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깊은 뜻을 마음으로 보게나 - 가슴속에 묻어둔 성철 스님의 골방이야기
원정 지음 / 맑은소리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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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아무래도 노장(老莊)은 늙음에 어울리고 체 게바라는 젊음에 어울린다. 락은 젊음에
어울리고 재즈는 중년에 어울린다. 꼭 그래야만 한다는 법은 없지만 다 어울리는 때
가 있는 법이다. 무릎 관절에 부담을 주면서까지 DDR을 하는 노인네가 있다면 말
릴 일이다. 문제는 자신의 문화를 눈치 보지 않고 즐기는 데 있다. 굳이 몸의 무리
를 무릎 쓰면서까지 젊음의 문화를 따라가야 할 이유가 없다.

대충 이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내 프로레슬링 애호는 변호가 궁색해진다. 치
고 박고, 때려부수고, 심지어는 피까지 철철 흘리는 야만적인 게임이 뭐가 그리 재밌
냐는 아내의 항변은 그런 대로 받아넘기겠지만 내 집을 방문한 '점잖은' 손님 앞에서
까지 천연덕스럽게 프로레슬링을 즐기기엔 다소 난감한 게 사실. 그러나 공범이 있으
면 죄책감이 덜한 법. 다행스럽게도 성철스님을 옆에서 오랫동안 모셨다는 원정(圓
淨)의 수필집,『침묵의 깊은 뜻을 마음으로 보게나』(맑은 소리 刊)는 성철스님이 프
로레슬링의 애호가였음을 말해준다. 게다가 이 책은 천하의 임제나 조주도 그 앞에
서 꼬리를 접어야 했을 선지식 경허스님의 제자였던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것으로 유명한 청담 스님 또한 프로레슬링의 팬이었음을 짤막한 에피소드와 함께 전
한다.
사연인즉슨 이렇다. 현대 한국 불교사에서 내로라 하는 큰스님인 성철스님과 청담스
님, 두 사람이 한번은 어느 신도 집에 초대받아 그곳에서 묵었다는 것. 그런데 두
분 스님이 그곳에서 레슬링 경기를 정신없이 보다가 "우리도 레슬링 한번 하자." 하
며 서로 목을 끌어안고 뒹굴기 시작했단다. 쿵쿵거리는 소리에 놀란 안주인이 달려와
서 그 광경에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성철스님 변명하는 목소리로 왈 "우리 지금 레
슬링하고 있는 거야." 했단다. 그 후 두 스님은 만날 때마다 그 레슬링 얘기를 하셨
다고 한다. 심지어 차 안에서 '이 놈의 영감, 레슬링 한번 하자.'고 서로의 멱살을
잡곤 했다는 것. 어느 날인가는 자꾸 한판 붙어 보자고 하는 청담스님을 떼어 놓을
요량으로 성철스님께서 "향곡이도 내가 이긴다구" 했단다. 향곡은 몸집이 남달리 크
고 힘이 셌다는 것이다. 그 후 청담스님이 입적하자, 그가 입관될 때 꼭 하고 싶었다
는 이야기가 있었다며 성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놈의 노장! 어서 일어나 우
리 레슬링 한번 해야지!"
'스님'과 '레슬링'이라는 다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코드들이 모여 혼융의 일대장
관을 연출하고 있는 에피소드다. 이런 에피소드에 재미를 느낀다면 "달마가 동쪽으
로 간 까닭은?"이라는 물음에 "WWE를 보기 위해서"라는 유머로 가볍게 받아칠 수도
있을 것이다. 달마가 누군가. 송곳니를 세우고 달려드는 호랑이도 가볍게 때려누일
수 있는 소림 권법의 창시자가 아닌가. 아무리 설법(?)을 늘어놓아도 프로레슬링은
짜고 하는 쇼, 그런 유치한 장난을 뭐가 좋다고 보는가, 라고 계속 따진다면 소이부
답(笑而不答), 이는 성과 속을 가볍게 뛰어넘는 도통한 웃음이 아니다. 그저 답변이
궁색할 땐 웃는 게 최고. 정색을 하고 따져 묻는 엄숙주의자 앞에선 어떤 변호도 통
할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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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 - 진리를 위해 죽다 주니어 클래식 2
안광복 풀어씀 / 사계절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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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내는 권장도서 목록처럼 형식적인 것도 없다. 대개는『죄와 벌』, 『종의 기원』, 『열하일기』등, 소위 ‘고전’이라 이름하는 책들로 채워지기 일쑤다. 그렇다면 이런 책들이 고전으로서의 품위를 지켜가며 그 이름만큼의 대접을 받느냐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도서관에서 볼썽사납게 잔뜩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책들은 대개가 이런 류의 책들이다. 따지고 보면 그런 책들은 교사들도 읽어내기가 수월치 않은 책들이다. 더구나 인터넷과 MP3 등에 익숙한 신세대들이 읽어내려니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다. 결국 학교에서 내는 권장도서목록은 학생들로 하여금 책읽기가 얼마나 재미없는 놀이인가를 실감나게 만들어 준다.

