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 까치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휴가, 우리 몸에 침묵을 돌려주는 시간




  김현은 그의 책, 『행복한 책읽기』(문학과 지성사)에서 황동규의 지적이라면서 이런 말을 소개한다. ‘자기 삶을 추상화시키지 않으려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결부된 이미지나 관념도 함께 보아야 할 것이다. 강렬한 삶일수록 우리의 삶은 사물과 관념 사이에 펼쳐 있거나 뭉쳐 있기 때문이다.’라고. 황동규의 지적은 옳다. 대체 나의 삶을 몇 줄을 '스토리(Story)'로 압축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한 민족이나 국가의 역사를 몇 줄의 '하스토리(History)'로 압축한다는 것 역시 어불성설이다. 그 몇 줄의 스토리 안에 내 절절한 실패와 좌절의 역사가 담길 리 만무하고, 몇 줄의 히스토리 안에 한 민족과 국가가 겪어야 했던 파란만장과 우여곡절의 역사가 담길 리 없다. 오히려 쓸쓸한 연애의 추억은 어떤 일몰의 푸른빛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어떤 어두운 기억들은 우기(雨期)의 풍경 속에서 더욱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은 아닌가. 차라리 몇 줄의 언어로 압축된 스토리보다 하나의 풍경과 이미지가 나의 삶을 온전히 말해주고 계시해주는 주는 것은 아닌가. 어떤 새벽, 나는 푸르스름한 박명(薄命)의 어둠 속에서 아슴푸레한 과거를 떠올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 푸르스름한 이미지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벅참이 나를 엄습할 수도 있으리라. 시가 보여주어야 할 것은 바로 그 어떤 벅참의 순간은 아닐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어라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어쩌면 내 욕망이 만들어낸 환각일 수도 있는 저 이미지의 어슴푸레함.

  김현은 그의 책에서 또 이렇게 지적한다. ‘파시즘이란 가만있게 내버려두지 않는 강요이다. 무엇을 말해야 한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무엇에 대해 가만히 있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이 파시즘의 본질이다. 파시즘에 대한 재밌는 해석이다. 가만있게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간섭을 의미한다.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고 부추긴다는 뜻일 게다.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결국 파시스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말하게 할 것이다. 갖은 선전과 프로파간다는 결국 파시스트의 언어다. 그 언어를 추동하는 힘은, 진실을 입증해야만 한다는 끊임없는 강박관념일 것이다.

  하긴 언어는 인간의 의식을 해방하기보다는 옥죈다는 표현이 타당한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은 어떤가.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보기보다는 ‘언어를 통해서 왜곡된 사물’을 본다. 무지개의 색깔이 일곱 가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어에 끄달려 무지개를 일곱 색깔이라는 관념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

  언어를 통해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에 결국 사람들은 사물의 다양한 표정들을 놓치게 마련이다. 우리의 인식의 시스템은 장미를, 붉다, 향기롭다 등의 언어로 파악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의 장미는 항상 언어 그 이상이다. 사실 ‘장미’라는 언어는 구체적인 현실 속의 어떤 장미도 보여주지 못한다. 언어로서의 ‘장미’는 무수한 현실의 장미 속에서 추출된 추상적인 관념일 뿐이다. 현실은 언제나 언어 이상이다. 어떤 장인의 언어라고 할지라도 언어로써 현실을 재현한다는 것은 역부족이다. 언어는 자신의 무능을 극복하고자 수많은 기교와 수사법을 고안해낸다. 그러나 갖은 기교와 수사법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구체적인 현실 앞에서 무능력함을 드러낼 뿐이다. 어찌 ‘초록’이라는 말로 저 자연의 푸르름을 번역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언어도단(言語道斷)!, 어불성설(語不成說)!

