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 - 페미니즘, 서구문화, 몸
수전 보르도 지음, 박오복 옮김 / 또하나의문화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여자의 몸에 대한 철학적 성찰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 수전 보르도 저, 박오복 역 / 또하나의문화, 2003


  리기를 시작한 지 꼭 일 년 반이 지났다. 불어난 체중은 정상을 회복했지만 그 동안 무릎의 통증으로 몇 번 통원치료를 하기도 했었다. 그런 나를 보며 주위에서는 건강이 달리기의 목적이라면 굳이 병원까지 다니면서 달릴 이유가 있겠느냐는 핀잔을 하곤 했다. 그저 웃고 말았다. 그러나 웃음의 뒤끝이 개운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 대체 이 달리기는 무엇을 위한 것이지, 대체 이 달리기의 배후에는 어떤 심리학적인 기원이 있는 것일까, 그런 의문이 고개를 슬쩍 쳐들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 뛰는 자들은 계속 뛰려고 하는 법, 뛰고자 하는 의지보다는 몸의 ‘관성’이 나를 길로 이끌었다.

  내 몸을 내가 확실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 달리기는 바로 내가 내 몸의 주인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가빠지는 호흡, 팽창하는 혈관, 경직과 이완을 되풀이하는 근육이 ‘살아있음’을 분명하게 느끼게 하였다. 대체 어디에서 내가 이런 주인된 느낌을 또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내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으로 내가 모든 기획의 중심에서 정책의 입안자가 되고 실행자가 되었던 적이 있었던가. 늘 변두리에 처져 있다는 소외감을 보상받기 위해 달리기의 중심에 나를 놓아두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내 몸이 달리기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내 삶의 중심에 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존재의 변혁이 그렇게 호락호락 달성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달리기도 혁명이라면 혁명이었다. 굳이 어떤 거창한 변혁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리라. 달리기를 종용하는 나의 무의식은 그렇게 애써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었다.

  뱃살이 줄어들고 이두박근이 섬세한 굴곡을 갖기 시작할 때, 그리하여 내가 스스로를 통제하고 관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한줌의 성취감을 안겨주었고, 나태와 안일함 속에 빠지려는 나를 스스로 독려하여 러닝머신 위에 덩그마니 올려놓았을 때, 나는 내 의지에 사뭇 감동하기조차 하였다. 그래, 나에게도 이런 영웅적인 의지가 있었군. 처음으로 하프마라톤을 완주하고 완주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 내가 비로소 의지와 엄격성이 칭찬 받는 공간에 들어섰음을 흐뭇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육체는 이 영광에 아랑곳없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무릎이 통증을 호소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그때 군살이 적으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군살은 의지의 박약을 말해주고, 자기 관리와 통제의 허술함을 나타내는 지표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군살은 내 영혼의 계획을 좌절시키는 불온한 것으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혁명의 전사답게 내 몸을 빈틈없이 관리해야 했다. 모든 혁명은 피의 대가를 지불하는 법, 나태와 안일과 탐욕은 숙청의 대상이었다. 가차없이 내 게으름과 무분별한 식욕을 혐오스러운 것으로 분류하고 감시의 눈길을 던져야 했다. 딴에는 생명공동체 운운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채식에 마음이 기울어졌던 것도 그때쯤이었고 노자와 장자를 열심히 읽었던 때도 그때쯤이었던 듯싶다. 몸의 혁명을 더욱 고상한 명분으로 장식하기 위해서는 이념적 무장이 시급한 때였다. 연단만 주어진다면 육식은 지구를 망치고 몸을 망치는 길이라고 소리 높여 외쳤을지도 모르겠다. 제레미 레프킨의 『육식의 종말』과 존 라빈스의 『음식혁명』을 열심히 읽었다.

  허겁지겁 혀의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천박하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애써 육식에 대한 욕망을 제어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미학적, 도덕적 우월성을 성취했다고 내 무의식은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과 같은 책은 내 도덕적 프라이드를 증명해줄 수 있는 책들이었다. 당연히 금욕주의자들의 책으로 발길이 돌려졌다. 줄어든 뱃살과 늘어난 폐활량과 섬세해진 근육들이 금욕이 헛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탄탄해지는 몸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러나 정신주의자의 시선이었다. 고통스럽게 육체를 통어함으로써 어떤 영혼의 성취를 이루어냈다고 하는 금욕주의자의 시선.

  제,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또 하나의 문화)을 읽는다. 이 책의 저자 수전 보르도는 왜 20세기에 날씬함이 지배적인 문화적 이상이 되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거식증, 살빼기, 성형수술 등 현대여성이 한번쯤 고민해보았을 문제를 철학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켄터키 대학의 영문학 교수인 그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몸과 마음을 분리하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이원론에서 몸은 동물적인 것, 내가 아닌 것, 순수하지 않은 이질적인 것, 이성을 방해하는 야만적이고 물질적인 외피, 영혼의 감옥쯤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영혼과 이성은 남성으로, 몸은 여성으로 상징화되었다. 육체가 이성보다 저열한 것으로 위계화된 사회에서 육체는 자율성을 가질 수 없었다. 그것은 언제나 통제되어야 할 그 무엇이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플라톤과 데카르트는 몸을 사고의 혼란과 불명료함의 원천이라고 비난했다. 몸은 적이었다. ‘이원론자들은 이 통제할 수 없는 몸과 싸워서 누가 두목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내부에 두 의지, 즉 육체의 하인과 정신의 하인이 있는데, 이 둘 사이에서 자신의 영혼은 찢어진다고 말했던 것처럼, 거식증 환자도 정신적 투쟁, 선과 악의 대결을 묘사한다. 이는 분명 정신/의지와 식욕/육체간의 싸움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수전 보로도는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음식물을 거부하는 거식증 환자나 날씬함을 숭배하는 자들은 모두 정신주의자다. 그 정신주의는 육체에 대한 경멸, 육체를 영혼에 대한 장애와 이질적인 힘으로 생각하는 희랍과 기독교 전통에 뿌리박고 있다. ‘굶는 것에서 오는 욕구 불만, 거식증 환자가 빠져드는 지속적인 육체 활동의 정지, 거식증이 수반하는 많은 신체적인 합병증, 이런 것들이 거식증 환자에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것들을 무시할 수 있으면, 그것은 몸을 정복했다는 또 하나의 증거인 셈이다.’라는 구절은 통원치료를 하면서까지 달리기를 고집하는 심리적 기저에 무엇이 있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내 육체를 내 마음대로 부리고 싶다는 폭군의 의지, 바로 그것이었다. 내 몸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스릴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고통쯤은 기꺼이 희생물로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여성들이 육체를 학대하는 거식증에 더 쉽게 빠져드는가. 답은 간단하다. 여성들이 남성보다 권력에서 더 많이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 몸 바깥에서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내 몸 안에서나마 주인이 되어 보겠다는 무의식이 여성들로 하여금 거식증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식증을 단순한 질병으로 보는 데 수전 보르도는 단호히 반대한다. 거식증은 남녀의 비정상적인 권력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대단히 사회적인 질병이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에 분노하고, 그와 관련된 가치를 거부하고 그들의 미래가 그들 어머니의 삶과 같은 방향으로 진전되는 것에 강렬하게 반발하는’ 데서 비롯되는 질병이 거식증이라는 것이다. ‘살[육체]’을 거부하는 것은 여성을 거부하는 것이요, 살을 거부하는 만큼 여성들은 자신이 자신의 몸의 주인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만큼의 권력을 획득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광고들이 보여주는 성공한 여자, 사회적 권력을 획득한 여자들을 보라. 그들은 하나같이 비쩍 마른 남성의 몸매를 갖고 있지 않은가. 수전 보르도는 말한다. ‘우리 문화가 무능과 곡선미를 연관시킨다는 사실이다. 물론, 거식증 환자는 여성적 몸매를 갖는다는 것이 사회적, 성적 취약성을 내포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취약성을 인정하지 않고 좀더 강한 존재로 환생하고 싶은 욕구, 거식증은 곧 권력에 대한 욕망이 낳는 사회적 질병이다. 그러나 남성의 몸을 얻었다고 그녀가 출산과 양육의 운명에서 해방되는 것도 아니고 남성의 힘과 특권을 얻는 것도 아니다. 가련한 무의식!

