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의 유럽통신
고종석 지음 / 문학동네 /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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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과 「개미 Z」가 말하는 순수의 위험성


 뉴욕 센트럴파크의 지하에 사는 할리우드 애니매이션 「개미Z」의 주인공, 일개미 Z-4195는 아주 불온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다. 항상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조직의 명령대로만 살아가는 삶에 불만을 품고 일탈을 꿈꾸는 개미 Z는 나이트클럽에서 공주개미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후부터 Z의 생활은 모험의 연속. 공주를 보기 위해 병정개미의 열병식에 끼어 들었다가 얼떨결에 전쟁터에 보내진 Z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쟁 영웅이 되고, 훈장을 받는 자리에서 발라 공주와 술집에서 만났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얼결에 발라 공주와 함께 바깥세계로 통하는 수렁에 빠져 찾아나서는 곳이 인섹토피아-곤충의 천국이다.

 그들이 천신만고 끝에 도달한 인섹토피아는 샌드위치와 콜라와 나이키의 땅이다. 샌드위치는 비닐랩에 싸여 있다. 투명한 비닐랩은 내용물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차단한다. 번쩍이는 내용물에 압도되어 접근하려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비닐랩은 오염을 원천적으로 거부한다. 땅 위를 꼼지락거리는 미물들, 시궁창을 기웃거리는 벌레들과 같이 열등한 존재들에게는 비닐랩의 세계는 배타적이다. '나이키 신발바닥에 붙은 껌보다 못한' 한낱 미물에 불과한 Z에게 그 세계는 가히 폭력적이다. 번쩍거리는 광택의 세계, 그곳은 소비의 천국, 상품의 왕국이었는지는 몰라도 Z가 꿈꾸었던 벌레들의 천국, 인섹토피아는 아니었다.

 Z가 찾은 인섹토피아는 쓰레기장이다. 먹다 버린 사과의 숭숭 뚫린 구멍 사이에서 벌레들이 춤을 춘다. 온갖 너저분한 것 속에서 벌레들은 제 몸에 꿈틀거리는 약동하는 에너지를 맘껏 분출한다. 그곳에선 누구든 똑같은 방식으로 춤을 추지 않아도 좋다. 기계적인 몸의 움직임, 그것은 춤이 아니라 강요된 동작일 뿐이요, 획일과 균질을 미덕으로 아는 전체주의자들이나 좋아할 법한 매스게임에 다름 아니다. 인섹토피아 그곳은 제 안의 리듬에 따라 제각각의 방식으로 몸을 흔들 수 있는 곳이다. 억압된 에너지가 분출하는 이곳은 유희와 축제와 판타지의 공간이다. 곳곳에 바리케이트가 있어 초대장과 신분증이 없으면 들어가지 못하는 세계가 아니다. 그곳은 누구든 출입과 왕래가 자유로운 곳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온갖 쓰레기들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먹을 것이 널려 있고, 이래라 저래라 간섭이 없는 곳' 인섹토피아는 그런 곳이다. 죽어서도 대가리의 오와 열을 맞추어야 하는 위압적이고 일사불란한 군사문화와는 거리가 먼 땅이다. '개인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왕국이야. 개미는 왕국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해'라고 으르대며 함부로 애국심을 강요하는 그런 곳이 아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말하지 않았던가. 애국심은 깡패들의 도피처라고. 돌이켜 보시라. 얼마나 많은 현대의 비극들이 '구국의 결단'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는가를. 애국심을 동원하는 행사엔 얼마나 장중한 언어들이 동원되었을까.