그렇다고 아이들의 얄팍한 감수성을 자극하는 하이틴 로맨스나, 아이들의 경쟁심리를 부추기는 처세술 서적들과 같이 소위 ‘잘 읽히는 책’들로 권장도서 목록을 채우기도 낯간지럽다. 아무리 만화가 잘 읽힌다 할지라도 흥미 위주의 권장도서목록을 만들기도 마뜩치가 않다. 이래저래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이 읽어야 할 책들을 가린다는 일은 쉽지가 않다.

이런 교육현장의 어려움을 헤아려서일까, 사계절출판사가 ‘주니어클래식■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다는 소식은 반가운 뉴스였다. 고전의 내용을 기계적으로 요약하지 않고, 고전을 직접 강의하듯 설명하는 방식으로 펴냈다니, 당연히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생물학과 철학 분야 최고의 고전들인 『종의 기원』과 『소크라테스의 변명, 진리를 위해 죽다』가 먼저 나왔고, 조만간 뉴턴의 『프린키피아』, 홉스의 『리바이어던』, 일연의 『삼국유사』, 모어의 『유토피아』 등을 펴낼 예정이라니 반가움이 컸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진리를 위해 죽다』를 풀어쓴 안광복은 고등학교에서 철학과 논리적 사고를 가르치는 교사다. 그가 수많은 철학적 저작 가운데서 굳이 『변명』을 텍스트로 삼아 다시 풀어쓴 이유는 무엇일까.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매우 짧고 간략한 책이지만 그 속에는 정의로움의 의미, 죽음과 인간다운 삶을 비롯해 수많은 생각거리와 가르침이 담겨 있다는 것이 저자의 답이다.

이 책은 시종일관 정의로움의 의미와 인간다운 삶과 죽음의 문제를 천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주제만큼 무거운 책은 아니다. 인간 소크라테스를 생생한 인물로 되살려 내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의 여러 장점 중의 하나다.

“여러분들은 제가 말하는 방식이 좋은지 나쁜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고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이 정의에 합당한지 아닌지에만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재판관의 덕이란 정의와 부정의를 가리는 것이고, 연설자의 덕은 진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발언은 2004년 대한민국의 현실에도 충분히 의미 있는 대목이다.

『고르기아스』에서 소크라테스는 포퓰리즘(populism: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태도)을 적나라하게 공격한다. 그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가란 병든 아이를 설득하는 요리사와 같다고 말한다. 병든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의사이다. 그런데 의사는 맛있는 음식을 주지도 않고 때로는 굶기거나 괴로운 절제 수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요리사는 맛난 음식과 사탕을 준다. 분별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이 의사를 싫어하고 요리사를 택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소크라테스가 볼 때, 군중 주도의 민주주의란 바보 같은 선택이 존중받는 사회에 지나지 않는다. (119쪽)

