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
1. 정치는 권력 행사가 아니다. 정치는 그 자체로, 즉 고유한 주체 때문에 현실화되며, 고유한 합리성에서 유래하는 특정한 행위 양식으로서 정의해야 한다. 정치적 주체를 사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정치적 관계이지, 그 역이 아니다.
- 정치는 권력 행사나 권력을 소유하기 위한 투쟁, 정당성의 토대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정치는 고유한 주체, 정치를 고유하게 정의하는 특정한 관계 속에, 참여/몫을 가짐avoir part에 있다. 순수 정치 혹은 정치철학의 회귀(아렌트, 레오 스트라우스)는 공공선,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분리를 주장하지만 이는 정치를 통치적 과두정으로 이끌 뿐이며 국가적인 것으로 단순히 환원시켜버린다. 정치를 특정한 체험세계로 생각한다면 정치의 고유함은 사라지며, 정치에 고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체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주체가 정의되는 모순적인 두 항들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다.
2. 정치의 고유함은 대립되는 것들에 참여하는 것으로 정의되는 주체의 실존이다. 정치는 역설적인 행위 유형이다.
- 정치는 평등한 자들에 대한 지배이며, 시민은 지배한다는 사실과 지배받는다는 사실에 참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정식의 역설. 삶과 좋은 삶의 대립을 이어받는 행위의 두 양식(포이에시스-프락시스)이라는 고전적 대립으로는 이 역설을 극복할 수 없다. 아렌트에게 프락시스는 archein(시작하다 = 지배하다 = 자유롭다 = 도시국가에 살다)의 힘에 있어서 평등한 자들의 질서이다. 그러나 archein, 즉 앞장서서 걷는 자가 있으면 다른 자들은 반드시 뒤에서 걷기 마련이다. 아르케의 논리는 한정된 열등에 대해 행사되는 한정된 우월을 전제하는데, 정치의 주체 그리고 정치가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논리와 단절해야 한다.
3. 정치는 아르케 논리와의 특정한 단절이다. 그것은 사실 힘을 행사하는 자와 그것을 감수하는 자 사이의 ‘정상적인’ 위치 분배와 단절하는 것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이 위치들에 ‘고유하게’ 만드는 자질들에 대한 관념과 단절하는 것이다.
- 플라톤은 통치할 자격들과 통치받을 자격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했다(법률 3권). 그가 고려하는 일곱가지 자격들 중 네 가지는 본성의 차이, 출생의 차이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권위의 자격들(부모, 연장자, 주인, 귀족)이다. 다섯 번 째 자격은 우월한 본성의 권력, 더 약한 자들에 대한 더 강한 자들의 권력이며, 여섯 번 째 자격은 알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아는 자들의 권력이다. 즉 본성상의 우위와 앎의 지배가 있다. 하지만 일곱 번 째 자격이 있는데 이는 신의 선택에 속하는 것으로, 누구에게 아르케의 행사가 돌아갈지 지정해주는 제비뽑기의 사용이다. 민주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제비뽑기, 즉 통치할 자격의 부재다. 민주주의는 자격의 부재가 아르케를 행사할 자격을 부여하는 특정한 상황이다. 민주주의는 시작 없는 시작이며, 지배하지 않는 자의 지배이다.
4. 민주주의는 하나의 정치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르케 논리와의 단절, 곧 아르케의 자질로 지배를 예견하는 것과 단절하는 것이며, 특정한 주체를 정의하는 관계 형태로서 정치 체제 자체이다.
- 민주주의의 공리를 구성하는 인민의 자유의 실질적 내용은 지배의 공리계(지배할 능력과 지배받을 능력의 상관관계)와 단절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어느 특수한 정체를 뜻하는 정치 체제가 아니라, 정치를 설립하는 것institution, 정치의 주체와 그것의 관계 형태를 설립하는 것이다. 데모스의 통치는 통치할 자격을 갖지 않았음을 유일한 공통의 특성으로 갖는 자들의 통치이다. 데모스는 셈 바깥에 있는 자, 말하지 않아야 하는데 말하는 자, 몫이 없는 것에 몫을 갖는 자이다.
