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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한상봉 지음 / 울림 / 2000년 11월
평점 :
품절
사소해지기의 어려움
- 한상봉의 『연민』
평소에 알고 지내는 발비나 수녀님이 어느 날인가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 제가 수녀원에 있을 때 일이에요. 수녀원 생활이란 게 사실 많이 힘들죠. 먹고 싶은 것도 많지만 맘대로 먹을 수 없는 게 수녀원 생활이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 갑자기 쵸코파이가 먹고 싶은 거예요. 한번 먹고싶은 마음이 드니 걷잡을 수가 없더라구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총 덕분인지 신자 한 분이 제게 초코파이를 하나 주시더라구요.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걸 차마 먹을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제 책상 속에 넣어놓고 먹고싶을 때마다 열어보았어요. 입에서 녹는 초코파이의 달콤한 맛을 상상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어느날 출출한 시간에 동료 수녀 한 분이 그것을 보시더니 먹고싶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어쩔까 하다가 에라 드려버리자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그렇게 먹고 싶던 초코파이에 대한 갈증이 싹 가시는 거예요. 거짓말처럼 초코파이를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거였어요. 주님께서 저를 단 한 번에 채워주신 거예요. 그것도 완전하게 채워주신 거예요."
발비나 수녀님을 온전히 채워주신 존재가 수녀님 말씀대로 과연 하나님인지는 몰라도 수녀님의 예의 그 말씀은 어떤 감동적인 연설보다 비움과 베품의 미학을 실감나게 전해주고 있었다.
느끼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 느낌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그러나 느낌을 얻기 위해 안달하는 사람에게도 느낌은 오지 않는다. 어떤 느낌을 타인에게 강요한다고 해서 그가 우리와 함께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아도 어떨 때는 출렁거리는 느낌의 해일 속에 휩싸일 때가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렇게 오는 것이고, 연민의 감정이 또한 그렇게 오는 것이리라.
문득 젊음을 잃은 아내의 얼굴을 낯설게 보면서 이 여자가 과연, 나와 살을 섞어온 여자였던가라고 느낄 때, 그 느낌의 뭉클함을 연민이라고 이름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 연민은 아주 낯선 감정이다. 습관화된 일상 속에서 우리를 모든 것을 무미하게 보아 넘긴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사물의 표피만을 훑고 지날 뿐이다. 그러나 연민의 시선은 거죽만을 바라보는 시선은 아니다. 표피의 깊이를 헤아리는 시선이다. 타인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감정은 아주 건조한 것이거나 격앙된 것이기가 십상이다. 온통 연민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존재는 대자대비한 부처나 만민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일 것이다. 그러나 칡뿌리처럼 거친 아내의 투박한 손마디에서 문득 코끝이 찡해지는 느낌을 얻었다면 연민은 분명 지고지순한 존재만의 전유물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연민보다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연연해하는 것이 평범한 생활인의 일상사가 아니던가. 나 자신의 욕망과 공허를 바라보는 시선, 내 욕망과 공허를 채워주지 못하는 타인에 대한 야멸차고 냉랭한 시선, 결국 고독이란 스스로를 연민하는 나르시시스의 욕망이 아닐까. 젊음이 고통스럽다고 하다면 그것은 충족받고자 하는 열망의 깊이 때문은 아닐까.
청춘의 시절, 그때 우리가 연인이란 이름으로 사랑했던 존재를 과연 진정한 타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 그 타인이란 내 공허를 채워주는 수단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내 공허를 채워줄 타인에 대한 갈망을 우린 대담하게도 사랑이라고 불렀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언젠가 그런 순간은 온다. 타인을 타인으로 바라보게 되는 순간, 그 또한 나와 같이 욕망하는 존재였음을 인정하는 순간, 내 욕망만이 보상받아야 할 유일무이한 대상이 아니었음을 인정하는 순간, 그래, 너도 나처럼 거기에 있었구나, 너도 나처럼 채워지지 않는 공허를 그렇게 피곤하게 부둥켜안고 서 있었구나, 조금은 너그러워진 시선으로 타인을 볼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을 대상으로서가 아닌 또 하나의 주체로서 바라보게 되는 것이리라.
연민은 그러므로 타인의 '피로'를 바라보는 감정이 아닐까. 고독이 나의 '피로'를 바라보는 마음이라면 연민이란 타인의 공허와 상처를 바라보는 일이리라. 따지고 보면 종교가 가르친 것이 다름 아닌 '연민'이었다. 불교의 자비심이 그렇고 기독교의 긍휼함이 그렇고 맹자의 측은지심이 또한 그랬다..
