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형상, 인식, 상기, 무한정자 등등에 대한 해설.   

박홍규 교수는 그러니까 선생님들의 선생님인 셈인데.. 요새는 

이런 강의가 없다는 게 아쉽다.

 


박홍규 형이상학 강의 2권

철학이란 무엇인가? 1988. 12. 11

능력은 희랍어로 dynamis야. dynamis라는 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인데, 가능성에는 될 수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 두 가지가 있어. 가능성은 항상 존재에 대한 가능성이야. 그것은 동시에 그렇게 안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지. 그게 항상 따라다니는데, 그러한 부정의 가능성을 우리는 존재의 가능성에 대해서 우연성이라고 해, 우연성. (79)


기독교에서 신은 전지전능이라고 하거든? 왜 그러냐 하면, 희랍의 신은 어떤 재료나 질료matter가 있어야 가공한다는 점에서 제약이 있는데, 기독교에서의 신은 허무에서 만들어내기 때문에 전지전능하지 않느냐는 거야. 그런데, 희랍 철학에서는 존재와 무 사이에는 가능성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 가능성에는 연속성이 들어가야 돼. 개연성probability에는 연속성이 들어가. 한순간에 탁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야. 그러나 존재와 무 사이에는 한 순간에 탁 창조돼. 가능성은 죽 연속적으로 이뤄져. 그러다가 어디서 빗나갈 수도 있고, 이렇게 갈 수도 있고 저렇게 갈 수도 있어 (...) 지식은 요컨대 일정한 능력인데, 능력은 연속적으로 그 힘이 발휘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실현돼.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 (81)


우리의 인식 주관, 영혼에는 기본적이고 선험적a priori인 성격으로서 능력이 들어 있어. 능력이 들어 있으니까 영혼은 항상 선험적으로 과오에 빠질 수 있어. 따라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지능은 허위에 빠질 수도 있고 빠지지 않을 수도 있어. 그래서 허위에 빠지지 않도록 끌고 나가야 돼. 능력을 발휘하도록 옆에서 도와줘야 돼. 능력은 그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이 있어야 발휘되니까. 그것이 대화야. 소크라테스가 산파 역할을 해서 이끌어줘. 도와주는 거야. 그럼 누가 인식을 하느냐? 소크라테스가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화자 자기 자신이 스스로 인식을 해. (...) 기계는 인과법칙으로 가지만, 능력은 자기운동autokinēsis의 그 자기auto에서 나왔기 때문에 기계가 될 수 없어. 타고난 본성에서 나온거야. 기계는 외부에서 힘이 주어진 것이야. (82~3)


물질에는 인식이 없다. 왜냐하면 물질의 운동은 자기 동일성identity을 가질 때에는 인과율의 법칙을 따라가니까. 요컨대 선택이 없어, 선택. 그래서 하나야. 힘이 외부에서 주어져. 영혼은 자기 내재적인 것이고. 물질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겠지만, 요컨대 신체sōma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자신kath'hautēn, 즉 우리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지적 능력을 방해하고 제한하더라는거야. (85)


후기 자연철학은 항상 끊어져 있어. 그런데 초기 자연철학은 끊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물활론이라든지, 헤라클레이토스가 그 대표적인 것인데, 만물은 흐른다는 거야. 끊어져 있지 않아, 이게. 만물은 흐른다는 것은 정적인 공간이 나와 있지 않다는 거야. 지능 발달은 처음에는 정적인 공간이 나오지 않는 동적인 우주에서 정적인 우주로 간다는 거야. (89)


그러니까 자신kath'hautēn이라는 것은 인식의 주체자가,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우리의 상상력이든지 우리의 인식 속에 들어 있는 것이든지 뭐든지 간에,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났다는 얘기야. 완전히 독립했다. 그래야 그것이 자기 인식의 주체자가 될 수 있는 것이지, 타자에 따라 다닌다면 인식의 주체자가 될 수 없어. 그것에 종속되니까. (92)


그러니까 사물 그 자체를 그것으로서 인식하는 능력은 이런 순수사고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이야. 가령 행동에서 관심이 들어간다는 것을 우리가 부정하는 것이 아니야. 그런데 그것에만 국한시키려는 사람이 있어. 그런 사람에 대해서 뭐라고 답변해야 하냐면, 관심이 들어간다는 그 사실을 사실로서 자기 동일성을 주면서 인식할 수 있는 그 능력은 무엇이냐를 물어야 돼. (...) 요컨대 인간이 물리적 세계에 있을 적에는 관심도 나오고, 상호 주관성도 나오고, 모조리 다 나와. 상대성도 나오고 의미 부여도 나오고 (93)


