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 (DVD+OST)
이창동 감독 / 기타 (DVD)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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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수무책인 육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요령부득인 혓바닥은 나비도 만들고 코끼리도 만들고 급기야는 춤추는 인도의 아가씨도 만든다. 얼씨구나 절씨구, 육체가 육체를 떠나니 이렇게 좋다. 판타지는 육체를 가두는 문화에 대한 복수다, 축제다.


들리는 촛불을 보라. 느낄 수도 없는 미세한 바람의 분노가 끊임없이 촛불의 외곽을 잡아 흔든다. 그러나 촛불의 중심은 더 없이 밝고 환하다. 추억이 있다면 그 밝고 평화스런 중심에 있다. 그러나 어떤 추억도 확고부동한 중심 속에 있지 않다. 추억은 늘 뿌옇고 애매하다. 그것 같기도 하고, 그것 아닌 것도 같은 것이 추억이 아니었던가. 추억은 항상 분명한 시공간 속에 있지 않다. 그러기에 그것은 안개와도 같이 잡을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기억은 그 추억의 중심을 낚아채려 하지만 어떤 시간도 공간 속으로 완벽하게 수렴되지 않는다.

레임은 확고부동한 외곽선을 가진다. 오만하게도 영상은 그것을 현실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눈'의 소유자인 이성이 주장하는 현실일 뿐이다. 봄[視]은 모서리[角]를 가지기에 바라봄엔 반드시 사각(死角)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세계는 그리고 타인은 대개의 경우 시각의 바깥, 즉 사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예술가들은 프레임이 간과하고 있는 공간[사각]을 제 시각의 영역으로 편입시키기를 거부한다. 이창동은 사각(死角)을 시각(視角)의 영역으로 포섭하기 위해 헨드헬드를 사용한 것은 아닌지. 들고 찍으니 앵글은 흔들리지만 흔들리니까 무릇 경계가 사라진다. 대체 프레임 속의 명확한 외곽선은 무엇인가. 예술과 현실의 경계, 주관과 객관의 경계, 미와 추의 경계,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헨드 핼드는 그 명확한 외곽선을 지운다. 아니, 흐린다. 아니, 섞어 버린다.

쉰다는 것, 심장이 뛰고 혈액이 순환을 한다는 것, 연비어약(鳶飛魚躍), 몸은 본질적으로 갇히기를 거부한다. 순수한 육체인 아이들을 보라. 그들은 약동한다. 달리고 까딱거리고 찧고 까분다. 그러다 자빠지고 징징거린다. 어른들은 말한다. 가만 있지 못하겠니. 어른들에겐 그것이 쉬운 일일지 모르지만 아이들에겐 형벌이다. 제도와 문화에 끊임없이 노출되면서 비로소 아이들은 고요해진다. 그렇다고 그들 안의 도약의 에너지가 고갈된 것은 아니다. 어른들의 몸엔 성장하지 않은 아이가 들어 있기 마련이다. 슬프게도 대부분의 인류는 미성년이다.


주는 몸을 가눌 수가 없다. 자꾸 몸이 흔들린다. 가만있으라고 율법은 명령하지만 공주의 몸은 가만있을 수가 없다. 뇌성마비인 공주의 몸, 누군가가 그 몸을 진정시켜 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 어떤 위대한 어머니가 그 고단한 노동을 감내하랴. 공주, 너희들은 별 수 없는 인간이다. 그들에게 내려진 형벌은 '격리'다. 그 속에서 너희들은 웅크리고나 있어라. 몸을 진정시킬 수 없는 자, 제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는 자, 너희들의 땅은 이곳이 아니다.

