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몸에 대한 철학적 성찰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 수전 보르도 저, 박오복 역 / 또하나의문화, 2003 달리기를 시작한 지 꼭 일 년 반이 지났다. 불어난 체중은 정상을 회복했지만 그 동안 무릎의 통증으로 몇 번 통원치료를 하기도 했었다. 그런 나를 보며 주위에서는 건강이 달리기의 목적이라면 굳이 병원까지 다니면서 달릴 이유가 있겠느냐는 핀잔을 하곤 했다. 그저 웃고 말았다. 그러나 웃음의 뒤끝이 개운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 대체 이 달리기는 무엇을 위한 것이지, 대체 이 달리기의 배후에는 어떤 심리학적인 기원이 있는 것일까, 그런 의문이 고개를 슬쩍 쳐들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 뛰는 자들은 계속 뛰려고 하는 법, 뛰고자 하는 의지보다는 몸의 ‘관성’이 나를 길로 이끌었다.

내 몸을 내가 확실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 달리기는 바로 내가 내 몸의 주인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가빠지는 호흡, 팽창하는 혈관, 경직과 이완을 되풀이하는 근육이 ‘살아있음’을 분명하게 느끼게 하였다. 대체 어디에서 내가 이런 주인된 느낌을 또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내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으로 내가 모든 기획의 중심에서 정책의 입안자가 되고 실행자가 되었던 적이 있었던가. 늘 변두리에 처져 있다는 소외감을 보상받기 위해 달리기의 중심에 나를 놓아두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내 몸이 달리기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내 삶의 중심에 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존재의 변혁이 그렇게 호락호락 달성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달리기도 혁명이라면 혁명이었다. 굳이 어떤 거창한 변혁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리라. 달리기를 종용하는 나의 무의식은 그렇게 애써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었다.
뱃살이 줄어들고 이두박근이 섬세한 굴곡을 갖기 시작할 때, 그리하여 내가 스스로를 통제하고 관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한줌의 성취감을 안겨주었고, 나태와 안일함 속에 빠지려는 나를 스스로 독려하여 러닝머신 위에 덩그마니 올려놓았을 때, 나는 내 의지에 사뭇 감동하기조차 하였다. 그래, 나에게도 이런 영웅적인 의지가 있었군. 처음으로 하프마라톤을 완주하고 완주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 내가 비로소 의지와 엄격성이 칭찬 받는 공간에 들어섰음을 흐뭇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육체는 이 영광에 아랑곳없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무릎이 통증을 호소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그때 군살이 적으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군살은 의지의 박약을 말해주고, 자기 관리와 통제의 허술함을 나타내는 지표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군살은 내 영혼의 계획을 좌절시키는 불온한 것으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혁명의 전사답게 내 몸을 빈틈없이 관리해야 했다. 모든 혁명은 피의 대가를 지불하는 법, 나태와 안일과 탐욕은 숙청의 대상이었다. 가차없이 내 게으름과 무분별한 식욕을 혐오스러운 것으로 분류하고 감시의 눈길을 던져야 했다. 딴에는 생명공동체 운운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채식에 마음이 기울어졌던 것도 그때쯤이었고 노자와 장자를 열심히 읽었던 때도 그때쯤이었던 듯싶다. 몸의 혁명을 더욱 고상한 명분으로 장식하기 위해서는 이념적 무장이 시급한 때였다. 연단만 주어진다면 육식은 지구를 망치고 몸을 망치는 길이라고 소리 높여 외쳤을지도 모르겠다. 제레미 레프킨의 『육식의 종말』과 존 라빈스의 『음식혁명』을 열심히 읽었다.
허겁지겁 혀의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천박하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애써 육식에 대한 욕망을 제어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미학적, 도덕적 우월성을 성취했다고 내 무의식은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과 같은 책은 내 도덕적 프라이드를 증명해줄 수 있는 책들이었다. 당연히 금욕주의자들의 책으로 발길이 돌려졌다. 줄어든 뱃살과 늘어난 폐활량과 섬세해진 근육들이 금욕이 헛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탄탄해지는 몸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러나 정신주의자의 시선이었다. 고통스럽게 육체를 통어함으로써 어떤 영혼의 성취를 이루어냈다고 하는 금욕주의자의 시선.