미디어를 이용해 얼마든지 이미지 조작이 가능한 현실에서 대중은 합리적 이성에 따라 사태를 결정하기보다는 조작된 이미지와 다수의 감정에 휘둘리기 쉽다. 저자는 다수의 선택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모두의 결정보다는 전문가 한 사람의 선택과 결단이 더 나은 경우도 많다고 지적한다. 이런 저자의 발언은 자칫 엘리트주의로 비추어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의 일단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훌륭한 논리는 많은 우군을 거느리고 있는 논리가 아니라 냉철한 이성과 분별력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라면 360대 140, 80표차로 사형언도를 받게 된 소크라테스의 재판판결도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며 때론 소수의 의견이 다수의 의견보다 훨씬 진리에 접근해 있을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엘리트주의를 우리가 우리 삶의 모든 국면에 적용시킬 수는 없겠다. 그러나 이익만 생긴다면 어떤 일이든 서슴지 않겠다는 천박한 상업주의, 대중들의 의견이면 무엇이든 좇겠다는 포퓰리즘은 반성의 여지가 있다. 어떤 진술이 정확한지의 여부는 그것이 과반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혹은 오랜 세월 동안 중요한 인물들에 의해 믿어져 왔는가에 따라 결정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많은 일간지들이 국민들의 여론동향을 보도하기가 일쑤다. 대중들의 의견을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에 반영하자는 의도야 말릴 것이 없지만 이런 기사를 읽고 과연 정치인들이 자신의 신념대로 정책을 이끌고 나갈지 미지수다. “말을 훌륭하게 만드는 것은 말을 타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말 전문가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견해는 수 천년의 간격을 뛰어넘어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소크라테스는 일방적인 주장이나 연설을 혐오했다. 그에게 ‘대화’는 자기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자신이 잘못 생각한 점을 깨닫고 상대방도 자신의 생각 가운데 이치에 어긋난 점을 찾아가면서 최선의 결론을 얻으려는 탐구의 과정이다. 반면 연설이나 글은 말하는 사람의 의견만을 전달하는 독단적인 의사 전달이다. 진정한 깨달음은 오직 대화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169쪽)

인터넷은 생산적인 토론의 장일 수도 있고 그릇된 대중주의를 확산시키는 도구일 수도 있다. 다수의 믿음이 옳다는 다수결 원리보다는 더욱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서로 토론하고 협의하는 대화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소크라테스의 견해는 이른바 ‘사이버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도 곰곰 새겨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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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
강수돌 지음 / 그린비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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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안 학교에 대해 말해 보라, 현행 교육 정책에 대해서 말해 보라, 요즘 '교권이 상실되었다'는 말을 하는데, 그 원인과 교권을 회복하기 위한 해결 방안을 말해 보라, 현재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말해 보라, 대중 매체 발달에 따른 알맞은 교육 방법을 말해 보라, 현직 교사들은 교원수급체계에 발생할 수 있는 사소한 변화에 대해서도 극도의 혐오감을 나타내고 있다. 교사들의 이러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그들이 지닌 교사로서의 특권 때문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지녔을 수도 있는 노동자로서의 지위 때문인가, 자립형 고교 설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기여 입학제 논란에 대한 견해를 밝혀라, 현재 시행하고 있는 고교 평준화 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최근 붐을 이루고 있는 해외 유학 이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등 대학입학의 심층면접에서는 교육에 관련해서 많은 문제들이 출제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까지 합쳐 모두 12년의 학교생활을 했다고 하지만 많은 학생들이 우리나라 교육의 총체적인 문제점에 대해서는 깊은 인식을 갖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강수돌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그린비, 2003년 07월)은 교육의 문제점을 꼬집고 있는 책입니다. 입시위주의 학교교육, 일류대학만을 지향하는 학벌위주의 사회, 왕따와 학교폭력 등 우리교육의 문제점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강수돌 교수는 이 책에서 교육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냅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시각도 제시합니다. 교육을 출세의 수단,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보지 말자는 것이지요. 학교가 훌륭한 노동능력을 배출하는 인력공급소가 되어선 안되겠다는 것이 강수돌 교수의 현실인식입니다. 한마디로 오늘의 교육은 '돈벌이의 패러다임'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생태적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수돌 교수는 주장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부와 권력에 있지 않고 깨끗한 공기 속에서 오염되지 않은 좋은 것을 먹고, 이웃들과 마음으로부터의 대화를 나누는 데에 있다고 강수돌 교수는 말합니다.

