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 수상록 - 혜원교양사상 6
몽테뉴 지음 / 혜원출판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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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 건축이론가는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이 시민들의 일상적 삶의 터전과 너무 괴리되어 있음을 비판한다. 미술관은 시민들의 근접이 용이한 곳에 위치해야 하고 그럴 수 있을 때, 문화는 고상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는 통념에서 벗어나 일상화되고 전면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가는 도서관도 그런 맥락에서 그 입지가 재고려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남산도서관의 입지도 좋은 편은 못된다. 삼청공원 근처에 있는 정독도서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사찰은 경건하게 속진(俗塵)을 털고 들어가는 곳이다. 일상의 번잡스러움을 벗고 성스러운 영역으로 들어가는 곳이 사찰이다. 사찰은 그러기에 깊은 산이 제 격이다. 소쇄한 바람소리와 물소리가 제 격이다. 사원을 찾아간다는 것은 힘겹게 산등성이를 오르면서 존재의 심연, 그 고요 속으로 한발 한발 걸어 들어가는 자기 탐색의 여정일 것이다. 도서관은 사찰이 아니다. 자아를 탐색한다는 거창한 명분을 가지고 도서관을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산기슭이나 숲 속에 도서관을 지을 까닭이 없다. 접근의 효율성만을 따진다면 도심의 한 가운데나 동네 한 복판에 있는 도서관이 제 격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도서관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적인 도서관의 이미지와는 멀다. 파란 하늘이 무한정으로 쏟아지는 대형 유리창이 있는 도서관, 가끔 아무 생각 없이 큰 창으로 흘러드는 구름을 바라보며 머리 속을 텅 비워낼 수 있는 도서관, 이런 도서관의 이미지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반까지 다녔던 남산시립도서관의 이미지가 투영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책을 읽다가 가끔 고개를 들면 커다란 유리창으로 남산의 수풀들이 시야를 상큼하게 채웠다. 때론 흘러가는 구름들을 넋을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 높은 곳에서는 모든 것이 멀고 아득했다. 어떨 때는 책보다 나무들과 구름들과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산새들에 더 오랜 시간 시선을 풀어놓고는 했다. 그럴 때 책은 나의 시선이 자기에게 돌아와 주기를 아무말 없이 기다려 주곤 했었다. 나는 그런 책의 침묵을 좋아했다. 책과 자연을 같이 읽을 수 있었던 곳, 어린 시절의 내게 그곳은 남산도서관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분당에도 도서관은 자그마한 야산 중턱에 있다. 불편을 호소하는 학생들도 있겠지만 책을 읽으러 가는 길에 그만한 수고는 감내해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독서는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서의 시간은 고독의 시간이다. 그러나 그 고독은 통증과 함께 하는 시간이 아니라 감미로움과 함께 하는 시간이다. 토마스 아 캠피스도 "그 동안 나는 어디서나 안식을 찾아보았지만, 책을 들고 한쪽 구석에 앉은 때를 제외하고는 아무 곳에도 없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독서광으로 알려진 몽테뉴는 그의
『수상록』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서재까지 가기에 좀 힘이 드는 것과 위치가 외지다는 것이 내 마음에 드는데, 운동의 실효를 위해서도 좋고, 사람 북새를 피하기 위해서 좋기 때문이다. 그곳이야말로 나의 본집이다. 나는 그곳의 지배를 전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단지 하나 이 구석만은 부부간이건, 부자이건, 일반인의 것이건, 일체 공동생활에서 제외시켜 놓고자 한다." 타인의 침해로부터 온전히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고독의 성소(聖所), 몽테뉴에게 있어서 서재(書齋)는 그런 곳이었다.


 적어도
『수상록』이 전하고 있는 몽테뉴는 고독을 즐길 줄 알았다. "나의 생각으로는 자기 집에 자기로 돌아가 있는 곳, 자기 한 사람만의 궁전을 차릴 곳, 몸을 감출 곳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그 신세가 참으로 비참하다"라고 몽테뉴는 쓰고 있다. 누구나 자기 집에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자기로' 돌아가기는 쉽지가 않다. '자기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투명하게 제 속내를 드러내도 좋을 만큼 순수한 영혼이 어디 있으랴. 사정이 이렇다면 자기와의 대면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일 수도 있으리라. 자기와의 대면을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스포츠에 열광해도 좋고, 열심히 취미에 몰두하는 것도 좋다. TV를 보며 성찰의 시간을 망각하는 것도 좋다. 대중문화는 '자기와의 대면'을 피하게 하는 데 적격이다. 타자와의 소통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동문회니 향우회니 하는 모임들로 북적거리는 심리의 배후에도 자기와의 대면을 피하기 위한 무의식적 계책이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아무튼 자신과의 대면이 썩 유쾌한 체험은 아닐 터 오늘날의 문화적 세태가 가벼운 흥밋거리 위주로 가는 것도 대중들의 저간의 고충을 말해주는 같아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측면도 없지 않다.


