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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와 문명 ㅣ 한길컬처북스 21
장 뒤비뇨 / 한길사 / 1998년 5월
평점 :
품절
시, 마음의 반딧불을 모아 타오르는 노래
축제와 문명 장 뒤비뇨 지음, 류정아 옮김 / 한길사, 1998
일 속에서는 일이 보이지 않는다. 조금 거리를 두어야 잘 보인다. 어떤 계기로 해서건 일에 거리를 두고 보니 어쩐지 하는 일이 시원찮다. 밋밋해 보이기 이를 데가 없다. 퍼들썩거리는 저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순간 잘 나가던 일상은 그만 맥이 빠져 삐거덕거린다. 이래도 되는 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순조롭던 일상이 돌연 수상해 보인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강령들이 어째 수상타. 아무래도 이런 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던가, 일을 작파해버리기엔 일상의 무게가 만만찮다. 버겁기까지 하다. 의심은 짧고, 생계는 길다. 툴툴거리면서 다시 일로 돌아가는 수밖에.
일을 하려면 쿵쿵거리는 피를 잠재워 두어야 한다. 보채지 좀 마라고 껄떡거리는 욕망도 잠재워 두어야 한다. 징징거리지 마라고 마음도 잠재워 두어야 한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싶지만 일이란 게 원래 그런 거다. 그러나 누르려고 해서 눌러지는 게 욕망은 아니다.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이 무정형의 에너지 앞에서 이성은 창백하기 그지없다. 일상을 삐거덕거리게 한 욕망을 협상의 테이블로 끌고 와, 으르고 별러도 이성으로선 별반 줄 게 없다. 잘 구슬려 일터로 돌려보내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자코 일상에 복무시킬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지만, 한번 삐진 마음을 달래는 길이 쉬울 리가 없다. 이럴 땐 이성이 크게 한턱 쓰는 수밖에 없다. 놀아랏!
그리하여 이제 축제는 단절이다. 일상으로부터 얼마쯤 거리를 두는 격절(隔絶)이다. 상식으로부터도 좀 물러서고, 관습으로부터도 좀 물러서는 거리두기다. 어려울 것도 없다.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이다. 해방은 풍자고, 야유고, 일탈이다.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에너지가 축제의 동력이다. 기계적인 분절의 시간 대신에 제 고유한 리듬과 운율에 따라 몸을 흔드는 가무(歌舞)의 시간이 축제의 시간이다.
『축제와 문명』의 장 뒤비뇨는 말한다.
사람들은 자주 ‘놀이’와 ‘축제’를 혼동한다. 놀이는 규칙의 수용을 이야기하며 과격한 근육행위에 기호를 부여하고 자연적인 행위로부터 분리되어 스펙터클로 통합되는 것이다. 반면에 축제는 규칙을 위반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모든 규칙을 파괴하는 것이다.
놀이를 이끌고 가는 것은 규칙이고 룰이다. 룰이 없으면 놀이가 아니다. 룰을 어기는 자는 ‘왕따’를 시키면 그만이다. 하지만 세상을 둘러보시라. 정치나 경제의 규칙이란 것은 놀이의 규칙과는 유가 다른 것인지, 놀이의 규칙을 어기고도 버젓이 사회적 권력을 행사하시는 분들이 한 둘이 아니시다. 나 안 해, 놀이가 재미없으면 안 놀면 그만이다. 뉴질랜드에 가서 번지점프를 할까, 디즈니랜드에 가서 롤러코스터를 탈까, 그러나 여비도 만만치 않은데, 대체 이 땅이 아니면 어디에 가서 놀겠는가. 이를 갈면서도 이 땅에 살 수밖에.
이 땅에 살기 위하여 다시 일하러 간다. 열심히 빵을 굽고, 방부제를 치고, 열심히 모종을 하고, 농약을 치고, 이것을 사라, 이것을 입어라, 이것을 먹어라, 이것을 마셔라, 이것을 씹어라, 욕망을 부풀려, 절박한 몸의 요구가 아닌 것들을 판매하고……. 반성하는 자에게 안녕은 없다. 그래, 일상은 진지한 거다. 제 새끼들을 보듬으며 먹고사는 일은 위대한 거다, 이렇게 얼렁뚱땅 변호도 해가면서 되먹지도 않은 노동을 감싸고도는 거다.