  그렇다면 소피아 로렌이나 마릴린 먼로와 같이 볼륨 있는 육체의 소유자가 섹스의 심벌이 되었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수전 보르도는 말한다. ‘풍만한 소피아 로렌은 여성들에게 여성의 가장 깊은 욕망은 가정과 남편과 가족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던 시대의 섹스의 여신이었다. 오늘날, 남성의 세계로 진출한 여성의 욕망은 그 세계의 전문적인, 그리고 남성적인 기준을 따를 것이 요구된다. 따라서 여성의 몸으로부터 모성적 힘을 상기시키는 모든 심리적 연상들을 벗겨내야 한다.’라고. 그리하여 배고픔을 인내하고 포만감을 적대시함으로써 만들어진 여윈 육체를 통해, 전통적인 어머니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아울러 사회적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무의식적인 계산이 거식증의 심리적 메커니즘이라는 것이 수전 보르도의 설명이다.

  물론 저자는 페미니즘의 주류 논리대로 살을 빼고자 하는 여성들을 가부장제의 규범을 내면화하고 수동적으로 그것을 따르는 꼭두각시로 보지는 않는다. 그들도 분명히 행위하는 주체이다. 거식증을 포함한 이상 반응 또한 불완전하고 무의식적이고 비생산적이긴 하지만 나름대로의 하나의 의미 있는 저항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어떻든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은 여성들의 육체에 관한 철학적 성찰의 기록이다. 하지만 한 인간의 몸이란 사회적 권력이 맞부딪치는 투쟁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이 화해해야 할 장소이기도 하므로 수전 보르도의 성찰은 남성의 몸을 가진 나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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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 까치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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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휴가, 우리 몸에 침묵을 돌려주는 시간




  김현은 그의 책, 『행복한 책읽기』(문학과 지성사)에서 황동규의 지적이라면서 이런 말을 소개한다. ‘자기 삶을 추상화시키지 않으려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결부된 이미지나 관념도 함께 보아야 할 것이다. 강렬한 삶일수록 우리의 삶은 사물과 관념 사이에 펼쳐 있거나 뭉쳐 있기 때문이다.’라고. 황동규의 지적은 옳다. 대체 나의 삶을 몇 줄을 '스토리(Story)'로 압축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한 민족이나 국가의 역사를 몇 줄의 '하스토리(History)'로 압축한다는 것 역시 어불성설이다. 그 몇 줄의 스토리 안에 내 절절한 실패와 좌절의 역사가 담길 리 만무하고, 몇 줄의 히스토리 안에 한 민족과 국가가 겪어야 했던 파란만장과 우여곡절의 역사가 담길 리 없다. 오히려 쓸쓸한 연애의 추억은 어떤 일몰의 푸른빛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어떤 어두운 기억들은 우기(雨期)의 풍경 속에서 더욱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은 아닌가. 차라리 몇 줄의 언어로 압축된 스토리보다 하나의 풍경과 이미지가 나의 삶을 온전히 말해주고 계시해주는 주는 것은 아닌가. 어떤 새벽, 나는 푸르스름한 박명(薄命)의 어둠 속에서 아슴푸레한 과거를 떠올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 푸르스름한 이미지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벅참이 나를 엄습할 수도 있으리라. 시가 보여주어야 할 것은 바로 그 어떤 벅참의 순간은 아닐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어라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어쩌면 내 욕망이 만들어낸 환각일 수도 있는 저 이미지의 어슴푸레함.

  김현은 그의 책에서 또 이렇게 지적한다. ‘파시즘이란 가만있게 내버려두지 않는 강요이다. 무엇을 말해야 한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무엇에 대해 가만히 있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이 파시즘의 본질이다. 파시즘에 대한 재밌는 해석이다. 가만있게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간섭을 의미한다.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고 부추긴다는 뜻일 게다.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결국 파시스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말하게 할 것이다. 갖은 선전과 프로파간다는 결국 파시스트의 언어다. 그 언어를 추동하는 힘은, 진실을 입증해야만 한다는 끊임없는 강박관념일 것이다.

  하긴 언어는 인간의 의식을 해방하기보다는 옥죈다는 표현이 타당한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은 어떤가.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보기보다는 ‘언어를 통해서 왜곡된 사물’을 본다. 무지개의 색깔이 일곱 가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어에 끄달려 무지개를 일곱 색깔이라는 관념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

  언어를 통해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에 결국 사람들은 사물의 다양한 표정들을 놓치게 마련이다. 우리의 인식의 시스템은 장미를, 붉다, 향기롭다 등의 언어로 파악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의 장미는 항상 언어 그 이상이다. 사실 ‘장미’라는 언어는 구체적인 현실 속의 어떤 장미도 보여주지 못한다. 언어로서의 ‘장미’는 무수한 현실의 장미 속에서 추출된 추상적인 관념일 뿐이다. 현실은 언제나 언어 이상이다. 어떤 장인의 언어라고 할지라도 언어로써 현실을 재현한다는 것은 역부족이다. 언어는 자신의 무능을 극복하고자 수많은 기교와 수사법을 고안해낸다. 그러나 갖은 기교와 수사법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구체적인 현실 앞에서 무능력함을 드러낼 뿐이다. 어찌 ‘초록’이라는 말로 저 자연의 푸르름을 번역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언어도단(言語道斷)!, 어불성설(語不成說)!