요는 비물리적 세계에서 이뤄져야만 학문적입 합의가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학문적인 합의가 아니라 단순히 사상에서의 합의야. 그런건 의견doxa이라 그래. 사회사상과 사회학은 달라. 사회사상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견해이고, 내가 거기에 따라가느냐 아니냐, 그것뿐이야, 검증이 필요없어. (95)


신체, 물리적 세계에서 벗어난 영역에서 주어진 형상eidos을 갖고, 인식 내용을 갖고 반성해야 돼. 그래야 내포implication를 가지고, 그것이 들어 있는 사물의 자기 동일성이 확정돼. (...) 감각적인 대상은 우리의 감각적인 오관에 대상Gegenstand으로서 나와야 돼. 그런 것만 인식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인식이 되지 않아. 운동 자체니 뭐 그런 것은 다 되질 않아. 그러나 물리적 세계를 벗어난 세계에선 모든 것에 자기 동일성이 주어진다면 - 이것이 대단히 중요해 - , 그것이 어떤 성질이든지 간에 인식의 대상이 된다, 그 말이야. (100)


요컨대 동일성에 입각한 정의를 내리면 뭐든지 인식 대상이 돼. 그러한 인식 대상은 어느 차원에서 이루어지느냐 하면 이 물리적 세계에서 이뤄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야. 동일성을 부여하는 우리의 영혼 속에서... (103)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으뜸 되게 탁월하게 사물을 취급하는거니까, 가능한 한 하나라도 남겨놓지 않고 취급해야 탁월하지, 그렇지 않으면 탁월하다고 말 못하지. 그러니까 탁월함의 극한치는 그때그때 주어진 지식 내용의 전부를 총체적으로 연관지어서 그것이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을 따져야 돼. 한 사물이 주어질 때 그것만 취급하면 안 돼. 모든 사물과의 총체적인 연관 하에서 취급해야 탁월해. 알아들었지? 철학의 의미는 그거야. (110)


철학이란 것은 탁월한 지식인데, 탁월하다는 것은 정도차가 있어. 그런데 어떤 것이 탁월한 지식이냐 하면 요컨대 그것이 연속적으로 우리의 실증 과학에 탁월하게 일치하는 것이어야만 돼. 그래야 탁월한 형이상학이 돼. 탁월하게 검증될 수 있는 것, 탁월하게 실증 과학과 합치해야만 탁월한 철학이 되지, 검증될 수 없는 것은 플라톤에 의하면 억견doxa이야. 허구적fictive인 것이야. (116)


이 세상에 완전한 철학은 없고, 어느 철학이든지 간에 문제가 있어. 베르그송 같은 철학은 생물과 무생물을 설명하는 데에는 참 좋은데, 그렇게 하면 공간의 자립성이 없어져. 실제 실증 과학하고 실질적으로 이론상 차이가 없어. 무생물만이 형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베르그송 이론이 옳아. 왜냐하면 그것은 정지해 있으니까, 운동하지 않으니까. 만약에 완전한 철학이 있다면 하나의 철학만 있을 것 아냐? 그러니까 우리가 정의definition할 때부터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 이것 자체가 문제거든. 그래서 그것을 가정hypothesis이라고 하는 거야. 완전한 정의가 나오면 사람들이 이 우주를 다 알게? 곤란하지? 그러니까, 플라톤 존재론의 기본적 성격은 전체pan를 찾으려는 것인데, 전체라는 것이 다 극한적인 일부분에서만 성립하더라는 거야. (117)




<플라톤과 허무주의 극복> 1989. 12

테아이테토스 편에서 하는 얘기가 인식은 인식한다고 해서 외부 대상에 대해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는 거야. 그러면서도 그 내용이 우리에게 들어와서 그대로 있다가 다시 외부로 그 대상을 찾아가서 일치해. 그동안 하나도 안 변해. 변해 버리면 인식이라고 하지 않아. 변해버리면 재인이 되지 않으니까. (139~140)