을 가눌 수 없는 또 하나의 인간이 있다. 홍종두. 제발, 발 좀 까딱거지 않을 수 없니, 재수 없다. 제발 흔들지 좀 마라. 하지만 당신들에게 쉬운 일도 '다 큰 어린아이' 종두에겐 쉽지 않다. 그의 몸은 다리를 떨든 노래를 하든, 가만있을 수가 없다. 아니 가만있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종두의 비극은 언어를 배우지 못한 데 있다. 제대로 된, 문화화 된 언어가 있다면 왜 어린아이가 기를 쓰며 울겠는가. 한 여자의 몸을 발그랗게 달굴 연애편지를 쓸 수 만 있었다면 종두가 왜 한 여자를 범했겠는가. 종두에게 언어가 있다면 왜 폭력의 전과를 달아야 했겠는가. 종두는 언어가 없는 어린아이다. 이창동은 그 어린아이에게 말을 가르친다. 이 영화의 말미를 보라. 종두가 공주에게 그럴싸한 편지를 쓰고 있지 않은가. 연애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성장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나뭇가지의 그림자를 무서워하는 공주를 위하여 나뭇가지를 자른다. 종두는 언어뿐만이 아니라 상징적 행위를 구사하기도 한다. 종두는 이렇게 어른이 된다. 그 성인식은 눈물겹다.

두의 세계는 언어 이전의 세계, 문자 이전의 세계다. 강간미수, 폭력, 그것은 언어 이전의 폭력이다. 사기, 업무상배임 같이 고급스런 범죄가 아니다. 그것은 엄격히 몸이 저지른 죄악이다. 그러나 그 누가 몸으로부터 정신을 정밀하게 분리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전통적으로 종교는 고약한 이분법을 가르친다. 육체와 정신, 정통과 이단, 예토와 정토, 성과 속, 미와 추, 선과 악, 현실과 판타지, 차안과 피안, 무수한 구획을 통하여 종교는 딛어야 할 땅과 딛지 말아야 할 땅을 가른다. 목사님의 기도 앞에서 종두는 참으로 피곤하다. 종두의 몸은 가만 있어주지를 않는다. 정착할 수 없는 몸뚱이를 가지고 율법의 땅에 정착해야 하는 종두에게도 그러나 구원은 있다. 공주다. 정적(靜寂)을 모르는 공주의 몸뚱이. 뒤틀린 육체. 그 두 개의 몸뚱이가 만나 연애를 한다. 해방이다. 그 해방의 공간은 전철 안이기도 하고 청계천 고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끊임없이 말하고 싶어한다. 다정한 연인들처럼 생수병으로 뒷통수를 치고도 싶고, 입을 쫑긋거리며 투정이라도 부려보고 싶어한다. 연인들이란 끊임없이 말하고 싶어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육체로 육체의 끝에 닿을 수 없는 것이라면 언어로라도 끊임없이 존재의 심연에 닿고 싶어하는 자들이 연인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언어로도, 육체로도 그 심연에 닿을 수 없는 존재는 또 하나의 현실을 창조한다. 판타지!

