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와 존재하기
조지 쉬언 지음, 김연수 옮김 / 한문화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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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달리기, 몸 속에 길 위의 고통을 각인한다




    녕에서 함덕까지 북제주의 해안도로를 파도 소리를 들으며 달렸다. 쿵쿵거리는 내 몸의 피 소리가 포효하는 파도소리와 아주 잘 어울렸다. 일상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한 여행, 그러나 나는 컴컴한 새벽 다시 한번 숙소를 빠져나온 것이다. 달린다는 것은 언제나 일정한 공간으로부터 내 몸을 빼내는 일이었다. 한 발짝 한 발짝, 몸의 나아감과 공간의 물러섬.

    지금으로부터 꼭 이년 전, 뛴 지 육 개월 정도 되었을까. 무리를 했는지 무릎에 이상이 왔다. ‘장경인대증후군’, 한 달 정도는 쉬라는 의사의 권유에 아랑곳없이 보름 정도 쉬고 뛰었더니 욱신거리는 통증이 심해졌다. 침을 맞고, 마사지를 하고, 퇴근 후에 정형외과에서 치료를 받으면서도 달렸다. 치료한 보람이 있었는지 무릎이 좋아지는가 싶더니 ‘족저근막염’이라고 이번엔 발바닥에 통증이 느껴졌다. 무릎 아래 파스를 6장씩이나 붙이고 달렸다.

    허리가 줄어들고, 볼 살이 빠지고, 몸도 가벼워지기 시작했고, 체중이 줄었을 것이다. 아내는 그 정도면 이젠 어디 가서 총각 행세라도 할 수 있으니 더 이상 달리지 마라, 더 달리면 오히려 얼굴에 주름도 더 생기고, 사람이 경망스럽게 보일 수 있으니, 그만 달리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병원 신세까지 져가면서 달릴 필요가 있냐는 것이었다. 아내뿐만이 아니었다. 파스로 도배를 한 무릎을 보고 동료들도 한 마디 거들었다. 내 몸 좋자고 달리는 것인데, 병원에까지 다니면서 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두주불사(斗酒不辭)인 내가 술자리에서 뜸해졌다는 사실에 대해 섭섭했던 속내를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사람이 하던 짓을 해야지 안 하던 짓을 하면 큰일난다는 은근한 위협을 하는 동료들도 있었다. 건강도 좋아졌는데 이제 ‘걷기’를 해보라는 권유를 해오는 사람들도 부쩍 많아졌다. 달리기는 ‘활성산소’를 생성하고 활성산소는 DNA 조직을 파괴시키니 이젠 건강을 생각한다면 ‘걷기’를 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법 전문가적인 충고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엔 살을 좀 빼야겠다는 생각에서 달렸는지도 모르겠다. 쫄티를 입어도 과히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는 않겠군, 제법 괜찮은 몸매가 만들어졌을 때, 달리기의 목적은 이미 달성된 셈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달리기를 그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달리기를 멈춘다면 런너가 아니다.

    뛰는 순간에 있어서만은 내가 내 몸의 주인이다. 속도를 내거나 늦추거나 모든 것은 내 의지에 달렸다. 하지만 내 의지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더 빨리’라고 내 마음이 말할 수 있지만 그 소리가 몸에 미치지 못하면 그만이다. 세상도 몸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 마음도 몸을 어찌할 수가 없다. 하지만 몸과 마음의 이런 이분법은 옳지 않다. 뛰고 있을 때, 과연 나는 내 몸의 주인인가. 몸을 소유한다?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오만인가. 그렇다. 나는 곧 내 몸이다. 그 몸이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언제 나의 온전한 주인이었던 적이 있던가. 당신은 이미 낡았다, 낡지 않으려거든 제품을 바꿔라, 끊임없이 욕망을 부추기는 광고와 정치선전에, 미디어가 강요하는 무의식적 강제에, 지배이데올로기의 보이지 않는 책동에 내 몸은 언제라도 한 번 ‘몸의 요구’에 충실했던 적이 있던가. 달린다는 것은 그 모든 외적인 강제를 벗어버리는 일이다. 임제 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立處皆眞)이라 하셨던가. <어느 곳에서든지 주인이 되면 그 서 있는 곳은 다 부처가 되는 법>, 하지만 부처까지 바랄 것 없다. 백세까지의 건강도 필요 없다. 활성산소를 피하고, 관절의 통증을 피하고, 건강을 바라시거든 걸으시라. 걸으며 사색하시라.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숲길)에서 '혼자서 걸으며 여행했던 때만큼 생각을 많이 하고 살아있음을 강하게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걷는 것에는 생각을 자극하고 생명력을 불어넣는 뭔가가 있다.'라고 말한 장 자크 루소는 옳다.