1999년부터 조치원에서 귀틀집을 짓고 살며 세 아이를 키우고 있는 그는 부모들이 지방에서 서울로, 강북에서 강남으로 진출하려고 하는 한 교육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고 봅니다. 부모가 아무리 훌륭한 모임에서 참교육, 인간교육, 바른교육 등을 배우고 결심한다고 해도 집에 돌아와 옆집 아줌마만 만나면 말짱 도루묵이 된다면 교육개혁은 물건너 간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입니다. 옆집아줌마가 “남들은 다 아이들을 학원에도 보내고 족집게 과외교사에게 맡기기도 하는데, 참교육이니 인간교육이니 그런 고지식한 얘기만 하다가는 나중에 자식들한테 원망듣기 딱 좋다”며 한심하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면, 대개의 부모들은 현실주의자로 돌아오고 만다는 것이다.

강수돌 교수는 어려운 말로 교육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강수돌 교수의 거주지가 조치원이 된 것은 그가 고려대 조치원 캠퍼스의 교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식 교육 때문에 서울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는 사람들은 직장이 충청권이나 강원권만 되어도 통근할 걱정부터 하고, 전라도나 경상도로 발령이 나는 경우 아버지만 내려가고 나머지 가족들은 서울에 남는 것이 대개의 현실이지요. 그가 과감히 전원생활을 결심한 것은 전원생활을 통해 건강하게 아이들을 자라게 하겠다는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이 책은 단지 교육문제에 국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인 물질주의에 대해, 우리가 가진 안일한 소시민적 삶의 자세에 대해 반성과 통찰의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일독을 권합니다.

새겨볼 만한 구절: 효율성이란 한마디로, 투입량 대비 산출량의 비율을 말한다. 도일한 투입량이라면 산출량이 늘어나야 효율이 향상되는 것이고, 또 동일한 산출량이라면 투입량이 줄어 들어야 효율이 오르는 것이다. 투입이 줄면서도 동시에 산출이 늘면 효율은 가장 크게 올라갈 것이다. 이러한 효율성을 나타나는 대표적인 지표가 바로 '생산성'이다. 만일 이 정도 선에서 우리 삶의 문제가 순조로이 해결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그러하다. 그러나 문제는 제한된 자원의 효율적 분배를 위해 시장과 경쟁이 우리 삶의 모든 과정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크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즉 모든 상품은 시장경쟁력이 있어야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또 그러기 위해서 노동생산성을 높여야만 했다. 투입을 줄이고 산출을 늘리자니 인간을 단순한 생산요소로 환원시켜 통제해야만 하고, 건강과 인격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또 원료와 에너지 공급, 폐기물 처리를 값싸게 하자니 자연생태계를 파괴하기 일쑤였다. 그러는 사이에 인간성 상실이라는 정신적 황폐화까지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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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비시선 156
함민복 지음 / 창비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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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찻집에서의 화두

찻집은 한산했다. 추위 탓인지 샘터 파랑새 극장 앞 버스정류장엔 잔뜩 웅크리고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사람이 나다닐 날씨가 아닌 혹한인데도 대학로는 인파로 붐볐다. 나는 약속한 사람이 나타나기까지 시간을 죽일 요량으로 함민복의 시구 하나를 떠올렸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참구하기에 적당한 화두였다.

밤과 낮의 경계인 박명의 시간에 꽃이 핀다. 태양이라는 꽃. 남과 밤의 경계인 석양의 시간에도 꽃은 핀다. 황혼이라는 꽃. 액체와 고체의 경계에서도 꽃은 핀다. 성애꽃. 액체와 기체의 경계에서도 꽃은 핀다. 뿌연 수증기의 안개꽃. 인생의 이유기(離乳期)인 청소년기에도 꽃은 핀다. 여드름, 삶과 죽음의 경계에도 꽃은 핀다. 저승꽃. 그쯤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후후, 실소가 비어져 나온다. 아무래도 이런 게 아닌 듯싶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고, 함민복이 틀렸을 수도 있다. 둘이 모두 틀렸을 가능성은 더욱 크다. 어쨌든 다시 시작이다.