수무책인 육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요령부득인 혓바닥은 나비도 만들고 코끼리도 만들고 급기야는 춤추는 인도의 아가씨도 만든다. 얼씨구나 절씨구, 육체가 육체를 떠나니 이렇게 좋다. 판타지는 육체를 가두는 문화에 대한 복수다, 축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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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 (2Disc)
줄리 테이머 감독, 셀마 헤이엑 외 출연 /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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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마 헤이엑이 분한 영화 <프리다> 속의 프리다 칼로는 여성이다. 셀마 헤이엑의 바디라인은 매혹적이고, 제75회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의상상을 <시카고>에 빼앗기고 분장상에 만족해야 했지만 프리다의 의상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녀의 영혼마저도 생물학적 신체와 동일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융(Jung)은 여성의 정신 속에 들어 있는 남성적 요소를 아니무스(Animus)라 했던가. 한 인간의 몸엔 음과 양이 태극처럼 뒤엉켜 있다. 어떤 남성성을 무의식화하느냐는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문화적인 문제. 씩씩하게 살려는 여성들은 어머니처럼 살기를 거부하지만 다른 역할 모델이 없기에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그대로다. 따라서 여성 무의식 속의 남성성인 아니무스는 가부장적이다. 가부장적 문화권에서는 전통적인 아버지상이 한 여성의 무의식으로 잠입하기 마련이라면 프리다의 아니무스는 보르헤스의 『불한당들의 세계사』에서 등장할 법한, 남아메리카의 마초상이 투영되었을 것이란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어린 시절에 소아마비를 앓고 18살에 교통사고로 버스 난간이 자궁을 관통하는 사고를 입었다 해도 프리다의 몸은 여전히 여자다. 그러나 그 ‘부실한 여자’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를 그린 것은 혼자일 때가 많았기 때문이고, 내가 가장 잘 아는 소재가 나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던 프리다는 ‘나’를 그리기 시작한다. ‘나’를 초월하는 길은 ‘나’에 집착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일까. 조각나고 뒤틀린 신체, 그것은 자신의 기괴함을 들여다보아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각성의 작업이었으리라. 자기 연민 없이 어찌 제 그로테스크한 몸을 들여다 볼 수 있었을까. 그러나 강한 자는 초월의 에네르기, 그 자체가 아니면 무엇인가. 현실에서의 패배가 곧 예술에서의 패배가 될 수는 없었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똑바로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선, 그 팽팽한 대결의 정신이 프리다의 붓끝에 실린다. 그 붓을 움켜쥐게 하는 힘, 그것은 여성의 악다구니가 아니었다. 세계를 내 손으로 그러쥐겠다는 남성적인 힘이었다. 불우를 불우로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 슬픔을 슬픔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대결과 초월의 정신이었다. 그것을 브르똥(Breton)은 초현실주의라 명명했다. 그러나 프리다의 초현실주의엔 브르똥의 정치성이 없었다. “프리다 칼로는 정확하게 정치 노선과 예술 노선의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다.”라고 한 브르똥의 말은 반은 진실이고 반은 왜곡이다. 그녀는 오직 자신만을 그리지 않았던가.

그것은 자기 연민에서 비롯된 에고이즘이었고, 현실의 유약(柔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도저한 자기 부정이었다. 프리다는 남장(男裝)을 한다. 마치 자신의 육체를 부정하려는 듯. 디에고 리베라에 대한 사랑도 그런 자기부정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리베라가 누군가. 마초도 그런 마초가 따로 없다. 아내고 처제고 따지지 않는다. 그는 무자비한 냉혈한이다. 율법도 없고 도덕도 없다. 오직 딸랑거리는 하초의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 게다가 그는 멕시코 제일의 벽화가라는 명성까지 확보하지 않았는가. 프리다의 무의식적 남성상, 아니무스에 꼭 들어맞는 인물이다. 힘을 갈구하는 프리다가 이런 남자를 지나쳤을 리가 없다. 자화상에 대한 집착, 남장(男裝), 리베라에 대한 사랑, 혁명에 대한 열광(그녀는 실제로 1907년생인데 1910년의 멕시코 혁명에 열광한 나머지 자신의 탄생을 1910년이라고 우겼다는 일화가 있다), 트로츠키와의 염문, 그 모두가 힘과 권력에 대한 그녀의 도저한 집착에서 연유하는 것은 아닌가. 영화 <프리다>의 원작이라고 알려진 『프리다 칼로』(민음사)의 저자 헤이든 헤레라(Heyden Herrera)도 프리다를 평하길 ‘명성과 인기에 무덤덤한 것처럼 굴었으나 실은 그것을 즐겼고, 남들 눈에 비치는 자기 이미지를 관리하는 데 능했다.’고 평하지 않았던가. 누구나 그렇듯, 그는 연극적 인간이었다.

