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오역이 많군; 어떻게 보면 취향 차이라고 볼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레닌보다도, 바디우를 포함하여 당대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의 마오에 대한 열광이 흥미롭고 그 배경이 궁금하다. 물론 이 글만 가지고 하는 얘기는 아니고, 그러니까 바디우의 친한 친구?인 지젝을 읽을 때도 궁금한 점이지만, 바디우의 이런 입장(실재, 사건 등의 존재론)이 오늘날 정치철학에 또는 대중정치에 어떤 식의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정치를 윤리로 환원하기. 그러고보니 아래 글에 정작 레닌 얘기는 별로 없고;; 전체 요지는 오늘날 도처에 만연한 침울한 강박증에 맞서 (니체처럼) 가치전환해라, 행위해라, 새로운 것을 만들어라 정도가 되겠다.
<레닌 재장전>, 알랭 바디우, 하나는 스스로를 둘로 나눈다.
(영어본 p. 7~10)
오늘날 레닌의 정치적 저작들은 거의 민주주의 대 전체주의 독재라는 고전적인canonical(국역27 ; 규범적인) 대립구도 속에서 재검토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은 진작 있었는데, 레닌을 비판했던 카우츠키 등 사민주의자들이 기댄 범주가 민주주의였다. 당시 반동분자들과 착취자들의 선거권을 박탈하려던 러시아 볼셰비키에 반대하여, 대의제와 의회 주도의 정치 체제를 당연히 여긴 카우츠키는 투표권을 전적으로 강조했다. 레닌은 이러한 측면에서 카우츠키의 이론적 편향deviation(국역28배신)을 보았다. 문제는 카우츠키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일반의 문제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일반의 문제에 개입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원칙을 어기기 위해 러시아에 국한된 전술적 결정 운운하는 것, 원칙의 문제로 정의되는 정치 개념을 개량주의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부차적 모순에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언제나 편향의 본질이다. 결국 이론은 문제의 국면을 사유 속에 통합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문제의 국면은 전술적이거나 지엽적이고 특수한 결정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승리의 원칙에 의해 규정된다. 레닌은 승리, 혁명적 정치에서 실재the real(국역29 ; 가장 실질적인 것)를 이론의 내적 조건으로 변화시킨다.
1917년에서 70년대 말에 이르는 이 세기는 이데올로기적이거나 상상적인 것의 세기, 유토피아의 세기가 아니다. 이 세기의 주체적 규정은 레닌주의이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직접적으로immediately(국역30즉각적으로) 실천 가능한 것에 대한, 실재에 대한 열정이다. 이 세기는 선언과 미래의 세기가 아니라 행위the act(국역30;행동)와 실행의 세기, 절대적 현재의 세기이다. 20세기는 승리의 시대, 혁명의 시대이다. 레닌에게 승리의 도구는 최종적이고 총체적인 전쟁을 준비하는 이론적, 실천적 명료성이다. 이 세기는 그래서 전쟁의 세기인데, 이는 둘 또는 적대적 분열이라는 문제 주의를 배회한다. 이 세기는 자신의 법이 둘, 즉 적대라고 선언한다. 둘은 세 항목에 따라 몰락되어야 한다. 1) 중심적 적대, 두 개의 주체성이 존재하며 이 주체성들은 생사를 건 투쟁 속에서 전지구적 차원에서 조직된다. 이 세기는 그런 적대의 무대이다. 2) 적대를 사유하는 두 방식 사이에도 폭력적 적대가 존재한다. 이것이 공산주의와 파시즘 사이의 대립이 지닌 본질이다. 공산주의자에게 최종 심급에 놓여 있는 대립은 계급들 간의 대립이다. 급진적 파시스트에게 이것은 국가nation와 인종 간의 대립이다. 이 두 번째 부분은 어쩌면 첫 번째보다 더 본질적이다. 3) 이 세기는 전쟁을 통한 생산의 세기로 규정적 통일성definite unity(국역31 ; 명확한 통일성)을 촉발시킨다. 적대는 한쪽 진영의 다른쪽 진영에 대한 승리를 통해 극복된다. 이 점에서 둘의 세기는 하나the One를 향한 근본적radical(국역32 ; 강렬한) 욕망에 의해 활성화된다. 적대의 분절과 하나의 폭력을 명명하는 것은 실재의 표지로서 승리이다.