  대학 시절 <시론>을 강의했던 교수는 시는 ‘말해진 것’에 있지 않고 '말해지지 않은 것‘ 속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모든 텍스트는 발화(發話)로 해서 생겨난다. 발화(發話)가 없는 텍스트란 엄밀히 말해서 없다. 원론적으로 말해지지 않는다면 말은 없는 것이다. 헌데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말해지지 않은 침묵이 의미의 집적체인 시의 주소라니. 영어에도 ‘행간을 읽어라-Read between the lines'라는 말이 있다. 행간은 여백이다. 여백은 텅 비어있다. 일체의 인기척도, 멍멍 짖는 소리도 없다. 아무리 들여다 보았자, 보이는 것은 허여멀건 침묵의 공간일 뿐이다. 침묵은 침묵일 뿐인데, 그 텅 빈 침묵의 공간에서 대체 무엇을 읽으란 말인가. 선사들의 어법으로 치자면 허공에서 뼈다귀를 꺼내먹으란 말씀이다. 참으로 고약하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말로써 할 수 있는 일들이란 것이 별반 없다. 말로써 효자 났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고, 말로써 부자 되었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도 그 사람의 행동을 보라고 했지, 그 사람의 말을 보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 위대한 스승이 없더라도 우리는 대체로 말로써 판단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설명 이전의 느낌이다. 지금 창 밖에서 울어대는 매미 소리 역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다. 매미의 울음소리, 그것은 한 존재가 제 존재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으르렁거림이요, 포효다. 그 어떤 언어도 그 울음의 내부 속으로 진입할 수는 없다. 대가(大家)의 비유와 상징이 가끔 길을 열어줄지 모르지만, 그런 기회를 만나기란 흔치 않다.

  여기, 침묵을 말하는 책이 있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까치)가 그것. 이 책은 불가(佛家)의 선문답처럼 알쏭달쏭한 역설로 가득하다. 가령 이런 식. ‘말은 침묵으로부터, 침묵의 충만함으로부터 나온다.’ 그래. 물은 끓으면서 쓰다 달다 아무 말도 안 한다. 그러나 더 이상의 열기를 참을 수 없을 때, 물은 그의 내부로부터 끓는 소리를 내지른다. 냄비 안의 팝콘도 제 열기를 스스로 이기지 못할 때, 제 존재의 내부를 확 드러내놓으면서 ‘펑’ 소리를 내지른다. ‘펑’ 소리를 내지르는 팝콘에겐 아무 죄도 없다. 팝콘이 참아내야 했던 저간의 침묵과 고통의 깊이가 ‘펑’ 소리를 내지르는 팝콘의 진정성이다. 진정한 소리란 그런 것이리라. 침묵과 고통의 내부로부터 뛰쳐나오는 소리.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불필요한 소리들을 뱉어내는가. 또 우리의 문명이란 얼마나 많은 소음을 생산해내는가.

  ‘말은 침묵과 대립해 있다. 그러나 적대관계 속에서 대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은 다만 침묵의 다른 한 면일 뿐이다.’라는 구절도 음미해볼 만하다. 피카르트는 침묵이 말의 다른 한 면일 뿐이다라고 하지 않고 말이 침묵의 다른 한 면이라고 말하고 있다. 침묵이 더 근원적이라는 얘기다. 그렇다. 우리의 어린 시절, 우리는 그다지 많은 언어들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기실 그렇게 많은 언어들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풍부하게 들을 수 있었고 대화할 수 있었다. 연인들에게 언어는 불필요한 소모다. 그들은 표정과 동작만으로도 끊임없이 소통한다. 그 소통은, 존재의 아주 깊숙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소리 없는 전언에 힘입는다. 연인들은 그 소리를 듣는다. 연인들은 이런 역설을 이해하는 존재이리라. ‘침묵해요, 내가 당신 말을 들을 수 있도록!’


  피카르트는 ‘진리로써 완전히 채워지지 않은 말의 공간을 인간은 슬픔으로 가득 채운다.’라고 말하고 있다. 말할 수 없는 것, 설명될 수 없는 것, 바로 그것이 인간의 존재의 뿌리가 아닌가. 촛불이 사납게 타오르는 내밀한 시간, 우리의 입안에서 참을 수 없는 무엇인가가 툭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저 밑바닥으로부터 구성하고 있는 것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나’란 그리고 ‘당신’이란 항상 언어 이상의 것이리라. 그러므로 언어로 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란 얼마나 속악한 일인가.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도 그의 저서 『침묵의 언어』(한길사)에서, 음성과 기호만이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음성과 기호가 전달되고 있는 순간의 시간과 공간도 의사를 전달한다고 말하고 있다. 홀은 이러한 사실을 인류학적 방법으로 분석했다. ꡒ사랑해ꡓ라고 말할 때, 음성의 내용보다는 말의 억양, 눈빛, 두 사람 간의 거리, 때와 장소 등이 더 진실된 의미를 전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새벽에 걸려오는 전화는 긴급한 사태라는 의미이고, 한밤중의 전화는 생사의 문제로 간주될 수도 있다. 반드시 말의 내용과 형식만이 말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문화를 이해할 때, 그 전제로서 ‘침묵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7시에 만나자’라는 언표에도 침묵의 언어가 개입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그 언표를 ‘6시 30분에서 7시 30분 사이에 만나자’로 이해하고 있는 반면, 어떤 문화권에서는 정확히 ‘7시에 만나자’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세한 의미는 언표에 드러나 있지 않다. 그것은 침묵으로써 갈무리된다. 한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그 침묵을 읽어내는 것이라는 것이 홀의 설명이다.

  도처에 말이 넘쳐난다. 소음이 넘쳐난다. 피카르트는 말한다. ‘오늘날 침묵은 더 이상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가 아니다. 침묵은 다만 아직 소음이 뚫고 들어가지 않은 곳일 뿐이다. 그것은 소음의 중지일 뿐이다. 소음 장치가 어느 한 순간 작동을 멈추면 그것이 오늘날의 침묵이다.’ 진정한 침묵은 소리의 끊김이 아니라는 말이다. 삐꺽거림과 삐꺽거림의 사이, 굉음과 굉음의 사이가 침묵은 아니라는 말이다. 말과 말 사이가 침묵이 아니라, 말 속에 침묵이 있다는 논리인가?

