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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리는 세계 - 식량에 관한 열두 가지 신화
프랜씨스 무어 라페 외 지음, 허남혁 옮김 / 창비 / 2003년 10월
평점 :
식량이 모자라서 굶는다? 천만의 말씀
굶주리는 세계/ 프렌씨스 라페 외 등저 / 창비, 2003
녹색혁명, 바이오테크의 시대에 새삼스레 무슨 기근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IMF 이후 결식아동의 문제는 수단이나 방글라데시와 같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8억 여명이 일상적으로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한다. 식량이 모자라서? No,라는 것이 『굶주리는 세계』의 답이다. “오늘날 전세계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루에 3500칼로리를 공급할 수 있을 만큼 곡물을 생산한다. 이는 거의 모든 사람을 비만으로 만들고도 남을 정도이다. 게다가 이 추정치는 채소, 콩, 견과류, 뿌리작물, 과일, 초식 가축과 생선 같은 다른 식량자원을 합산하지 않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합산하면 한 사람이 매일 적어도 2㎏의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다.” 라고 이 책은 말한다.
『굶주리는 세계』의 집필자는 푸드퍼스트(Food First)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식량과 발전정책연구소>의 연구원들이다. 2억 1천만 명이 만성 영양실조 상태에 있는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 국가들이 계속 식량을 수출하고 있다는 사실, 나이지리아, 브라질, 볼리비아 등 인구밀도가 낮고 식량자원이 풍부한 국가들에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황당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사실은 자연재해나 인구밀도가 기아의 원인이라는 우리들의 판단이 근거 없는 편견임을 말해준다.
녹색혁명이 굶주림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은 역시 No,라고 말한다. “신품종을 재빨리 도입한 것은 빈농이 아니라 부농들이었으며, 토지 없는 농민들은 물론 이것을 심을 땅이 없으므로 새로운 종자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대규모 농장을 가진 부유한 농민들의 생산량은 늘어났고, 생산량이 늘자 곡물가격은 떨어졌다. 결국 이는 소규모 빈농들을 압박했다. 따라서 빈농들은 새로운 종자가 도입되기 전보다도 경쟁에서 더욱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녹색혁명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녹색혁명의 덕을 조금이라도 보는 곳은 녹색혁명 전부터 불평등 수준이 다른 곳에 비해 월등히 낮았던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불평등의 구조를 해결하지 않은 상황에서의 녹색혁명이란 오직 부자들의 창고를 늘리는 데만 기여한다는 사실이다.
개량종자들을 채택하면 농가의 순소득이 증대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푸드퍼스트(Food First)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개량종자의 선택으로 비료와 농약 비용이 수확량보다 더 빨리 불어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매우 디테일한 자료들을 제시한다. “필리핀 중부 루손지역에서는 80년대에 쌀 수확량은 13% 늘어났는데 비료 사용량은 21% 늘어났다. 중부 평원 지역에서는 수확이 6.5% 늘어나는 데 그친 반면, 비료 사용량은 24% 늘어나고 농약 사용량은 53% 늘어났다.” 부농들은 농약과 비료를 감당할 만한 여력이 있겠지만 빈농들은 그럴 여력이 없는 탓에 점점 더 불리해진다는 것이다. 뿐인가. 비료와 농약 사용의 증가로 환경 파괴는 불을 보듯 뻔한 일. 결국 경제권력 집중 구조개선 방안, 토지와 식량 자원 및 소득의 형평성 유지 방안 등이 새 영농법과 함께 고민되지 않는 이상, ‘배고픔’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원조 또한 굶주림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의 진단이다. 미국의 경제원조가 몇 개 국가에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으며, 경제원조는 일련의 구조조정정책을 강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며, 미국은 군사원조를 통해 전세계적인 무력분쟁에 직접 기여하고 있으며, 이는 추악한 현실을 흐리는 ‘겉치레’ 역할을 해 대중을 호도한다는 점을 이 책은 지적하고 있다. 미국의 원조는 외교정책의 일환으로 자유무역과 시장정책에 사용됐고, 식량 무기 수출증대에 기여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진정으로 개발도상국을 도와주고 싶다면 원조자금으로 그들의 부채탕감을 해주어야 한다는 지적도 경청할 만하다.
식량이 충분하지 않다, 자연 탓이다. 인구가 너무 많다, 미국의 원조가 기아를 해결한다, 녹색혁명이 해결책이다 등등, 굶주림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고정관념 12가지를 골라 ‘신화’라고 명명하고 그 신화의 허구성을, 이 책은 폭로한다.
결국 배고픔은 식량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라는 것이다. 일한 만큼 보상받고, 식량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민주적인 사회구조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기근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이다.
굶주림은 칼로리 섭취량의 부족만은 아니라고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굶주림이란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힘을 빼앗기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다.”라는 것이다. 나의 굶주림은 상상할 수 있지만 내 아이의 굶주림은 상상하기란 고통스러운 일이다. 누가 그 부모의 고통을 가족이기주의라고 이름할 것인가.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부모의 무력함보다 절망적인 것이 또 있을까. 소위 ‘자발적 가난’이야 얼마든지 환영할 만한 것이지만, 가난이 지긋지긋한 것이라면 바로 그 굶주림의 절망감 때문이리라.
“굶주린다는 것은 굴욕적인 삶을 의미한다. 고통, 슬픔, 그리고 굴욕은 굶주림이 의미하는 것들의 일부이다.․․․굶주림을 숫자로만, 즉 칼로리 섭취량이 적은 사람의 수로만 생각한다면, 그 해법 또한 숫자―식량 원조량이 몇 톤인지, 아니면 경제 원조금액이 얼마인지―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굶주림을 가장 고통스러운 인간 감정에 직면한 사람들로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그 근원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고l 이 책은 말한다. 왜 아니겠는가. 굶주림은 굴욕이다. 가족을 굶겨야 하는 가장에게 삶은 치욕이지 않겠는가. 그 치욕 앞에서 인간됨의 품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기근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근본적 대안으로서의 민주주의는 결국 인간됨의 품위를 드높이는 일이다.
*삽화로 이용한 판화는 케테 콜비츠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