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와 존재하기
조지 쉬언 지음, 김연수 옮김 / 한문화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달리기, 몸 속에 길 위의 고통을 각인한다




    녕에서 함덕까지 북제주의 해안도로를 파도 소리를 들으며 달렸다. 쿵쿵거리는 내 몸의 피 소리가 포효하는 파도소리와 아주 잘 어울렸다. 일상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한 여행, 그러나 나는 컴컴한 새벽 다시 한번 숙소를 빠져나온 것이다. 달린다는 것은 언제나 일정한 공간으로부터 내 몸을 빼내는 일이었다. 한 발짝 한 발짝, 몸의 나아감과 공간의 물러섬.

    지금으로부터 꼭 이년 전, 뛴 지 육 개월 정도 되었을까. 무리를 했는지 무릎에 이상이 왔다. ‘장경인대증후군’, 한 달 정도는 쉬라는 의사의 권유에 아랑곳없이 보름 정도 쉬고 뛰었더니 욱신거리는 통증이 심해졌다. 침을 맞고, 마사지를 하고, 퇴근 후에 정형외과에서 치료를 받으면서도 달렸다. 치료한 보람이 있었는지 무릎이 좋아지는가 싶더니 ‘족저근막염’이라고 이번엔 발바닥에 통증이 느껴졌다. 무릎 아래 파스를 6장씩이나 붙이고 달렸다.

    허리가 줄어들고, 볼 살이 빠지고, 몸도 가벼워지기 시작했고, 체중이 줄었을 것이다. 아내는 그 정도면 이젠 어디 가서 총각 행세라도 할 수 있으니 더 이상 달리지 마라, 더 달리면 오히려 얼굴에 주름도 더 생기고, 사람이 경망스럽게 보일 수 있으니, 그만 달리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병원 신세까지 져가면서 달릴 필요가 있냐는 것이었다. 아내뿐만이 아니었다. 파스로 도배를 한 무릎을 보고 동료들도 한 마디 거들었다. 내 몸 좋자고 달리는 것인데, 병원에까지 다니면서 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두주불사(斗酒不辭)인 내가 술자리에서 뜸해졌다는 사실에 대해 섭섭했던 속내를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사람이 하던 짓을 해야지 안 하던 짓을 하면 큰일난다는 은근한 위협을 하는 동료들도 있었다. 건강도 좋아졌는데 이제 ‘걷기’를 해보라는 권유를 해오는 사람들도 부쩍 많아졌다. 달리기는 ‘활성산소’를 생성하고 활성산소는 DNA 조직을 파괴시키니 이젠 건강을 생각한다면 ‘걷기’를 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법 전문가적인 충고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엔 살을 좀 빼야겠다는 생각에서 달렸는지도 모르겠다. 쫄티를 입어도 과히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는 않겠군, 제법 괜찮은 몸매가 만들어졌을 때, 달리기의 목적은 이미 달성된 셈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달리기를 그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달리기를 멈춘다면 런너가 아니다.

    뛰는 순간에 있어서만은 내가 내 몸의 주인이다. 속도를 내거나 늦추거나 모든 것은 내 의지에 달렸다. 하지만 내 의지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더 빨리’라고 내 마음이 말할 수 있지만 그 소리가 몸에 미치지 못하면 그만이다. 세상도 몸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 마음도 몸을 어찌할 수가 없다. 하지만 몸과 마음의 이런 이분법은 옳지 않다. 뛰고 있을 때, 과연 나는 내 몸의 주인인가. 몸을 소유한다?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오만인가. 그렇다. 나는 곧 내 몸이다. 그 몸이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언제 나의 온전한 주인이었던 적이 있던가. 당신은 이미 낡았다, 낡지 않으려거든 제품을 바꿔라, 끊임없이 욕망을 부추기는 광고와 정치선전에, 미디어가 강요하는 무의식적 강제에, 지배이데올로기의 보이지 않는 책동에 내 몸은 언제라도 한 번 ‘몸의 요구’에 충실했던 적이 있던가. 달린다는 것은 그 모든 외적인 강제를 벗어버리는 일이다. 임제 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立處皆眞)이라 하셨던가. <어느 곳에서든지 주인이 되면 그 서 있는 곳은 다 부처가 되는 법>, 하지만 부처까지 바랄 것 없다. 백세까지의 건강도 필요 없다. 활성산소를 피하고, 관절의 통증을 피하고, 건강을 바라시거든 걸으시라. 걸으며 사색하시라.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숲길)에서 '혼자서 걸으며 여행했던 때만큼 생각을 많이 하고 살아있음을 강하게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걷는 것에는 생각을 자극하고 생명력을 불어넣는 뭔가가 있다.'라고 말한 장 자크 루소는 옳다.