이제,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또 하나의 문화)을 읽는다. 이 책의 저자 수전 보르도는 왜 20세기에 날씬함이 지배적인 문화적 이상이 되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거식증, 살빼기, 성형수술 등 현대여성이 한번쯤 고민해보았을 문제를 철학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켄터키 대학의 영문학 교수인 그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몸과 마음을 분리하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이원론에서 몸은 동물적인 것, 내가 아닌 것, 순수하지 않은 이질적인 것, 이성을 방해하는 야만적이고 물질적인 외피, 영혼의 감옥쯤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영혼과 이성은 남성으로, 몸은 여성으로 상징화되었다. 육체가 이성보다 저열한 것으로 위계화된 사회에서 육체는 자율성을 가질 수 없었다. 그것은 언제나 통제되어야 할 그 무엇이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플라톤과 데카르트는 몸을 사고의 혼란과 불명료함의 원천이라고 비난했다. 몸은 적이었다. ‘이원론자들은 이 통제할 수 없는 몸과 싸워서 누가 두목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내부에 두 의지, 즉 육체의 하인과 정신의 하인이 있는데, 이 둘 사이에서 자신의 영혼은 찢어진다고 말했던 것처럼, 거식증 환자도 정신적 투쟁, 선과 악의 대결을 묘사한다. 이는 분명 정신/의지와 식욕/육체간의 싸움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수전 보로도는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음식물을 거부하는 거식증 환자나 날씬함을 숭배하는 자들은 모두 정신주의자다. 그 정신주의는 육체에 대한 경멸, 육체를 영혼에 대한 장애와 이질적인 힘으로 생각하는 희랍과 기독교 전통에 뿌리박고 있다. ‘굶는 것에서 오는 욕구 불만, 거식증 환자가 빠져드는 지속적인 육체 활동의 정지, 거식증이 수반하는 많은 신체적인 합병증, 이런 것들이 거식증 환자에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것들을 무시할 수 있으면, 그것은 몸을 정복했다는 또 하나의 증거인 셈이다.’라는 구절은 통원치료를 하면서까지 달리기를 고집하는 심리적 기저에 무엇이 있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내 육체를 내 마음대로 부리고 싶다는 폭군의 의지, 바로 그것이었다. 내 몸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스릴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고통쯤은 기꺼이 희생물로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여성들이 육체를 학대하는 거식증에 더 쉽게 빠져드는가. 답은 간단하다. 여성들이 남성보다 권력에서 더 많이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 몸 바깥에서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내 몸 안에서나마 주인이 되어 보겠다는 무의식이 여성들로 하여금 거식증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식증을 단순한 질병으로 보는 데 수전 보르도는 단호히 반대한다. 거식증은 남녀의 비정상적인 권력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대단히 사회적인 질병이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에 분노하고, 그와 관련된 가치를 거부하고 그들의 미래가 그들 어머니의 삶과 같은 방향으로 진전되는 것에 강렬하게 반발하는’ 데서 비롯되는 질병이 거식증이라는 것이다. ‘살[육체]’을 거부하는 것은 여성을 거부하는 것이요, 살을 거부하는 만큼 여성들은 자신이 자신의 몸의 주인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만큼의 권력을 획득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광고들이 보여주는 성공한 여자, 사회적 권력을 획득한 여자들을 보라. 그들은 하나같이 비쩍 마른 남성의 몸매를 갖고 있지 않은가. 수전 보르도는 말한다. ‘우리 문화가 무능과 곡선미를 연관시킨다는 사실이다. 물론, 거식증 환자는 여성적 몸매를 갖는다는 것이 사회적, 성적 취약성을 내포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취약성을 인정하지 않고 좀더 강한 존재로 환생하고 싶은 욕구, 거식증은 곧 권력에 대한 욕망이 낳는 사회적 질병이다. 그러나 남성의 몸을 얻었다고 그녀가 출산과 양육의 운명에서 해방되는 것도 아니고 남성의 힘과 특권을 얻는 것도 아니다. 가련한 무의식!

그렇다면 소피아 로렌이나 마릴린 먼로와 같이 볼륨 있는 육체의 소유자가 섹스의 심벌이 되었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수전 보르도는 말한다. ‘풍만한 소피아 로렌은 여성들에게 여성의 가장 깊은 욕망은 가정과 남편과 가족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던 시대의 섹스의 여신이었다. 오늘날, 남성의 세계로 진출한 여성의 욕망은 그 세계의 전문적인, 그리고 남성적인 기준을 따를 것이 요구된다. 따라서 여성의 몸으로부터 모성적 힘을 상기시키는 모든 심리적 연상들을 벗겨내야 한다.’라고. 그리하여 배고픔을 인내하고 포만감을 적대시함으로써 만들어진 여윈 육체를 통해, 전통적인 어머니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아울러 사회적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무의식적인 계산이 거식증의 심리적 메커니즘이라는 것이 수전 보르도의 설명이다.
물론 저자는 페미니즘의 주류 논리대로 살을 빼고자 하는 여성들을 가부장제의 규범을 내면화하고 수동적으로 그것을 따르는 꼭두각시로 보지는 않는다. 그들도 분명히 행위하는 주체이다. 거식증을 포함한 이상 반응 또한 불완전하고 무의식적이고 비생산적이긴 하지만 나름대로의 하나의 의미 있는 저항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어떻든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은 여성들의 육체에 관한 철학적 성찰의 기록이다. 하지만 한 인간의 몸이란 사회적 권력이 맞부딪치는 투쟁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이 화해해야 할 장소이기도 하므로 수전 보르도의 성찰은 남성의 몸을 가진 나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