    같은 맥락에서 “속도는 망각의 열정에 비례한다.”고 했던, 『느림』(민음사)의 작가 쿤데라도 옳다. 생각은 무겁다. 뛰는 자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느낄 뿐이다. 조지 쉬언은 그의 책 『달리기와 존재하기』(한문화)에서 “역사를 만들지 않고 사는 법, 원수를 갚지 않고 즐기는 법‘을 달리기를 통해 배웠다고 고백했다. 역사를 만들지 않고 산다니, 달마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설 말이다. 그러나 치렁치렁 무거운 과거를 달고 달려 보시라. 그럴 때 몸은 안달이다. 가급적 모든 것을 비워달라고 내 몸은 소리친다. 뛰는 자에게 과거와 미래는 없다. 과거가 없으니 쓰라림이 없고, 미래가 없으니 불안이 없다. 모든 발걸음은 현재에 있다. 바람이 나뭇가지의 흔들림에 있듯이.

    달리기에 필요한 것은 쿠션이 좋은 런닝화, 운동복, 그리고 몸뿐이다. 어떤 테크놀로지도 필요 없다. 경쟁 스포츠처럼 라이벌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스키나 골프처럼 고가의 장비도 필요 없다. 나는 어떤 테크놀로지도 매개하지 않고 직접 나를 느낀다. 규칙도 없다. 내가 규칙이다. 내 몸이 규칙이다. 쿵쿵거리는 피와 가쁜 호흡이 규칙이다. 달리는 자는 가능한 한 위장을 비워두어야만 한다.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은 반드시 식도를 타고 역류한다. 과거도 벗어두어야 한다. 법도 없고 룰도 없다.

    모든 고통의 순간은 지나간다. 고통을 기억하는 것은 내 머리가 아니다. 내 모든 근육과 세포 하나 하나가 내가 달린 길과 고통을 기억한다. 달린다는 것은 내 몸 속에 길 위의 고통을 각인하는 것이다. 조지 쉬언은 달리기를 통해 <영적 성장의 최종 목적지인 존재 속으로 들어가는 법>을 배웠다고 했고, <성자나 형이상학자가 되고 싶다면 먼저 운동가가 되어라>라고도 했다. 달리기를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리자는 말이다. 마라톤은 스포츠가 아니다. 가장 다이내믹한 참선이요, 철학이라고 마라톤을 완주한 한 주자는 말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는 마라톤을 통해 득도했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마라톤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켰다는 말도 듣지 못했다.

    마라톤이 끝나면 런너들은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다시 세상의 룰에 순응할 것이다. 벗었던 몸에 다시 의상을 걸치고 무거운 구두를 신고 생산성과 효율성의 신화를 종교처럼 신봉하는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그들은 다시 테크놀로지와 시스템의 논리에 순응해야 할 것이다. 그 논리에 순응할 힘을 얻기 위해 우리가 달려야만 한다면 우리의 달리기는 최악이다.

    달리기에는 생각이 없다. 과거도 미래도 없다. 생각이 없고, 과거도 미래도, 역사도 없는 종교가 있다면 달리기는 분명 종교다. 하지만 그런 종교는 없다. 거창하게 말할 것 없다. 달리는 자에게 왜 달리느냐고 물을 때, 머뭇거린다면 그가 바로 런너다. 이유와 목적을 따지는 것은 이 시대의 못된 버릇이다. 모든 즐거운 것은 이유가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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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리는 세계 - 식량에 관한 열두 가지 신화
프랜씨스 무어 라페 외 지음, 허남혁 옮김 / 창비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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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이 모자라서 굶는다? 천만의 말씀
굶주리는 세계/ 프렌씨스 라페 외 등저 / 창비, 2003




색혁명, 바이오테크의 시대에 새삼스레 무슨 기근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IMF 이후 결식아동의 문제는 수단이나 방글라데시와 같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8억 여명이 일상적으로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한다. 식량이 모자라서? No,라는 것이 『굶주리는 세계』의 답이다. “오늘날 전세계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루에 3500칼로리를 공급할 수 있을 만큼 곡물을 생산한다. 이는 거의 모든 사람을 비만으로 만들고도 남을 정도이다. 게다가 이 추정치는 채소, 콩, 견과류, 뿌리작물, 과일, 초식 가축과 생선 같은 다른 식량자원을 합산하지 않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합산하면 한 사람이 매일 적어도 2㎏의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다.” 라고 이 책은 말한다.

『굶주리는 세계』의 집필자는 푸드퍼스트(Food First)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식량과 발전정책연구소>의 연구원들이다. 2억 1천만 명이 만성 영양실조 상태에 있는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 국가들이 계속 식량을 수출하고 있다는 사실, 나이지리아, 브라질, 볼리비아 등 인구밀도가 낮고 식량자원이 풍부한 국가들에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황당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사실은 자연재해나 인구밀도가 기아의 원인이라는 우리들의 판단이 근거 없는 편견임을 말해준다.