  하나의 교향곡을 들으며 우리는 한 음부가 끝나고 다른 음부가 시작될 때, 소리와 소리 사이의 휴지부(休止部)에서 어떤 그윽함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격렬한 감정일 수도 있다. 그 그윽함과 격렬함이 침묵의 결이고 무늬일까?

  ‘침묵은 인간의 마음속에 비애를 불러일으킨다. 침묵은 인간에게 말에 의한 죄로의 전락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상태를 회상시키기 때문이다.’라고 피카르트는 쓰고 있다. 많은 말은 결국 허약함의 징표가 아닐까. 강한 자는 결국 존재한다는 사실로써 이미 충만해 있는 자가 아닐까. 결국 많은 말들은 존재의 허약함을 채우기 위한 방편이 아닐까. 소위 ‘성자(聖者)’라고 하는 사람들이 경전을 쓰지 않는 것도 그들이 충분히 강해서이지는 않을까. 그들은 경전을 혀로써 쓰지 않고 존재로써 쓴 것은 아닐까. 말은 결국 허약함을 상기시키고 죄를 상기시킨다. 글을 든 자의 비애는 여기에 있다.

  ‘오랜 침묵 뒤에 다시 말하기 시작한 사람을 잘 보면, 그는 마치 말에 의해 이제 막 눈 앞에 나온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말을 통해 새로이 확인되는 것이다.’라는 구절은 오랜 병에서 회복된 자의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오래 병을 앓으며 침묵으로 투병 생활을 한 자가 뱉어내는 소리, 우린 대체로 그것이 진실하다고 판단한다. 우리의 판단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는 우리의 사고는 미욱하긴 해도 일면 진실하다.

  도시에는 말들이 가득하지만 자연 속에는 소리가 가득하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배운, 알퐁스 도데의 아름다운 소설 『별』(베텔스만)에서의 한 대목을 보자. ‘만일 한번만이라도 한데서 밤을 새워 본 일이 있는 분이라면, 인간이 모두 잠든 깊은 밤중에는, 또 다른 신비로운 세계가 고독과 적막 속에 눈을 뜬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샘물은 훨씬 더 맑은 소리로 노래 부르고, 못에는 자그마한 불꽃들이 반짝이는 것입니다. 온갖 신령들이 거침없이 오락가락 노닐며, 대기 속에는 마치 나뭇가지나 풀잎이 부쩍부쩍 자라는 소리라도 들리듯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들, 그 들릴 듯 말 듯한 온갖 소리들이 일어납니다.’ 바로 자연 속에서, 우리는 잃어버렸던 ‘귀’를 도로 찾는 것은 아닌지.

  바야흐로 산과 들을 찾는 휴가 시즌이다. 문명의 소음 속에서, 잃어버렸던 우리들의 ‘귀’를 찾기 위해서는 노래방 기기가 소음을 내뿜고 있는 관광지를 찾기보다는 계곡의 바위틈에서 서늘하게 발을 담가 볼 일이다. 휴가란, 우리 몸에 침묵을 돌려주는 일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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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에 다가서기
강영조 지음 / 효형출판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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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앞에서 설레는 마음은 무엇인가?
풍경에 다가서기 강영조 / 효형출판, 2003



    경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풍경을 바라보는 일, 그것은 바로 ‘그 무엇을’ 읽어내는 일이다. 그렇다면 풍경의 무엇이 우리의 발목을 잡아채 저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것일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풍경에 다가서게 되는 것일까. 그러나 풍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저만치’ 있을 뿐이다.

    내 의지와는 아랑곳없이 막무가내로 놓여진 자연의 위용과 웅자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왜소하다. 그 크기와 높이만으로도 인간을 압도하는 산, 폭우를 쏟아낼 것만 같은 여름날의 검은 구름, 무서운 기세로 해안의 절벽을 때리는 파도, 자연의 그 위압적인 권력 앞에서 인간은 사소하다. 사소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어떤 종류의 위안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만약 그런 위안을 찾을 수 없다면 스스로 고안이라도 하여야 했을 것이다. 가만있는 산을 불러다 말을 걸고, 잔뜩 불어터진 구름을 빌어다 살아있는 표정을 입혀야 했을 것이다. 풍경의 의인화, 사물에 감정을 불어넣는 이런 애니미즘을 통해 인간은 세계가 그런 대로 우호적이라고 생각하며 적이 안도했을지도 모르겠다.

    장엄한 일몰의 풍경 앞에서, 커다랗게 성호를 그으며 떨어지는 별똥 앞에서, 일망무제의 운해 앞에서, 남해금산 그 푸른 바닷물 앞에서의 설레임이란 대체 어떤 심리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일찍이 연암 박지원은 만주의 요동 벌판을 지날 때 그 소감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고 『열하일기』는 말한다. “아, 참 좋은 울음터로다. 가히 한번 울만하구나.” 이태의 『남부군』에서도 빨치산 일행들이 장엄한 지리산의 설경을 보면서 눈물을 글썽인다.(그들은 전투적 인간이기에 앞서 피와 눈물이 있는 미학적 인간이었던 것이다.) 대체 풍경의 무엇이 인간의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을 이끌어내는 것일까. 왜 풍경은 ‘저만치 ’에 있지 않고 인간에게 ‘작용’하는가. 풍경을 인간의 내부로 끌어들여 그것을 의인화하고 마는 인간의 심리적 배경은 어떤 것인가.

    그러나 풍경이 주는 감동을 분석하는 일이란 얼마나 좀스럽고 불경스러운 일인가. 대체 기원을 따져서 어쩌자는 건지. 그러나 풍경에 대한 분석만으로도 썩 훌륭한 저서가 있다. 장영조의 『풍경에 다가서기』(효형출판). 이 책은 풍경에 대한 미적 체험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형식적 아름다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황금비, 균제미, 구도 등은 미적 형식을 설명하는 도구다. 그리스 조각이나 건축, 불상과 탑, 단아한 한옥, 산수화의 미적 완성도의 설득력은 수학적 비례에서 구하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여기에는 형태적 완전성이 전제된다.”

