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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루시다 - 열화당미술선서 56
롤랑 바르트 지음, 조광희 외 옮김 / 열화당 / 1998년 6월
평점 :
절판
삶도 그러한 페이지를 가졌을까. 책을 읽다 보면 영원히 어느 한 페이지에 머무르고 싶을 때가 있다. '사진에 관한 노트'라는 부제가 달린 롤랑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의 43페이지는 오랫동안 시선을 붙잡아 둔다.
'낡은 집, 그늘이 시원한 현관, 기와를 얹은 지붕, 옛 아랍풍의 실내장식,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남자, 인기척이 없는 길, 지중해 지방에서 자라나는 나무'가 있는 이 흑백사진이 롤랑바르트를 하염없는 그리움에 들게 했다면 롤랑바르트의 글은 그 흑백사진과 더불어 내 안에 오랫동안 살게 될 것이다.(이하의 번호가 붙은 글들은 롤랑바르트의 글, 그리고 그 뒤는 감상적 첨언들!)
1. '이 옛날 사진은 나를 감동시킨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전부터 살고 싶었던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이 욕망은알 수 없는 뿌리를 따라 나의 내부 깊은 곳으로 파고든다. 그것은 풍토의 열기인가? 지중해의 신화인가?.나는 그곳에서 청아하게 살고 싶다. 나에게 있어서 풍경사진은 그곳을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을 주어야 한다. 이 거주의 욕망을 잘 관찰해 보면, 몽환적인 것도 경험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환상적이며 나를 앞으로 데려가는 듯이 보이는 일종의 투시력에 속한다. 그러나 내 자신도 그곳이 구체적으로 어딘지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보들레르가 <여행에의 초대>와 <전생>에서 노래한 이중의 움직임이다. 이 열애의 감정이 솟는 풍경 앞에서 마치 나는 그곳에 가 본 적이 있는 것처럼, 혹은 가게 될 것을 확신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어머니의 육체에 관해, "우리가 그곳에 있었음을 그토록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다른 장소는 없다"고 말한다. 남몰래 나의 마음 속에 다시 '어머니'를 되살아나게 하는 것, 바로 그러한 것이 (욕망이 선택한) 풍경의 본질이리라.
내게도 따스한 기억은 있다. 모래톱에서였을 것이다. 미세한 갯벌의 흙은 햇볕을 받아 따스했고, 자박자박 밟히는 갯물은 미지근했다. 발가락 사이로 진흙이 오물오물 삐져 나오고 있었을 때, 나는 걷고 있었다. 해초들이 발목을 가 볍게 감싸오기도 했다. 갈매기가 울고 있었고 수평선은 희뿌연 햇살로 아른거렸다. 세상은 한 순간 그 운행을 중지하고 '그 한없이 조용한 느낌'을 음미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어머니를 되살아나게 할 수 있을까. 단지 방문해보고 싶은 곳이 아니라, 영원히 그곳에 거주해 보고 싶은 곳, 환한 빛살과 따스한 열기로 가득한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곳, 죽음이 그런 곳일까. 참 따스한 자궁 같은 것.
2. 사진이 재현하고 시키는 무수한 것들은 단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았던 현상이다. 즉 사진은 실존적으로 다시는 되풀이 될 수 없는 것들을 기계적으로 재생시킨다. 절대적인 '특수성', 불투명한 최고의 '우연성', 죽음은 사진의 본질이다.
도처에 사진은 있다. 바야흐로 이미지의 홍수 시대, 잘 다듬어진 육체와 한치의 양보도 없는 건강미가 시선을 압도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재빨리 폐기처분된다. 한 번 반짝하기 위해 별[스타]들은 존재한다. 스타는 가고 사진은 남는 다. 난 너의 사진을 꼭 한 장만 가지고 싶다. 추억은 말해지지 않은 여백 속에서 부글거리는 법이므로. 그러나 완벽한 한 여백은 공포다. 대체로 어떤 흔적이라도 남겨야 안심하는 이 좁상한 속내를 나는 모른다. 그 흔적 속에 영원히 과거의 시간들을 봉인하고 말겠다는 착각. 그러나 누가 시간속에 훌훌 손을 털고 모습도 없이 석양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3. 이 황량한 사막에서 어떤 사진은 갑자기 나에게 찾아와 나를 흥분시키고, 또 나는 그 사진을 흥분시킨다. 그러므로 내가 사진을 존재케 하는 매력을 열거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방식에 의해서이다. 즉 그것은 흥분시키기다. 사진 그 자체는 조금도 흥분되지 않지만, 그러나 사진은 나를 흥분시킨다. 이것이 바로 모든 모험의 행위이다.