고종석의 유럽통신 일개미들을 억압하고, 열등한 유전자들을 청소해버리겠다는 전투개미 사령관 멘디블의 언어를 눈여겨 보시라. 얼마나 장중하고, 얼마나 귀족적이고, 얼마나 세련된 어법인가. 열등한 언어를 가진 일개미들의 유전자를 일소하고 우수한 전투개미의 형질만을 유전시키겠다는 맨디블의 생각은 히틀러의 게르만족 우월주의, 그 비극적 인종주의(racism)와 기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고종석의 산문집, 『고종석의 유럽 통신』(문학동네)의 한 구절을 음미해봐도 좋을 것이다. "저는 말할 나위 없이 불순함의 편입니다. 순수함에 대한 열정, 순결함에 대한 광기는 결국 불순함에 대한 증오, 요컨대 타인에 대한 증오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역사상 그 순수함에 대한 집착이 가져온 가공할 만한 재해를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피의 순결함에 대한 열정은 가스실에서 6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고, 지난 수년간 르완다를 피바다로 만들었으며, 신앙의 순결에 대한 열정과 결합해 보스니아와 북에이레를 전쟁터로 만들었습니다" 고종석은 종교적 배타성도 정치적 배타성에 못지 않은 위험을 안고 있음을 말한다. " 인간 사이의 증오, 그리고 그것의 집단적 외화로서의 전쟁을 바라보면서, 저는 한두 가지 하찮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 생각의 첫째는 사회 전체의 세속화의 필요성에 대한 것입니다. 단순한 정교분리를 넘어선 세속화 말이에요. …종교들이란 대체로, 특히 그것이 일신교라면 더욱더, 관용의 원칙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항상 분쟁의 씨앗으로 작용합니다. 그 하찮은 생각의 둘째는, 사실 그 첫 번째 생각과 포개지며 그것을 더 확산하는 생각입니다만, 순수성 또는 순결성에 대한 열망을 포기할 필요성에 대한 것입니다. … 종교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모든 교조주의, 근본주의의 심리적 뿌리는 순수(결)성에 대한 욕망입니다. "