녹색혁명이 굶주림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은 역시 No,라고 말한다. “신품종을 재빨리 도입한 것은 빈농이 아니라 부농들이었으며, 토지 없는 농민들은 물론 이것을 심을 땅이 없으므로 새로운 종자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대규모 농장을 가진 부유한 농민들의 생산량은 늘어났고, 생산량이 늘자 곡물가격은 떨어졌다. 결국 이는 소규모 빈농들을 압박했다. 따라서 빈농들은 새로운 종자가 도입되기 전보다도 경쟁에서 더욱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녹색혁명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녹색혁명의 덕을 조금이라도 보는 곳은 녹색혁명 전부터 불평등 수준이 다른 곳에 비해 월등히 낮았던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불평등의 구조를 해결하지 않은 상황에서의 녹색혁명이란 오직 부자들의 창고를 늘리는 데만 기여한다는 사실이다.

개량종자들을 채택하면 농가의 순소득이 증대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푸드퍼스트(Food First)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개량종자의 선택으로 비료와 농약 비용이 수확량보다 더 빨리 불어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매우 디테일한 자료들을 제시한다. “필리핀 중부 루손지역에서는 80년대에 쌀 수확량은 13% 늘어났는데 비료 사용량은 21% 늘어났다. 중부 평원 지역에서는 수확이 6.5% 늘어나는 데 그친 반면, 비료 사용량은 24% 늘어나고 농약 사용량은 53% 늘어났다.” 부농들은 농약과 비료를 감당할 만한 여력이 있겠지만 빈농들은 그럴 여력이 없는 탓에 점점 더 불리해진다는 것이다. 뿐인가. 비료와 농약 사용의 증가로 환경 파괴는 불을 보듯 뻔한 일. 결국 경제권력 집중 구조개선 방안, 토지와 식량 자원 및 소득의 형평성 유지 방안 등이 새 영농법과 함께 고민되지 않는 이상, ‘배고픔’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원조 또한 굶주림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의 진단이다. 미국의 경제원조가 몇 개 국가에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으며, 경제원조는 일련의 구조조정정책을 강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며, 미국은 군사원조를 통해 전세계적인 무력분쟁에 직접 기여하고 있으며, 이는 추악한 현실을 흐리는 ‘겉치레’ 역할을 해 대중을 호도한다는 점을 이 책은 지적하고 있다. 미국의 원조는 외교정책의 일환으로 자유무역과 시장정책에 사용됐고, 식량 무기 수출증대에 기여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진정으로 개발도상국을 도와주고 싶다면 원조자금으로 그들의 부채탕감을 해주어야 한다는 지적도 경청할 만하다.

식량이 충분하지 않다, 자연 탓이다. 인구가 너무 많다, 미국의 원조가 기아를 해결한다, 녹색혁명이 해결책이다 등등, 굶주림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고정관념 12가지를 골라 ‘신화’라고 명명하고 그 신화의 허구성을, 이 책은 폭로한다.

결국 배고픔은 식량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라는 것이다. 일한 만큼 보상받고, 식량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민주적인 사회구조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기근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이다.

굶주림은 칼로리 섭취량의 부족만은 아니라고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굶주림이란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힘을 빼앗기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다.”라는 것이다. 나의 굶주림은 상상할 수 있지만 내 아이의 굶주림은 상상하기란 고통스러운 일이다. 누가 그 부모의 고통을 가족이기주의라고 이름할 것인가.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부모의 무력함보다 절망적인 것이 또 있을까. 소위 ‘자발적 가난’이야 얼마든지 환영할 만한 것이지만, 가난이 지긋지긋한 것이라면 바로 그 굶주림의 절망감 때문이리라.

“굶주린다는 것은 굴욕적인 삶을 의미한다. 고통, 슬픔, 그리고 굴욕은 굶주림이 의미하는 것들의 일부이다.․․․굶주림을 숫자로만, 즉 칼로리 섭취량이 적은 사람의 수로만 생각한다면, 그 해법 또한 숫자―식량 원조량이 몇 톤인지, 아니면 경제 원조금액이 얼마인지―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굶주림을 가장 고통스러운 인간 감정에 직면한 사람들로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그 근원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고l 이 책은 말한다. 왜 아니겠는가. 굶주림은 굴욕이다. 가족을 굶겨야 하는 가장에게 삶은 치욕이지 않겠는가. 그 치욕 앞에서 인간됨의 품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기근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근본적 대안으로서의 민주주의는 결국 인간됨의 품위를 드높이는 일이다.



*삽화로 이용한 판화는 케테 콜비츠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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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0-26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삽화 안 보여요
 
축제와 문명 한길컬처북스 21
장 뒤비뇨 / 한길사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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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마음의 반딧불을 모아 타오르는 노래
축제와 문명 장 뒤비뇨 지음, 류정아 옮김 / 한길사, 1998




속에서는 일이 보이지 않는다. 조금 거리를 두어야 잘 보인다. 어떤 계기로 해서건 일에 거리를 두고 보니 어쩐지 하는 일이 시원찮다. 밋밋해 보이기 이를 데가 없다. 퍼들썩거리는 저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순간 잘 나가던 일상은 그만 맥이 빠져 삐거덕거린다. 이래도 되는 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순조롭던 일상이 돌연 수상해 보인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강령들이 어째 수상타. 아무래도 이런 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던가, 일을 작파해버리기엔 일상의 무게가 만만찮다. 버겁기까지 하다. 의심은 짧고, 생계는 길다. 툴툴거리면서 다시 일로 돌아가는 수밖에.

