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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 (2Disc)
줄리 테이머 감독, 셀마 헤이엑 외 출연 /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셀마 헤이엑이 분한 영화 <프리다> 속의 프리다 칼로는 여성이다. 셀마 헤이엑의 바디라인은 매혹적이고, 제75회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의상상을 <시카고>에 빼앗기고 분장상에 만족해야 했지만 프리다의 의상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녀의 영혼마저도 생물학적 신체와 동일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융(Jung)은 여성의 정신 속에 들어 있는 남성적 요소를 아니무스(Animus)라 했던가. 한 인간의 몸엔 음과 양이 태극처럼 뒤엉켜 있다. 어떤 남성성을 무의식화하느냐는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문화적인 문제. 씩씩하게 살려는 여성들은 어머니처럼 살기를 거부하지만 다른 역할 모델이 없기에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그대로다. 따라서 여성 무의식 속의 남성성인 아니무스는 가부장적이다. 가부장적 문화권에서는 전통적인 아버지상이 한 여성의 무의식으로 잠입하기 마련이라면 프리다의 아니무스는 보르헤스의 『불한당들의 세계사』에서 등장할 법한, 남아메리카의 마초상이 투영되었을 것이란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어린 시절에 소아마비를 앓고 18살에 교통사고로 버스 난간이 자궁을 관통하는 사고를 입었다 해도 프리다의 몸은 여전히 여자다. 그러나 그 ‘부실한 여자’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를 그린 것은 혼자일 때가 많았기 때문이고, 내가 가장 잘 아는 소재가 나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던 프리다는 ‘나’를 그리기 시작한다. ‘나’를 초월하는 길은 ‘나’에 집착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일까. 조각나고 뒤틀린 신체, 그것은 자신의 기괴함을 들여다보아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각성의 작업이었으리라. 자기 연민 없이 어찌 제 그로테스크한 몸을 들여다 볼 수 있었을까. 그러나 강한 자는 초월의 에네르기, 그 자체가 아니면 무엇인가. 현실에서의 패배가 곧 예술에서의 패배가 될 수는 없었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똑바로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선, 그 팽팽한 대결의 정신이 프리다의 붓끝에 실린다. 그 붓을 움켜쥐게 하는 힘, 그것은 여성의 악다구니가 아니었다. 세계를 내 손으로 그러쥐겠다는 남성적인 힘이었다. 불우를 불우로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 슬픔을 슬픔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대결과 초월의 정신이었다. 그것을 브르똥(Breton)은 초현실주의라 명명했다. 그러나 프리다의 초현실주의엔 브르똥의 정치성이 없었다. “프리다 칼로는 정확하게 정치 노선과 예술 노선의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다.”라고 한 브르똥의 말은 반은 진실이고 반은 왜곡이다. 그녀는 오직 자신만을 그리지 않았던가.
그것은 자기 연민에서 비롯된 에고이즘이었고, 현실의 유약(柔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도저한 자기 부정이었다. 프리다는 남장(男裝)을 한다. 마치 자신의 육체를 부정하려는 듯. 디에고 리베라에 대한 사랑도 그런 자기부정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리베라가 누군가. 마초도 그런 마초가 따로 없다. 아내고 처제고 따지지 않는다. 그는 무자비한 냉혈한이다. 율법도 없고 도덕도 없다. 오직 딸랑거리는 하초의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 게다가 그는 멕시코 제일의 벽화가라는 명성까지 확보하지 않았는가. 프리다의 무의식적 남성상, 아니무스에 꼭 들어맞는 인물이다. 힘을 갈구하는 프리다가 이런 남자를 지나쳤을 리가 없다. 자화상에 대한 집착, 남장(男裝), 리베라에 대한 사랑, 혁명에 대한 열광(그녀는 실제로 1907년생인데 1910년의 멕시코 혁명에 열광한 나머지 자신의 탄생을 1910년이라고 우겼다는 일화가 있다), 트로츠키와의 염문, 그 모두가 힘과 권력에 대한 그녀의 도저한 집착에서 연유하는 것은 아닌가. 영화 <프리다>의 원작이라고 알려진 『프리다 칼로』(민음사)의 저자 헤이든 헤레라(Heyden Herrera)도 프리다를 평하길 ‘명성과 인기에 무덤덤한 것처럼 굴었으나 실은 그것을 즐겼고, 남들 눈에 비치는 자기 이미지를 관리하는 데 능했다.’고 평하지 않았던가. 누구나 그렇듯, 그는 연극적 인간이었다.

그러나 강한 여자의 내면엔 연약한 소녀가 살고 있기 마련. 프리다의 강함은 이 연약한 소녀를 억누름으로써만 그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억압은 무의식의 성장을 도울 뿐, 모든 억압된 무의식은 말한다. "I will be back" 프리다 안의 소녀는 위로 받고 싶어한다. 그녀에겐 자상한 아빠가 필요하다. 하지만 리베라가 나긋나긋하게 그녀를 위로해줄 성싶은가. 누가 이 소녀를 토닥거려 줄까. 드디어 프리다 안의 소녀의 고독이 시작된 것이다. 징징거리며 그녀는 리베라에게 사랑을 애걸한다. 하지만 리베라의 피는 차다. 프리다가 성인(成人)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 소녀와의 타협이 필요했다. 프리다는 이 소녀를 변신시키는 길을 택함으로써 성인이 된다. 프리다는 스스로 마초가 된다. 계율에 몸을 복속시키기보다는 제 욕망에 제 몸을 따르게 한다. 프리다를 설명하는 데 ‘동성애’라는 레테르는 천박하다. 프리다가 택한 길은 철저히 여성을 부인하는 길, 남성적 권력에 대한 탐닉의 길이었다. 여성성을 부인하는 것이 여성해방이라고 생각했던 초창기의 페미니스트들은 프리다가 택한 길을 페미니즘이라고 이름했던 것은 아닐까.
테킬라 마시기 결투에서 승자가 되어 사진작가 티나 모도티(애슐리 쥬드 粉)와 탱고를 추는 장면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연출가 출신인 감독 줄리 테이머가 자신의 장기를 살리기 위해 작위적으로 연출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전기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에피소드의 사실성은 아니다. 감독의 의도성과는 무관하게 우리는 그 장면에서 승리에 집착하는 프리다의 아니무스와 만난다.
부정의 정신은 전적으로 남성적이다. 그것은 아(我)와 비아(非我)를 구분하는 대낮의 정신, 이성의 산물이다. 갈등과 대립을 무화시키고, 구별과 차별의 정신을 무색하게 하는, 박명(薄明)의 정신, 그 포용의 여성성이 그리운 때다. 여기는 경계인조차 품지 못하는 옹졸한 땅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