 멘디블이 약속하는 땅은 고상한 언어가 지배하는 땅, 근엄한 이성만이 지배하는 땅이다. 음험한 욕망은 언어의 화려한 외양 뒤에 숨는다. 그런 땅에 천박한 언어를 구사하는 일개미들은 없어도 좋다. 대량살육은 이런 대목에서 기획되었으리라. 나는 이 대목에서 통신언어의 천박성 운운하는 언어순수주의자들, 언어국수주의자들을 떠올린다.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는 사람과 '안냐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의 도덕성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어솨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서 오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보다 폭력적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차라리 '안녕하십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안냐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보다 폭력적일 가능성은 훨씬 높다. '안냐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보다 '안녕하십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권력이 주어질 가능성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건대 인섹토피아는 쓰레기장이다. 쓰레기장엔 모든 잡것들이 버려지고 모든 잡것들의 출입이 허용된다. 물론 쓰레기장에도 최소한의 규칙은 있다. 산업폐기물 같은 유독성 물질은 출입이 금지된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규칙이 많아선 쓰레기장이 아니다. 그런 곳은 학교이고 감옥이고 병원이다. 오늘날 세계 최대규모의 쓰레기장은 인터넷이다. 자살 사이트, 엽기 사이트, 범죄 사이트, 포르노 사이트, 온갖 잡것들이 '약속 받은 땅의 젖과 꿀'처럼 흘러 넘치는 곳이다. 그러나 무질서는 참을 수 없어, 모든 균들은 박멸되어야 마땅하다는 구국의 사명감으로 이곳을 청소하겠다는 발상은 전투개미사령과 멘디블의 생각과 그다지 먼 곳에 있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인터넷을 놀만한 쓰레기장, 쓸만한 천국으로 만들어야 할 존재는 애국자들도 아니고 전투개미 사령관도 아니다. 그는 다름 아닌 네티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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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한길컬처북스 2
이부영 지음 / 한길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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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대 신경정신과 교수 이부영의 저서 『그림자』는 난해한 칼 구스타프 융의 심리학 이론을 풍부한 사례를 들어 간명하게 소개하고 있다. 서문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구절은 이 책의 성격을 단적으로 요약해준다. "이 책은 분석심리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들에게 보다 깊은 이론과 그 응용을 가르치는 전문교육을 목적으로 한 것일 뿐 아니라 그림자와 관계된 그간의 연구를 토대로 새롭게 탐구한 연구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분석심리학을 접해보지 않은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서론 부분에서 분석심리학에서 보는 마음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기본 설명을 하는 등 전체적으로 쉽게 쓰려고 했으나 이론 부분의 설명이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전체적으로 쉽게 쓰려고 했으나 이론 부분의 설명이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라는 발언은 한 학자의 인간됨의 깊이를 숙연하게 느끼게 한다. 말하고자 하는 대상은 어려운 것일지 몰라도 그의 어법은 쉽다. 쉽게 말한다는 것은 그 책이 기본적으로 독자와의 나눔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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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통제와 탈주 - 스피노자에서 들뢰즈까지 한길컬처북스 16
전경갑 지음 / 한길사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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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통제와 탈주』(전경갑)는 난해한 개념이 등나무처럼 꼬여있는 책에서 오는 불만을 깨끗하게 해소시킨다. 스피노자에서 들뢰즈까지의 욕망에 대한 난해한 이론을 깔끔하게 말하고 있다. 쇼펜하워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전경갑은 이렇게 서술한다. "고통이야말로 삶의 실재이며, 쾌락이나 행복은 고통의 일시적 유예에 불과하다. 이러한 고통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 있는 사람들에게 이내 권태라는 또 다른 채찍이 떨어진다. 예컨대 성적욕망이 일시적으로 만족되면 권태가 다가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욕망 충족의 대상을 추구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이 끝없이 반복되기 때문에 권태는 고통만큼 참기 어려운 것이다. 이와 같이 자아는 결핍에 기인한 고통과 만족에 수반된 권태 사이에서 쉼 없이 흔들리는 진자와 다름없고, 따라서 낙관주의는 삶의 끝없는 고뇌에 대한 통렬한 조소일 뿐이다." 간명한 서술이 깨달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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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
김영민 지음 / 민음사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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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사람이 있고 지혜의 사람이 있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식으로 거칠게 분류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수재들은 전자에 속하겠고 몽테뉴와 소크라테스는 후자에 속한다고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정치학, 윤리학, 동물학. 시학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반면에 우리가 몽테뉴의 지적 편력을 살펴볼 수 있는 저서는 고작해야 『수상록』 정도다. 『수상록』은 장중하지 않다. 가벼운 이야기 거리다. 현학적 이론도 없고, 헤겔에서처럼 정교한 논리적 분석도 없다. 일이관지(一以貫之), 책 전체를 하나로 꿰뚫겠다는 추상(抽象)의 의욕도 없다. 혹자는 이를 두고 깊이가 없다거니, 사유의 두께가 얇다거니 혹평을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런 혹평은 번지수가 틀렸다. 한 작가에게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이란 그 작가의 실존의 전 무게가 걸린 문제다. 몽테뉴라는 한 개인의 실존이 선택한 '가벼움'을 그의 지적 허약함이나 불성실의 문제로 따지려 드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얘기다. 몽테뉴가 누군가. 떠르르한 이론을 들먹이거나 거창한 담론으로 지적인 스케일을 과시해보겠다는 의도 따위는 그에겐 멀었다.

  "돌파구를 뚫고, 외교사절을 이끌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분명 눈부신 행위들이다. 하지만 꾸짖고, 웃고, 물건을 사고 팔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리고 그대 자신과 더 나아가 그대의 식솔과 마찰 없이 공평하게, 그대 자신을 속이거나 게으르지 않고, 잘 어울려 사는 것보다 더 눈부시고, 또 드물고 어려운 일은 없다. 사람들이야말로 그렇지 않은 삶들 못지 않은 긴장과 무게로 각자의 직분에 충실하다."

 몽테뉴는 시정잡배들의 삶도 대언장어(大言壯語)를 구사하는 종교가와 정치가의 삶에 필적하는 가치가 있음을 말한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박학다식이 정작 그 자신들에게는 어떤 소용이 있을까?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했던가? 그것이 상식의 문지기에게 일어났던 불행을 덜어 주었는가? 논리학이 그들의 통풍(痛風)에 위안이 되었던가?"