일을 하려면 쿵쿵거리는 피를 잠재워 두어야 한다. 보채지 좀 마라고 껄떡거리는 욕망도 잠재워 두어야 한다. 징징거리지 마라고 마음도 잠재워 두어야 한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싶지만 일이란 게 원래 그런 거다. 그러나 누르려고 해서 눌러지는 게 욕망은 아니다.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이 무정형의 에너지 앞에서 이성은 창백하기 그지없다. 일상을 삐거덕거리게 한 욕망을 협상의 테이블로 끌고 와, 으르고 별러도 이성으로선 별반 줄 게 없다. 잘 구슬려 일터로 돌려보내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자코 일상에 복무시킬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지만, 한번 삐진 마음을 달래는 길이 쉬울 리가 없다. 이럴 땐 이성이 크게 한턱 쓰는 수밖에 없다. 놀아랏!

그리하여 이제 축제는 단절이다. 일상으로부터 얼마쯤 거리를 두는 격절(隔絶)이다. 상식으로부터도 좀 물러서고, 관습으로부터도 좀 물러서는 거리두기다. 어려울 것도 없다.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이다. 해방은 풍자고, 야유고, 일탈이다.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에너지가 축제의 동력이다. 기계적인 분절의 시간 대신에 제 고유한 리듬과 운율에 따라 몸을 흔드는 가무(歌舞)의 시간이 축제의 시간이다.

『축제와 문명』의 장 뒤비뇨는 말한다.

사람들은 자주 ‘놀이’와 ‘축제’를 혼동한다. 놀이는 규칙의 수용을 이야기하며 과격한 근육행위에 기호를 부여하고 자연적인 행위로부터 분리되어 스펙터클로 통합되는 것이다. 반면에 축제는 규칙을 위반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모든 규칙을 파괴하는 것이다.

놀이를 이끌고 가는 것은 규칙이고 룰이다. 룰이 없으면 놀이가 아니다. 룰을 어기는 자는 ‘왕따’를 시키면 그만이다. 하지만 세상을 둘러보시라. 정치나 경제의 규칙이란 것은 놀이의 규칙과는 유가 다른 것인지, 놀이의 규칙을 어기고도 버젓이 사회적 권력을 행사하시는 분들이 한 둘이 아니시다. 나 안 해, 놀이가 재미없으면 안 놀면 그만이다. 뉴질랜드에 가서 번지점프를 할까, 디즈니랜드에 가서 롤러코스터를 탈까, 그러나 여비도 만만치 않은데, 대체 이 땅이 아니면 어디에 가서 놀겠는가. 이를 갈면서도 이 땅에 살 수밖에.

이 땅에 살기 위하여 다시 일하러 간다. 열심히 빵을 굽고, 방부제를 치고, 열심히 모종을 하고, 농약을 치고, 이것을 사라, 이것을 입어라, 이것을 먹어라, 이것을 마셔라, 이것을 씹어라, 욕망을 부풀려, 절박한 몸의 요구가 아닌 것들을 판매하고……. 반성하는 자에게 안녕은 없다. 그래, 일상은 진지한 거다. 제 새끼들을 보듬으며 먹고사는 일은 위대한 거다, 이렇게 얼렁뚱땅 변호도 해가면서 되먹지도 않은 노동을 감싸고도는 거다.

꿀 속에 빠져버린 일벌처럼 일에서 헤어 나오긴 아예 글러버린 것 같다. 어찌해야 저들을 일의 꿀통 속으로부터 건져내, 끊임없이 뒤섞이며, 끊임없이 해체되며, 파도가 뭍을 하염없이 쓸어 내리듯 규칙도 없이 룰도 없이 한바탕 질펀하게 놀 수 있을까.

효율성, 생산성, 경제성……. 대체 이런 것들이 언제부터 놀이의 규칙이 되었는지. 하늘의 새들과 땅의 풀들과 이 세계의 동무들과 어울려 잘 한번 놀아보는 데 저 강령들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대체 누구의 권능을 빌어 저 강령들은 우리 위에 군림하시는 건지. 모르는 척 의뭉스레 요것들을 슬쩍 밟아 버리면 안될까. 어이쿠 미안해, 마음에도 없는 사과도 해가면서.

그러나 잘못 건드렸다가는 몰매를 맞기 십상이다. 몰매를 맞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균열을 내는 수밖에. 원래 큰 덩치들이란 조그만 상처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니, 조금씩 흠집을 내는 거다. 네가 천년 만년 갈 거 같으냐, 속으로 한번 으르렁거려 보면서 야곰야곰 외곽을 갉아대는 거다.