5. 민주주의의 주체인, 따라서 정치의 모체가 되는 주체인 인민은 공동체 성원들의 모임도 노동하는 주민 계급도 아니다. 인민이란 주민의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과 비교하여 보충이 되는 부분으로서 셈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셈을 공동체 전체와 동일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 인민(데모스)은 인종과 다르고, 주민의 한 부분이나 부분들의 합계와 다르다. 인민은 정당한 지배 논리들을 중단시킴으로써 주민을 그 자체로부터 탈구시키는 보충이다. 인민이란 출생의 원칙을 이어가기 위해 부의 원칙을 부여하는 논리를 가로막은 고안물artifice이다(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인민은 셈해지지 않은 것을 셈하기 혹은 몫 없는 자들의 몫, 최종심급에서 말하는 자들의 평등을 기입하는 보충적인 존재이다. 민주주의는 공동체를 사회체의 부분들의 합에서 분리하는 텅 빈 보충적 부분을 공동체 전체와 동일시한다. 이 근본적 분리는 정치를 사회의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과 비교하여 잉여로서 스스로를 기입하는 보충적 주체들의 행위로 정초한다. 정치 문제의 모든 핵심은 공백과 잉여를 해석하는 것에 달려 있다. 클로드 르포르의 민주주의론에 대한 두 가지 해석(공백은 아나키, 공백은 왕의 인간적이고 신적인 이중 신체를 해체함으로써 나오는 산물). 그러나 인민의 이중적 신체는 주권자의 신체를 희생시켜 나온 것이 아니라 정치를 구성하는 것으로 원래 주어져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더불어 정치를 정초하는 아르케의 분할은 어떤 정초적 희생이 아니라 모든 희생적 신체의 중화이다.
6. 만일 정치가 사회적 부분들과 몫들의 분배와 함께 사라져가는 차이에 대한 설계도라면, 그로부터 정치의 실존은 조금도 필연적이지 않으며, 지배 형식들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잠정적인 우연적 사건으로서 도래한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또한 마찬가지로 정치적 계쟁은 정치의 실존 자체를 그 본질적인 대상으로 한다는 사실이 따라 나온다.
- 인민이 셈해지지 않은 것을 셈하는 특정한 형상이나 몫 없는 자들의 특정한 형상을 사회의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에 보충으로 기입하는 주체일 때 정치는 존재한다. 이러한 몫이 존재하느냐 아니냐가 바로 정치의 쟁점이며 정치적 계쟁의 대상이다. 부자들과 빈자들의 싸움은 단어들이 나눠질 수 있는 가능성을 위한 싸움이며, 공동체를 다른 식으로 셈하는 범주들을 설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위한 싸움이다. 공동체의 부분들을 셈하는 두 가지 방식. 첫 번째 것(치안)은 사회체를 구성하는 출생, 직무, 자리, 이해의 차이들로 정의되는 실제 부분들을 셈하며 모든 보충을 제외한다. 두 번째 것(정치)은 몫이 없는 자들의 몫을 더 셈한다.
7. 정치는 특정하게 치안과 대립한다. 치안은 공백과 보충의 부재를 원리로 하는 하나의 감각적인 나눔이다.
- 치안은 사회적인 것의 상징적 구성이다. 치안의 본질은 억압이 아니며 생명체에 대한 통제(예컨대 푸코)도 아니고,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다. 이는 지각 방식들을 규정함으로써 참여/몫을 가짐의 형식들을 규정한다. 치안의 본질은 공백과 보충의 부재로 특징지어진다. 없는 것에 대한 배제야말로 치안 원리이다. 정치의 본질은 공동체 전체와 동일시되는 몫 없는 자들의 몫을 보충하면서 이 타협을 교란시키는 것이다. 치안은 정치의 논리를 부정하지만, 정치의 본질은 가시적인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개입이며 치안으로부터 정치를 분리하는 것이다.
8. 정치의 중대한 작업은 그것의 고유한 공간을 짜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의 주체들의 세계 그리고 정치가 작동하는 세계를 보이게 만드는 데 있다. 정치의 본질은 두 세계가 하나의 유일한 세계 안에 현존하는 불일치를 현시하는 것이다.