    하지만 우린 폐허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던가. 이 책의 저자 장영조는 왜 인간이 스러져 가는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지에 대해서 조선 세조 때의 학자 어세겸의 노래를 빌어 말한다. “옛 절에 놀러오니 중이 예스럽지 않고/ 신라 천년 지난 일이 도리어 새롭구나/ 궁전은 티가 남았는데 야수들이 차지했고/ 산하는 주인 없이 진인(왕건)에게 귀속되었네/ 외로운 탑은 이미 앞뒷면이 허물어졌는데/ 늙은 소나무는 오히려 반쪽 몸이 남아 있구나” 어세겸의 폐허 감수성을 추측하기 위해서 저자는 고대의 폐허를 아름다운 풍경화 속에 재현시킨 화가, 클로드 로랭과 살바도르 로자, 니콜라 푸생과 같은 화가에 주목한다. 그들의 폐허 미학은 고대의 찬란한 문명에 대한 동경, 이른바 상고(尙古) 취미의 일종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게오르그 짐멜의 이런 발언 앞에서 얼마나 속된 것인가. 짐멜은 말한다. “기후, 식물의 번성, 더위, 추위 등의 영향이 그 영향 하에 있는 건조물을 같은 조건 아래 있는 토지의 색조에 근사한 것으로 만든다. 다시 말해서 이것들의 영향으로 예전에 대립적으로 자기 현시하고 있던 건조물을 귀속이라는 평안한 통일성으로 침잠하게 하는 것이다.”

    건조물은 중력에 대한 거부요, 투쟁이었다. 무너진다는 것, 낡아간다는 것은 자연에 대한 거부와 투쟁의 의지를 철수하고 자연의 섭리로 돌아가는 귀속과 침잠이라는 설명이다. 풍화와 소멸을 운명으로서 받아들임으로써, 폐허를 완성하고 인간은 ‘본래의 어머니’인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 석양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의 색조와 절묘한 구도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여명을 걷어내고 대낮을 뜨겁게 태우다가 마침내 목숨이 다하여 저 너머로 사라지는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자연의 섭리를 자신과 겹쳐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차가운 강철조차 붉게 녹을 피우고 있을 때에는 아름답다. 고산의 묵은 등걸이 아름다운 것도 이 때문이다. 허물어진 성벽, 궁터의 주춧돌, 폐광, 풍화하는 가을의 평원, 사람 없는 겨울 바다, 삭풍을 안고 있는 겨울 나무, 아스팔트 틈의 잡초, 물때 앉은 콘크리트 바닥, 세월을 안고 스려져 가는 이 모든 것들이 아름답다.” 소멸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겸손의 미학, 폐허의 풍경엔 그런 비밀이 숨어 있었다.

    『풍경에 다가서기』는 퇴계의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을 인용하며 온전한 풍경을 체험할 수 있는 방법 열 가지를 소개한다. 하나, 건강과 볼거리에 맞추어 탐승 경로를 정할 것. 둘, 다양한 이동 수단을 이용할 것. 셋, 적절한 조망점과 시기를 선정할 것. 넷, 다양한 자세로 풍경을 감상할 것. 다섯, 인상적인 풍경에 이름을 붙여줄 것. 일곱, 풍경을 상찬할 것. 여덟, 맛있는 먹거리를 맛볼 것. 아홉, 그곳의 풍경에 대해서 미리 공부하고 갈 것. 열, 풍경을 나누어 맛볼 것.

    그중 아홉과 열이 재미있다. 풍경은 시각적 체험이고 무엇인가 먹는 행위는 미각적 체험이다. 혀에 유쾌한 자극을 줌으로써 눈에도 쾌감을 줄 수 있지 않은가. 한 잔의 술에 성큼 산이 내 앞으로 다가설 수도 있는 것이고, 약수 한잔을 마시고 바라보는 산아래 마을이 더없이 정답게 보일 수도 있는 일이다. 더구나 그런 체험을 같이할 수 있는 벗이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어떤 풍경을 공유한다는 것, 그것은 내 동반자의 뇌리에 나 자신의 존재를 깊이 새기는 일이다. 풍경이 나에게로 흘러 들어와 지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되듯, 그것을 같이 바라보는 자 또한 나에게는 지울 수 없는 추억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면, 모든 연인들에게 무엇보다 하나의 픙경을 권할 일이다.

    말로는 말했다. “음악가는 음악을 사랑하고 종달새를 사랑하지 않으며, 시인은 시를 사랑하고 저녁노을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화가도 사람의 얼굴이나 풍경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화가는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이다."‘(앙드레 베르제 등저, 남기영 옮김, 삼협종합출판부) 라고 했다. 풍경을 보는 관조자의 감흥이 풍경화를 낳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풍경화를 바라보는 관조자의 감흥이 풍경을 그리고 싶은 욕망을 잉태한다는 것이다. 또 말로는 이 책에서 이런 말을 한다. ”물론, 젊은 화가는 처음에 모방하는 것을 배운다. 그러나 자신의 화법을 발견할 때까지는, 그가 모방하는 것은 선생의 그림이며, 자연이 아니다. 따라서 새로운 예술은 항상 그 이전의 예술로부터 출발하면서 스스로 탐구한다.“ 예술은 풍경을 모방함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술 작품을 모방하는 데서 온다는 것.

    『풍경에 다가서기』의 저자는 미술사가 곰브리치의 발언을 인용한다. ”알프스 풍경의 발견은 산의 전망을 담은 그림의 확산에 앞서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뒤이어 일어났다.“ 풍경화가 환경을 풍경으로 체험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예술 작품의 체험에서 비롯되는 문화적 교양이 관조자로 하여금 풍경의 미적 체험을 풍부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심 없는 담백한 마음만으로는 어쩌면 풍경의 깊이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잘 느끼는 마음, 잘 훈련된 마음이야말로 풍경의 풍부한 표정을 읽어내는 비결이 아니겠는지. 풍경으로부터 다양한 표정을 읽어내 그것을 고전의 반열에 오르게 한 이백, 두보, 소동파 같은 작가들이야말로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인이 아니었던가.

    자연을 그 효용 가치로밖에 볼 줄 모르는 사람에게 풍경은 그 풍부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그 풍경을 아끼고 지키려는 것은 객관적으로 거기에 있는 자연물을 지키는 운동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사 속에 새겨진 지역의 풍경, 고향의 풍경, 기억의 풍경을 지키는 행동이다. 지켜야 할 풍경은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관계다. 이처럼 사물의 나열이 아니라 사물들이 서로 관계하고 또 나와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생성되는 것이 풍경이다. 그래서 지켜야 할 풍경은 우리들의 추억과 애착이 담겨 있어서 다른 사물과 대체 불가능하다.” 우리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대로가 유일무이한 풍경이다. 그것은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개별성을 구현하고 있다. 그 개별성의 죽음 위에 세워지는 문명을 진보라는 이름으로 상찬하고만 있을 것인가. 풍경을 간직하겠다는 의지는 언제나 감상주의라는 오명을 뒤집어 써야하는 것인가.