술 한 잔에 노고를 달래는 저 고단한 노동에 어찌 벗이 없겠는가. 왁자지껄, 시끌벅적, 저 고단한 노동에 어찌 축제가 없겠는가. 다시 축제다. 룰 같은 건 없다. 내가 룰이다. 머리가 머리에만 붙어 있으니 재미없다. 이제 머리가 팔에 가서 붙어보니 그게 장히 즐겁다. 입술이 눈썹 위로 올라가 붙어보니 그 또한 즐겁다. 성님, 왜 그러슈, 농도 한번 해보니 이 또한 재밌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 지느냐, 날 버리고 가신 님은 가고싶어 가느냐, 니나노 한 자락으로 슬픔도 눙쳐 보면 것도 재밌다. 옙다, 임금이나 해라, FTA인지 귀신인지, 맨날 죽을상이신 농부님을 권좌에 앉히니, 것도 너무 재밌어, 땅 속에 없는 지렁이가 웃을 판이다. 허어, 똥구멍에서 푸르릉 파랑새가 날 일. 아무튼 한번 뒤집으니 세상이 다 즐겁다.

“동지들이여, 만약 태양이 부르주와들만을 위해서 타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좋소! 우리는 태양을 꺼버릴 것이오!” 트로츠키는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연단에서 이렇게 말했다던가. 그것은 일상을 뒤집는 선동의 언어였고, 언어의 관습을 뒤집는 시의 언어였다. 축제의 언어는 이렇게 불온하다. 익숙한 것들을 깨뜨리고 변형시키는 축제의 언어는 무례하고 신랄하다. 논리의 기나긴 우회를 거치지 않으니 축제의 언어는 기민하고 날렵하다.

장르의 규칙이 언어를 가두시겠다고? 언어도단이다. 그게 어디 될 법한 논리인가. 장르가 장르다우려면 모든 규칙을 놓을 때다. 축제의 언어는 해방의 언어다. 끊임없이 일탈하는 시의 언어다. 그러나 어떤 시와 노래가 축제의 에네르기를 감당하랴.

아무래도 어떤 노래가 있어야겠다. 무릇 산 자들의 가슴속에 빛나는 마음의 반딧불을 모아 붉은 장작불로 타는 축제의 노래.

그러나 그것은 파괴가 아니다. 차라리 귀향이다. 마음이 몸을 데불고 어기야 둥실 어깨춤 추며 가는 컴컴한 제 내부로의 귀환. 그래, 고생이 많았다, 울음이 기쁨과 함께 컴컴한 제 내부로부터 비어져 나온다. 기쁨이 슬픔의 손을 잡고 어둠을 천도한다. 그래, 이제 잘 가라. 주저말고 어여 가라. 슬픔이 길을 떠날 채비를 하면 언젯적 노래였는지 문득 사위가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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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사회 (양장) - 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
울리히 벡 지음, 홍성태 옮김 / 새물결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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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살은 힘이 세다
위험 사회, 울리히 벡 지음, 홍성택 옮김 / 새물결, 1997




    떤 현실적인 원도 그 중심으로부터의 거리가 동일할 수 없다면 완벽한 원, 즉 원의 이데아는 관념 속에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플라톤의 소위 '이데아'론이다. 감각으로 파악되는 경험적 현실이 이성으로 파악되는 관념의 세계보다 열등하다는 플라톤의 논리의 연장선에서는, 육체는 늘 이성에 뒤쳐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머리는 몸통 위에 얹혀, 몸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그 지정학적 위치로 해서 육체에 대한 이성의 우월을 정당화하고 싶어 한다. 만약 사고를 관장하는 인간의 두뇌가 허리 아래 부분, 다시 말해서 생식과 배설을 담당하는 기관 옆에 붙어 있었다면 이성이 오늘처럼 여전히 패권적 특권을 누릴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베이컨은 자연을 아는 것, 곧 과학이 자연을 지배하는 힘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인간의 이성은 과학의 힘을 빌려 더 이상 두려움을 모른다. 도시의 어디에도 암흑은 없다. 고성능의 살상무기를 휴대한 인간에게 더 이상의 적수는 없다. 호환과 마마는 더 이상 인간을 괴롭히지 못한다. 맹수들은 철창 속에 있고 벼락은 피뢰침을 타고 땅 속으로 방전된다. 게놈지도를 이미 완성한 생명공학 기술과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나가는 정보 기술의 행보는 자못 눈부신 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소년 코난>이나 <터미네이터>가 말하는 지구의 미래는 어둡다. 가을 들판의 폐허를 그린 시인 정현종의 <들판이 적막하다>, 산모가 굴뚝과 간통해 무뇌아를 낳았다고 노래한 최승호의 <공장지대>,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에 병든 고기를 싸고 있다고 표현한 신경림의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는 암울한 어조로 오늘을 말한다. 이쯤 되면 기술주의자들이 예술가들을 곱게 봐줄 리 없다. 툭하면 비관론으로 기술의 딴죽을 걸기가 일쑤요, 허황된 불안을 근거 없이 유포한다는 비난이 예술가에 덧씌워지기도 한다. 현실을 망각한 낭만주의라는 이름으로 예술가들을 싸잡아 비난하기도 한다. 시가 독자의 감정을 흥분시켜 예지력을 해쳐 진리의 길을 막는다고 보았던 플라톤은 진리가 이념이 되고 정의가 실현되는 이데아(idea)의 세계, 즉 공화국에서는 시인은 추방되어야 한다고 했던가. 예술가에 대한 오늘날의 기술주의자들의 견해와 플라톤의 생각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예술가에 대한 기술주의자들의 불만을 요약하면 이렇다. '근거도 없이 투덜대는 불평꾼들.'