너는 나를 달뜨게 한다. 나는 너로 하여 조금 더워지기 시작한다. 내가 나를 벗어나려고 하는 모험의 순간이다. 너는 좋은 음악이고 사진이며 좋은 詩이며 젖가슴이다. 나는 너를 보고 너를 듣는다. 나는 나를 벗어났다가는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담배 한 대를 문다. 좋은 것들은 나를 벗어나게 한다. 나는 확장된다. 아주 느슨하게.
4. 어떤 하찮은 것들이 나를 '찌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틀림없이, 사진가에 의해 그것들이 의도적으로 그곳에 놓여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의 관심을 끄는 하찮은 세부는 적어도 엄격한 의미에서 의도적이지 않으며, 아마 의도적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촬영된 대상의 영역에 필연적이고 무상적(無償的)인 덧붙임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하찮은 세부가 온통, 사진에 관한 나의 시선을 흥분시킨다. 그것은 나의 관심의 격렬한 변화, 하나의 섬광이다. 그 어떤 것의 표지에 의해, 사진은 이미 보잘 것 없는 것은 아니다.
때론 느닷없는, 예기치 못했던 방문이 꾸미지 않는 주인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게 한다. 의도하지 않는 것들은 꾸미지 않는다. 나는 어느날 무심히 앉아 있는 너의 모습에서 '문득 ' 아름다움을 알아 본다. 느닷없이 내게 오는 그런 느낌의 촌철살인을 나는 사랑한다. 그럴 때 내 눈은 온전히 내 소유가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항상 강렬하고 새롭게 바라볼 수만은 없다. '시인은 늘 새롭게 바라보는 자이다'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어떤 강렬한 느낌이 그들에게 때때로 '살러 오는 것'이리라. 너의 아름다움도 그런 것이 아닐까.
너의아름다움도 문득 새롭게 온다. 매순간을 충일 속에 살 수는 없다. 맥빠진 일상을 견디지 못한다면 엑스터시의 절정에서 뛰어내릴 수밖에.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이란 영화의 여주인공처럼. 그러나 그것도 여러 가능한, 사랑의 한 방법뿐이리라.
5.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화자가 자신의 할머니가 죽었을 때 말한 것처럼 나도 "괴로워하고 싶었을 뿐만 아니라, 나의 괴로움의 독자성을 존중하고 싶었다"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 독자성은 어머니 속에 있는 절대 환원불가 능한 그 무엇의 반영이었으며, 바로 이 사실로 말미암아 단번에 영원히 잃어버린 그 무엇이었기 때문이다.
애도의 슬픔은 점진적인 작용에 의해, 천천히 고통스러움을 지워버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믿을 수 없었고, 또 지금도 믿지 못한다. 그것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온전하게 자신의 슬픔의 주인이 되기 위해선 하나의 웅변이 필요하다. 내 슬픔은 누구의 슬픔과도 닮을 수 없는 유일무이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야만 할 것이다. 무릇 조사(弔辭)란 망자를 타자로부터 변별해주는 그 유일무이한 추억에 관해 바쳐진 헌사(獻辭)가 아니면 무엇이랴. 내 찢어 짐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그 유일무이한 추억의 독 자성에 바쳐진다. 강력한 슬픔은 그러므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누거나 덜어도 그의 슬픔은 온전히 그만의 슬픔이다. 그를 위로하기보다는 그 유일무이한 슬픔의 독자성을 말없이 인정해주는 편이 낫다.
6. 사진은 과거를 회상시키지 않는다. 사진이 나에게 일으키는 효과는 사라진 것을 되돌려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참으로 존재했음을 증언하는 데에 있다.
