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크라테스의 변명 - 진리를 위해 죽다 ㅣ 주니어 클래식 2
안광복 풀어씀 / 사계절 / 2004년 3월
평점 :
학교에서 내는 권장도서 목록처럼 형식적인 것도 없다. 대개는『죄와 벌』, 『종의 기원』, 『열하일기』등, 소위 ‘고전’이라 이름하는 책들로 채워지기 일쑤다. 그렇다면 이런 책들이 고전으로서의 품위를 지켜가며 그 이름만큼의 대접을 받느냐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도서관에서 볼썽사납게 잔뜩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책들은 대개가 이런 류의 책들이다. 따지고 보면 그런 책들은 교사들도 읽어내기가 수월치 않은 책들이다. 더구나 인터넷과 MP3 등에 익숙한 신세대들이 읽어내려니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다. 결국 학교에서 내는 권장도서목록은 학생들로 하여금 책읽기가 얼마나 재미없는 놀이인가를 실감나게 만들어 준다.
그렇다고 아이들의 얄팍한 감수성을 자극하는 하이틴 로맨스나, 아이들의 경쟁심리를 부추기는 처세술 서적들과 같이 소위 ‘잘 읽히는 책’들로 권장도서 목록을 채우기도 낯간지럽다. 아무리 만화가 잘 읽힌다 할지라도 흥미 위주의 권장도서목록을 만들기도 마뜩치가 않다. 이래저래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이 읽어야 할 책들을 가린다는 일은 쉽지가 않다.
이런 교육현장의 어려움을 헤아려서일까, 사계절출판사가 ‘주니어클래식■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다는 소식은 반가운 뉴스였다. 고전의 내용을 기계적으로 요약하지 않고, 고전을 직접 강의하듯 설명하는 방식으로 펴냈다니, 당연히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생물학과 철학 분야 최고의 고전들인 『종의 기원』과 『소크라테스의 변명, 진리를 위해 죽다』가 먼저 나왔고, 조만간 뉴턴의 『프린키피아』, 홉스의 『리바이어던』, 일연의 『삼국유사』, 모어의 『유토피아』 등을 펴낼 예정이라니 반가움이 컸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진리를 위해 죽다』를 풀어쓴 안광복은 고등학교에서 철학과 논리적 사고를 가르치는 교사다. 그가 수많은 철학적 저작 가운데서 굳이 『변명』을 텍스트로 삼아 다시 풀어쓴 이유는 무엇일까.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매우 짧고 간략한 책이지만 그 속에는 정의로움의 의미, 죽음과 인간다운 삶을 비롯해 수많은 생각거리와 가르침이 담겨 있다는 것이 저자의 답이다.
이 책은 시종일관 정의로움의 의미와 인간다운 삶과 죽음의 문제를 천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주제만큼 무거운 책은 아니다. 인간 소크라테스를 생생한 인물로 되살려 내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의 여러 장점 중의 하나다.
“여러분들은 제가 말하는 방식이 좋은지 나쁜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고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이 정의에 합당한지 아닌지에만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재판관의 덕이란 정의와 부정의를 가리는 것이고, 연설자의 덕은 진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발언은 2004년 대한민국의 현실에도 충분히 의미 있는 대목이다.
『고르기아스』에서 소크라테스는 포퓰리즘(populism: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태도)을 적나라하게 공격한다. 그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가란 병든 아이를 설득하는 요리사와 같다고 말한다. 병든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의사이다. 그런데 의사는 맛있는 음식을 주지도 않고 때로는 굶기거나 괴로운 절제 수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요리사는 맛난 음식과 사탕을 준다. 분별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이 의사를 싫어하고 요리사를 택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소크라테스가 볼 때, 군중 주도의 민주주의란 바보 같은 선택이 존중받는 사회에 지나지 않는다. (119쪽)
미디어를 이용해 얼마든지 이미지 조작이 가능한 현실에서 대중은 합리적 이성에 따라 사태를 결정하기보다는 조작된 이미지와 다수의 감정에 휘둘리기 쉽다. 저자는 다수의 선택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모두의 결정보다는 전문가 한 사람의 선택과 결단이 더 나은 경우도 많다고 지적한다. 이런 저자의 발언은 자칫 엘리트주의로 비추어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의 일단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훌륭한 논리는 많은 우군을 거느리고 있는 논리가 아니라 냉철한 이성과 분별력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라면 360대 140, 80표차로 사형언도를 받게 된 소크라테스의 재판판결도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며 때론 소수의 의견이 다수의 의견보다 훨씬 진리에 접근해 있을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엘리트주의를 우리가 우리 삶의 모든 국면에 적용시킬 수는 없겠다. 그러나 이익만 생긴다면 어떤 일이든 서슴지 않겠다는 천박한 상업주의, 대중들의 의견이면 무엇이든 좇겠다는 포퓰리즘은 반성의 여지가 있다. 어떤 진술이 정확한지의 여부는 그것이 과반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혹은 오랜 세월 동안 중요한 인물들에 의해 믿어져 왔는가에 따라 결정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많은 일간지들이 국민들의 여론동향을 보도하기가 일쑤다. 대중들의 의견을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에 반영하자는 의도야 말릴 것이 없지만 이런 기사를 읽고 과연 정치인들이 자신의 신념대로 정책을 이끌고 나갈지 미지수다. “말을 훌륭하게 만드는 것은 말을 타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말 전문가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견해는 수 천년의 간격을 뛰어넘어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소크라테스는 일방적인 주장이나 연설을 혐오했다. 그에게 ‘대화’는 자기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자신이 잘못 생각한 점을 깨닫고 상대방도 자신의 생각 가운데 이치에 어긋난 점을 찾아가면서 최선의 결론을 얻으려는 탐구의 과정이다. 반면 연설이나 글은 말하는 사람의 의견만을 전달하는 독단적인 의사 전달이다. 진정한 깨달음은 오직 대화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169쪽)
인터넷은 생산적인 토론의 장일 수도 있고 그릇된 대중주의를 확산시키는 도구일 수도 있다. 다수의 믿음이 옳다는 다수결 원리보다는 더욱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서로 토론하고 협의하는 대화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소크라테스의 견해는 이른바 ‘사이버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도 곰곰 새겨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