    같은 맥락에서 “속도는 망각의 열정에 비례한다.”고 했던, 『느림』(민음사)의 작가 쿤데라도 옳다. 생각은 무겁다. 뛰는 자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느낄 뿐이다. 조지 쉬언은 그의 책 『달리기와 존재하기』(한문화)에서 “역사를 만들지 않고 사는 법, 원수를 갚지 않고 즐기는 법‘을 달리기를 통해 배웠다고 고백했다. 역사를 만들지 않고 산다니, 달마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설 말이다. 그러나 치렁치렁 무거운 과거를 달고 달려 보시라. 그럴 때 몸은 안달이다. 가급적 모든 것을 비워달라고 내 몸은 소리친다. 뛰는 자에게 과거와 미래는 없다. 과거가 없으니 쓰라림이 없고, 미래가 없으니 불안이 없다. 모든 발걸음은 현재에 있다. 바람이 나뭇가지의 흔들림에 있듯이.

    달리기에 필요한 것은 쿠션이 좋은 런닝화, 운동복, 그리고 몸뿐이다. 어떤 테크놀로지도 필요 없다. 경쟁 스포츠처럼 라이벌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스키나 골프처럼 고가의 장비도 필요 없다. 나는 어떤 테크놀로지도 매개하지 않고 직접 나를 느낀다. 규칙도 없다. 내가 규칙이다. 내 몸이 규칙이다. 쿵쿵거리는 피와 가쁜 호흡이 규칙이다. 달리는 자는 가능한 한 위장을 비워두어야만 한다.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은 반드시 식도를 타고 역류한다. 과거도 벗어두어야 한다. 법도 없고 룰도 없다.

    모든 고통의 순간은 지나간다. 고통을 기억하는 것은 내 머리가 아니다. 내 모든 근육과 세포 하나 하나가 내가 달린 길과 고통을 기억한다. 달린다는 것은 내 몸 속에 길 위의 고통을 각인하는 것이다. 조지 쉬언은 달리기를 통해 <영적 성장의 최종 목적지인 존재 속으로 들어가는 법>을 배웠다고 했고, <성자나 형이상학자가 되고 싶다면 먼저 운동가가 되어라>라고도 했다. 달리기를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리자는 말이다. 마라톤은 스포츠가 아니다. 가장 다이내믹한 참선이요, 철학이라고 마라톤을 완주한 한 주자는 말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는 마라톤을 통해 득도했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마라톤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켰다는 말도 듣지 못했다.

    마라톤이 끝나면 런너들은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다시 세상의 룰에 순응할 것이다. 벗었던 몸에 다시 의상을 걸치고 무거운 구두를 신고 생산성과 효율성의 신화를 종교처럼 신봉하는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그들은 다시 테크놀로지와 시스템의 논리에 순응해야 할 것이다. 그 논리에 순응할 힘을 얻기 위해 우리가 달려야만 한다면 우리의 달리기는 최악이다.

    달리기에는 생각이 없다. 과거도 미래도 없다. 생각이 없고, 과거도 미래도, 역사도 없는 종교가 있다면 달리기는 분명 종교다. 하지만 그런 종교는 없다. 거창하게 말할 것 없다. 달리는 자에게 왜 달리느냐고 물을 때, 머뭇거린다면 그가 바로 런너다. 이유와 목적을 따지는 것은 이 시대의 못된 버릇이다. 모든 즐거운 것은 이유가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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