 몽테뉴의 이런 발언은 독서의 지향점에 대해서 새삼스런 성찰을 제기한다. 한 선승의 죽음에 대한 성찰의 깊이가 죽음의 두려움을 상쇄하지 못한다면 그의 오랜 묵언정진(默言精進)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모든 학문이 반드시 어떤 현실적 필요에 응답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효용과 효율로 모든 사물의 가치를 재단하는 우리시대의 척도란 얼마나 용렬하기 짝이 없는 것인지. 그러나 지식이 우리의 삶을 성찰하게 하고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면 몽테뉴의 이런 어법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다.

 "죽음이 닥칠 때 나는 양배추를 심고 있었으면 한다. 죽음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고, 미처 끝내지도 못한 정원 손질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죽음에 대한 모든 담론은 결국 독배를 든 저 소크라테스 의 담대함을 위한 것이어야 하지는 않을까."


 『형제라는 이름의 타인』(양혜영, 울림) 이란 책은 '형제란 무엇인가, 형제는 얼마나 닮았고 얼마나 다른가. 나는 형제에게, 형제는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에 관해 신화와 문학과 역사, 과학을 아우르며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책에 대한 독서가 형제간의 분란을 진정시키는 데 얼마나 일조할지는 의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책의 백해무익을 강조하는 것 또한 어리석다. 문제는 이런 책이 주는 메시지를 일상적 삶의 차원에서 용해시킬 수 있느냐일 것이다. 어쨌든 지적인 허기를 채워주는 책이 반드시 인간에 대한 밝은 눈뜸의 지혜를 마련해주는 것 같지는 않다. 형제에 대한 지식의 증가가 형제에 대한 연민과 이해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몽테뉴는 말한다.

 "나는 어떠한 일로도, 심지어 그렇게 소중하다는 학식을 얻는 일로도 머리를 싸맬 생각은 없다. 책을 통해서 내가 추구하는 모든 것은 시간을 올바르게 활용하여 나 자신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이다. 만약에 책을 읽다가 어려운 문장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그 부분을 곰곰 생각하느라 손톱을 물어뜯는 일은 절대로 없다. 한 두 번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다가 안 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만약 어떤 책이 나를 피곤하게 만들면 나는 다른 책을 집어든다."

 이런 발언이 그리스와 로마 철학에 통달한 사람, 몽테뉴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조금은 엄살 같다. 즐거움을 안겨주는 독서를 지향했던 몽테뉴의 발언은 「논어(論語)」'옹야편(雍也篇)'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연상시킨다. '안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그것을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知者)’어떤 실용적 목적에 응답해야 할 의무감을 벗어버리고, 독서 그 자체에 몰입하는, 몽테뉴는 독서의 쾌락주의자인 셈이었다. 알랭드 보통의 『드 보통의 삶의 철학 산책』(정진욱 역, 생각의나무 ) 183 페이지는 몽테뉴가 매우 탐욕스런 독서가였음을 말해준다. 그는 편협한 지방주의나 종족주의의 편견으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역사서, 여행기, 선교사나 선장의 보고서, 다른 나라의 문학 등에 대한 방대한 자료들을 탐독했다.

 저술의 난해함에 대한 몽테뉴의 비판도 눈여겨 볼 만한다.