    저자는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의 심미적 교양에 따라 풍경의 그림이 다양하게 지각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심미적 교양이라고 해서 예술적 소양이나 예리한 감수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단순히 풍경을 변별하는 언어를 많이 아는 것만으로도 풍경을 풍요롭게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정선의 「금강산도」가 예리한 바위산들이 화면 가득히, 그리고 만연하게 펼쳐져 있는 듯이 보이는 데 반해 「금강산 내총도」에 그려진 봉우리들이 비교적 명료하게 시인(是認)되는 것은 중요한 봉우리의 이름이 적혀 있기 때문이다. 이름으로 지시된 사물이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 그 풍경을 체험하는 인간의 의식을 끌어당기기 쉽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긴 그렇다. 고명한 언어학자의 도움을 빌지 않더라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는 자명한 이치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세계 그 자체가 아니다. 우리는 언어에 의해 굴절된 세계를 볼뿐이다. 지명(地名)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언어란 인간의 체험과 상상력을 반영한다. 지명을 안다는 것은 그 지명 속에 녹아들어 있는 경험의 총체를 아우르는 일일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이름을 한갓 된 기호라고 말할 수 있겠는지. 이 책은 이런 사정을 짧게 요약한다. “산행 전문가들에게는 산 의지형을 설명하기 위한 수백 행의 문장보다 그들의 경험이 깊이 녹아들어 있는 한 마디의 지형언어가 그 풍경을 더 설득력 있게 웅변한다.”라고.

    반야봉, 형제 바위, 소상야우, 동정추월, 어떤 풍경에는 이름이 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차이의 체계를 만들어 주는 일, 하나의 잊지 못할 풍경을, 저 숱한 무명의 풍경으로부터 차별화시키는 일일 것이다.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다. 막무가내로 놓여진 저 숱한 풍경들에 비해 인간의 기억의 용량은 얼마나 작은가. 인간의 작은 기억 용량이 궁여지책으로 만들어낸 것이 이름이었을 것이다.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어떤 풍경을 무한한 자연으로부터 차별화시키고 풍경은 비로소 관조자에게 유의미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이름은 자연을 화석화시키는 인간의 욕망의 산물이기에 앞서 인간이 사물을 사랑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순이’하면 달뜨는 마음도 있겠지만 ‘지리산’하면 콩닥거리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지중해’라는 말만 들어도 벌써 마음이 설렐 것이다. 나는 그런 이름들을 사랑한다.

    『풍경에 다가서기』에 다가서기도 필요할 터이지만, 가끔은 책에서 눈을 떼고 풍경에 다가설 필요가 있다. 침묵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될 수 있는가를 풍경은 보여준다. 관광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가급적이면 인적이 드문 길을 찾아 나설 일이다. 호젓한 동반자가 있다면 비단에 꽃을 더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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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갈나무 바라보기 - 동물들의 눈으로 본 세상 사계절 1318 교양문고 6
주디스 콜. 허버트 콜 지음, 후박나무 옮김, 최재천 감수 / 사계절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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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他者)의 눈을 빌려 세상을 바라보기
떡갈나무 바라보기, 주디스 콜, 허버트 콜 공저, 후박나무 역, 최재천 감수 / 사계절, 2002


  체로 지네나 쐐기 송충이 같은 다족류 동물들은 혐오감을 자아낸다. 누구나 한번쯤 옷에 붙은 송충이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경험이 있을 법하다. 대체 다족류의 어떤 점이 인간에게 혐오의 감정을 야기하는지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심층심리학이 필요하겠다. 그러나 송충이를 오래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언제 그랬느냐 싶게 두려움은 사라진다. (모든 관찰의 시선은 두려움이 사라지는 순간을 요구한다.) 희고 보송보송한 털,(거기에서 혐오의 감정을 유추해낼 만한 어떤 근거도 없다.) 배냇짓을 하듯 갓난아이처럼 꼬물대는 사물거림, 온몸을 구부렸다 다시 활처럼 펴는 동작을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신기하기가 그지없다. 문제는 우리가 송충이에 대한 경이(驚異)의 감정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아닐까. 히야, 라고 외치며 세상에 대해 두 눈을 동그랗게 뜰 줄 아는 아이의 마음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베이컨은 이를 두고 종족의 우상이라고 했던가. 가령 인간이 종(種)으로서 가질 수밖에 편견이나 오류 같은 것 말이다. 송충이를 징그럽다고 하는 것도 사실은 인간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편견일지도 모른다. 동물에게도 감정이 있다면, 송충이를 먹이로 하는 포식자들이 송충이에게 느끼는 감정과 인간의 그것은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보는 세계가 절대적이고 유일한 세계인 양 판단하고 행동하기 일쑤다.

  테러리즘은 자신의 신념 체계가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는 종교적 근본주의에서 싹트기 십상이다. 나와 타인은 다를 수 있다는 것, 그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 유혈(流血)의 싸움은 시작된다. 제국주의가 아무리 그럴싸한 이념을 표방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내 신념을 타인에게도 이식시키겠다는 배타주의에 다름 아니다. 내가 세계를 바라보는 식으로 남들도 세계를 바라보아야 하고, 만약 그들의 시각이 나와 같지 않다면 기어코 그들의 시각을 교정하고야 말겠다는 독선.

  동물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떡갈나무 바라보기』(주디스 콜, 허버트 콜 공저, 사계절)는 인간의 시선이란 것이 얼마나 편협하고 독선적인 것인가를 풍부한 사례를 통해 일깨워 준다. 내 오관을 떠나 타자(他者)의 감각을 빌려서 세상을 본다는 것은 분명 색다른 경험이다. ‘추천의 말’에서 최재천 교수는 ‘이 책은 지극히 감각적인 책이다. 오감을 죄다 동원하여 책을 읽게 만든다.’라고 쓰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이 책은 눈으로만 읽을 책은 아니다.

  이 책은 ‘움벨트(Umwelt)’라는 용어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1957년 『동물과 인간 세계로의 산책』을 쓴 야곱 폰 웩스쿨이 만든 이 용어는 동물이 경험하는 주변의 생물 세계를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졌다. 움벨트는 모든 동물이 공유하는 경험이 아니라 개개의 동물에게 특유한 경험을 일컫는다. 예를 들어 색맹이 보는 세상과 정상인이 보는 세계는 같을 수가 없다. 이때 정상인과 색맹은 다른 움벨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논리를 확대해 본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개체수만큼의 움벨트가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가 있다. 인간이 가지는 움벨트만이 절대적인 현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공간, 시간, 반응 세계로 접근하는 가장 쉬운 길은 동물의 감각이 활동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개미의 공간 감각이 어떠한지 알아보기 위해 상자와 돌덩이로 장애물을 만들어 놓고 눈을 가린 후, 잘 휘는 플라스틱 막대기 두개를 더듬이처럼 머리에 붙이고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면 장애물에 닿았을 때 막대기의 진동으로 장애물의 존재를 판단할 수 있을 터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개미 세계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방울뱀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피부로 세계를 느낄 수 있도록 상상력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피부 1㎠에 열을 감지하는 온점은 고작 세 개지만 방울뱀은 눈 아래 움푹 파인 곳에만 온점이 15만개라고 한다. 같은 지상에 존재하고 있지만 방울뱀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말 그대로 천양지차(天壤之差)인 셈이다.