    그러나 첨단의 보안장치에 엄청난 자본을 투여한다 할지라도 기술 속에 있는 인간은 여전히 불안하다. 첨단의 장비로 세팅된 초고층 인텔리젠트 건물에 정전이라도 된다면, 지구촌의 구석구석을 잇는 네트워크 시스템에 오류라도 발생한다면, 고속철도의 제동장치에 결함이라도 생긴다면, 하다못해 자료를 입력 해놓은 하드디스크에 바이러스라도 침투한다면…… . 기술주의자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강변할지 몰라도 하늘 아래 어디 완벽한 것이 있겠는가. 기술주의자들은 말할지 모른다. 불안이 또 다른 기술을 낳는다고. 좀더 강화된 안전장치와 보안체계가 기술에 대한 인간의 불안을 해소할 것이라고. 그러나 모든 빗장은 풀리기 마련이다. 아무리 단단한 자물쇠 앞에서도 인간은 불안한 법이다. 위험은 늘 소리 없이 도둑처럼 오지 않던가. 와서는 말하지 않던가. 너희들이 하는 짓이 다 그렇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근처에서 뒤늦게 한탄하고 통곡해 봐야, 헛일이다. 기술이 위용을 자랑하는 곳에서 위험은 구렁이처럼 똬리를 튼다. 세치 혀와 문학적 수사로 기술을 얕보지 말라고, 기술주의자들은 불만을 터뜨리리라. 왜 얕보겠는가. 인터넷이 욕설과 비방의 장으로 변한 감이 있긴 하지만 토론을 활성화시킨 공로를 왜 무시하겠는가. 가사기술이 여성으로 하여금 과중한 가사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켰다는 논리도 오십 퍼센트는 수긍할 만한 일이다. 의학 기술이 인류의 고통을 경감시켰다는 논리에도 반 이상은 수긍할 수밖에 없다.

    기술로 해서 인간은 편리를 얻었지만 그 편리의 실제적 내용에 대해서는 좀 따져봐야 할 일이다. 대체 어떤 편리함인가. 리모컨으로 TV를 켜고 끌 수 있는 편리? 인스턴트식품으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할 수 있는 편리? 섹스머신을 통해 생리적 욕구를 간편하게 해소할 수 있는 편리? 각진 얼굴을 좀더 원만하게 성형할 수 있는 편리? 기술로 해서 현대인은 편리를 얻었지만 그러나 그들이 정작 잃어버리는 것은 없을까? 하긴 무엇에나 그늘은 있는 법이다. 그러나 누가 그늘을 말할 것인가.

    근본주의자들은 말할 것이다. 다 버리자. 땅으로 돌아가자. 거기서 씨 뿌리고, 싹 틔우고, 꽃 피우고, 수확하고 계절처럼 순환하자. 소박하게 먹고 입고 마시자.

    버리는 자들은 아름답다. 명분이나 대의 따질 것 없이 '차떼기'로 챙기는 자들보다야 백만 번 아름답다. 그러나 과연 근본주의자들의 소망대로 이 문명이 제 욕망을 순순히 비워낼지는 의문이다. 움직이는 물체들은 계속 움직이려 한다는 뉴턴의 운동방정식이 아니더라도 하루하루를 이끌어 가는 거대한 기계들이 작동을 멈출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모든 시스템은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만 반성의 시간을 가질 뿐이다. 그것은 '어떻게'에 대해서는 묻지만 '왜'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위험사회』의 저자 울리히 벡은 우리의 앞날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위험사회의 원인이 된 과학 기술이 역설적이지만 또한 해결책을 제시해 줄 것이라고 말한다. 단 개인, 사회, 나아가 국가, 그리고 전 세계가 과학 기술에 대해 성찰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난 뒤에야 그 해결책이 가능하다고 예측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일상은 성찰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성찰은 최소한 멈칫거리는 시간을 필요로 하고 일로부터의 '거리'를 필요로 한다. 세계의 몸이 썩든 말든 생산을 위해 촌분을 아기지 말고 머리를 굴리라는 것이 자본주의가 강제하는 현실이다. 업적이 신통치 않으면 해고를 감수해야 한다.
    시인 정현종은 노래한다.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견딜 수 없네〉 전문


    대체 이 번지르르한 시대에 무엇이 아파 견딜 수 없다는 것인지. 시인들의 엄살은 자못 비장하기까지 하다. 변화도 아픔도 다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보이다 안 보이는 것들도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기술이 불안을 낳고, 다시 그 불안이 기술을 낳는 이 기술의 무한확장 시대에 '돈과 권력과 기계가 나를 다 먹어버리'고 말았다는 정현종 시인의 외침은 비장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문명의 웅자 앞에서 초라할 수밖에 없다. 당랑거철(螳螂拒轍), 어림 턱도 없는 소리다. 그러나 광고와 프로파간다의 시대에, 이런 초라한 소리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밤의 식료품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 최승호,<북어> 전문


