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앞에서 설레는 마음은 무엇인가?
풍경에 다가서기 강영조 / 효형출판, 2003 풍경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풍경을 바라보는 일, 그것은 바로 ‘그 무엇을’ 읽어내는 일이다. 그렇다면 풍경의 무엇이 우리의 발목을 잡아채 저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것일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풍경에 다가서게 되는 것일까. 그러나 풍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저만치’ 있을 뿐이다.
내 의지와는 아랑곳없이 막무가내로 놓여진 자연의 위용과 웅자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왜소하다. 그 크기와 높이만으로도 인간을 압도하는 산, 폭우를 쏟아낼 것만 같은 여름날의 검은 구름, 무서운 기세로 해안의 절벽을 때리는 파도, 자연의 그 위압적인 권력 앞에서 인간은 사소하다. 사소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어떤 종류의 위안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만약 그런 위안을 찾을 수 없다면 스스로 고안이라도 하여야 했을 것이다. 가만있는 산을 불러다 말을 걸고, 잔뜩 불어터진 구름을 빌어다 살아있는 표정을 입혀야 했을 것이다. 풍경의 의인화, 사물에 감정을 불어넣는 이런 애니미즘을 통해 인간은 세계가 그런 대로 우호적이라고 생각하며 적이 안도했을지도 모르겠다.

장엄한 일몰의 풍경 앞에서, 커다랗게 성호를 그으며 떨어지는 별똥 앞에서, 일망무제의 운해 앞에서, 남해금산 그 푸른 바닷물 앞에서의 설레임이란 대체 어떤 심리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일찍이 연암 박지원은 만주의 요동 벌판을 지날 때 그 소감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고 『열하일기』는 말한다. “아, 참 좋은 울음터로다. 가히 한번 울만하구나.” 이태의 『남부군』에서도 빨치산 일행들이 장엄한 지리산의 설경을 보면서 눈물을 글썽인다.(그들은 전투적 인간이기에 앞서 피와 눈물이 있는 미학적 인간이었던 것이다.) 대체 풍경의 무엇이 인간의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을 이끌어내는 것일까. 왜 풍경은 ‘저만치 ’에 있지 않고 인간에게 ‘작용’하는가. 풍경을 인간의 내부로 끌어들여 그것을 의인화하고 마는 인간의 심리적 배경은 어떤 것인가.

그러나 풍경이 주는 감동을 분석하는 일이란 얼마나 좀스럽고 불경스러운 일인가. 대체 기원을 따져서 어쩌자는 건지. 그러나 풍경에 대한 분석만으로도 썩 훌륭한 저서가 있다. 장영조의 『풍경에 다가서기』(효형출판). 이 책은 풍경에 대한 미적 체험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형식적 아름다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황금비, 균제미, 구도 등은 미적 형식을 설명하는 도구다. 그리스 조각이나 건축, 불상과 탑, 단아한 한옥, 산수화의 미적 완성도의 설득력은 수학적 비례에서 구하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여기에는 형태적 완전성이 전제된다.”
하지만 우린 폐허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던가. 이 책의 저자 장영조는 왜 인간이 스러져 가는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지에 대해서 조선 세조 때의 학자 어세겸의 노래를 빌어 말한다. “옛 절에 놀러오니 중이 예스럽지 않고/ 신라 천년 지난 일이 도리어 새롭구나/ 궁전은 티가 남았는데 야수들이 차지했고/ 산하는 주인 없이 진인(왕건)에게 귀속되었네/ 외로운 탑은 이미 앞뒷면이 허물어졌는데/ 늙은 소나무는 오히려 반쪽 몸이 남아 있구나” 어세겸의 폐허 감수성을 추측하기 위해서 저자는 고대의 폐허를 아름다운 풍경화 속에 재현시킨 화가, 클로드 로랭과 살바도르 로자, 니콜라 푸생과 같은 화가에 주목한다. 그들의 폐허 미학은 고대의 찬란한 문명에 대한 동경, 이른바 상고(尙古) 취미의 일종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게오르그 짐멜의 이런 발언 앞에서 얼마나 속된 것인가. 짐멜은 말한다. “기후, 식물의 번성, 더위, 추위 등의 영향이 그 영향 하에 있는 건조물을 같은 조건 아래 있는 토지의 색조에 근사한 것으로 만든다. 다시 말해서 이것들의 영향으로 예전에 대립적으로 자기 현시하고 있던 건조물을 귀속이라는 평안한 통일성으로 침잠하게 하는 것이다.”