  이 책은 동물의 생활 리듬, 사회 세계, 공간, 시간 감각 등 다양한 움벨트를 설명해 준다. 일백 년 가까이 사는 거북이와 하루밖에 못 사는 나방이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다르다. 진드기는 포유동물의 따스한 피에 알을 낳는다. 눈이 없고 귀도 없는 진드기는 풀잎이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가 토끼나 다람쥐 등 포유동물이 지나가는 순간 포유동물의 몸에서 발산하는 부티르산의 냄새를 감지해 포유동물의 몸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미국의 로스토크 연구소에는 무려 18년 동안 굶주린 채 나무에 매달려 살고 있는 진드기가 있다고 한다. 이런 진드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 감각은 같을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또 인간은 1초에 18개에서 24개의 이미지를 지각할 수 있지만 남아프리카의 ‘나이프피시’라는 물고기는 1초 동안 1,600가지의 전기충격을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사정이 이럴진대 하나의 고정된 시간관으로 세계를 파악하지 말라는 것이 저자의 충고다.

  이 책은 또한 공간의 개념도 동물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러 가지 예를 저자는 보여주고 있지만 그중 흥미로운 사실은 소금쟁이의 세계는 2차원적이라는 것이다. 물 위를 미끄러지듯 소금쟁이를 잡아서 어항에 담아두고 관찰하면 위쪽이나 아래쪽에서 움직이는 물체에는 반응하지 않지만 수면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반응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짚신벌레는 앞이나 뒤 또는 오른쪽이나 왼쪽을 구별할 수 없는 공처럼 방향에 신경을 쓰지 않을 뿐더러 방향을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수나방은 2.4km 떨어진 곳에 있는 암나방을 아주 희미한 냄새를 따라가 만나 짝짓기를 하고, 돌고래도 160km나 떨어져 있어도 암수가 대화를 하여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숫나방은 2.4km 떨어진 곳에 있는 암나방을 오직 희미한 냄새만을 따라가 만나서 짝짓기 한다고 한다.

  사랑에 빠지면 온 세상이 장밋빛으로 느껴지지만 우울해지면 잿빛으로 느껴지듯, 기분은 우리가 사물을 경험하고 그에 반응하는 방식을 결정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결국 나 자신의 시공 감각이나 기질만으로 파악된 세상이 절대적으로 유일한 세계는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늙은 떡갈나무가 숲 속에 서 있을 때, 그 떡갈나무는 무수한 움벨트를 거느린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그 목재적 효용성에만 관심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본다. 그러나 애벌레의 입장에서, 베짱이와 매미의 입장에서, 그 나무 뿌리의 동굴 속에 사는 여우의 입장에서 한 그루의 떡갈나무를 바라볼 것을 이 책은 권한다.

  얼마 전 어떤 대학의 축제에서 <노인 되어 보기>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인과 같은 위치에 있어 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무거운 납이 들어있는 벨트를 팔과 다리에 차게 하고, 눈에는 알이 두터운 안경을 쓰게 하였단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 했던가. 타자(他者)를 이해하기 위해선 타자가 되어보는 것이 상책임에도 우리의 감각은 지나치게 ‘나’의 몸 안에 갇혀 있다. 결국 환경파괴와 테러리즘과 제국주의가 ‘내’ 감각에만 안주하고 있는 나르시시즘에 다름 아님을 이 책은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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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한상봉 지음 / 울림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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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해지기의 어려움
- 한상봉의 『연민』




평소에 알고 지내는 발비나 수녀님이 어느 날인가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 제가 수녀원에 있을 때 일이에요. 수녀원 생활이란 게 사실 많이 힘들죠. 먹고 싶은 것도 많지만 맘대로 먹을 수 없는 게 수녀원 생활이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 갑자기 쵸코파이가 먹고 싶은 거예요. 한번 먹고싶은 마음이 드니 걷잡을 수가 없더라구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총 덕분인지 신자 한 분이 제게 초코파이를 하나 주시더라구요.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걸 차마 먹을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제 책상 속에 넣어놓고 먹고싶을 때마다 열어보았어요. 입에서 녹는 초코파이의 달콤한 맛을 상상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어느날 출출한 시간에 동료 수녀 한 분이 그것을 보시더니 먹고싶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어쩔까 하다가 에라 드려버리자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그렇게 먹고 싶던 초코파이에 대한 갈증이 싹 가시는 거예요. 거짓말처럼 초코파이를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거였어요. 주님께서 저를 단 한 번에 채워주신 거예요. 그것도 완전하게 채워주신 거예요."

발비나 수녀님을 온전히 채워주신 존재가 수녀님 말씀대로 과연 하나님인지는 몰라도 수녀님의 예의 그 말씀은 어떤 감동적인 연설보다 비움과 베품의 미학을 실감나게 전해주고 있었다.

느끼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 느낌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그러나 느낌을 얻기 위해 안달하는 사람에게도 느낌은 오지 않는다. 어떤 느낌을 타인에게 강요한다고 해서 그가 우리와 함께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아도 어떨 때는 출렁거리는 느낌의 해일 속에 휩싸일 때가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렇게 오는 것이고, 연민의 감정이 또한 그렇게 오는 것이리라.

문득 젊음을 잃은 아내의 얼굴을 낯설게 보면서 이 여자가 과연, 나와 살을 섞어온 여자였던가라고 느낄 때, 그 느낌의 뭉클함을 연민이라고 이름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 연민은 아주 낯선 감정이다. 습관화된 일상 속에서 우리를 모든 것을 무미하게 보아 넘긴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사물의 표피만을 훑고 지날 뿐이다. 그러나 연민의 시선은 거죽만을 바라보는 시선은 아니다. 표피의 깊이를 헤아리는 시선이다. 타인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감정은 아주 건조한 것이거나 격앙된 것이기가 십상이다. 온통 연민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존재는 대자대비한 부처나 만민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일 것이다. 그러나 칡뿌리처럼 거친 아내의 투박한 손마디에서 문득 코끝이 찡해지는 느낌을 얻었다면 연민은 분명 지고지순한 존재만의 전유물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연민보다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연연해하는 것이 평범한 생활인의 일상사가 아니던가. 나 자신의 욕망과 공허를 바라보는 시선, 내 욕망과 공허를 채워주지 못하는 타인에 대한 야멸차고 냉랭한 시선, 결국 고독이란 스스로를 연민하는 나르시시스의 욕망이 아닐까. 젊음이 고통스럽다고 하다면 그것은 충족받고자 하는 열망의 깊이 때문은 아닐까.