그러나 강한 여자의 내면엔 연약한 소녀가 살고 있기 마련. 프리다의 강함은 이 연약한 소녀를 억누름으로써만 그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억압은 무의식의 성장을 도울 뿐, 모든 억압된 무의식은 말한다. "I will be back" 프리다 안의 소녀는 위로 받고 싶어한다. 그녀에겐 자상한 아빠가 필요하다. 하지만 리베라가 나긋나긋하게 그녀를 위로해줄 성싶은가. 누가 이 소녀를 토닥거려 줄까. 드디어 프리다 안의 소녀의 고독이 시작된 것이다. 징징거리며 그녀는 리베라에게 사랑을 애걸한다. 하지만 리베라의 피는 차다. 프리다가 성인(成人)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 소녀와의 타협이 필요했다. 프리다는 이 소녀를 변신시키는 길을 택함으로써 성인이 된다. 프리다는 스스로 마초가 된다. 계율에 몸을 복속시키기보다는 제 욕망에 제 몸을 따르게 한다. 프리다를 설명하는 데 ‘동성애’라는 레테르는 천박하다. 프리다가 택한 길은 철저히 여성을 부인하는 길, 남성적 권력에 대한 탐닉의 길이었다. 여성성을 부인하는 것이 여성해방이라고 생각했던 초창기의 페미니스트들은 프리다가 택한 길을 페미니즘이라고 이름했던 것은 아닐까.

테킬라 마시기 결투에서 승자가 되어 사진작가 티나 모도티(애슐리 쥬드 粉)와 탱고를 추는 장면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연출가 출신인 감독 줄리 테이머가 자신의 장기를 살리기 위해 작위적으로 연출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전기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에피소드의 사실성은 아니다. 감독의 의도성과는 무관하게 우리는 그 장면에서 승리에 집착하는 프리다의 아니무스와 만난다.

부정의 정신은 전적으로 남성적이다. 그것은 아(我)와 비아(非我)를 구분하는 대낮의 정신, 이성의 산물이다. 갈등과 대립을 무화시키고, 구별과 차별의 정신을 무색하게 하는, 박명(薄明)의 정신, 그 포용의 여성성이 그리운 때다. 여기는 경계인조차 품지 못하는 옹졸한 땅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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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죽거리 잔혹사 [dts] - [할인행사], (2disc)
유하 감독, 이정진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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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컨대 필자는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를 객관적으로 이야기할 처지가 못된다. 1970년대말에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고,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 이소룡의 영화라면 남김없이 소비하며, 쌍절곤을 휘두르는 이소룡의 “야비오!” 소리에 열광했고, 진추하의 노래를 들었고, 보니엠의 "원웨이 티켓"을 들으며 고고장을 기웃거렸고, 배철수가 멤버로 있는 ‘활주로’의 노래를 읊조렸고, 누구나 한번쯤 치러야 했을 풋사랑의 아픔을 겪으며 그 시절을 통과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을 무어라 명명하든 어쨌든 그 시절은 지나갔다. 그리고 더 엄혹한 시절이 왔다! (나는 ‘엄혹한’이라는 형용사에 방점을 찍는다.)

'구국의 유신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라고 씌어진 학교 정문의 간판, 빠일로트 만년필, 양은 도시락, 버스 차장, 올리비아 핫세, 원더우먼, 서니텐… <말죽거리 잔혹사>는 흘러간 시대를 복원하겠다는 야심으로 무장한 소품들로 넘친다. 그 야심은 일단 성공한 듯싶다. 그래, 맞다, 그때 그랬었지, 그 시절을 통과한 이들이라면 유하의 셋팅 실력에 충분히 고개를 끄덕였을 법하다.

유하 감독의 연출에 가장 큰 공감을 보낼 세대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속하는 또래일 것이다. 소위 386세대. 그러나 10대 역시 이 영화에 환호한다. 그 환호의 일부는 권상우의 근육질 몸매에 보내는 소녀들의 찬사일 것이고, 또 그 일부는 적(?)들을 차례로 쓰러뜨리는 권상우의 절권도에 보내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런 대중적 코드에 머무르고 있지 않다. 영화는 한층 웅숭깊은 차원에서 10대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이 영화의 미덕이다.