건조물은 중력에 대한 거부요, 투쟁이었다. 무너진다는 것, 낡아간다는 것은 자연에 대한 거부와 투쟁의 의지를 철수하고 자연의 섭리로 돌아가는 귀속과 침잠이라는 설명이다. 풍화와 소멸을 운명으로서 받아들임으로써, 폐허를 완성하고 인간은 ‘본래의 어머니’인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 석양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의 색조와 절묘한 구도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여명을 걷어내고 대낮을 뜨겁게 태우다가 마침내 목숨이 다하여 저 너머로 사라지는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자연의 섭리를 자신과 겹쳐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차가운 강철조차 붉게 녹을 피우고 있을 때에는 아름답다. 고산의 묵은 등걸이 아름다운 것도 이 때문이다. 허물어진 성벽, 궁터의 주춧돌, 폐광, 풍화하는 가을의 평원, 사람 없는 겨울 바다, 삭풍을 안고 있는 겨울 나무, 아스팔트 틈의 잡초, 물때 앉은 콘크리트 바닥, 세월을 안고 스려져 가는 이 모든 것들이 아름답다.” 소멸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겸손의 미학, 폐허의 풍경엔 그런 비밀이 숨어 있었다.
『풍경에 다가서기』는 퇴계의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을 인용하며 온전한 풍경을 체험할 수 있는 방법 열 가지를 소개한다. 하나, 건강과 볼거리에 맞추어 탐승 경로를 정할 것. 둘, 다양한 이동 수단을 이용할 것. 셋, 적절한 조망점과 시기를 선정할 것. 넷, 다양한 자세로 풍경을 감상할 것. 다섯, 인상적인 풍경에 이름을 붙여줄 것. 일곱, 풍경을 상찬할 것. 여덟, 맛있는 먹거리를 맛볼 것. 아홉, 그곳의 풍경에 대해서 미리 공부하고 갈 것. 열, 풍경을 나누어 맛볼 것.
그중 아홉과 열이 재미있다. 풍경은 시각적 체험이고 무엇인가 먹는 행위는 미각적 체험이다. 혀에 유쾌한 자극을 줌으로써 눈에도 쾌감을 줄 수 있지 않은가. 한 잔의 술에 성큼 산이 내 앞으로 다가설 수도 있는 것이고, 약수 한잔을 마시고 바라보는 산아래 마을이 더없이 정답게 보일 수도 있는 일이다. 더구나 그런 체험을 같이할 수 있는 벗이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어떤 풍경을 공유한다는 것, 그것은 내 동반자의 뇌리에 나 자신의 존재를 깊이 새기는 일이다. 풍경이 나에게로 흘러 들어와 지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되듯, 그것을 같이 바라보는 자 또한 나에게는 지울 수 없는 추억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면, 모든 연인들에게 무엇보다 하나의 픙경을 권할 일이다.

말로는 말했다. “음악가는 음악을 사랑하고 종달새를 사랑하지 않으며, 시인은 시를 사랑하고 저녁노을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화가도 사람의 얼굴이나 풍경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화가는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이다."‘(앙드레 베르제 등저, 남기영 옮김, 삼협종합출판부) 라고 했다. 풍경을 보는 관조자의 감흥이 풍경화를 낳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풍경화를 바라보는 관조자의 감흥이 풍경을 그리고 싶은 욕망을 잉태한다는 것이다. 또 말로는 이 책에서 이런 말을 한다. ”물론, 젊은 화가는 처음에 모방하는 것을 배운다. 그러나 자신의 화법을 발견할 때까지는, 그가 모방하는 것은 선생의 그림이며, 자연이 아니다. 따라서 새로운 예술은 항상 그 이전의 예술로부터 출발하면서 스스로 탐구한다.“ 예술은 풍경을 모방함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술 작품을 모방하는 데서 온다는 것.
