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없는 미녀 SE (2disc 디지팩)
김인식 감독, 김혜수 외 출연 / 베어엔터테인먼트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증가하는 양이 질적으로 급전하는 비등의 정점처럼 모든 열정에는 포만의 정점이 있기 마련이다. 번거롭게 조르주 바타이유를 빌리지 않더라도 열정의 정점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에로스의 충동이라면 그것은 곧 타나토스, 죽음에의 충동에 다름 아니다. 설탕이 설탕인 채로 커피와 하나가 될 수는 없는 법, '나'를 무화시키지 않고 '내'가 여전히 나인 채 너와 하나가 될 수는 없다. 그 속에 내 존재를 송두리째 디밀 수 있는 괜찮은 입구를 찾았다고 한들 애시당초 그와의 합일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화엄경의 구절들을 들먹이며 불이(不二)의 법문을 외쳐 봐야 어차피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 분명한 사실 앞에서 절망과 상처를 과장하는 것이 멜로의 어법이다. 그 상투적인 멜로의 어법은 아무리 우려먹어도 약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네 욕망의 불이 쉬 꺼지지 않는 탓이고, 우리네 이성은 제 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욕망의 불 앞에서는 무력한 탓이다.

영화 <얼굴 없는 미녀>에서의 세트는 필요 이상으로 미학적이다.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이 간결하고 단촐하다. 한편의 미니멀리즘 아트를 보는 듯하다. 이런 기하학적 배치가 과연 감독의 의도적 연출에서 비롯되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구성적인 선과 인공적 조명으로 장식된 주인공 지수의 집과 석원의 진료실, 대학병원의 구름다리, 스포츠 센터 등은 독특한 색감과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어쨌든 <얼굴 없는 미녀>의 영화적 공간은 심플하고 모던하기 그지없다. 그 공간은 모든 것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설명하려는 과학과 이성의 공간의 상징이다. 그곳은 밝고 간결하고 투명한 칠음계의 공간이다.

그러나 어디든 무시무시한 심연과 악몽의 변두리는 있게 마련이다. 그 공간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천장에서 죽은 쥐의 시체가 썩듯 끊임없이 악취가 풍겨오지만 그 악취의 입구조차 찾을 수가 없다. 의사들은 그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와 열쇠를 찾아주겠노라고 장담을 한다. 그러나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지 않던가. 석원(김태우)은 제 고통이 부글거리는 진원지조차 제대로 찾지 못해 쩔쩔매는 한심한 중생이다. 그런 그가 지수(김혜수)의 고통을 치료하겠단다. 제 자신을 객관화하지 못하는, 머리만 큰 남자아이가 가슴만 빵빵한 어린 소녀를 치료하겠다니, 이건 숫제 치료를 핑계 대고 어린 소녀의 몸을 만져보겠다는 소위 '병원놀이'의 세련된(?) 버전이 아닌가. 어쨌든 그 놀이는 성공적으로 진행된다. 더구나 그 병원놀이는 환자의 아픔을 치료하는 동시에 의사의 트라우마를 동시에 치료한다는 근사한 명목까지 얻는다. 이 대목에서 의사의 윤리를 들먹이는 비평가는 차갑게 달려드는 시선들을 일축해버릴 수 있는 배짱이 있어야 한다. 언제나 영화는 윤리보다는 미학의 편이다.

그녀(지수)는 글을 쓴다. 아니 매달린다. 쉴새없이 중얼거리며 욕망을 뱉어내는 셈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대로 하나의 허구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욕망이 만들어 내는 각본대로 사물들을 호명하고 호출하고 배치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세계에는 세계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지수의 눈에는 세계가 보일 리 없다. 세계는 쓰레기고 고결한 것은 '나'다. 그런 '나'를 몰라주니 미친다. 아니 미쳤다. 미쳐서 헛것이 보인다. 결국 그녀의 욕망이 본 것은 세계가 아니라 헛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반성을 모른다. 그녀는 여성이라는 가면을 쓴 마초다. 잘못 건드리면 칼침을 놓을 기세다. 오히려 석원이 김태우의 혀 짧은 목소리를 빌어 수줍은 여성성을 연기해낸다. 대체 이 전도된 성역할은 무엇의 상징인가. 기존의 성정체성을 전복하려는 연출자의 계책인가. 아님 우연인가.

설령 맘 좋은 편집자가 있어 지수의 글을 책으로 묶어준다고 해서 그녀의 욕망이 끝이 날까. 죽은 애인이 살아온다고 해서 그녀의 욕망이 휴식을 할까. 원칙적으로 모든 욕망은 휴식을 모른다. 휴식을 모르는 욕망을 좇는다는 것은 끊임없이 존재를 가열시켜 결국 재처럼 연소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삶은 얼마간의 굴욕을 지불하는 일이라지 않던가.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일정한 타협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녀에게 타협은 없다. 수틀리면 쇼핑카의 물건들을 뒤집어 버릴 수 있는 남성적 오기와 배짱이 있다. 하지만 말이 좋아서 오기와 배짱이지 다른 쪽에서 보자면 자기밖에 모르는 유아적 이기심의 발로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쭉쭉하고 빵빵한 여자들이 하면 왠지 뭐가 있어 보이는 게 영화다. 뻬아트리체 달이 한 성질을 부리는 <베티불루>를 생각해보시라. 타인의 자유가 시작되는 곳에서 나의 자유는 끝이 난다는 윤리학은 그런 미녀들의 성깔 앞에서는 무력하다. 하긴 윤리가 영화에 개입하면 왠지 구질구질해진다는 것도 현실이긴 하다.

김인식 감독은 그의 데뷔작 <로드무비>에서부터 어른들의 세계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의 영화에는 자신의 욕망만을 바라보는 어린아이만 등장한다. <로드무비>에는 그의 아내와 아이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좇는 욕망의 원칙주의자 대식이 있다. 하긴 모든 욕망은 근본적으로 소통을 거부한다. 하지만 <로드무비>에서의 대식에겐 오직 저의 공허함을 충족받고자 하는 갈급함만이 있을 뿐, 타인도 욕망하는 주체라는 사실에 대한 고려는 깨끗하게 망각되고 있다.

의사인 석원에게는 욕망으로부터 반성적 거리를 확보해야할 직업적 의무가 있다. 상처에 매몰되지 않고 상처를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직업적 뚝심이 석원에게는 있어야 한다. 바로 그 뚝심의 세계가 프로의 세계이고 어른들의 세계다.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봉합할 수 있는 자, 그가 의사고 프로이며 어른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의 상처에 매여 있다. 그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는 것이다. 상처의 동굴 속으로 기어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싶은 것이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의 강으로 돌아가 최후를 맞이하는 연어처럼 석원은 자신을 죽음을 몰고 간다. 거기가 끝이다.

김 빠지는 소리지만 몇 명쯤의 어른 정도는 이 영화의 사이사이에 배치했어도 좋았을 듯하다. 무리한 요구이긴 하다. 윤리학적 잔소리가 들어가면 영화가 김이 빠진다는 흥행의 요구도 요구지만, 톨스토이의 소설처럼 인생을 입체적으로 보기에는 영화란 태생적으로 장르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푸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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