이는 변증법적 도식이 아니다. 종합이 아니라, 모든 것들은 두 가지 항 가운데 한쪽의 절멸을 가리킨다. 이 세기는 둘과 하나가 비-변증법적으로 병렬해 있는 형상이다. 승리를 얻기 위한 원동력은 적대 자체인가 하나를 향한 욕망인가? 레닌주의의 주요한 철학적 질문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며,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원들이 가장 깊게 천착했던 것도 이 질문이다. 이른바 철학계의 거대한 계급투쟁. 이 결투는 변증법의 본질이 적대의 발생에 있으며, 정확한 공식은 ‘하나는 스스로를 둘로 나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좌파)과, 다른 한편으로 변증법의 본질이 모순적인 항(개념)notion들의 종합이며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공식은 ‘둘은 하나로 통합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우파) 사이의 대립이다.1)이 대립은 그러나 본질적 진리를 감춘다. 왜냐하면 이는 혁명적 주체성, 그 구성적 욕망을 식별하는 것identification(국역32;확인)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둘은 하나로 통합된다는 입장이 우파적이라면, 이 견해가 중국혁명가들에게 미숙해보였기 때문이다. 이 입장을 따르면 욕망을 산출하는 하나는 사유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종합을 빌미로 고대적인ancient(국역33고전적인) 하나, 즉 일자를 요청하도록 하게 된다. 변증법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복고주의적이다. 오늘날 혁명적인 활동가activist(33행동가)가 된다는 것은 의무적으로 분열division을 욕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새로움의 문제는 즉시 상황의 특이성 속에서 창조적 분열creative division(국역33분열을 창조)의 문제가 된다.
1966~7년 사이 중국의 문화혁명은 하나를 지지하는 자들과 변증법적 도식의 다른 편을 옹호하는 자들이 대립했다. 진보의 깃발 아래 대중의 정치는 진정한 공산주의를 향해 가야한다는 마오 같은 이들과 경제 관리가 중요하며 대중 동원은 해로운 점이 많다고 생각하는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같은 이들의 대립. 이 대립은 정치적 풍랑 속에서 군대의 개입, 폭력적인 관료적 대립 등을 거쳐 76년 마오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 덩 샤오핑이 권좌로 돌아가는 테르미도르 반동이 뒤따랐다. 어쨌거나 문화혁명이 일련의 정치적 흐름 전체에 폐막을 고한다는 점인데, 핵심 대상은 당이고 주된 정치 개념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이다. 오늘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다시금 예속되길 갈망하는 이들 사이에는 이런 전례없는 사건을 야만적이고 잔인한 권력투쟁이라고 부르는 것이 유행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우스꽝스럽게도 당연한 말을 하고 있다고 답할 수 있다. 문화혁명의 투사들은 근본적으로 “유일한 문제는 권력의 문제”라고 말했던 레닌을 끊임없이 인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언제부터 우리 정치철학자들은 위기에 몰린 정치 지도자가 다시 권력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공포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는가? 권력투쟁의 의미와 중요성은 무엇이 시급한지를 통해서 판단되어야 한다(마오; 혁명은 형식적인 디너파티가 아니다). 모든 문제점에 대해, 특히 (도시와 농촌, 지적노동과 육체노동intellectual and manual labor[국역36지식인과 수공업 노동자], 당과 대중 등의 관계처럼)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두 계급 간의 투쟁에는 두 개의 길과 두 개의 노선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사실이다.
그렇다면 때로 극단적으로 치달았던 폭력은 어떠한가? 정치가 만일 부와 부자들, 권력과 권력가들, 과학과 과학자들(국역36; 학문과 학자들), 자본과 그 하수인들에게 사회를 종속시키고자 하는 영원한 질서를 근본적으로 전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는 이런 정치가 자애로우며 점진적이고progressive(국역 ; 진보적이고) 평화적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무에 붙들려있다는be held for nothing, 모든 사유가 무에 매여있다는 생각을 우리가 견딜 수 없어할 때마다, 여기에는 엄청나게 가혹한 사유의 폭력이 존재한다. 총체적 해방이라는 주제는 현재 속에, 절대적 현재의 열광 속에서 실행에 옮겨지면 언제나 선과 악 너머에 위치하게 된다. 행위의 와중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선은 기존 질서가 자신의 지속persistence(국역37;영속성)을 명명하는 데서 나온 귀중한 명칭인 일자the one뿐이기 때문이다. 극단적 폭력은 극단적 열광이 지닌 상대적 상관물이고, 정말로 성패가 달린 문제는, 니체 식으로 말해 모든 가치들의 가치전환이다. 실재를 향한 레닌주의적 열정은 사유를 향한 열정이며, 어떤 도덕도 알지 못한다. 니체가 알고 있던 것처럼 도덕은 단지 하나의 계보학적 지위status(국역; 상태)를 지닐 뿐이다. 설사 지식인 박해에 관한 것이라도, 실재로의 정치적 접근을 명령하는 것은 지식의 특권이 아니라는 사실이 실재를 향한 열정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프랑스혁명에서 라부아지에를 사형하면서 했던 말, ‘공화국은 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 자체를 넘어서, 공리적이며 축약된 형태 ‘공화국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국역 수정)의 명목 아래에서 이를 읽는 법을 알아야 한다. 정치적인 것은, 실재와 관련해서 자신의 원칙을 세우며, 자신을 제외한 어떤 다른 필요도 가지지 않는다.