  대학 시절 <시론>을 강의했던 교수는 시는 ‘말해진 것’에 있지 않고 '말해지지 않은 것‘ 속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모든 텍스트는 발화(發話)로 해서 생겨난다. 발화(發話)가 없는 텍스트란 엄밀히 말해서 없다. 원론적으로 말해지지 않는다면 말은 없는 것이다. 헌데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말해지지 않은 침묵이 의미의 집적체인 시의 주소라니. 영어에도 ‘행간을 읽어라-Read between the lines'라는 말이 있다. 행간은 여백이다. 여백은 텅 비어있다. 일체의 인기척도, 멍멍 짖는 소리도 없다. 아무리 들여다 보았자, 보이는 것은 허여멀건 침묵의 공간일 뿐이다. 침묵은 침묵일 뿐인데, 그 텅 빈 침묵의 공간에서 대체 무엇을 읽으란 말인가. 선사들의 어법으로 치자면 허공에서 뼈다귀를 꺼내먹으란 말씀이다. 참으로 고약하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말로써 할 수 있는 일들이란 것이 별반 없다. 말로써 효자 났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고, 말로써 부자 되었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도 그 사람의 행동을 보라고 했지, 그 사람의 말을 보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 위대한 스승이 없더라도 우리는 대체로 말로써 판단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설명 이전의 느낌이다. 지금 창 밖에서 울어대는 매미 소리 역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다. 매미의 울음소리, 그것은 한 존재가 제 존재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으르렁거림이요, 포효다. 그 어떤 언어도 그 울음의 내부 속으로 진입할 수는 없다. 대가(大家)의 비유와 상징이 가끔 길을 열어줄지 모르지만, 그런 기회를 만나기란 흔치 않다.

  여기, 침묵을 말하는 책이 있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까치)가 그것. 이 책은 불가(佛家)의 선문답처럼 알쏭달쏭한 역설로 가득하다. 가령 이런 식. ‘말은 침묵으로부터, 침묵의 충만함으로부터 나온다.’ 그래. 물은 끓으면서 쓰다 달다 아무 말도 안 한다. 그러나 더 이상의 열기를 참을 수 없을 때, 물은 그의 내부로부터 끓는 소리를 내지른다. 냄비 안의 팝콘도 제 열기를 스스로 이기지 못할 때, 제 존재의 내부를 확 드러내놓으면서 ‘펑’ 소리를 내지른다. ‘펑’ 소리를 내지르는 팝콘에겐 아무 죄도 없다. 팝콘이 참아내야 했던 저간의 침묵과 고통의 깊이가 ‘펑’ 소리를 내지르는 팝콘의 진정성이다. 진정한 소리란 그런 것이리라. 침묵과 고통의 내부로부터 뛰쳐나오는 소리.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불필요한 소리들을 뱉어내는가. 또 우리의 문명이란 얼마나 많은 소음을 생산해내는가.

  ‘말은 침묵과 대립해 있다. 그러나 적대관계 속에서 대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은 다만 침묵의 다른 한 면일 뿐이다.’라는 구절도 음미해볼 만하다. 피카르트는 침묵이 말의 다른 한 면일 뿐이다라고 하지 않고 말이 침묵의 다른 한 면이라고 말하고 있다. 침묵이 더 근원적이라는 얘기다. 그렇다. 우리의 어린 시절, 우리는 그다지 많은 언어들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기실 그렇게 많은 언어들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풍부하게 들을 수 있었고 대화할 수 있었다. 연인들에게 언어는 불필요한 소모다. 그들은 표정과 동작만으로도 끊임없이 소통한다. 그 소통은, 존재의 아주 깊숙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소리 없는 전언에 힘입는다. 연인들은 그 소리를 듣는다. 연인들은 이런 역설을 이해하는 존재이리라. ‘침묵해요, 내가 당신 말을 들을 수 있도록!’


  피카르트는 ‘진리로써 완전히 채워지지 않은 말의 공간을 인간은 슬픔으로 가득 채운다.’라고 말하고 있다. 말할 수 없는 것, 설명될 수 없는 것, 바로 그것이 인간의 존재의 뿌리가 아닌가. 촛불이 사납게 타오르는 내밀한 시간, 우리의 입안에서 참을 수 없는 무엇인가가 툭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저 밑바닥으로부터 구성하고 있는 것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나’란 그리고 ‘당신’이란 항상 언어 이상의 것이리라. 그러므로 언어로 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란 얼마나 속악한 일인가.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도 그의 저서 『침묵의 언어』(한길사)에서, 음성과 기호만이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음성과 기호가 전달되고 있는 순간의 시간과 공간도 의사를 전달한다고 말하고 있다. 홀은 이러한 사실을 인류학적 방법으로 분석했다. ꡒ사랑해ꡓ라고 말할 때, 음성의 내용보다는 말의 억양, 눈빛, 두 사람 간의 거리, 때와 장소 등이 더 진실된 의미를 전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새벽에 걸려오는 전화는 긴급한 사태라는 의미이고, 한밤중의 전화는 생사의 문제로 간주될 수도 있다. 반드시 말의 내용과 형식만이 말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문화를 이해할 때, 그 전제로서 ‘침묵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7시에 만나자’라는 언표에도 침묵의 언어가 개입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그 언표를 ‘6시 30분에서 7시 30분 사이에 만나자’로 이해하고 있는 반면, 어떤 문화권에서는 정확히 ‘7시에 만나자’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세한 의미는 언표에 드러나 있지 않다. 그것은 침묵으로써 갈무리된다. 한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그 침묵을 읽어내는 것이라는 것이 홀의 설명이다.