꿀 속에 빠져버린 일벌처럼 일에서 헤어 나오긴 아예 글러버린 것 같다. 어찌해야 저들을 일의 꿀통 속으로부터 건져내, 끊임없이 뒤섞이며, 끊임없이 해체되며, 파도가 뭍을 하염없이 쓸어 내리듯 규칙도 없이 룰도 없이 한바탕 질펀하게 놀 수 있을까.
효율성, 생산성, 경제성……. 대체 이런 것들이 언제부터 놀이의 규칙이 되었는지. 하늘의 새들과 땅의 풀들과 이 세계의 동무들과 어울려 잘 한번 놀아보는 데 저 강령들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대체 누구의 권능을 빌어 저 강령들은 우리 위에 군림하시는 건지. 모르는 척 의뭉스레 요것들을 슬쩍 밟아 버리면 안될까. 어이쿠 미안해, 마음에도 없는 사과도 해가면서.
그러나 잘못 건드렸다가는 몰매를 맞기 십상이다. 몰매를 맞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균열을 내는 수밖에. 원래 큰 덩치들이란 조그만 상처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니, 조금씩 흠집을 내는 거다. 네가 천년 만년 갈 거 같으냐, 속으로 한번 으르렁거려 보면서 야곰야곰 외곽을 갉아대는 거다.

술 한 잔에 노고를 달래는 저 고단한 노동에 어찌 벗이 없겠는가. 왁자지껄, 시끌벅적, 저 고단한 노동에 어찌 축제가 없겠는가. 다시 축제다. 룰 같은 건 없다. 내가 룰이다. 머리가 머리에만 붙어 있으니 재미없다. 이제 머리가 팔에 가서 붙어보니 그게 장히 즐겁다. 입술이 눈썹 위로 올라가 붙어보니 그 또한 즐겁다. 성님, 왜 그러슈, 농도 한번 해보니 이 또한 재밌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 지느냐, 날 버리고 가신 님은 가고싶어 가느냐, 니나노 한 자락으로 슬픔도 눙쳐 보면 것도 재밌다. 옙다, 임금이나 해라, FTA인지 귀신인지, 맨날 죽을상이신 농부님을 권좌에 앉히니, 것도 너무 재밌어, 땅 속에 없는 지렁이가 웃을 판이다. 허어, 똥구멍에서 푸르릉 파랑새가 날 일. 아무튼 한번 뒤집으니 세상이 다 즐겁다.
“동지들이여, 만약 태양이 부르주와들만을 위해서 타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좋소! 우리는 태양을 꺼버릴 것이오!” 트로츠키는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연단에서 이렇게 말했다던가. 그것은 일상을 뒤집는 선동의 언어였고, 언어의 관습을 뒤집는 시의 언어였다. 축제의 언어는 이렇게 불온하다. 익숙한 것들을 깨뜨리고 변형시키는 축제의 언어는 무례하고 신랄하다. 논리의 기나긴 우회를 거치지 않으니 축제의 언어는 기민하고 날렵하다.
장르의 규칙이 언어를 가두시겠다고? 언어도단이다. 그게 어디 될 법한 논리인가. 장르가 장르다우려면 모든 규칙을 놓을 때다. 축제의 언어는 해방의 언어다. 끊임없이 일탈하는 시의 언어다. 그러나 어떤 시와 노래가 축제의 에네르기를 감당하랴.
아무래도 어떤 노래가 있어야겠다. 무릇 산 자들의 가슴속에 빛나는 마음의 반딧불을 모아 붉은 장작불로 타는 축제의 노래.
그러나 그것은 파괴가 아니다. 차라리 귀향이다. 마음이 몸을 데불고 어기야 둥실 어깨춤 추며 가는 컴컴한 제 내부로의 귀환. 그래, 고생이 많았다, 울음이 기쁨과 함께 컴컴한 제 내부로부터 비어져 나온다. 기쁨이 슬픔의 손을 잡고 어둠을 천도한다. 그래, 이제 잘 가라. 주저말고 어여 가라. 슬픔이 길을 떠날 채비를 하면 언젯적 노래였는지 문득 사위가 고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