그렇다. 내가 그곳에 있었다. 커다란 나무가 있었고, 철도길이 있었고, 앞니가 빠진 아이가 하나 있었고, 소풍날인지 고궁의 담장을 따라 소년의 손을 잡고 달리는, 눈을 가린 엄마가 있었다. 그 한 장의 사진 위에서 과거는 부유물처럼 떠다닌다. 하지만 사진은 그 부유물의 내용을 보여주지 않는다. 거기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사진은 완강하게 입증한다. 나는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바로 그곳에 있었다.
7.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관해 할 말이 없다는 것, 내가 결코 깊이를 주지도 변화시키지도 못한 채, 망연히 바라보는 그의 사진에 관해 아무 할 말이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공포이다. 내가 품을 수 있는 유일한 사념은 이 최초의 죽음의 끝에는 바로 내 자신의 죽음이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 이 두 죽음 사이에는 기다림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영정 뒤에 한 사람이 누워 있다. 그 사람은 과연 영정 속의 주인공일까. 죽음이라는 저 부동의 현실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영원히 우리가 거기에 있을 수 없다는 비극의 인식이 셔터를 누른다. 찰칵, 한 번 열렸다 닫혀지는 삶.
8. 만일 사진이 철저하게 파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이유는 사진이 갖는 명증의 힘 때문이다. 영상에 있어서, 대상은 한 덩어리로서 제시되고 그 외관은 분명하다.―이것은 대상을 애매한 방식으로 논란의 여지를 지닌 채 나에게 주어지는, 그리고 본다고 확신하는 것을 믿지 말도록 부추기는 텍스트, 혹은 다른 지각 작용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사진 앞에서는 다른 알리바이가 있을 수 없다. 하나의 우연을 그토록 투명하게 붙잡아 매둘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없었다. 그러나 대상을 포획하는 사진의 저 투명함이야말로 때론 기억을 빈곤하게 한다. 김영민의 표현을 빌자면 바라봄 (視)에는 각(覺)이 생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바라봄에는 우리가 소홀하게 보아넘긴 여백이 따른다. 하나의 피사체에 고정된 눈동자의 힘을 빼고 다소 풀어진 눈으로도 세상을 볼 것! 모든 불투명한 것들을 소독하는 명증성이 아니라 세상에 편재해있는 불투명함마저도 껴안을 수 있는 명증의 힘!
9. 사진의 '운명'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리라. 나로 하여금 '총체적인 진실한 사진'을 발견했다고 믿게 만들면서, 사진은 현실(그것은 존재했다)과 진실(그렇다!)을 터무니없이 혼란시켜 버린다.
당신은 사진 한 장을 제시한다. 그건 그렇다.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끝없이 유동하는 현실 속에서 과거의 고정된 순간의 확실성은 어떤 의미를 갖는단 말인 가. 사진은 때로 가장 야비한 음모와 손을 잡기도 한다. 사진이 말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이 보여주는 과거의 한 순간을 철저히 신봉하는 자들이 그것에 귀를 기울일 리는 없다. 불륜은 그것이 갖는 '사건적 의미'보다 항상 훨씬 많은 말을 한다. 사진으로 그들의 입을 막을 수는 없다. 사진은 하나의 참고 사항일 뿐 그것이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넘치는 보도 사진이 역사를 말해줄 수는 없다.
10. 사회는 사진을 얌전하게 만들려 하고,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에서 끊임없이 폭발하려는 광기를 진정시키려고 애쓴다. 이를 위해 사회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첫번째 방법은 사진을 예술로 만드는 인데, 왜냐하면 예술은 결코 광기가 없기 때문이다. 사진을 얌전하게 만드는 또다른 방법은 일반화시키고 군생(群生)시켜 진부하게 만드는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사진 앞에 다만 영상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광기 자체가 예술인 적은 없었다. 현실 자체가 예술인 적도 없었다. 현실을 변형하는 어떤 왜곡의 힘에 의해서 현실은 비로소 예술이란 이름을 얻지만 광기가 살균된 예술은 과연 떳떳한가. 광기를 거세하고 어떤 이미지를 보여주든지, 이미지를 버리고 현실의 광기를 보여주든지 그 어떤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선택은 오로지 셔터를 누르는 당신의 손가락 안에 있다. 그 손가락이 자주 떨리기를! 나는 그런 망설임만을 신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