내가 나라는 개체성을 떠나 세계가 일시에 나에게 틈입할 때, 그래서 내가 더 이상 나만의 개체성을 고집하기를 그쳤을 때, (물론 나는 그런 무아의 황홀경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어떤 강철의 무지개꽃이 피는 것은 아닐까. 내가 소시민성의 울타리를 벗어던지고 전체의 삶,
보편의 삶 속으로 나를 투신시키는 탈아와 몰아의 순간, 나는 문득 어떤 황홀한 꽃한송이를 보아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떤 경계를 넘는 순간, 그래서 더 이상 내가 예전의 차원에 머무를 수 없을 때, 그때 꽃이라도 피어야 하지 않겠는가. 더 이상그 만남이 예전의 만남일 수 없을 때, 위로차라도, 설령 마음에 없는 꽃이라도 씽긋 한번 피워줘야 하지 않겠는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아이에게 꽃다발을 안기듯 경계를 넘는 자에게 한다발의 꽃송이라도 바쳐야 온당하지 않겠는가. 모든 경계에 꽃이 피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 경계에 한다발의 소국이라도 놓아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의 세계를 버리고 하나의 세계를 끌어 안는 자들에게 꽃한송이라도 바쳐야 도리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모든 경계에 꽃이 핀다가 아니라 모든 경계에 꽃을 바쳐야 한다로 바꾸어 써야 옳지 않은가. 그러나 사정은 어떤가. 모든 경계를 기꺼운 마음으로 봐주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경계는 위험하다. 위험할뿐더러 불순하다. 모든 극단주의자들을 보호관찰 대상으로 하는 사회에서 모든 경계에는 감시의 서늘한 성애꽃이 필 뿐이다. 겨울은 모든 경계를 완강하게 만든다. 물은 가장 확고부동한 자세로 존재의 영역을 표시하고, 사람들은 잔뜩 안으로 또아리를 틀며 겨울 공기에 노출되는 체표면의 면적을 극소화시킨다. 혹한은 대기를 투명하게 하고 그 투명한 대기 속에서 모든 것들은 명확한 경계선을 가진다. 그 경계선들은 보란 듯이 내 영역을 주장한다. 그 투명함이, 그 명쾌함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나는 언제나 늦은 여름날의 오후를 좋아했던 것 같다. 상도동 옛집에서 뜰 앞의 오동나무의 넓은 잎사귀가 후박나무에 그늘을 드리울 때, 존재가 제 존재의 영역을 확고하게 주장하지 않는 그런 순간, 나에게도 슬몃슬몃 졸음이 오고 그랬다. 설탕물이 미지근한 물에 녹듯 내가 내 존재의 윤곽을 허무는 체험을 나는 졸음이라고 생각했다. 의식에서 무의식의로의 몰입은 한껏 나른하고 달콤했다. 그 달콤함도 또 하나의 꽃이라면 꽃이랄 수 있겠다. 그때 나에게도 애인이 있었다면, 오동나무가 후박나무에게 그러듯 나도 애인의 살 속으로 깊이 파고 들었을 것이다.

목욕을 한다.
밖으로 난 창에는
뿌옇게 김이 서린다
어둠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더는 제 무게를 견딜 수 없다는 듯
주먹을 웅크린 채
어떤 결단의 끝장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의 길
그 흘러내리는 길 사이로
보이는 불빛
차가움과 더움의 경계에서
내 몸뚱이와 불빛들을
비로소 소통하게 하는
저 물방울의 길
마른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나는
내가 써야할 시들을
생각해본다
-졸시,「경계」


모든 것들이 제 경계의 딱딱한 금속성을 시위하는 겨울이다. 찻잔을 만지면 찻잔의 미지근한 체온 속으로 무엇인가가 녹아 들어가는 느낌이다. 나는 문득 모든 경계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했다.그렇지 않은 경계도 있겠지만 그런 경계는 이미 내 관심사는 아니다. 이제 조금씩 만남에 너그러워질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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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루시다 - 열화당미술선서 56
롤랑 바르트 지음, 조광희 외 옮김 / 열화당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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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도 그러한 페이지를 가졌을까. 책을 읽다 보면 영원히 어느 한 페이지에 머무르고 싶을 때가 있다. '사진에 관한 노트'라는 부제가 달린 롤랑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의 43페이지는 오랫동안 시선을 붙잡아 둔다.