 "개인적이거나 독특한 패션으로 관심을 끌려고 드는 것이 옹졸한 마음의 상징이듯이, 연설도 그와 똑같다. 새로운 표현이나 널리 쓰이지 않는 단어들을 추구하려는 욕망은 신출내기 학교 선생 같은 야망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글쓰기 행태는 몽테뉴의 걱정을 사기에 충분하다. 학자들의 어렵고 난해한 글쓰기는 지식인들만의 '사교클럽'에서만 통용되는, 해독불가능한 암호로 전락했다는 탄식이 나온 지 이미 오래되었다. 난삽하기 짝이 없는 글이 전문성과 지적 깊이를 가장해 저자의 게으름과 무성의를 은폐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외국이론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논문이란 서구 정신문화의 정화로 수입된 상품이기 때문에 논문쓰기에서 벗어나지못하는 학자들은 서구문화의 중개상 노릇을 하는 기지촌 지식인에 불과하다."는 김영민의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민음사)에도 경청할 만한 대목이 눈에 띈다. 논문이라는 글쓰기 속에서 강단과 거리, 생각과 생활, 학문과 일상, 학자와 일반인은 멀어지기만 한다는 지적이다. 요컨대 글과 삶이 따로 논다는 것이다. 대학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학의 내규에 따르면 전국 규모 학회지나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 한 편이 1점으로 평가된다면, 계간지 등에 발표한 글은 0.1점에서 0.3점 정도로 평가된다고 한다. 우리 인문학의 편협함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들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인문사회과학 에세이가 '잡문'으로 폄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한 위대한 에세이스트의 이름을 통해 지적인 허영심을 충족시키고 텍스트에 후광 효과를 주기 위해 몽테뉴를 들먹거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수다한 인용과 각주 속에는 분명 어떤 지적인 허약함이 있기 마련이지 않겠는가.

 "소개의 글과 정의, 하위 구분과 어원 설명이 그의 저작물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의 책을 한 시간 정도 읽은 뒤; 그에게서 어떤 진수와 실체를 얻었는지 돌이켜보면, 거의 언제나 공허한 이야기밖에 남는 것이 없다."

 "우리의 복부에 찬 것을 배출시키는 괄약근은 우리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심지어는 의지에 반하여 그 스스로 팽창하고 수축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라는 몽테뉴 발언은 내게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모든 장식적 수사와 인용을 떼어버리고 "어떤 이야기든 '너'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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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3-01-20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조와 선호 스타일은 저와 사뭇 다르지만 배울 것, 느끼고 반추할만한 부분이
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몽테뉴 수상록 - 혜원교양사상 6
몽테뉴 지음 / 혜원출판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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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건축이론가는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이 시민들의 일상적 삶의 터전과 너무 괴리되어 있음을 비판한다. 미술관은 시민들의 근접이 용이한 곳에 위치해야 하고 그럴 수 있을 때, 문화는 고상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는 통념에서 벗어나 일상화되고 전면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가는 도서관도 그런 맥락에서 그 입지가 재고려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남산도서관의 입지도 좋은 편은 못된다. 삼청공원 근처에 있는 정독도서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사찰은 경건하게 속진(俗塵)을 털고 들어가는 곳이다. 일상의 번잡스러움을 벗고 성스러운 영역으로 들어가는 곳이 사찰이다. 사찰은 그러기에 깊은 산이 제 격이다. 소쇄한 바람소리와 물소리가 제 격이다. 사원을 찾아간다는 것은 힘겹게 산등성이를 오르면서 존재의 심연, 그 고요 속으로 한발 한발 걸어 들어가는 자기 탐색의 여정일 것이다. 도서관은 사찰이 아니다. 자아를 탐색한다는 거창한 명분을 가지고 도서관을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산기슭이나 숲 속에 도서관을 지을 까닭이 없다. 접근의 효율성만을 따진다면 도심의 한 가운데나 동네 한 복판에 있는 도서관이 제 격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도서관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적인 도서관의 이미지와는 멀다. 파란 하늘이 무한정으로 쏟아지는 대형 유리창이 있는 도서관, 가끔 아무 생각 없이 큰 창으로 흘러드는 구름을 바라보며 머리 속을 텅 비워낼 수 있는 도서관, 이런 도서관의 이미지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반까지 다녔던 남산시립도서관의 이미지가 투영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책을 읽다가 가끔 고개를 들면 커다란 유리창으로 남산의 수풀들이 시야를 상큼하게 채웠다. 때론 흘러가는 구름들을 넋을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 높은 곳에서는 모든 것이 멀고 아득했다. 어떨 때는 책보다 나무들과 구름들과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산새들에 더 오랜 시간 시선을 풀어놓고는 했다. 그럴 때 책은 나의 시선이 자기에게 돌아와 주기를 아무말 없이 기다려 주곤 했었다. 나는 그런 책의 침묵을 좋아했다. 책과 자연을 같이 읽을 수 있었던 곳, 어린 시절의 내게 그곳은 남산도서관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분당에도 도서관은 자그마한 야산 중턱에 있다. 불편을 호소하는 학생들도 있겠지만 책을 읽으러 가는 길에 그만한 수고는 감내해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독서는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서의 시간은 고독의 시간이다. 그러나 그 고독은 통증과 함께 하는 시간이 아니라 감미로움과 함께 하는 시간이다. 토마스 아 캠피스도 "그 동안 나는 어디서나 안식을 찾아보았지만, 책을 들고 한쪽 구석에 앉은 때를 제외하고는 아무 곳에도 없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독서광으로 알려진 몽테뉴는 그의
『수상록』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서재까지 가기에 좀 힘이 드는 것과 위치가 외지다는 것이 내 마음에 드는데, 운동의 실효를 위해서도 좋고, 사람 북새를 피하기 위해서 좋기 때문이다. 그곳이야말로 나의 본집이다. 나는 그곳의 지배를 전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단지 하나 이 구석만은 부부간이건, 부자이건, 일반인의 것이건, 일체 공동생활에서 제외시켜 놓고자 한다." 타인의 침해로부터 온전히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고독의 성소(聖所), 몽테뉴에게 있어서 서재(書齋)는 그런 곳이었다.


