여자에게 아는 체를 한다.승주의 불안했던 어린 시절과 ‘아는 사람’이 된 유미의 이야기가 쓸쓸하지만 둘의 관계가 계속 이어질 것 같아 작은 위안을 얻게 된다.소설 속 등장인물은 아이든 어른이든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죽음마저도 평안한 끝이 아니라 더한 고통으로 이어지고 우연히 찾아온 행운은 행운이 아니라는 걸 머지않아 깨닫게 되기도 한다.아들이 내던 소음이 사라지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에 던져지는 부모도 있다.어린 시절 어른만 되면 뭐든지 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실제로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된 현재는 생각했던 것만큼 넉넉하지 않고 자유롭지도 않다.<어른의 미래> 속 인물들은 어린 시절 꿈꾸던 어른의 미래가 아니라 내가 현재 살고 있는 팍팍한 어른의 모습이다.11편의 짧은 소설은 지금까지 읽었던 작가의 다른 소설과는 다르게 피도 개구리도 쓰레기도 쥐도 구역질 나는 존재들도 나오지 않는다.그럼에도 짧은 소설은 짧은 창끝처럼 날카롭게 현실을 찌르며 편혜영이 편혜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려준다.
<본 도서는 비채 서포터즈 활동 중 제공받았습니다.>노르웨이 작가 ‘요 네스뵈’의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의 열세 번째 이야기다.미국으로 건너간 해리는 허름한 술집에서 매일 술잔을 기울이며 인생을 허비하던 중 중년 여성 ‘루실’과 친구가 된다.멕시코 갱단에게 큰 빚을 진 루실은 어느 날 갱단에게 잡히고 해리는 본능적으로 루실을 구해 도망치다 갱단 일원을 크게 다치게 한다.숨어있던 둘을 찾아낸 갱단은 루실을 인질로 삼고 해리에게 루실이 진 거액의 빚을 변제할 것을 요구한다.한편, 오슬로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실종된 두 여성이 참혹한 모습의 변사체로 발견되고 접점에 오슬로의 부동산 재벌인 ‘뢰드‘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게 된다.자신의 결백을 증명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뢰드는 해리를 찾게 되고 해리는 거액의 빚을 갚아주는 조건으로 사건 해결을 위해 오슬로로 돌아온다.사실 작가는 물론 ’해리 홀레’라는 시리즈를 알지 못했기에 소설을 읽기 전 가장 큰 걱정은 전편의 이야기를 한 편도 읽지 않았다는 것이었다.그것도 초반 한두 권이 아니라 열 편이 넘는 이야기인데 욕심에 읽겠다고는 했지만, 과연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후회가 앞섰다.하지만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고, 소설에 들어가기 전 시리즈의 전권에 대한 간략한 줄거리와 등장인물에 대한 소개가 있어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뭐부터 말해야 할지. 불성실. 근무 중 중대 과실. 술에 취한 채 근무한 알콜의존자. 폭력 사건 여러 건. 약물남용 등등. 처벌은 피했지만 동료 한 명 이상의 죽음에 책임이 있고요. 요컨대 양심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잡아들인 범죄자 대부분보다 범죄를 더 많이 저지른 자죠. 게다가 같이 일하기에는 악몽 같은 자일 겁니다.” (p50)뢰드의 변호사가 전한 해리 홀레의 인상이 매력적이지 않은 탓인지 특별한 관계가 아닌 루실을 위해 거액의 채무를 갚겠다는 약속을 하는 모습이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오슬로에 돌아와서도 단주하지 못하고 여자관계 또한 맺고 끊음이 분명치 않아 과연 사건의 중심에 다다를 수 있을까 의심이 들었다.하지만 사건 해결을 위해 인생의 막다른 길에 다다른 인물들을 모아 그들에게 적절한 임무를 부여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모습에서는 전문가다움이 느껴진다.사건은 잔인하고 희생자들은 참혹하게 죽음을 맞이하지만 진범이 드러나고 살인 도구가 밝혀지는 순간 느껴지는 전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놀랍고, 참신하기까지 하다.살인 뒤에 숨겨진 아동에 대한 성 착취가 아이의 일생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껴져 마음이 아픈 탓에 악인이 죽음으로 끝을 맺지만, 생각만큼 통쾌하지는 않았다.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의 전작을 차례대로 모두 읽었다면 더 재미있었겠지만 <블러드문>으로 시리즈의 첫발을 내디뎌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600페이지가 넘는 페이지 수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열세 번째 이야기를 읽고 난 후 시리즈의 시작인 #박쥐 가 더 궁금해진다.
<본 도서는 비채출판사 서포터즈 활동 중 제공받았습니다.>1992년생인 작가는 두 권의 시집을 베스트셀러에 올려 BBC 선정 ‘세계를 장악하는 여성 시인’에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네가 누구든>은 작가의 첫 장편소설로 출간과 동시에 영화화가 확정되고 “미래의 기술이 정체성과 고독, 우정이라는 인류 고유의 문제에 어떻게 파고드는지 보여주는 눈부신 데뷔작“(책날개 소개 글)이라는 찬사와 함께 2024년 <타임> ’반드시 읽어야 할 책 100권’에 선정된다.산타크루즈 해안가의 작은 마을의 집들은 여러 해 전부터 공유 숙박시설이나 여름 별장으로 개조되면서 미티와 베델은 그곳의 마지막 거주민으로 남는다.혈연관계는 아니지만 엄마의 지인인 베델과 10년 전부터 함께 사는 미티는 식당에서 접시 닦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시간이 나면 동네를 산책하고 토요일 밤엔 베델과 함께 영화를 보는 등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살아간다.그러던 어느 날 오랫동안 비어있던 ‘온통 유리로 되어 있어 마치 벽이 없는 것‘(p11)처럼 보이는 일명 ‘인형의 집’으로 불리던 이웃집에 새로운 사람들이 이사 온다.부유한 데다 누구보다 자신의 파트너인 레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새베스천과 눈부시게 아름다운 외모를 갖은 레나는 완벽한 커플로 보인다.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미티과 베델를 중심으로 펼쳐지던 소설은 레나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는다.미티와 레나가 가까워질수록 10년 동안 집을 떠나 베델과 함께 살 수밖에 없었던 미티의 비밀이 드러나고 완벽해 보이던 레나의 생활에 균열이 생기면서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소설을 읽은 내내 10년 동안 숨겨왔던 미티의 비밀이 궁금하고 무엇보다 혈육이 아닌 미티와 아무 조건 없이 10년 동안 함께한 베델의 사랑이 위대해 보인다.서로에게 끌리는 미티와 레나의 관계를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어렵지만 자석처럼 끌리면서도 그 마음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 불안해하는 둘의 사이가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공통점이라고는 없는 두 여성이 서로를 통해 진짜 자신을 찾는 과정은 단순한 퀴어 소설이 아닌 미스테리함을 가미해 끝까지 흥미진진하다. 새베스천에 완전히 종속돼 있던 레나의 완벽한 모습 뒤에 숨겨진 비밀이 밝혀진 순간 영화 ‘스텝포드 와이프‘가 떠오르는 것은 레나의 미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10년 동안 사과하지 않은 자기 잘못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숨지 않는 미티와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자신의 본모습을 찾아 나선 레나의 앞날이 그녀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그럼에도 과거의 잘못 앞에 당당히 서려는 미티와 편안함에 안주하지 않고 진실에 다가가는 레나를 응원하며 그들이 자유롭고 행복해지기를 바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