확실히 실재를 향한 열정은 항상 가상semblance의 증식을 동반한다. 혁명가에게 세계는 기만과 타락으로 가득 찬 구세계이다. 실재의 정화작업이란 실재를 에워싸고 모호하게 만드는 현실reality로부터 실재를 추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기는 심오함에 반항하고 근본적인 것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전개하며, 니체를 따라 ‘배후 세계worlds behind’(국역; 세계들의 이면)라는 것을 제거해버리라고, 실재는 외양appearance과 동일하다고 말하라고 제안한다. 이 세기를 활성화하는 것은 이상이 아닌 실재이므로 사유는 외양을 외양으로 파악하거나 실재를 외양의 순수한 사건으로 파악해야 한다. 순수한 표면으로서 실재를 재발견하기 위한 투쟁에서 가상의 파괴는, 현실의 가상이 실재와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순수한 파괴와 동일시된다. 이 정화과정에서 마지막 지점에서 현실의 완전한 부재인 실재는 무nothingness가 된다. 이 세기의 수많은 시도들이 취한 - 정치적이고 예술적이고 과학적인(국역;학문적인) - 이 방식은 니힐리즘적 테러리즘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 방식의 주체적 동인은 실재를 향한 열정이므로, 무가 아니라 창조에 동조하며 이 안에서 능동적 니힐리즘을 인식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모든 이성적 활동은 현실의 중력에 의해 한정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악을 피하는 것, 실재와의 모든 접촉을 피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테러리즘적 요소 - 실재를 정화하려는 욕망 -를 억눌러 온 이래 니힐리즘은 그 효과를 상실하고 반동적 니힐리즘이 되어 간다. 이 세기가 그려온 또 다른 방식, 테러의 매력에 굴하지 않고 실재를 향한 열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방식을 공제의 방식the subtractive way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공제의 방식은 실재의 지점을 현실의 파괴가 아니라 최소 차이minimal difference로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아주 작은 차이,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소멸 항vanishing term을 간파하기 위해 외견상의 통일성으로부터 이 항을 뽑아냄으로써 현실을 정화하는 것이지 현실의 표면 속에서 그것을 절멸시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the affect가 위치한 곳은 바로 이 거의의 안, 내재적인 예외 안이다.
이 두 노선과 함께, 이제 핵심 문제는 새로움에 대한 것이다. 이 세기는 스스로를 도래 또는 시작의 형상으로 제시했으며, 특히 새로운 인간으로 제시해왔다. 대부분의 이들, 특히 하이데거를 포함한 파시즘적 사유 영역에서, 새로운 인간은 일정 부분 망각되었고 타락해버린 고대인을 복권하는 것이다. 새로움이란 여기서 본래적인 것의 재생산, 비본래적인 것의 파괴를 통한 기원의 복구이다. 다른 그룹의 사상가,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영역에서 새로운 인간은 역사적 적대를 파괴하는데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존재해본 적 없는 어떤 것, 진정한 창조이다. 그것은 계급 너머, 국가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다. 새로운 인간은 복권되거나 산출된다. 첫 번째 경우에서 새로운 인간에 대한 정의는 인종이나 국가, 핏줄, 토양 같은 신화적인 전체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새로운 인간은 특성들(게르만족, 아리안어, 전사 등)의 집합이다. 두 번째 경우에서 새로운 인간은 모든 범주화와 특성화에 저항한다. 특히 가족, 사적 소유, 민족-국가에 저항한다. 마르크스 역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보편적 특이성은 범주화에 저항하며, 어떤 특성들도 지니지 않고, 가장 중요한 점으로 개별적 민족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새로운 인간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이고 보편적인 개념화는 모든 범주화를 거부한다. 여기서 뿌리와 전통, 기원들을 찾는데 있어 원시적이면서도 이기적인 중핵인 가족에 대한 적대심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가족들이여, 나는 너희들을 증오한다.”(앙드레 지드) 이 세기의 끄트머리에서 가족이라는 개념이 공감대를 갖고 금기에 가까운 지위를 다시 획득하는 것은 놀랍다(독일 녹색당, 동성애자들 등). 이 세기의 진짜 현재 속에서 새로운 인간은 국가주의적 독재 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사적 소유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사람이다. 오늘날 근대화는 착하고 나약한 아버지, 어머니, 아들이 되는 것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며, 능률적인 경영자가 되는 것, 최대한의 이윤을 얻어내고 책임감 있는 시민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슬로건은 “돈을 벌어라, 가족을 보호하라, 투표에서 승리하라”이다. 이 세기는 다음의 세 가지 테마들 주위로 이끌리고 있다. 불가능한 주체적 혁신과 안락함, 그리고 반복. 다른 말로 강박증obsession(국역42 ; 강박관념)이다. 이 세기는 안전에 대한 강박증 속에서 끝나고 있으며, 보다 더 비참한 다음의 준칙 아래서 종결되고 있다. 즉 당신이 숨쉬는 이곳은 사실상 그렇게 나쁘지 않다. 더 최악인 것들이 존재해왔으며, 또한 존재한다. 우리는 이제 너무나 널리 확산되어 버린 침울한 강박증에 맞서 이를 수행해야 한다.
1) 모순의 문제를 다룰 때 마오주의는 엥겔스나 스탈린의 시도에 비해 이점을 갖는다. 즉 마오는 동일성 전반에 대한 모순의 최우선성을 옹호한다(모순론). 종합이 가능한 것은 一分爲二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의 종합이란 단지 마오쩌둥이 비적대적 모순, 대립의 상대적인 교착 상태라고 부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