 적어도
『수상록』이 전하고 있는 몽테뉴는 고독을 즐길 줄 알았다. "나의 생각으로는 자기 집에 자기로 돌아가 있는 곳, 자기 한 사람만의 궁전을 차릴 곳, 몸을 감출 곳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그 신세가 참으로 비참하다"라고 몽테뉴는 쓰고 있다. 누구나 자기 집에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자기로' 돌아가기는 쉽지가 않다. '자기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투명하게 제 속내를 드러내도 좋을 만큼 순수한 영혼이 어디 있으랴. 사정이 이렇다면 자기와의 대면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일 수도 있으리라. 자기와의 대면을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스포츠에 열광해도 좋고, 열심히 취미에 몰두하는 것도 좋다. TV를 보며 성찰의 시간을 망각하는 것도 좋다. 대중문화는 '자기와의 대면'을 피하게 하는 데 적격이다. 타자와의 소통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동문회니 향우회니 하는 모임들로 북적거리는 심리의 배후에도 자기와의 대면을 피하기 위한 무의식적 계책이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아무튼 자신과의 대면이 썩 유쾌한 체험은 아닐 터 오늘날의 문화적 세태가 가벼운 흥밋거리 위주로 가는 것도 대중들의 저간의 고충을 말해주는 같아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측면도 없지 않다.


 최재서는 「교양의 정신」이란 에세이에서 "문화는 사회적일지는 모르나 그것을 개성 내부에서 개발시키고 배양하는 데는 오랫동안 고독의 시기가 필요하다. 따라서 교양은 집단적 생활과는 양립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사회적 성격으로서 집단적 생활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집단적 생활 속에서 교양을 얻을 수 없다. 교양은 혼자 물러 앉아서 독서하고 사색하고 심적으로 분투하는 시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교양이 철저하게 고독의 산물임을 말하고 있다. 혼자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은 누군가의 보호와 간섭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미성년이라 할 수 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했지만, 혼자 남았을 때 침묵의 가부좌를 틀고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는 내공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가동하든지, TV를 켜든지 아니면 책장을 열든지 우린 어떤 식으로든 혼자의 시간을 피하기 마련이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우리의 감각을 세계로 무한히 확장시킨다. 이 가공할 만한 첨단의 장비는 우리를 어디로든 데려 간다. 풍성한 볼거리에 시선을 주다보면 시간은 아주 허망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나'를 방치하고 '나'와의 만남을 피하는 데엔 더 이상의 도구가 없다. TV의 드라마도 그 중독성으로 효과적으로(?) 시간을 소비하게 한다. 컴퓨터 게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독서는 제 내면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한다. 그것은 시간을 소비하게 하기보다 시간을 오히려 확장시킨다. 한 권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타인의 삶을 되살아 보기도 하지 않던가. 물론 모든 독서가 이런 깊은 성찰의 시간을 주는 것은 아니다. 판타지 소설, 하이틴로맨스 소설, 각종 처세술 관련서 등 많은 책들이 실용과 즐거움을 위해 기획되어진다.(더 정확히는 자본의 창출을 위해 기획되어진다고 해야 옳으리라.) 유흥적 독서, 실용적 이익을 얻기 위한 독서가 반드시 나쁠 것만은 없다. 아이들은 누구나 기름지고 달콤한 것을 좋아하지 않던가. 그러나 성장한다는 것, 미각이 세련되어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보다 다양한 감각, 가령 담백한 맛, 씁쓰레한 맛에서도 미각의 기쁨을 음미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달콤한 하이틴 로맨스를 즐기는 십대의 독서 취향도 그리 탓할 일만은 아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달콤한 것에서만 미각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문제이듯 책에 대한 취향이 어릴 때와 다름이 없이 달착지근하고 유흥적인 내용에만 고착되어 있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겠다.