감각하는 그 인식 기능의 속의, 속의, 속에는 순수pure하게 어떤 것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 주체성이 있는데 그때 파악되는 것이 형상eidos이야, 사유물noēton이야. 거기서는 사물의 순수한 자기 동일성identity이 나와. 감각 세계 속에서는 그것이 운동과 더불어 나타나. 운동은 생성과 소멸을 가지고 와. (...) 형상이 존재적인 존재자라는 것은 무슨 얘기냐? 그것은 단순히 거기서 사물의 본질이 명료clear하게 드러났다는 얘기가 아니라, 형상은 그 자체로서 모든 생성과 소멸로부터 벗어났다는 얘기야. (142)


요컨대 형상 학설은 허무주의가 극복되지 않는 한, 우리의 인식 능력이 사실을 사실대로 그리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거야. 그러니까 허무주의의 완전한 극복이 선행되어야만 우리의 인식이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한다describe는 것이 의미가 있는데, 그것이 어디서 이루어지느냐 하면 바로 형상에서 이루어지더라는 얘기야, 간단히 얘기하면. 알아들었나? 형상에 대한 기술, 인식은 언제든지 재인이 가능해. 플라톤의 입장에서는 건강한 한, 항상 재인이 가능해. (143)


모순은 언제 성립하느냐 하면 존재와 무가 부딪치는 그 한계선에서 성립해. 무엇인가를 구별하려면, 가령 이것은 존재고, 이것은 무라는 그 한계가 꼭 드러나야 해. 애매하면 무엇인지 몰라. 그런데 한계를 넘어서려고 한다면 어떻게 하느냐? 한계를 잘라야하는데, 그 자르는 곳에는 연속성이 있더라, 연속성이 한계를 자르더라, 다시 말해 모순을 극복하는 것은 연속성이더라는 말이야. (...) 무한정자apeiron는 모순으로 빠지는 것을 방해하는 방파제야. 무한정자, 연속성이라는 것은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야. 항상 과정process으로서만 주어져. 한번에 주어지지 않아. 그러니까 연속성에는 항상 과정이 들어가. 과정이나 연속성이나 철학적으로 보면 똑같은 것의 양면이야. 그런데 과정은 그 자체 연속성의 원인으로서 한정되어definite 있지 않기 때문에 한정적인 것의 보충을 받아야 되는데, 그렇게 보충해주는 것이 형상과 제작자dēmiourgos야. 다시 말하면 무한정자 속에서 드러나는 한에 있어서만 존재가 드러나고 그럼으로써 모순은 극복된다는 말이야. 이것이 플라톤의 입장이야. 그러니까 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무한정자는 존재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지만, 동적인 측면에서 보면 모순을 극복하는 방파제야. 제삼자야. 밖에 있어. (...) 그러니까 존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타나는 한에 있어서만 파악이 된다는 말이야. 아무리 이론적으로 따져도 그것을 벗어날 수가 없어. 그러면 우리 학문이라는 것은 뭐냐. 간단히 말해 그것은 연속성의 법칙에 따라가는 것이야. (148)


우리의 지능이라는 것은 발달하면 할수록 분화되거든. 그래서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고, 무엇이든 이렇게 딱딱 구분해서 정의를 내려. 그렇게 구분하고 정의 내리기 시작한 사람이 누구냐면 플라톤이야. 희랍에서는 기독교와 같은 종교가 없어. (151)


종교는 종교고, 학문은 학문이고 서로 달라. 존재가 무와 직접적인 관계에 있을 때는 신앙의 문제이고, 그것을 연속성의 관계로 나타내려고 할 때는 학문의 문제야. 연속성은 무엇이냐 하면 무한정자, 다시 말해 존재와 무에 대해 제삼자, 존재와 무 어느 것도 아닌 것이야. (...) 존재와 무의 관계 속에는 두 번이라든지, 세 번이라든지, 그런 것은 없어. 되풀이되는 것은 연속성에서만 있어. 부활을 교리로 따져보면 그것은 학문이 아니야. 그러니까 신학이나 교리라고 하는 것은 학문과 기독교의 한계선에서 성립해. (152~3)


고르기아스 같은 허무주의는 왜 나오는가를 좀 생각해봐.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존재론에서 나와. 이것이냐 저것이냐entweder-oder에서. 이 세상에 나타난 허무주의 중에서 고르기아스의 허무주의처럼 극한적인 허무주의는 없어 (...) 왜 그런 생사의 문제가 하나의 시대적인, 커다란 철학의 동인motivation이 되었느냐 하는거야. 왜 그럴까? 반드시 전쟁 중에는 허무주의가 나오게 마련이야. (...)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사고는 전쟁 때 나와. (154~5)