『풍경에 다가서기』의 저자는 미술사가 곰브리치의 발언을 인용한다. ”알프스 풍경의 발견은 산의 전망을 담은 그림의 확산에 앞서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뒤이어 일어났다.“ 풍경화가 환경을 풍경으로 체험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예술 작품의 체험에서 비롯되는 문화적 교양이 관조자로 하여금 풍경의 미적 체험을 풍부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심 없는 담백한 마음만으로는 어쩌면 풍경의 깊이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잘 느끼는 마음, 잘 훈련된 마음이야말로 풍경의 풍부한 표정을 읽어내는 비결이 아니겠는지. 풍경으로부터 다양한 표정을 읽어내 그것을 고전의 반열에 오르게 한 이백, 두보, 소동파 같은 작가들이야말로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인이 아니었던가.
자연을 그 효용 가치로밖에 볼 줄 모르는 사람에게 풍경은 그 풍부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그 풍경을 아끼고 지키려는 것은 객관적으로 거기에 있는 자연물을 지키는 운동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사 속에 새겨진 지역의 풍경, 고향의 풍경, 기억의 풍경을 지키는 행동이다. 지켜야 할 풍경은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관계다. 이처럼 사물의 나열이 아니라 사물들이 서로 관계하고 또 나와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생성되는 것이 풍경이다. 그래서 지켜야 할 풍경은 우리들의 추억과 애착이 담겨 있어서 다른 사물과 대체 불가능하다.” 우리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대로가 유일무이한 풍경이다. 그것은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개별성을 구현하고 있다. 그 개별성의 죽음 위에 세워지는 문명을 진보라는 이름으로 상찬하고만 있을 것인가. 풍경을 간직하겠다는 의지는 언제나 감상주의라는 오명을 뒤집어 써야하는 것인가.
저자는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의 심미적 교양에 따라 풍경의 그림이 다양하게 지각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심미적 교양이라고 해서 예술적 소양이나 예리한 감수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단순히 풍경을 변별하는 언어를 많이 아는 것만으로도 풍경을 풍요롭게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정선의 「금강산도」가 예리한 바위산들이 화면 가득히, 그리고 만연하게 펼쳐져 있는 듯이 보이는 데 반해 「금강산 내총도」에 그려진 봉우리들이 비교적 명료하게 시인(是認)되는 것은 중요한 봉우리의 이름이 적혀 있기 때문이다. 이름으로 지시된 사물이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 그 풍경을 체험하는 인간의 의식을 끌어당기기 쉽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긴 그렇다. 고명한 언어학자의 도움을 빌지 않더라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는 자명한 이치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세계 그 자체가 아니다. 우리는 언어에 의해 굴절된 세계를 볼뿐이다. 지명(地名)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언어란 인간의 체험과 상상력을 반영한다. 지명을 안다는 것은 그 지명 속에 녹아들어 있는 경험의 총체를 아우르는 일일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이름을 한갓 된 기호라고 말할 수 있겠는지. 이 책은 이런 사정을 짧게 요약한다. “산행 전문가들에게는 산 의지형을 설명하기 위한 수백 행의 문장보다 그들의 경험이 깊이 녹아들어 있는 한 마디의 지형언어가 그 풍경을 더 설득력 있게 웅변한다.”라고.
반야봉, 형제 바위, 소상야우, 동정추월, 어떤 풍경에는 이름이 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차이의 체계를 만들어 주는 일, 하나의 잊지 못할 풍경을, 저 숱한 무명의 풍경으로부터 차별화시키는 일일 것이다.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다. 막무가내로 놓여진 저 숱한 풍경들에 비해 인간의 기억의 용량은 얼마나 작은가. 인간의 작은 기억 용량이 궁여지책으로 만들어낸 것이 이름이었을 것이다.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어떤 풍경을 무한한 자연으로부터 차별화시키고 풍경은 비로소 관조자에게 유의미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이름은 자연을 화석화시키는 인간의 욕망의 산물이기에 앞서 인간이 사물을 사랑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순이’하면 달뜨는 마음도 있겠지만 ‘지리산’하면 콩닥거리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지중해’라는 말만 들어도 벌써 마음이 설렐 것이다. 나는 그런 이름들을 사랑한다.
『풍경에 다가서기』에 다가서기도 필요할 터이지만, 가끔은 책에서 눈을 떼고 풍경에 다가설 필요가 있다. 침묵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될 수 있는가를 풍경은 보여준다. 관광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가급적이면 인적이 드문 길을 찾아 나설 일이다. 호젓한 동반자가 있다면 비단에 꽃을 더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