청춘의 시절, 그때 우리가 연인이란 이름으로 사랑했던 존재를 과연 진정한 타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 그 타인이란 내 공허를 채워주는 수단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내 공허를 채워줄 타인에 대한 갈망을 우린 대담하게도 사랑이라고 불렀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언젠가 그런 순간은 온다. 타인을 타인으로 바라보게 되는 순간, 그 또한 나와 같이 욕망하는 존재였음을 인정하는 순간, 내 욕망만이 보상받아야 할 유일무이한 대상이 아니었음을 인정하는 순간, 그래, 너도 나처럼 거기에 있었구나, 너도 나처럼 채워지지 않는 공허를 그렇게 피곤하게 부둥켜안고 서 있었구나, 조금은 너그러워진 시선으로 타인을 볼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을 대상으로서가 아닌 또 하나의 주체로서 바라보게 되는 것이리라.

연민은 그러므로 타인의 '피로'를 바라보는 감정이 아닐까. 고독이 나의 '피로'를 바라보는 마음이라면 연민이란 타인의 공허와 상처를 바라보는 일이리라. 따지고 보면 종교가 가르친 것이 다름 아닌 '연민'이었다. 불교의 자비심이 그렇고 기독교의 긍휼함이 그렇고 맹자의 측은지심이 또한 그랬다..

과부 사정 홀아비가 안다던가. 대개의 연민은 동종(同種)에 대한 배려에서 싹튼다. 내 가족에 대한 배려, 내 고향 사람에 대한 배려, 내 민족에 대한 배려. 그러나 의외로 한 인간의 연민은 타종(他種)에까지 확산되면서 인간됨의 높이와 폭을 드러내기도 한다. 남의 가족에 대한, 타향 사람에 대한, 타민족에 대한, 다른 생명체에 대한 배려, 나와 성향과 취미가 다른 종족에 대한 배려가 그것이다. 그러한 배려는 타인을 너의 몸처럼 사랑하라, 네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마라, 우주가 곧 너의 몸이다, 라는 종교적 말씀으로 승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멀어도 한참 멀었다. 타인의 고통을 위로해줄 수는 있어도, 타인의 기쁨에 흔쾌히 동참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가 아니었던가. 타인의 고통을 위로하며 우리는 내심 타인의 고통에 내가 당면해 있지 않음에 안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보며 우리의 행운에 안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타인의 기쁨에 질투를 느끼면서 우리는 '그'가 기뻐하는 자리에 '내'가 있어야 함을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정이 이렇다면 질투는 근본적으로 '빼앗고자 하는' 감정이다.

세상에는 내 슬픔만 있는 것이 아니리라. 더 큰 슬픔 앞에 어떤 슬픔은 차라리 사치일 수도있을 것이다. 더 큰 상처 앞에 어떤 상처는 엄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더 큰 슬픔과 상처가 , 더 큰 외로움이 우리를 위로한다. 더 깊은 상처의 아픔을 어루만지면서 우리는 내 상처의 아픔을 잊는다. 그렇다면 성자(聖者)들의 외로움은 중생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되었던 것은 아닐까.

깊은 슬픔』의 작가 신경숙은 어떤 자리에서 "소설뿐만이 아니라 제 글쓰기 행위의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제 생각에는 연민 같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이나 죽어 있는 것들에 대해서 연민의 감정이 일지 않으면,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그냥 스쳐 지나간다는 것을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문학작품들이 타인을 연민하기보다 작자 스스로를 연민하고 있는 것인지. 소위 '문청'의 문학작품일수록 치기 어린 나르시시즘 쉽사리 노출한다. 그들은 타인을 위로하기보다는 스스로 위로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작자의 의도야 어쨌든 나는 외롭다라는 작가의 절규 속에서도 독자들은 묘한 심정적 위로를 얻는다. 하지만 그러한 위로란 무엇인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며 비로소 안도하는 '내' 안의 어떤 이기심이 아닐까. 소위 저급한 의미에서의 대중문학이란 위로받고 싶다는 독자의 이기심과 충족받고 싶다는 작가의 욕망이 절묘하게 야합한 결과가 아닐까.

한상봉의 수필집, 『연민』(울림)의 17페이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배운 게 없어도 사지만 멀쩡하다면, 얼마든지 세상의 불행한 인생들에게 손 내밀어 줄 수 있다. 거창하게 민주주의와 노동 해방을 외치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늘진 세상에 그야말로 햇볕 한줌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용기 있는 자이다.……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들이라는 생각을 늘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영영 구제받지 못할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시각에 다시 묻자. 우리는 돌심장을 거둬 내고 살심장을 심고 있는지. 아니면 살심장을 거둬 내고 겹겹이 갑옷을 껴입고 있는지."

그러나 필자의 외침이 절실한 그 무엇으로 와닿을 만큼 우리들은 여유롭지 못하다. 그가 아무리 황지우의 시를 빌어 "그러므로 길가는 이들이여/그대 비록 악을 이기지 못하였으나/약과 마음을 얻었으니/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고 외친들 세상의 고통을 내것으로 냉큼 받아들일 독자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감동은 그러한 외침에 있지 않다. 이 책의 감동은 천주교사회문제연구소,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같은 교회 안의 재야 단체에 몸을 실으며 '고난의 시대'를 통과해냈던 그의 이력과 전남 영광, 전북 임실과 김제, 경북 예천과 상주, 경남 함양 등지를 기웃거리다 전북 무주의 광대정이란 마을에 비로소 '귀농'하기까지의 역정이 그의 정신사에 남겼을 무수한 편린들이다. 김수영의 시와 불교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정, 허균과 체 게바라에 대한 그의 도저한 관심을 읽고 있노라면 앎과 지식의 분리, 이론과 실천의 분리가 장황한 수사학에 치우친 얼치기 글들을 양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내 자신에 대한 자괴심을 갖게 한다. (확실히 이 책은 사람을 아프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의 184페이지는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이 혁명의 땅임을 말한다. 한상봉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결코 편안한 일이 아니다. 이 책은 우리들에게 어떤 결단을 무의식중에 요구하고 있다.

"우리 시대에는 스타를 갈망하는 바다 속에서 시시한 삶의 자리를 지켜내는 투쟁이 요청되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내적 혁명을 일으키고, 시시한 삶을 선택·결단함으로써, 시시하고 보잘것없는 중생들의 마음결을 살피고, 그들과 함께 혁명하는 것이다."

그렇다. 사소해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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