그때로부터 20년이 지났다. 그러나 뭐가 달라졌다는 것인가. 박정희가 저격되고, 교련이 폐지되고, 몽둥이가 교실에서 사라지고(이 부분은 객관적인 검증이 필요하겠다.), 흑백 TV가 칼라 TV로 바뀌었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여전히 입시는 과중한 무게로 10대들을 압박한다. 청년실업이 50만에 육박하는 현실은 일층 무게를 더한다. 모니터만 켜면 ‘무늬만 19세 이상’인 컨텐츠들이 오감을 자극한다. 신어라, 입어라, 마셔라, 들어라... 온갖 미사여구의 광고메시지들은 무의식적인 선택을 강요하며 10대의 여린 감성을 파고든다. 클릭 몇 번이면 원하는 모든 이미지들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미지에 만족하는 욕망이 있던가. 모든 욕망은 실체의 속살을 파고들고 싶어하는 법. 갖고 싶어, 구매하고 싶어, 미디어들이 부풀려 놓은 욕망 앞에 10대들은 속수무책이다. 과도해진 욕망 앞에 빈곤한 구매력, 일탈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때리고 부수고 소비하라. 비용이 모자란다고? 소비의 욕망으로 땡땡하게 부풀어오른 10대들의 몸을 아껴주는 아저씨들이 있지 않은가.

이쯤에서 물어보자. 무엇이 달라졌는가. 영화 배우 정윤희의 비키니 사진 한 장을 수첩에 끼워넣고 희희낙락하던 욕망은 엄청난 량의 하드디스크를 점령하는 포르노물로 ‘성장’하지 않았는가. 과장을 보탠다면 오늘날 한 학생의 욕망의 총량이 ‘정문고’전체 학생들의 욕망의 총량보다 작다고 할 수 없다. 긍휼함을 입어야 한다면 정문고의 학생들이 아니라 욕망의 과잉 시대를 살아가야만 하는 ‘이곳’의 학생들이지 않을까. 유하 감독이 진실로 키취의 진정성을 그리고 싶었다면 그가 그려야 했던 것은 바로 시물라시옹 시대의 ‘현수’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긍휼함을 입어야 한다면 1970년대의 ‘현수’가 아니라 2000년대의 ‘현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디어가 확대재생산해내는 욕망이 1970년대의 현수보다 2000년대의 현수에게 더 큰 공허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나 조금은 나르시시스트인 법이다. 더구나 현수는 현수대로의 진정성이 있다. 그것이 유아의 나르시시즘이든 어떻든 제 자신의 공허를 채우고 싶은 갈급한 욕망은 솔직한 것이다. 한 여자를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 앞에 부르르 떠는 청춘의 육체는 솔직한 것이다. 나르시시즘이라 명명하든 말든 그것을 긍휼하게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도 솔직한 것이다. 10대, 그들에겐 욕망을 좀더 세련되게 승화할 교양이나 취미가 풍족치 않다. 그러나 이 땅의 교육이 그것을 가르쳐줬던가. 천만에! 숱한 교육개혁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아이들은 욕망을 좀더 문화적으로 세련시킬 기술을 어른 세대들로부터 전수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어른 세대들, 이들은 10대들의 욕망을 부풀리기에 혈안이었다. 한편으로는 10대들의 과소비와 명품선호현상을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10대들을 구매자로 포섭하기 위한 마케팅 전략을 펼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런 이율배반의 땅이 10대들이 숨쉬는 공간이었다. 폭압의 시대는 갔는지 모르겠지만 더 엄혹한 시절이 온 것이다. 컴퓨터그래픽의 기술을 빌어, 좀더 화려한 의상과 세련된 자태로, 더 가혹한 시절이 도래한 것이다.