과부 사정 홀아비가 안다던가. 대개의 연민은 동종(同種)에 대한 배려에서 싹튼다. 내 가족에 대한 배려, 내 고향 사람에 대한 배려, 내 민족에 대한 배려. 그러나 의외로 한 인간의 연민은 타종(他種)에까지 확산되면서 인간됨의 높이와 폭을 드러내기도 한다. 남의 가족에 대한, 타향 사람에 대한, 타민족에 대한, 다른 생명체에 대한 배려, 나와 성향과 취미가 다른 종족에 대한 배려가 그것이다. 그러한 배려는 타인을 너의 몸처럼 사랑하라, 네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마라, 우주가 곧 너의 몸이다, 라는 종교적 말씀으로 승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멀어도 한참 멀었다. 타인의 고통을 위로해줄 수는 있어도, 타인의 기쁨에 흔쾌히 동참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가 아니었던가. 타인의 고통을 위로하며 우리는 내심 타인의 고통에 내가 당면해 있지 않음에 안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보며 우리의 행운에 안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타인의 기쁨에 질투를 느끼면서 우리는 '그'가 기뻐하는 자리에 '내'가 있어야 함을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정이 이렇다면 질투는 근본적으로 '빼앗고자 하는' 감정이다.
세상에는 내 슬픔만 있는 것이 아니리라. 더 큰 슬픔 앞에 어떤 슬픔은 차라리 사치일 수도있을 것이다. 더 큰 상처 앞에 어떤 상처는 엄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더 큰 슬픔과 상처가 , 더 큰 외로움이 우리를 위로한다. 더 깊은 상처의 아픔을 어루만지면서 우리는 내 상처의 아픔을 잊는다. 그렇다면 성자(聖者)들의 외로움은 중생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되었던 것은 아닐까.
『깊은 슬픔』의 작가 신경숙은 어떤 자리에서 "소설뿐만이 아니라 제 글쓰기 행위의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제 생각에는 연민 같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이나 죽어 있는 것들에 대해서 연민의 감정이 일지 않으면,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그냥 스쳐 지나간다는 것을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문학작품들이 타인을 연민하기보다 작자 스스로를 연민하고 있는 것인지. 소위 '문청'의 문학작품일수록 치기 어린 나르시시즘 쉽사리 노출한다. 그들은 타인을 위로하기보다는 스스로 위로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작자의 의도야 어쨌든 나는 외롭다라는 작가의 절규 속에서도 독자들은 묘한 심정적 위로를 얻는다. 하지만 그러한 위로란 무엇인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며 비로소 안도하는 '내' 안의 어떤 이기심이 아닐까. 소위 저급한 의미에서의 대중문학이란 위로받고 싶다는 독자의 이기심과 충족받고 싶다는 작가의 욕망이 절묘하게 야합한 결과가 아닐까.
한상봉의 수필집, 『연민』(울림)의 17페이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배운 게 없어도 사지만 멀쩡하다면, 얼마든지 세상의 불행한 인생들에게 손 내밀어 줄 수 있다. 거창하게 민주주의와 노동 해방을 외치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늘진 세상에 그야말로 햇볕 한줌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용기 있는 자이다.……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들이라는 생각을 늘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영영 구제받지 못할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시각에 다시 묻자. 우리는 돌심장을 거둬 내고 살심장을 심고 있는지. 아니면 살심장을 거둬 내고 겹겹이 갑옷을 껴입고 있는지."
그러나 필자의 외침이 절실한 그 무엇으로 와닿을 만큼 우리들은 여유롭지 못하다. 그가 아무리 황지우의 시를 빌어 "그러므로 길가는 이들이여/그대 비록 악을 이기지 못하였으나/약과 마음을 얻었으니/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고 외친들 세상의 고통을 내것으로 냉큼 받아들일 독자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감동은 그러한 외침에 있지 않다. 이 책의 감동은 천주교사회문제연구소,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같은 교회 안의 재야 단체에 몸을 실으며 '고난의 시대'를 통과해냈던 그의 이력과 전남 영광, 전북 임실과 김제, 경북 예천과 상주, 경남 함양 등지를 기웃거리다 전북 무주의 광대정이란 마을에 비로소 '귀농'하기까지의 역정이 그의 정신사에 남겼을 무수한 편린들이다. 김수영의 시와 불교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정, 허균과 체 게바라에 대한 그의 도저한 관심을 읽고 있노라면 앎과 지식의 분리, 이론과 실천의 분리가 장황한 수사학에 치우친 얼치기 글들을 양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내 자신에 대한 자괴심을 갖게 한다. (확실히 이 책은 사람을 아프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의 184페이지는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이 혁명의 땅임을 말한다. 한상봉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결코 편안한 일이 아니다. 이 책은 우리들에게 어떤 결단을 무의식중에 요구하고 있다.
"우리 시대에는 스타를 갈망하는 바다 속에서 시시한 삶의 자리를 지켜내는 투쟁이 요청되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내적 혁명을 일으키고, 시시한 삶을 선택·결단함으로써, 시시하고 보잘것없는 중생들의 마음결을 살피고, 그들과 함께 혁명하는 것이다."
그렇다. 사소해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