플라톤은 허무주의가 무한정자의 영향이라고 해. 그러나 그것은 정적인 차원에서 보니까 그렇지, 동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래도 무한정자가 허무로 돌아가는 것을 막아주는 방파제라는 거야.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허무로 돌아가지 않아. 실재는 객관적이고. (157)


중요한 것은 인식 기능은 하나의 활동인데, 수동성passivity이 빠져. 수동성이 빠지지 않으면 영향을 받고, 그때그때 변질해버려. 그러면 인식의 주체자가 될 수 없어. 변하지 않아야지. 그래야 순수한 활동이라고 해. 불사적athanaton이야. 그것을 자발성이라고 하지. 그것은 내용이 하나도 없어. (...) 그것에 의해서 파악이 되는 것이 형상eidos인데, 거기서는 생성과 소멸이 빠져나가. 빠져나가니까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잖아. 형상은 없어지지 않잖아. 항상 그대로 있어. 항상 존재existence해. 그러니까 형상은 허무주의의 극복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지 않는 한, 의미가 없다는 얘기야. 플라톤은 본성 속에physei 형상이 있다는 거야. 자체적인 것으로kath'hauto으로, 참된 존재ontōs on로. (158) 
 



<플라톤과 전쟁> 1990. 6. 17

종교문제를 플라톤은 어떻게 풀었느냐? 그게 파이돈 편이거든. 죽음의 문제가 나올 수 밖에 없어. (...) 그러면 플라톤의 죽음의 문제는 무엇이냐? 어떤 해결책이냐? 윤회설이야. (...) 그러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관계는 어떤 것이냐? 일자의 타자와의 관계야. 영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야. 있는 데서 없어졌다는 것은 플라톤 철학에서는 성립되지 않아. 기독교에서는 있는 데서 없어진다는 모순을 보장하기 위해서, 없는 것이 생긴다는 역기능에 의해서 그것을 보충하지만, 플라톤에서는 그러지 않는단 말이야. 죽는다, 없어진다는 것은 플라톤에서 성립이 되지 않아. 영혼이 없어진다는 것은 성립이 안 돼. 이 세상은 항상 타자의 세계야. 다만 분리되어서 영혼이 타자의 세계로 간다. 그것뿐이야. 일자에서 타자로 넘어간다, 타자에서 일자로 넘어온다, 생겨나는 것은 그것뿐이야. 영혼은 그전부터 있었고, 저쪽에 있는 생은 이쪽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야. 여기서 철학자처럼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오는 모든 신체적인 요소에서 쾌락이나 감각 같은 것에 매달리지 않고 깨끗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기서 영혼 자체가 완전히 분리될 수 있고, 자체적인 것kath'hauto이 되어서 저쪽에 있는 존재자의 세계의 진상을 자체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 존재와 무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란 것이 무엇이냐? 아무리 잘한 사람이나 못한 사람이나 죽으면 모두 허무로 돌아간다는 것은 똑같은 것이며, 부정은 모든 것에 대해서 똑같아. 다 없어지고 죽어버리면 그만이야. 죽음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똑같아. 플라톤은 다 같지 않아. 여기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져. (187~9)


객관적인 것이 무너질 때는 어떻게 되느냐, 윤리적 허무주의가 나와. nomos는 우리 인간의 능력, 힘을 조절해 주는 기능을 해. 그것이 없어지면 조절받지 않은 힘이 나와. 최후에 가서는 힘 자체가 나와. 그래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주장these이 나와. 힘이 나와. 또 인식론적 허무주의가 나와. (192)


상기설뿐만 아니라, 테아이테토스 편에서는 자기는 대화에서 상대방에게 산파술만 행한다는 거야. 그게 무슨 얘기냐? 평화 시대에는 객관적인 규칙 이있어서 정보를 전달하면 돼. 그러나 여기서는 내 주관적인 견해거든. 그러니까 진리의 인식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의 바탕에서는 성립할 수 없고, 신체 - 사회에 들어가려면 신체, 일종의 연장성이 필요해 -에서 벗어난 영혼 속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거야.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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