교육이 그들에게 ‘자발적 가난’을 가르쳤던가. 소위 ‘럭셔리’한 것을 선호하는 10대들에게 법정(法頂)이 말하는 ‘무소유’는 따분한 추천도서에 불과하다. 성장의 신화가 추호도 의심받지 않는 곳에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슈마허의 주장은 한낱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웰빙’이라고? 그것은 좀더 좋은 것을 소비하고자 하는 귀족주의의 다른 이름은 아닌가? 소비를 통해 자신을 차별화시키려는 ‘차별화 전략’은 아닌가. 아비는 굶는데 아들이 잘 살단다면 그 아들의 삶을 웰빙이라고 할 수 있는가. 관계에 대한 배려를 빼놓고 웰빙을 언급할 수는 없다. 학교의 '윤리‘가 ’관계에 대한 배려‘를 말하던가. 진정한 정체성은 소비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윤리‘가 말하던가.

'지금‘을 말하지 않고 ’옛날‘을 말하는 것을 굳이 탓할 일은 못 된다. 누구나 지나간 한때를 그려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때가 좋았어, 라고 하는 회고적 감상주의는 위험한 것이다. 다행히 유하의 <말죽거리 잔혹사>는 그런 회고적 감상주의를 벗어나 있다. 폭력과 비리로 얼룩진 참으로 돼먹지 못한 시절을 통과했노라고 그의 영화는 말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가 지금 딛고 있는 지금의 땅은 어떤가. 그곳은 안전한가. 그곳의 아이들은 평안하신가. 광고에 대한 패로디를 그의 시적 전략의 하나로 했던 시인으로서의 유하와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욕망을 말하던 감독으로서의 유하의 작가적 공력이 이제 본격적으로 <욕망의 잔혹사>를 말할 때이다. 그것이야말로 폭력의 내부를 좀더 샅샅이 해부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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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없는 미녀 SE (2disc 디지팩)
김인식 감독, 김혜수 외 출연 / 베어엔터테인먼트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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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가하는 양이 질적으로 급전하는 비등의 정점처럼 모든 열정에는 포만의 정점이 있기 마련이다. 번거롭게 조르주 바타이유를 빌리지 않더라도 열정의 정점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에로스의 충동이라면 그것은 곧 타나토스, 죽음에의 충동에 다름 아니다. 설탕이 설탕인 채로 커피와 하나가 될 수는 없는 법, '나'를 무화시키지 않고 '내'가 여전히 나인 채 너와 하나가 될 수는 없다. 그 속에 내 존재를 송두리째 디밀 수 있는 괜찮은 입구를 찾았다고 한들 애시당초 그와의 합일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화엄경의 구절들을 들먹이며 불이(不二)의 법문을 외쳐 봐야 어차피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 분명한 사실 앞에서 절망과 상처를 과장하는 것이 멜로의 어법이다. 그 상투적인 멜로의 어법은 아무리 우려먹어도 약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네 욕망의 불이 쉬 꺼지지 않는 탓이고, 우리네 이성은 제 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욕망의 불 앞에서는 무력한 탓이다.

영화 <얼굴 없는 미녀>에서의 세트는 필요 이상으로 미학적이다.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이 간결하고 단촐하다. 한편의 미니멀리즘 아트를 보는 듯하다. 이런 기하학적 배치가 과연 감독의 의도적 연출에서 비롯되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구성적인 선과 인공적 조명으로 장식된 주인공 지수의 집과 석원의 진료실, 대학병원의 구름다리, 스포츠 센터 등은 독특한 색감과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어쨌든 <얼굴 없는 미녀>의 영화적 공간은 심플하고 모던하기 그지없다. 그 공간은 모든 것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설명하려는 과학과 이성의 공간의 상징이다. 그곳은 밝고 간결하고 투명한 칠음계의 공간이다.