  도처에 말이 넘쳐난다. 소음이 넘쳐난다. 피카르트는 말한다. ‘오늘날 침묵은 더 이상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가 아니다. 침묵은 다만 아직 소음이 뚫고 들어가지 않은 곳일 뿐이다. 그것은 소음의 중지일 뿐이다. 소음 장치가 어느 한 순간 작동을 멈추면 그것이 오늘날의 침묵이다.’ 진정한 침묵은 소리의 끊김이 아니라는 말이다. 삐꺽거림과 삐꺽거림의 사이, 굉음과 굉음의 사이가 침묵은 아니라는 말이다. 말과 말 사이가 침묵이 아니라, 말 속에 침묵이 있다는 논리인가?

  하나의 교향곡을 들으며 우리는 한 음부가 끝나고 다른 음부가 시작될 때, 소리와 소리 사이의 휴지부(休止部)에서 어떤 그윽함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격렬한 감정일 수도 있다. 그 그윽함과 격렬함이 침묵의 결이고 무늬일까?

  ‘침묵은 인간의 마음속에 비애를 불러일으킨다. 침묵은 인간에게 말에 의한 죄로의 전락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상태를 회상시키기 때문이다.’라고 피카르트는 쓰고 있다. 많은 말은 결국 허약함의 징표가 아닐까. 강한 자는 결국 존재한다는 사실로써 이미 충만해 있는 자가 아닐까. 결국 많은 말들은 존재의 허약함을 채우기 위한 방편이 아닐까. 소위 ‘성자(聖者)’라고 하는 사람들이 경전을 쓰지 않는 것도 그들이 충분히 강해서이지는 않을까. 그들은 경전을 혀로써 쓰지 않고 존재로써 쓴 것은 아닐까. 말은 결국 허약함을 상기시키고 죄를 상기시킨다. 글을 든 자의 비애는 여기에 있다.

  ‘오랜 침묵 뒤에 다시 말하기 시작한 사람을 잘 보면, 그는 마치 말에 의해 이제 막 눈 앞에 나온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말을 통해 새로이 확인되는 것이다.’라는 구절은 오랜 병에서 회복된 자의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오래 병을 앓으며 침묵으로 투병 생활을 한 자가 뱉어내는 소리, 우린 대체로 그것이 진실하다고 판단한다. 우리의 판단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는 우리의 사고는 미욱하긴 해도 일면 진실하다.

  도시에는 말들이 가득하지만 자연 속에는 소리가 가득하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배운, 알퐁스 도데의 아름다운 소설 『별』(베텔스만)에서의 한 대목을 보자. ‘만일 한번만이라도 한데서 밤을 새워 본 일이 있는 분이라면, 인간이 모두 잠든 깊은 밤중에는, 또 다른 신비로운 세계가 고독과 적막 속에 눈을 뜬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샘물은 훨씬 더 맑은 소리로 노래 부르고, 못에는 자그마한 불꽃들이 반짝이는 것입니다. 온갖 신령들이 거침없이 오락가락 노닐며, 대기 속에는 마치 나뭇가지나 풀잎이 부쩍부쩍 자라는 소리라도 들리듯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들, 그 들릴 듯 말 듯한 온갖 소리들이 일어납니다.’ 바로 자연 속에서, 우리는 잃어버렸던 ‘귀’를 도로 찾는 것은 아닌지.

  바야흐로 산과 들을 찾는 휴가 시즌이다. 문명의 소음 속에서, 잃어버렸던 우리들의 ‘귀’를 찾기 위해서는 노래방 기기가 소음을 내뿜고 있는 관광지를 찾기보다는 계곡의 바위틈에서 서늘하게 발을 담가 볼 일이다. 휴가란, 우리 몸에 침묵을 돌려주는 일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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