'낡은 집, 그늘이 시원한 현관, 기와를 얹은 지붕, 옛 아랍풍의 실내장식,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남자, 인기척이 없는 길, 지중해 지방에서 자라나는 나무'가 있는 이 흑백사진이 롤랑바르트를 하염없는 그리움에 들게 했다면 롤랑바르트의 글은 그 흑백사진과 더불어 내 안에 오랫동안 살게 될 것이다.(이하의 번호가 붙은 글들은 롤랑바르트의 글, 그리고 그 뒤는 감상적 첨언들!)

1. '이 옛날 사진은 나를 감동시킨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전부터 살고 싶었던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이 욕망은알 수 없는 뿌리를 따라 나의 내부 깊은 곳으로 파고든다. 그것은 풍토의 열기인가? 지중해의 신화인가?.나는 그곳에서 청아하게 살고 싶다. 나에게 있어서 풍경사진은 그곳을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을 주어야 한다. 이 거주의 욕망을 잘 관찰해 보면, 몽환적인 것도 경험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환상적이며 나를 앞으로 데려가는 듯이 보이는 일종의 투시력에 속한다. 그러나 내 자신도 그곳이 구체적으로 어딘지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보들레르가 <여행에의 초대>와 <전생>에서 노래한 이중의 움직임이다. 이 열애의 감정이 솟는 풍경 앞에서 마치 나는 그곳에 가 본 적이 있는 것처럼, 혹은 가게 될 것을 확신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어머니의 육체에 관해, "우리가 그곳에 있었음을 그토록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다른 장소는 없다"고 말한다. 남몰래 나의 마음 속에 다시 '어머니'를 되살아나게 하는 것, 바로 그러한 것이 (욕망이 선택한) 풍경의 본질이리라.

내게도 따스한 기억은 있다. 모래톱에서였을 것이다. 미세한 갯벌의 흙은 햇볕을 받아 따스했고, 자박자박 밟히는 갯물은 미지근했다. 발가락 사이로 진흙이 오물오물 삐져 나오고 있었을 때, 나는 걷고 있었다. 해초들이 발목을 가 볍게 감싸오기도 했다. 갈매기가 울고 있었고 수평선은 희뿌연 햇살로 아른거렸다. 세상은 한 순간 그 운행을 중지하고 '그 한없이 조용한 느낌'을 음미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어머니를 되살아나게 할 수 있을까. 단지 방문해보고 싶은 곳이 아니라, 영원히 그곳에 거주해 보고 싶은 곳, 환한 빛살과 따스한 열기로 가득한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곳, 죽음이 그런 곳일까. 참 따스한 자궁 같은 것.

2. 사진이 재현하고 시키는 무수한 것들은 단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았던 현상이다. 즉 사진은 실존적으로 다시는 되풀이 될 수 없는 것들을 기계적으로 재생시킨다. 절대적인 '특수성', 불투명한 최고의 '우연성', 죽음은 사진의 본질이다.

도처에 사진은 있다. 바야흐로 이미지의 홍수 시대, 잘 다듬어진 육체와 한치의 양보도 없는 건강미가 시선을 압도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재빨리 폐기처분된다. 한 번 반짝하기 위해 별[스타]들은 존재한다. 스타는 가고 사진은 남는 다. 난 너의 사진을 꼭 한 장만 가지고 싶다. 추억은 말해지지 않은 여백 속에서 부글거리는 법이므로. 그러나 완벽한 한 여백은 공포다. 대체로 어떤 흔적이라도 남겨야 안심하는 이 좁상한 속내를 나는 모른다. 그 흔적 속에 영원히 과거의 시간들을 봉인하고 말겠다는 착각. 그러나 누가 시간속에 훌훌 손을 털고 모습도 없이 석양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3. 이 황량한 사막에서 어떤 사진은 갑자기 나에게 찾아와 나를 흥분시키고, 또 나는 그 사진을 흥분시킨다. 그러므로 내가 사진을 존재케 하는 매력을 열거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방식에 의해서이다. 즉 그것은 흥분시키기다. 사진 그 자체는 조금도 흥분되지 않지만, 그러나 사진은 나를 흥분시킨다. 이것이 바로 모든 모험의 행위이다.