그러나 어디든 무시무시한 심연과 악몽의 변두리는 있게 마련이다. 그 공간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천장에서 죽은 쥐의 시체가 썩듯 끊임없이 악취가 풍겨오지만 그 악취의 입구조차 찾을 수가 없다. 의사들은 그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와 열쇠를 찾아주겠노라고 장담을 한다. 그러나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지 않던가. 석원(김태우)은 제 고통이 부글거리는 진원지조차 제대로 찾지 못해 쩔쩔매는 한심한 중생이다. 그런 그가 지수(김혜수)의 고통을 치료하겠단다. 제 자신을 객관화하지 못하는, 머리만 큰 남자아이가 가슴만 빵빵한 어린 소녀를 치료하겠다니, 이건 숫제 치료를 핑계 대고 어린 소녀의 몸을 만져보겠다는 소위 '병원놀이'의 세련된(?) 버전이 아닌가. 어쨌든 그 놀이는 성공적으로 진행된다. 더구나 그 병원놀이는 환자의 아픔을 치료하는 동시에 의사의 트라우마를 동시에 치료한다는 근사한 명목까지 얻는다. 이 대목에서 의사의 윤리를 들먹이는 비평가는 차갑게 달려드는 시선들을 일축해버릴 수 있는 배짱이 있어야 한다. 언제나 영화는 윤리보다는 미학의 편이다.

그녀(지수)는 글을 쓴다. 아니 매달린다. 쉴새없이 중얼거리며 욕망을 뱉어내는 셈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대로 하나의 허구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욕망이 만들어 내는 각본대로 사물들을 호명하고 호출하고 배치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세계에는 세계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지수의 눈에는 세계가 보일 리 없다. 세계는 쓰레기고 고결한 것은 '나'다. 그런 '나'를 몰라주니 미친다. 아니 미쳤다. 미쳐서 헛것이 보인다. 결국 그녀의 욕망이 본 것은 세계가 아니라 헛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반성을 모른다. 그녀는 여성이라는 가면을 쓴 마초다. 잘못 건드리면 칼침을 놓을 기세다. 오히려 석원이 김태우의 혀 짧은 목소리를 빌어 수줍은 여성성을 연기해낸다. 대체 이 전도된 성역할은 무엇의 상징인가. 기존의 성정체성을 전복하려는 연출자의 계책인가. 아님 우연인가.

설령 맘 좋은 편집자가 있어 지수의 글을 책으로 묶어준다고 해서 그녀의 욕망이 끝이 날까. 죽은 애인이 살아온다고 해서 그녀의 욕망이 휴식을 할까. 원칙적으로 모든 욕망은 휴식을 모른다. 휴식을 모르는 욕망을 좇는다는 것은 끊임없이 존재를 가열시켜 결국 재처럼 연소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삶은 얼마간의 굴욕을 지불하는 일이라지 않던가.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일정한 타협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녀에게 타협은 없다. 수틀리면 쇼핑카의 물건들을 뒤집어 버릴 수 있는 남성적 오기와 배짱이 있다. 하지만 말이 좋아서 오기와 배짱이지 다른 쪽에서 보자면 자기밖에 모르는 유아적 이기심의 발로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쭉쭉하고 빵빵한 여자들이 하면 왠지 뭐가 있어 보이는 게 영화다. 뻬아트리체 달이 한 성질을 부리는 <베티불루>를 생각해보시라. 타인의 자유가 시작되는 곳에서 나의 자유는 끝이 난다는 윤리학은 그런 미녀들의 성깔 앞에서는 무력하다. 하긴 윤리가 영화에 개입하면 왠지 구질구질해진다는 것도 현실이긴 하다.

김인식 감독은 그의 데뷔작 <로드무비>에서부터 어른들의 세계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의 영화에는 자신의 욕망만을 바라보는 어린아이만 등장한다. <로드무비>에는 그의 아내와 아이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좇는 욕망의 원칙주의자 대식이 있다. 하긴 모든 욕망은 근본적으로 소통을 거부한다. 하지만 <로드무비>에서의 대식에겐 오직 저의 공허함을 충족받고자 하는 갈급함만이 있을 뿐, 타인도 욕망하는 주체라는 사실에 대한 고려는 깨끗하게 망각되고 있다.