    자갈처럼 딱딱한 혀를 가진 사람들의 시대에 시인의 엄살이란 무엇인가. 결국 당신이나 나나 싱싱한 지느러미를 잃어버린 북어는 아니겠냐는 울분이요 한탄이다. 시인이 싱그러운 지느러미와 그것이 꿈틀거리는 대양을 꿈꾸지 않았다면 북어의 딱딱함을 굳이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꿈꾸는 자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시인들은 민감한 센서의 소유자가 아닌가. 왜 고통이 닥쳐서야만 아파한단 말인가. 통증이 오기 전에 미리 아파하는 것이 시인의 엄살이다. 그들은 남들보다 먼저 아파함으로써 세상이 병들었음을 말한다.
   

病을 생각하는 것은
病에 매어달리는 것은
필경 내가 아직 건강(健康)한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거대(巨大)한 비애(悲哀)를 갖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거대(巨大)한 여유(餘裕)를 갖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 김수영, <파리와 더불어> 中에서


    병은 세상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빨간불이다. 고통은 정상으로의 복귀를 바라는 병든 몸의 신호다. 누구가가 몸의 부름에 답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이 병들었다면 누군가가 아파야 정상이다. 문명은 당당한 낯빛으로 자신의 건재를 자랑하지만, 비애와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땅에서 '거대한 비애'와 '거대한 여유'를 가진 자들은 아프다. 시인의 엄살이 없는 곳에 문명의 불안은 없다. 그곳엔 의기양양한 문명만이 우뚝할 뿐이다.

    시가 씌어지고 또 팔리는 시대가 왔으면 하지만 눈과 귀를 빼앗는 테크놀로지의 화려함 앞에서 이런 희망은 부질없다. '봄이 왔어도 봄 같지 않다(春來不似春)'라는, 오랑캐 땅에서 부르는 왕소군의 노래가 예사스럽지 않게 들린다. 겉멋이 들지 않은 시인, 온몸으로 시를 쓰는 시인, 세상보다 먼저 병들어 세상의 병을 예언하는 시인, 그의 엄살이 그리운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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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2004-10-26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탄광에 들어갈 때, 무슨 새를 갖고 들어간다죠. 산소가 모자라면 그 새가 먼저 죽어 알려준다고....

감각의 박물학 2004-10-26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니리아 같습니다.
 
뚱보, 내 인생 반올림 2
미카엘 올리비에 지음, 송영미 그림, 조현실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몸짱 시대의 뚱보의 사랑
뚱보, 내 인생, 미카엘 올리비에 지음, 조현실 옮김 / 바람의 아이들, 2004




    몸짱 신드롬이라던가. 어른들은 런닝 머신 위에서 몸 만들기에 아침저녁으로 여념이 없다. 청년들도 몸에 관한 한 어른들에 못지 않다. 한 조사에 의하면 어떤 대학교의 여대생 10명 가운데 4명이 자신의 체격을 비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여자 신입생 절반 이상이 운동으로 살을 빼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확고한 자의식이 없는 아이들이다. 어른들은 분명한 자신의 의지 아래 육체를 두겠다는 생각으로 몸을 관리하고 '살'을 적으로 규정하겠지만 아이들은 몸을 이성의 통제 아래 두겠다는 확고한 자의식이 없다. 어른들은 책을 읽는다, 음악을 듣는다, 미술을 감상한다는 식의 고상한 취미를 가질 수도 있고, 골프나 테니스를 치거나 마라톤을 하는 등의 스포츠에 빠져볼 수도 있고, 하다 못해 고스톱에 빠질 수 있겠지만 아이들에게는 특별히 문화를 즐길 만한 정신적․물질적 여유가 없다.

    물론 아이들에게 문화를 가르칠 책임은 어른들에게 있다. 그러나 어른들이라고 해서 뾰족한 문화가 없는 대한민국에서 아이들이 빠질 데라곤 별반 없다. 고작 인터넷 게임을 즐긴다거나 스타에 열광하는 정도랄까. 그런 류의 또래문화에도 익숙하지 못한 아이들은 먹고 마시는 몸의 쾌락밖에 딱히 즐거움을 찾을 데가 없다.

    둘러보면 가히 미식가의 천국이다. 음료만 해도 수십 가지 종류요, 아이스크림만 해도 그 종류와 이름을 알 수 없을 정도다. 감자칩 하나만 해도 그 종류의 다양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TV 광고는 끊임없이 식욕을 자극하고 구매를 부추긴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금욕을 기대한다는 것은 지나친 과욕이다. 미디어는 아이들의 욕망을 엄청나게 부풀리는데 한가하게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가르친다는 것도 시대착오라면 착오라 하겠다.