너는 나를 달뜨게 한다. 나는 너로 하여 조금 더워지기 시작한다. 내가 나를 벗어나려고 하는 모험의 순간이다. 너는 좋은 음악이고 사진이며 좋은 詩이며 젖가슴이다. 나는 너를 보고 너를 듣는다. 나는 나를 벗어났다가는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담배 한 대를 문다. 좋은 것들은 나를 벗어나게 한다. 나는 확장된다. 아주 느슨하게.

4. 어떤 하찮은 것들이 나를 '찌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틀림없이, 사진가에 의해 그것들이 의도적으로 그곳에 놓여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의 관심을 끄는 하찮은 세부는 적어도 엄격한 의미에서 의도적이지 않으며, 아마 의도적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촬영된 대상의 영역에 필연적이고 무상적(無償的)인 덧붙임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하찮은 세부가 온통, 사진에 관한 나의 시선을 흥분시킨다. 그것은 나의 관심의 격렬한 변화, 하나의 섬광이다. 그 어떤 것의 표지에 의해, 사진은 이미 보잘 것 없는 것은 아니다.


때론 느닷없는, 예기치 못했던 방문이 꾸미지 않는 주인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게 한다. 의도하지 않는 것들은 꾸미지 않는다. 나는 어느날 무심히 앉아 있는 너의 모습에서 '문득 ' 아름다움을 알아 본다. 느닷없이 내게 오는 그런 느낌의 촌철살인을 나는 사랑한다. 그럴 때 내 눈은 온전히 내 소유가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항상 강렬하고 새롭게 바라볼 수만은 없다. '시인은 늘 새롭게 바라보는 자이다'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어떤 강렬한 느낌이 그들에게 때때로 '살러 오는 것'이리라. 너의 아름다움도 그런 것이 아닐까.

너의아름다움도 문득 새롭게 온다. 매순간을 충일 속에 살 수는 없다. 맥빠진 일상을 견디지 못한다면 엑스터시의 절정에서 뛰어내릴 수밖에.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이란 영화의 여주인공처럼. 그러나 그것도 여러 가능한, 사랑의 한 방법뿐이리라.

5.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화자가 자신의 할머니가 죽었을 때 말한 것처럼 나도 "괴로워하고 싶었을 뿐만 아니라, 나의 괴로움의 독자성을 존중하고 싶었다"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 독자성은 어머니 속에 있는 절대 환원불가 능한 그 무엇의 반영이었으며, 바로 이 사실로 말미암아 단번에 영원히 잃어버린 그 무엇이었기 때문이다.
애도의 슬픔은 점진적인 작용에 의해, 천천히 고통스러움을 지워버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믿을 수 없었고, 또 지금도 믿지 못한다. 그것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온전하게 자신의 슬픔의 주인이 되기 위해선 하나의 웅변이 필요하다. 내 슬픔은 누구의 슬픔과도 닮을 수 없는 유일무이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야만 할 것이다. 무릇 조사(弔辭)란 망자를 타자로부터 변별해주는 그 유일무이한 추억에 관해 바쳐진 헌사(獻辭)가 아니면 무엇이랴. 내 찢어 짐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그 유일무이한 추억의 독 자성에 바쳐진다. 강력한 슬픔은 그러므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누거나 덜어도 그의 슬픔은 온전히 그만의 슬픔이다. 그를 위로하기보다는 그 유일무이한 슬픔의 독자성을 말없이 인정해주는 편이 낫다.

6. 사진은 과거를 회상시키지 않는다. 사진이 나에게 일으키는 효과는 사라진 것을 되돌려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참으로 존재했음을 증언하는 데에 있다.