의사인 석원에게는 욕망으로부터 반성적 거리를 확보해야할 직업적 의무가 있다. 상처에 매몰되지 않고 상처를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직업적 뚝심이 석원에게는 있어야 한다. 바로 그 뚝심의 세계가 프로의 세계이고 어른들의 세계다.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봉합할 수 있는 자, 그가 의사고 프로이며 어른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의 상처에 매여 있다. 그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는 것이다. 상처의 동굴 속으로 기어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싶은 것이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의 강으로 돌아가 최후를 맞이하는 연어처럼 석원은 자신을 죽음을 몰고 간다. 거기가 끝이다.

김 빠지는 소리지만 몇 명쯤의 어른 정도는 이 영화의 사이사이에 배치했어도 좋았을 듯하다. 무리한 요구이긴 하다. 윤리학적 잔소리가 들어가면 영화가 김이 빠진다는 흥행의 요구도 요구지만, 톨스토이의 소설처럼 인생을 입체적으로 보기에는 영화란 태생적으로 장르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푸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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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들렌 (2disc: DVD + CD)
박광춘 감독, 신민아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03년 4월
평점 :
품절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일 뿐
 
 
드라이버를 사용해야 할 때 드라이버는 보이지 않는다. 평소에 일정한 장소에 두었다면 문제가 없겠는데 최근에 사용하고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여기저기 찾다가 의외의 곳에서 드라이버를 발견할 때가 많다. 특히 사용하지 않는 도구는 일정한 곳에 둘 필요가 있다.
 
도구에 대한 많은 정의가 있지만  '도구는 필요할 때 생각나는 존재이다.' 라는 정의는 어떨까. 망치나 드라이버를 시시때때로 그리워하는 사람은 없다. 우산도 비가 올 때만 생각나지 날이 쨍쨍할 때는 우산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청명한 날에도 우산을 만지작거리고 안개 낀 날이나 바람이 부는 날에도 우산을 쓰다듬는다면 그 우산은 이미 도구가 아니다. 그 우산은 그에게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우산에는 특별한 추억이 얽혀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그 우산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 받았을지도 모르고, 지금은 모두 슬픈 추억이 되었지만 그 우산을 쓰고 비 오는 날 과거의 '그녀'와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우유배달부는 매일 아침 우유팩을 문 앞에 가져다 놓는다. 매일 아침 그 우유를 마시며 아무도 우유 배달부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배달 사고가 나는 날 아침에는 어김없이 우유배달부에게 전화를 건다. 필요할 때 우유배달부가 비로소 생각되어진 것이다.
 
필요할 때만 생각나는 것이 도구라면 '존재'는 늘 나에게 의미 있는 대상이다. 평소에는 대화가 없다가 배가 고플 때 엄마가 생각난다면 엄마는 도구이지 더 이상 '존재'는 아니다. "당신을 사랑해. 그 이유는 당신의 아버지가 돈이 많기 때문이야."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를 내 출세와 치부의 도구로 보고 잇는 것이지 그를 하나의 인격적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필요할 때만 전화를 거는 친구, 부탁할 일이 있을 때만 연락을 하는 동창생이 많아질수록 한 사람의 인생은 쓸쓸해진다. 수첩에는 이름이 빽빽한데도 정작 내가 쓸쓸하고 외로운 날 전화 걸 친구가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내 주위에 '수단'으로서의 친구보다는 '존재'로서의 친구가 많을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영화 『마들렌』에서의 사랑은 순수하기 이를 데 없다. 그녀가 어떻든, 그녀가 어떤 조건을 가졌든 그는 묻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묻는다. 마치 상품을 구매할 때처럼 여러 가지 조건들을 캐어묻는다. 진정한 사랑은 말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당신일 뿐, 그 외의 어떤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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