 최재서는 「교양의 정신」이란 에세이에서 "문화는 사회적일지는 모르나 그것을 개성 내부에서 개발시키고 배양하는 데는 오랫동안 고독의 시기가 필요하다. 따라서 교양은 집단적 생활과는 양립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사회적 성격으로서 집단적 생활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집단적 생활 속에서 교양을 얻을 수 없다. 교양은 혼자 물러 앉아서 독서하고 사색하고 심적으로 분투하는 시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교양이 철저하게 고독의 산물임을 말하고 있다. 혼자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은 누군가의 보호와 간섭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미성년이라 할 수 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했지만, 혼자 남았을 때 침묵의 가부좌를 틀고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는 내공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가동하든지, TV를 켜든지 아니면 책장을 열든지 우린 어떤 식으로든 혼자의 시간을 피하기 마련이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우리의 감각을 세계로 무한히 확장시킨다. 이 가공할 만한 첨단의 장비는 우리를 어디로든 데려 간다. 풍성한 볼거리에 시선을 주다보면 시간은 아주 허망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나'를 방치하고 '나'와의 만남을 피하는 데엔 더 이상의 도구가 없다. TV의 드라마도 그 중독성으로 효과적으로(?) 시간을 소비하게 한다. 컴퓨터 게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독서는 제 내면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한다. 그것은 시간을 소비하게 하기보다 시간을 오히려 확장시킨다. 한 권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타인의 삶을 되살아 보기도 하지 않던가. 물론 모든 독서가 이런 깊은 성찰의 시간을 주는 것은 아니다. 판타지 소설, 하이틴로맨스 소설, 각종 처세술 관련서 등 많은 책들이 실용과 즐거움을 위해 기획되어진다.(더 정확히는 자본의 창출을 위해 기획되어진다고 해야 옳으리라.) 유흥적 독서, 실용적 이익을 얻기 위한 독서가 반드시 나쁠 것만은 없다. 아이들은 누구나 기름지고 달콤한 것을 좋아하지 않던가. 그러나 성장한다는 것, 미각이 세련되어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보다 다양한 감각, 가령 담백한 맛, 씁쓰레한 맛에서도 미각의 기쁨을 음미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달콤한 하이틴 로맨스를 즐기는 십대의 독서 취향도 그리 탓할 일만은 아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달콤한 것에서만 미각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문제이듯 책에 대한 취향이 어릴 때와 다름이 없이 달착지근하고 유흥적인 내용에만 고착되어 있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겠다.


 어떤 책들은 자신과의 내밀한 만남을 주선한다. "전시에나 평상시에나, 나는 책을 안 가지고 여행하는 일은 없다. 그러면서도, 책 한 장 읽지 않은 채로 며칠이고 몇 달이고 지나가기 일쑤이다."라고 말하는 몽테뉴의 『수상록』은 사려 깊은 한 인간의 성찰의 기록이다. 몽테뉴에게 성찰은 고독의 시간 속에서 숙성되었다. "나는 결코 혼자 있을 수 없는 것보다는, 늘 혼자 있는 것이 어쩐지 더 견디기 쉬울 것만 같이 여겨진다."라고 말할 때의 몽테뉴는 깨침을 위해 잠을 자지도 않고 않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장좌불와로 용맹정진하는 선사(禪師)의 면모를 풍긴다. "사는 위치가 외지다는 것은 사실인즉 오히려 나를 밖으로 더욱 확산 확대시킨다. 나는 홀로 있을 때에 더욱 즐겨 나라일, 세상일에 골몰한다. 루우브르궁이나 군중 속에서는, 나는 나의 껍질 속으로 도사려 든다. 군중은 나를 나 자신 속으로 몰아 넣는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몽테뉴의 고독은 협소한 자아를 넘어 세계의 한 가운데에 몽테뉴를 위치시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 자신을 재판하기 위해, 나 자신의 법률, 나 자신의 법정을 가지고 있다"라고.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가혹하리만치 준열한 자기심판을 감행한 것은 아니다. 그는 솔직하게 인간의 부조리와 모순을 인정한다. "확고한 의견이 뚫고 들어가 거기에 깊은 뿌리를 박기에는 나의 영혼은 적당한 터전이 못 되는 만큼, 나는 아주 자유롭고 거침없이 변론과 토론에 들어간다."라고 그는 솔직하게 고백한다. "조금만 방향을 바꾸거나 관점을 바꾸면 내 안에서는 온갖 모순이 발견된다. 수줍음이 많으면서 건방지고, 정숙하면서 음탕하고, 박식하면서 무식하고, 거짓말쟁이이면서 정직하고, 관대하면서 인색하고, 구두쇠이면서 낭비가다."라고 말할 때의 몽테뉴는 천상의 인간이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지상의 한 인간일 뿐이다. 그는 엄숙한 권위나 이론으로 자신을 포장하지 않는다. 때론 스스로를 제물로 삼는다. 치열한 반성은 곧 반성하는 자신의 자리까지를 응시하는 것이라고 할 때, 몽테뉴의 반성은 깊다. 몽테뉴는 때론 자신의 성적 무능력까지 고백한다.

 수상록의 '독자에게'의 마지막 구절은 상쾌하다. 그는 이렇게 말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러므로 독자여, 나 자신이 이 책의 내용이다. 이런 시시한 주제로 인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함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럼 안녕" 그러나 때로는 우리 안에 바보가 필요하다. 실용과 이익과 계산만이라면 세상은 너무 건조하다. 때로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찾아오는 그런 친구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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