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他者)의 눈을 빌려 세상을 바라보기
떡갈나무 바라보기, 주디스 콜, 허버트 콜 공저, 후박나무 역, 최재천 감수 / 사계절, 2002 대체로 지네나 쐐기 송충이 같은 다족류 동물들은 혐오감을 자아낸다. 누구나 한번쯤 옷에 붙은 송충이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경험이 있을 법하다. 대체 다족류의 어떤 점이 인간에게 혐오의 감정을 야기하는지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심층심리학이 필요하겠다. 그러나 송충이를 오래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언제 그랬느냐 싶게 두려움은 사라진다. (모든 관찰의 시선은 두려움이 사라지는 순간을 요구한다.) 희고 보송보송한 털,(거기에서 혐오의 감정을 유추해낼 만한 어떤 근거도 없다.) 배냇짓을 하듯 갓난아이처럼 꼬물대는 사물거림, 온몸을 구부렸다 다시 활처럼 펴는 동작을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신기하기가 그지없다. 문제는 우리가 송충이에 대한 경이(驚異)의 감정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아닐까. 히야, 라고 외치며 세상에 대해 두 눈을 동그랗게 뜰 줄 아는 아이의 마음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베이컨은 이를 두고 종족의 우상이라고 했던가. 가령 인간이 종(種)으로서 가질 수밖에 편견이나 오류 같은 것 말이다. 송충이를 징그럽다고 하는 것도 사실은 인간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편견일지도 모른다. 동물에게도 감정이 있다면, 송충이를 먹이로 하는 포식자들이 송충이에게 느끼는 감정과 인간의 그것은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보는 세계가 절대적이고 유일한 세계인 양 판단하고 행동하기 일쑤다.
테러리즘은 자신의 신념 체계가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는 종교적 근본주의에서 싹트기 십상이다. 나와 타인은 다를 수 있다는 것, 그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 유혈(流血)의 싸움은 시작된다. 제국주의가 아무리 그럴싸한 이념을 표방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내 신념을 타인에게도 이식시키겠다는 배타주의에 다름 아니다. 내가 세계를 바라보는 식으로 남들도 세계를 바라보아야 하고, 만약 그들의 시각이 나와 같지 않다면 기어코 그들의 시각을 교정하고야 말겠다는 독선.
동물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떡갈나무 바라보기』(주디스 콜, 허버트 콜 공저, 사계절)는 인간의 시선이란 것이 얼마나 편협하고 독선적인 것인가를 풍부한 사례를 통해 일깨워 준다. 내 오관을 떠나 타자(他者)의 감각을 빌려서 세상을 본다는 것은 분명 색다른 경험이다. ‘추천의 말’에서 최재천 교수는 ‘이 책은 지극히 감각적인 책이다. 오감을 죄다 동원하여 책을 읽게 만든다.’라고 쓰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이 책은 눈으로만 읽을 책은 아니다.

이 책은 ‘움벨트(Umwelt)’라는 용어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1957년 『동물과 인간 세계로의 산책』을 쓴 야곱 폰 웩스쿨이 만든 이 용어는 동물이 경험하는 주변의 생물 세계를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졌다. 움벨트는 모든 동물이 공유하는 경험이 아니라 개개의 동물에게 특유한 경험을 일컫는다. 예를 들어 색맹이 보는 세상과 정상인이 보는 세계는 같을 수가 없다. 이때 정상인과 색맹은 다른 움벨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논리를 확대해 본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개체수만큼의 움벨트가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가 있다. 인간이 가지는 움벨트만이 절대적인 현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공간, 시간, 반응 세계로 접근하는 가장 쉬운 길은 동물의 감각이 활동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개미의 공간 감각이 어떠한지 알아보기 위해 상자와 돌덩이로 장애물을 만들어 놓고 눈을 가린 후, 잘 휘는 플라스틱 막대기 두개를 더듬이처럼 머리에 붙이고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면 장애물에 닿았을 때 막대기의 진동으로 장애물의 존재를 판단할 수 있을 터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개미 세계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방울뱀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피부로 세계를 느낄 수 있도록 상상력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피부 1㎠에 열을 감지하는 온점은 고작 세 개지만 방울뱀은 눈 아래 움푹 파인 곳에만 온점이 15만개라고 한다. 같은 지상에 존재하고 있지만 방울뱀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말 그대로 천양지차(天壤之差)인 셈이다.

이 책은 동물의 생활 리듬, 사회 세계, 공간, 시간 감각 등 다양한 움벨트를 설명해 준다. 일백 년 가까이 사는 거북이와 하루밖에 못 사는 나방이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다르다. 진드기는 포유동물의 따스한 피에 알을 낳는다. 눈이 없고 귀도 없는 진드기는 풀잎이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가 토끼나 다람쥐 등 포유동물이 지나가는 순간 포유동물의 몸에서 발산하는 부티르산의 냄새를 감지해 포유동물의 몸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미국의 로스토크 연구소에는 무려 18년 동안 굶주린 채 나무에 매달려 살고 있는 진드기가 있다고 한다. 이런 진드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 감각은 같을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또 인간은 1초에 18개에서 24개의 이미지를 지각할 수 있지만 남아프리카의 ‘나이프피시’라는 물고기는 1초 동안 1,600가지의 전기충격을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사정이 이럴진대 하나의 고정된 시간관으로 세계를 파악하지 말라는 것이 저자의 충고다.

이 책은 또한 공간의 개념도 동물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러 가지 예를 저자는 보여주고 있지만 그중 흥미로운 사실은 소금쟁이의 세계는 2차원적이라는 것이다. 물 위를 미끄러지듯 소금쟁이를 잡아서 어항에 담아두고 관찰하면 위쪽이나 아래쪽에서 움직이는 물체에는 반응하지 않지만 수면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반응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짚신벌레는 앞이나 뒤 또는 오른쪽이나 왼쪽을 구별할 수 없는 공처럼 방향에 신경을 쓰지 않을 뿐더러 방향을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수나방은 2.4km 떨어진 곳에 있는 암나방을 아주 희미한 냄새를 따라가 만나 짝짓기를 하고, 돌고래도 160km나 떨어져 있어도 암수가 대화를 하여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숫나방은 2.4km 떨어진 곳에 있는 암나방을 오직 희미한 냄새만을 따라가 만나서 짝짓기 한다고 한다.
사랑에 빠지면 온 세상이 장밋빛으로 느껴지지만 우울해지면 잿빛으로 느껴지듯, 기분은 우리가 사물을 경험하고 그에 반응하는 방식을 결정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결국 나 자신의 시공 감각이나 기질만으로 파악된 세상이 절대적으로 유일한 세계는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늙은 떡갈나무가 숲 속에 서 있을 때, 그 떡갈나무는 무수한 움벨트를 거느린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그 목재적 효용성에만 관심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본다. 그러나 애벌레의 입장에서, 베짱이와 매미의 입장에서, 그 나무 뿌리의 동굴 속에 사는 여우의 입장에서 한 그루의 떡갈나무를 바라볼 것을 이 책은 권한다.
얼마 전 어떤 대학의 축제에서 <노인 되어 보기>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인과 같은 위치에 있어 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무거운 납이 들어있는 벨트를 팔과 다리에 차게 하고, 눈에는 알이 두터운 안경을 쓰게 하였단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 했던가. 타자(他者)를 이해하기 위해선 타자가 되어보는 것이 상책임에도 우리의 감각은 지나치게 ‘나’의 몸 안에 갇혀 있다. 결국 환경파괴와 테러리즘과 제국주의가 ‘내’ 감각에만 안주하고 있는 나르시시즘에 다름 아님을 이 책은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