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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죽거리 잔혹사 [dts] - [할인행사], (2disc)
유하 감독, 이정진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고백컨대 필자는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를 객관적으로 이야기할 처지가 못된다. 1970년대말에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고,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 이소룡의 영화라면 남김없이 소비하며, 쌍절곤을 휘두르는 이소룡의 “야비오!” 소리에 열광했고, 진추하의 노래를 들었고, 보니엠의 "원웨이 티켓"을 들으며 고고장을 기웃거렸고, 배철수가 멤버로 있는 ‘활주로’의 노래를 읊조렸고, 누구나 한번쯤 치러야 했을 풋사랑의 아픔을 겪으며 그 시절을 통과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을 무어라 명명하든 어쨌든 그 시절은 지나갔다. 그리고 더 엄혹한 시절이 왔다! (나는 ‘엄혹한’이라는 형용사에 방점을 찍는다.)
'구국의 유신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라고 씌어진 학교 정문의 간판, 빠일로트 만년필, 양은 도시락, 버스 차장, 올리비아 핫세, 원더우먼, 서니텐… <말죽거리 잔혹사>는 흘러간 시대를 복원하겠다는 야심으로 무장한 소품들로 넘친다. 그 야심은 일단 성공한 듯싶다. 그래, 맞다, 그때 그랬었지, 그 시절을 통과한 이들이라면 유하의 셋팅 실력에 충분히 고개를 끄덕였을 법하다.

유하 감독의 연출에 가장 큰 공감을 보낼 세대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속하는 또래일 것이다. 소위 386세대. 그러나 10대 역시 이 영화에 환호한다. 그 환호의 일부는 권상우의 근육질 몸매에 보내는 소녀들의 찬사일 것이고, 또 그 일부는 적(?)들을 차례로 쓰러뜨리는 권상우의 절권도에 보내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런 대중적 코드에 머무르고 있지 않다. 영화는 한층 웅숭깊은 차원에서 10대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이 영화의 미덕이다.
그때로부터 20년이 지났다. 그러나 뭐가 달라졌다는 것인가. 박정희가 저격되고, 교련이 폐지되고, 몽둥이가 교실에서 사라지고(이 부분은 객관적인 검증이 필요하겠다.), 흑백 TV가 칼라 TV로 바뀌었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여전히 입시는 과중한 무게로 10대들을 압박한다. 청년실업이 50만에 육박하는 현실은 일층 무게를 더한다. 모니터만 켜면 ‘무늬만 19세 이상’인 컨텐츠들이 오감을 자극한다. 신어라, 입어라, 마셔라, 들어라... 온갖 미사여구의 광고메시지들은 무의식적인 선택을 강요하며 10대의 여린 감성을 파고든다. 클릭 몇 번이면 원하는 모든 이미지들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미지에 만족하는 욕망이 있던가. 모든 욕망은 실체의 속살을 파고들고 싶어하는 법. 갖고 싶어, 구매하고 싶어, 미디어들이 부풀려 놓은 욕망 앞에 10대들은 속수무책이다. 과도해진 욕망 앞에 빈곤한 구매력, 일탈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때리고 부수고 소비하라. 비용이 모자란다고? 소비의 욕망으로 땡땡하게 부풀어오른 10대들의 몸을 아껴주는 아저씨들이 있지 않은가.
이쯤에서 물어보자. 무엇이 달라졌는가. 영화 배우 정윤희의 비키니 사진 한 장을 수첩에 끼워넣고 희희낙락하던 욕망은 엄청난 량의 하드디스크를 점령하는 포르노물로 ‘성장’하지 않았는가. 과장을 보탠다면 오늘날 한 학생의 욕망의 총량이 ‘정문고’전체 학생들의 욕망의 총량보다 작다고 할 수 없다. 긍휼함을 입어야 한다면 정문고의 학생들이 아니라 욕망의 과잉 시대를 살아가야만 하는 ‘이곳’의 학생들이지 않을까. 유하 감독이 진실로 키취의 진정성을 그리고 싶었다면 그가 그려야 했던 것은 바로 시물라시옹 시대의 ‘현수’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긍휼함을 입어야 한다면 1970년대의 ‘현수’가 아니라 2000년대의 ‘현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디어가 확대재생산해내는 욕망이 1970년대의 현수보다 2000년대의 현수에게 더 큰 공허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나 조금은 나르시시스트인 법이다. 더구나 현수는 현수대로의 진정성이 있다. 그것이 유아의 나르시시즘이든 어떻든 제 자신의 공허를 채우고 싶은 갈급한 욕망은 솔직한 것이다. 한 여자를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 앞에 부르르 떠는 청춘의 육체는 솔직한 것이다. 나르시시즘이라 명명하든 말든 그것을 긍휼하게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도 솔직한 것이다. 10대, 그들에겐 욕망을 좀더 세련되게 승화할 교양이나 취미가 풍족치 않다. 그러나 이 땅의 교육이 그것을 가르쳐줬던가. 천만에! 숱한 교육개혁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아이들은 욕망을 좀더 문화적으로 세련시킬 기술을 어른 세대들로부터 전수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어른 세대들, 이들은 10대들의 욕망을 부풀리기에 혈안이었다. 한편으로는 10대들의 과소비와 명품선호현상을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10대들을 구매자로 포섭하기 위한 마케팅 전략을 펼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런 이율배반의 땅이 10대들이 숨쉬는 공간이었다. 폭압의 시대는 갔는지 모르겠지만 더 엄혹한 시절이 온 것이다. 컴퓨터그래픽의 기술을 빌어, 좀더 화려한 의상과 세련된 자태로, 더 가혹한 시절이 도래한 것이다.
교육이 그들에게 ‘자발적 가난’을 가르쳤던가. 소위 ‘럭셔리’한 것을 선호하는 10대들에게 법정(法頂)이 말하는 ‘무소유’는 따분한 추천도서에 불과하다. 성장의 신화가 추호도 의심받지 않는 곳에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슈마허의 주장은 한낱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웰빙’이라고? 그것은 좀더 좋은 것을 소비하고자 하는 귀족주의의 다른 이름은 아닌가? 소비를 통해 자신을 차별화시키려는 ‘차별화 전략’은 아닌가. 아비는 굶는데 아들이 잘 살단다면 그 아들의 삶을 웰빙이라고 할 수 있는가. 관계에 대한 배려를 빼놓고 웰빙을 언급할 수는 없다. 학교의 '윤리‘가 ’관계에 대한 배려‘를 말하던가. 진정한 정체성은 소비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윤리‘가 말하던가.
'지금‘을 말하지 않고 ’옛날‘을 말하는 것을 굳이 탓할 일은 못 된다. 누구나 지나간 한때를 그려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때가 좋았어, 라고 하는 회고적 감상주의는 위험한 것이다. 다행히 유하의 <말죽거리 잔혹사>는 그런 회고적 감상주의를 벗어나 있다. 폭력과 비리로 얼룩진 참으로 돼먹지 못한 시절을 통과했노라고 그의 영화는 말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가 지금 딛고 있는 지금의 땅은 어떤가. 그곳은 안전한가. 그곳의 아이들은 평안하신가. 광고에 대한 패로디를 그의 시적 전략의 하나로 했던 시인으로서의 유하와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욕망을 말하던 감독으로서의 유하의 작가적 공력이 이제 본격적으로 <욕망의 잔혹사>를 말할 때이다. 그것이야말로 폭력의 내부를 좀더 샅샅이 해부하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