그렇다. 내가 그곳에 있었다. 커다란 나무가 있었고, 철도길이 있었고, 앞니가 빠진 아이가 하나 있었고, 소풍날인지 고궁의 담장을 따라 소년의 손을 잡고 달리는, 눈을 가린 엄마가 있었다. 그 한 장의 사진 위에서 과거는 부유물처럼 떠다닌다. 하지만 사진은 그 부유물의 내용을 보여주지 않는다. 거기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사진은 완강하게 입증한다. 나는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바로 그곳에 있었다.

7.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관해 할 말이 없다는 것, 내가 결코 깊이를 주지도 변화시키지도 못한 채, 망연히 바라보는 그의 사진에 관해 아무 할 말이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공포이다. 내가 품을 수 있는 유일한 사념은 이 최초의 죽음의 끝에는 바로 내 자신의 죽음이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 이 두 죽음 사이에는 기다림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영정 뒤에 한 사람이 누워 있다. 그 사람은 과연 영정 속의 주인공일까. 죽음이라는 저 부동의 현실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영원히 우리가 거기에 있을 수 없다는 비극의 인식이 셔터를 누른다. 찰칵, 한 번 열렸다 닫혀지는 삶.

8. 만일 사진이 철저하게 파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이유는 사진이 갖는 명증의 힘 때문이다. 영상에 있어서, 대상은 한 덩어리로서 제시되고 그 외관은 분명하다.―이것은 대상을 애매한 방식으로 논란의 여지를 지닌 채 나에게 주어지는, 그리고 본다고 확신하는 것을 믿지 말도록 부추기는 텍스트, 혹은 다른 지각 작용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사진 앞에서는 다른 알리바이가 있을 수 없다. 하나의 우연을 그토록 투명하게 붙잡아 매둘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없었다. 그러나 대상을 포획하는 사진의 저 투명함이야말로 때론 기억을 빈곤하게 한다. 김영민의 표현을 빌자면 바라봄 (視)에는 각(覺)이 생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바라봄에는 우리가 소홀하게 보아넘긴 여백이 따른다. 하나의 피사체에 고정된 눈동자의 힘을 빼고 다소 풀어진 눈으로도 세상을 볼 것! 모든 불투명한 것들을 소독하는 명증성이 아니라 세상에 편재해있는 불투명함마저도 껴안을 수 있는 명증의 힘!

9. 사진의 '운명'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리라. 나로 하여금 '총체적인 진실한 사진'을 발견했다고 믿게 만들면서, 사진은 현실(그것은 존재했다)과 진실(그렇다!)을 터무니없이 혼란시켜 버린다.

당신은 사진 한 장을 제시한다. 그건 그렇다.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끝없이 유동하는 현실 속에서 과거의 고정된 순간의 확실성은 어떤 의미를 갖는단 말인 가. 사진은 때로 가장 야비한 음모와 손을 잡기도 한다. 사진이 말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이 보여주는 과거의 한 순간을 철저히 신봉하는 자들이 그것에 귀를 기울일 리는 없다. 불륜은 그것이 갖는 '사건적 의미'보다 항상 훨씬 많은 말을 한다. 사진으로 그들의 입을 막을 수는 없다. 사진은 하나의 참고 사항일 뿐 그것이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넘치는 보도 사진이 역사를 말해줄 수는 없다.

10. 사회는 사진을 얌전하게 만들려 하고,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에서 끊임없이 폭발하려는 광기를 진정시키려고 애쓴다. 이를 위해 사회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첫번째 방법은 사진을 예술로 만드는 인데, 왜냐하면 예술은 결코 광기가 없기 때문이다. 사진을 얌전하게 만드는 또다른 방법은 일반화시키고 군생(群生)시켜 진부하게 만드는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사진 앞에 다만 영상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광기 자체가 예술인 적은 없었다. 현실 자체가 예술인 적도 없었다. 현실을 변형하는 어떤 왜곡의 힘에 의해서 현실은 비로소 예술이란 이름을 얻지만 광기가 살균된 예술은 과연 떳떳한가. 광기를 거세하고 어떤 이미지를 보여주든지, 이미지를 버리고 현실의 광기를 보여주든지 그 어떤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선택은 오로지 셔터를 누르는 당신의 손가락 안에 있다. 그 손가락이 자주 떨리기를! 나는 그런 망설임만을 신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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