- 공적 공간에 치안이 개입하는 것은 시위자들을 호명(알튀세르)하는 것이 아니라 해산시키는 것으로 이뤄진다. 치안은 도로를 그저 통행 공간일 뿐이라고 말한다. 정치는 이 통행 공간을 한 주체의 현시/시위 공간으로 변형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정치는 공간의 모양을 바꾸는 것, 거기서 할 것이 있고 볼 것이 있으며 명명할 것이 있는 것으로 바꾸는 것으로 이뤄진다. 정치는 공동체의 모든 nomos를 정초하는 나눔nemein 위에 설립되는 계쟁이다. 정치란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게 만드는 것, 소음으로만 들릴 뿐이었던 것을 말로서 듣게 만드는 것, 쾌나 고통의 표현으로 나타난 것을 공통의 선과 악에 대한 느낌으로 나타나게 만드는 데 있다. 정치의 본질은 불일치, 감각적인 것과 그 자체 사이의 틈을 현시하는 것이다. 정치적 현시는 보일 이유가 없던 것을 보게 만드는 것, 한 세계를 다른 세계 안에 놓는 것이다. 정치적 불일치의 고유함은 대화 상대자들나 토론의 대상 또는 무대가 미리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있기에 정치는 의사소통 행위 모델(예컨대 하버마스)과 동일시될 수 없다. 정치적 논증이란 분리된 세계들을 한데 모아놓는 역설적인 세계의 구성이다. 정치적 주체는 계쟁이라는 특수한 주체화 장치를 작동시키는 자이다. 정치적 현시는 늘 일시적이고 그 주체들은 늘 불안정하다. 정치적 차이는 언제나 소멸의 가장자리에 있다.
9. 정치철학의 고유함이라는 것이 고유한 존재 방식 속에서 정치행위를 정초하는 것인 한, 정치철학의 고유함은 정치를 구성하는 계쟁을 삭제하는 것이다. 정치 세계를 묘사하는 가운데 철학은 이 계쟁 삭제를 실행한다. 또한 그것의 실효성은 이 세계에 대한 철학적이지 않은 반철학적 묘사들 속에서까지 이어진다.
- 정치철학이라는 용어로 아르케 법의 비호 아래 정치를 재위치시키려는 철학의 노력이 은폐된다. 플라톤은 아르케-정치를 도시국가의 에토스와 노모스 사이의 단일성의 법칙으로 세우고 정치와 치안을 동일시한다. 그는 또한 정치 형태들에 대한 사회학적 혹은 정치학적 분석과 철학적 선험주의 사이의 대립형태들을 발명한다.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회-론(토크빌), 정치적 삶의 순수성에 대한 주장, 공화주의적 재정초의 선험주의(아마도 아렌트). 이러한 정치와 정치철학의 회귀는 정치를 망각하는 것으로 향한다.
10. 정치의 종언과 정치의 회귀는 사회적인 것의 상태와 국가 장치의 상태 사이의 단순한 관계 속에서 정치를 제거하는 상호 보완적인 두 방식들이다. 합의는 이러한 제거를 가리키는 통속적인 이름이다.
- 정치의 본질은 사회가 사회 자체에 대해 갖는 차이를 현시하는 불일치하는 주체화 양식들에 있다. 합의는 정치를 치안으로 환원한다. 정치의 회귀와 정치의 종언은 같은 효과를 내는 대칭적인 두 해석들이다. 순수 정치로의 회귀는 사회적인 것이 정치의 계쟁 대상 자체라는 사실을 감추며 정치를 국가적 실천과 동일시한다. 정치의 종언에 대한 사회론적 테제(헤겔-후쿠야마 또는 하이데거-상황주의자 식의 비의적 판본) 역시 사회적인 것의 상태를 제시함으로써 정치의 존재 이유를 없앤다. 이 테제는 자본주의가 정치의 소권 소멸을 이끈다는 것으로 요약되는데 이 역시 정치를 국가적 실천과 동일시한다. 정치의 회귀를 주장하는 철학자와 정치의 종언을 주장하는 사회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정치를 취소하는 합의의 실천을 해석하기 위해 정치철학이라는 전제를 취해야만 하는 질서 위에서 벌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