    어떻든 아이들은 엄청 먹어댄다. 어른들은 '웰빙'을 기치로 이제야 음식문화를 성찰해볼 수 있는 여유를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은 반성의 인간이기 이전에 쾌락의 인간이다. 아이들은 '정신'에 좋은 것보다는 '혀'에 좋은 것에 탐닉한다. 몸에 나쁜 것은 하나 같이 혀에 좋다. 피자와 햄버거가 그렇고, 생크림 케익과 아이스크림이 그렇고, 갑자칩과 쵸코 쿠키가 그렇다. 아이들에게 웰빙을 들먹이며 혀에 꺼끌꺼끌한 '현미밥'이나 나물반찬과 녹차 한 잔을 권하기는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이래저래 아이들의 몸피는 두꺼워질 수밖에 없다.

    TV나 컴퓨터는 아이들의 운동량을 현저하게 떨어뜨린다. 건강하게 자라다오, 라고 아이들에게는 말하지만 부모의 속내는 편하지 못하다. 왠지 우리 아이들이 남보다 뒤떨어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이런 저런 학원을 보내다 보면 아이들은 마음껏 뛰놀 시간이 없다. 이래 저래 아이들의 몸피는 두꺼워져 간다. 문제가 체력 저하로 그치면 다행이다. 청소년층에서 비만아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당뇨병이나 고혈압증세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런 현실에서 청소년들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성찰해볼 수 있게 하는 책이 거의 없다는 것은 좀 유감스럽다. '몸'에 관련한 책들은 쏟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소년의 눈높이에서 몸에 관련하여 진지한 사유를 이끌어 낼 만한 책들이 드물다는 말이다. 『뚱보, 내 인생』이 반가운 것은 이 대목에서다.

    우울한 뚱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몸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야,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것은 마음이지 몸이 아니란다 하는 식의 관념론을 설파하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럴까. 청소년들은 엄연히 현실주의자다. 그들이 먹고 마시는 쾌락을 추구한다고 해서 몸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 패션잡지를 보라. 몸에 대한 청소년들의 열기가 저절로 느껴진다. 『뚱보, 내 인생』의 주인공, 벵자멩에게 몸에 대한 마음의 우월성을 설파하는 일방적인 관념론은 설득력이 없다. 누가 뭐라 해도 벵자멩은 꾸역꾸역 먹는다. 잼 바른 식빵, 초콜릿, 버터, 치즈, 생크림 얹은 파이, 케첩을 듬뿍 뿌린 파스타, 마요네즈에 찍어 먹는 튀김……. 이런 음식들이 벵자멩의 몸무게를 89㎏까지 늘려 놓는다. 자, 벵자멩을 누가 구해줄 수 있을까?

    식이요법도 소용이 없다. 잘 참다가 폭식을 하면 '요요현상'이라고 절식을 시작했을 때보다 더 살이 찌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과식이나 폭식은 성인병을 유발할 수도 있다고 겁을 줄 수 있겠지만 청소년들은 현실주의자가 아닌가. 성인병은 어디까지나 미래의 일이지 현실의 일은 아니다. 그런 외모로서는 이성의 관심을 끌 수가 없단다. 바로 이것이 정답이다. 너를 사랑스럽게 보는 바로 그 눈길을 위해서 너는 너를 관리해야 한단다. 바로 이것이 정답이다. 네가 진정으로 사랑 받기를 원한다면, 네가 너를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입증하려면 너는 참을 수 없는 너의 식욕을 눌러야만 한단다. 바로 이것이 정답이다. 네가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네가 사랑 받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입증하려면 너는 고통을 참는 법을 배워야해. 이것이 정답이다. 가장 강력한 다이어트 효과가 있는 것이 '사랑'임을 『뚱보, 내 인생』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짝사랑하는 클레르와 수영장에서 마주친 뒤 벵자멩에게 변화가 일어난다. 다이어트가 시작된 것이다. 무면허 침술사에게 침을 맞고, 음식일지를 적고, 식이요법을 한다. 클레르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다. 클레르는 벵자밍의 다이어트 노력을 칭찬하고 호감 어린 엽서까지 보내온다. 다이어트는 한층 탄력을 받는다. 하지만 클레르는 벵자멩의 사랑을 우정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사랑이 아니었다고, 벵자멩은 앞이 캄캄해진다. 다이어트, 그런 게 다 무슨 필요란 말인가. 사랑도 받지 못하는 이 볼품 없는 몸을 관리해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절망이 다시 식욕을 부른다. 식욕은 다시 살을 부른다. 이 일을 어찌할까?

    이 작품으로 작가, 미카엘 올리비에는 '엥코륍티블 상' 등 프랑스, 벨기에, 독일에서 16개의 문학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 작품은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각색되어 방영되었다고 하니 톡톡히 주목을 받은 작품인 셈이다.

    몸을 말하는 여타의 책들이 계몽적 어투가 강했지만 이 책의 문체는 밝고 편안하며 유머스럽다. 번역은 편안한 호흡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청소년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청소년의 언어로 청소년의 고민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라면 미덕이다. 일체의 과장이 없다. 섣부르게 뚱보를 위로하려는 관념론자의 자의식도 없다. 속도감 있는 문체, 경쾌한 호흡이 청소년 소설의 한 모범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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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26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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