 어떤 책들은 자신과의 내밀한 만남을 주선한다. "전시에나 평상시에나, 나는 책을 안 가지고 여행하는 일은 없다. 그러면서도, 책 한 장 읽지 않은 채로 며칠이고 몇 달이고 지나가기 일쑤이다."라고 말하는 몽테뉴의 『수상록』은 사려 깊은 한 인간의 성찰의 기록이다. 몽테뉴에게 성찰은 고독의 시간 속에서 숙성되었다. "나는 결코 혼자 있을 수 없는 것보다는, 늘 혼자 있는 것이 어쩐지 더 견디기 쉬울 것만 같이 여겨진다."라고 말할 때의 몽테뉴는 깨침을 위해 잠을 자지도 않고 않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장좌불와로 용맹정진하는 선사(禪師)의 면모를 풍긴다. "사는 위치가 외지다는 것은 사실인즉 오히려 나를 밖으로 더욱 확산 확대시킨다. 나는 홀로 있을 때에 더욱 즐겨 나라일, 세상일에 골몰한다. 루우브르궁이나 군중 속에서는, 나는 나의 껍질 속으로 도사려 든다. 군중은 나를 나 자신 속으로 몰아 넣는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몽테뉴의 고독은 협소한 자아를 넘어 세계의 한 가운데에 몽테뉴를 위치시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 자신을 재판하기 위해, 나 자신의 법률, 나 자신의 법정을 가지고 있다"라고.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가혹하리만치 준열한 자기심판을 감행한 것은 아니다. 그는 솔직하게 인간의 부조리와 모순을 인정한다. "확고한 의견이 뚫고 들어가 거기에 깊은 뿌리를 박기에는 나의 영혼은 적당한 터전이 못 되는 만큼, 나는 아주 자유롭고 거침없이 변론과 토론에 들어간다."라고 그는 솔직하게 고백한다. "조금만 방향을 바꾸거나 관점을 바꾸면 내 안에서는 온갖 모순이 발견된다. 수줍음이 많으면서 건방지고, 정숙하면서 음탕하고, 박식하면서 무식하고, 거짓말쟁이이면서 정직하고, 관대하면서 인색하고, 구두쇠이면서 낭비가다."라고 말할 때의 몽테뉴는 천상의 인간이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지상의 한 인간일 뿐이다. 그는 엄숙한 권위나 이론으로 자신을 포장하지 않는다. 때론 스스로를 제물로 삼는다. 치열한 반성은 곧 반성하는 자신의 자리까지를 응시하는 것이라고 할 때, 몽테뉴의 반성은 깊다. 몽테뉴는 때론 자신의 성적 무능력까지 고백한다.

 수상록의 '독자에게'의 마지막 구절은 상쾌하다. 그는 이렇게 말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러므로 독자여, 나 자신이 이 책의 내용이다. 이런 시시한 주제로 인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함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럼 안녕" 그러나 때로는 우리 안에 바보가 필요하다. 실용과 이익과 계산만이라면 세상은 너무 건조하다. 때로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찾아오는 그런 친구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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