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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깊은 뜻을 마음으로 보게나 - 가슴속에 묻어둔 성철 스님의 골방이야기
원정 지음 / 맑은소리 / 1997년 5월
평점 :
절판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아무래도 노장(老莊)은 늙음에 어울리고 체 게바라는 젊음에 어울린다. 락은 젊음에
어울리고 재즈는 중년에 어울린다. 꼭 그래야만 한다는 법은 없지만 다 어울리는 때
가 있는 법이다. 무릎 관절에 부담을 주면서까지 DDR을 하는 노인네가 있다면 말
릴 일이다. 문제는 자신의 문화를 눈치 보지 않고 즐기는 데 있다. 굳이 몸의 무리
를 무릎 쓰면서까지 젊음의 문화를 따라가야 할 이유가 없다.
대충 이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내 프로레슬링 애호는 변호가 궁색해진다. 치
고 박고, 때려부수고, 심지어는 피까지 철철 흘리는 야만적인 게임이 뭐가 그리 재밌
냐는 아내의 항변은 그런 대로 받아넘기겠지만 내 집을 방문한 '점잖은' 손님 앞에서
까지 천연덕스럽게 프로레슬링을 즐기기엔 다소 난감한 게 사실. 그러나 공범이 있으
면 죄책감이 덜한 법. 다행스럽게도 성철스님을 옆에서 오랫동안 모셨다는 원정(圓
淨)의 수필집,『침묵의 깊은 뜻을 마음으로 보게나』(맑은 소리 刊)는 성철스님이 프
로레슬링의 애호가였음을 말해준다. 게다가 이 책은 천하의 임제나 조주도 그 앞에
서 꼬리를 접어야 했을 선지식 경허스님의 제자였던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것으로 유명한 청담 스님 또한 프로레슬링의 팬이었음을 짤막한 에피소드와 함께 전
한다.
사연인즉슨 이렇다. 현대 한국 불교사에서 내로라 하는 큰스님인 성철스님과 청담스
님, 두 사람이 한번은 어느 신도 집에 초대받아 그곳에서 묵었다는 것. 그런데 두
분 스님이 그곳에서 레슬링 경기를 정신없이 보다가 "우리도 레슬링 한번 하자." 하
며 서로 목을 끌어안고 뒹굴기 시작했단다. 쿵쿵거리는 소리에 놀란 안주인이 달려와
서 그 광경에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성철스님 변명하는 목소리로 왈 "우리 지금 레
슬링하고 있는 거야." 했단다. 그 후 두 스님은 만날 때마다 그 레슬링 얘기를 하셨
다고 한다. 심지어 차 안에서 '이 놈의 영감, 레슬링 한번 하자.'고 서로의 멱살을
잡곤 했다는 것. 어느 날인가는 자꾸 한판 붙어 보자고 하는 청담스님을 떼어 놓을
요량으로 성철스님께서 "향곡이도 내가 이긴다구" 했단다. 향곡은 몸집이 남달리 크
고 힘이 셌다는 것이다. 그 후 청담스님이 입적하자, 그가 입관될 때 꼭 하고 싶었다
는 이야기가 있었다며 성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놈의 노장! 어서 일어나 우
리 레슬링 한번 해야지!"
'스님'과 '레슬링'이라는 다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코드들이 모여 혼융의 일대장
관을 연출하고 있는 에피소드다. 이런 에피소드에 재미를 느낀다면 "달마가 동쪽으
로 간 까닭은?"이라는 물음에 "WWE를 보기 위해서"라는 유머로 가볍게 받아칠 수도
있을 것이다. 달마가 누군가. 송곳니를 세우고 달려드는 호랑이도 가볍게 때려누일
수 있는 소림 권법의 창시자가 아닌가. 아무리 설법(?)을 늘어놓아도 프로레슬링은
짜고 하는 쇼, 그런 유치한 장난을 뭐가 좋다고 보는가, 라고 계속 따진다면 소이부
답(笑而不答), 이는 성과 속을 가볍게 뛰어넘는 도통한 웃음이 아니다. 그저 답변이
궁색할 땐 웃는 게 최고. 정색을 하고 따져 묻는 엄숙주의자 앞에선 어떤 변호도 통
할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