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사물성과 도구성 
 
―사르트르의 미학 체계를 떠받치는 하나의 토대― 
 
서 문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40년대와 50년대에 사르트르를 일약 전세계 최고의 지성으로 올려놓은 참여문학론의 이론서이다. 이 책의 제1장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에서 사르트르는, 예술의 현실참여는 문학에 국한된 것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산문에 한정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운문으로 되어있는 시는 차라리 음악이나 미술에 가까워서 참여문학의 범주에는 넣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참여문학론 자체가 작금의 세계적인 이데올로기 대변혁 이전부터 이미 빛을 잃은 지 오래고, 저자 자신이 말년의 저서「집안의 백치」에서 이미 부정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지만, 스물 다섯 페이지 밖에 안되는 제1장의 이 짧은 텍스트에 대해서도 우리는 할말이 많다. 우선 미술이나 시가 순수예술이어서 현실참여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는 말이다. 이 책이 쓰여진 1947년에 이미 존재했던 멕시코의 화가 시케이로스의 혁명화나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예술을 생각해 보면 사르트르의 이와 같은 주장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 나라에도 선동적인 판화를 제작한 민중화가들, 그리고 격렬한 구호를 닮은 시를 쓴 민중시인들이 많이 있지 않았던가? 또 한편으로, 이 텍스트에 대한 평자들의 해석에 대해서도 우리는 할 말이 있다. 그것은 산문과 시를 구분한 이 텍스트의 내용을, 시에 대한 비하 또는 단죄로 규정한 잘못된 해석이다. ) 물론 '순수예술은 공허한 예술과 동의어이며, 이러한 미학적 순수주의는, 착취자로 백안시되기보다는 차라리 속물로 비판받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19세기 부르주아들의 교묘한 방어전략' )이라는 구절이 하나 들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은, 참여문학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 책의 전체적인 톤을 유지하기 위해 집어넣은 도입부의 단서일 뿐, 이것을 시에 대한 사르트르의 일방적인 비난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의 초기 철학서인「상상적인 것」이나 말년의 저서「집안의 백치」를 참조하여 읽는 독자라면 이같은 오해는 쉽게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관심은 참여시, 혹은 참여미술이 있을 수 있는가, 아닌가에 있지않다. 또 사르트르의 이 텍스트가 시를 형편없이 깎아 내리고 있다는 잘못된 독서법도 잠시 덮어두기로 하자. 우리는 다만, 이 책의 1장에서 산문과 시를 구분할 때 그 근거로 제시한 사물과 도구성의 관계,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시의 언어적 실패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당연히 하이데거의 체계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이 될 것이며, 아울러 사르트르의 마르크시즘 미학의 철학적 행로를 그리는 하나의 밑그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논문의 자료체는 어디까지나「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제1장에 국한된 것임을 밝혀둔다
 
언어의 사물성과 도구성
 
Ⅰ. 사물
무심한 독자가「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집어들고 무심하게 읽기 시작했을 때 그를 가장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아마도 '事物'(chose)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사물이라면 돌멩이, 나무, 시계, 책상 등 무엇이든지 손으로 잡을 수 있고, 눈에 보이는 물체가 아닌가? 그런데 "예술가에게 있어서는 색깔, 꽃다발, 찻잔받침 위의 찻숟가락 소리 등이 모두 고도의 사물" )이라느니, "화가는 화폭 위에 기호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을 창조하기를 원한다" )거니, 시인은 "말을 기호가 아니라 사물로 보는 사람" )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인가? 시(詩) 속에 표현된 시인의 "감정은 사물이 되어, 사물의 불투명성을 갖고 있다" )고도 하고, 랭보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하며 "여기서 의문형은 하나의 사물이 되었다" )고도 했다. 불어에서 chose와 비슷한 단어로는 mati re(물질), objet(물체), substance(실체)가 있으므로 다음과 같은 문장들도 역시 사물의 범주에 넣어 생각할수 있겠다. 즉, "시인에게 말의 의미는 물질의 성질로서 주어진다" ), 또는 "시인은 문장을 하나 구성한 것 같지만 실은, 그는 물체를 창조한 것이다" ), "그것은 더 이상 의미가 아니라 하나의 실체이다" ). 그런가 하면 '사물이 된 단어들'(mots―choses), '물체가 된 문장'(phrase―objet) ) 같은 합성어까지 눈에 띈다.

그렇다면 사물이란 무엇인가? 사르트르에게서 그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하이데거의「사물이란 무엇인가?」를 참조해보기로 한다. 우선 사물(chose)이란 좁은 의미로는,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물건이다. 돌, 나뭇조각, 가위, 시계, 사과 빵부스러기 등 무생물도 사물이고, 장미, 소관목, 너도밤나무, 전나무, 도마뱀, 말벌 등의 생물도 사물이다. 그런가하면, 넓은 의미로는 사실, 사건 등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의미한다. 무슨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을 때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Il se passe l des choses tranges.)라고 말하지 않는가? 또 "일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다."(Les choses ne marchent pas comme il faudrait.)라고 할 때나, "사태를 분명하게 밝힌다"(tirer les choses au clair)라고 말할 때 모두 chose라는 단어를 쓴다. 그러니까 사물의 두 번째 의미는 어떤 계획, 결정, 고찰, 정신상태, 역사적인 사건 또는 대화 중에 앞에서 열거된 것 등 모든 추상적인 상태나 국면이다. 우리말에서도 물건을 표시하는 '것'(이것, 그것, 저것)이 동시에 모든 추상적인 상태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앞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의 外延들을 종합해 보면 사물이란 "무엇 무엇이라고 명명된 것,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 어떤 것" )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제 그러면 우리는 사물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의미 이외의 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사르트르가 숟가락 소리도 사물이고, 색깔도 사물이고, 우리의 말이나 감정도 사물이라고 했을 때의 그 사물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리고 왜 그런 것들을 사물로 간주하는 것이 예술적인 태도, 시적인 태도가 되는가를 알아보자. 우선 사르트르가 정의한 사물의 성질을 텍스트에서 찾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는 골고다에서의 예수의 고뇌를 형상화한 틴토레토의 그림을 예로 들며 골고다의 위에 마치 찢겨 내비치는 듯한 노란 색의 하늘은 고뇌를 '의미하는 것(signifier)'이 아니라 '사물이 된 고뇌'(c'est une angoisse faite chose) )라고 했다. 즉 고뇌는 노란 색으로 찢어진 하늘이 되었으며, 그것은 "사물의 고유한 성격인 비삼투성, 확장성, 맹목적, 영속성, 외재성, 그리고 다른 사물들과 맺는 관계의 그 영원성"을 띠게 되었다고 했다. 이 정의들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확장성(擴張性)(extention)은 물체적인 것의 고유성을 규정한 데카르트의 용어이다. 데카르트는 도대체 물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면서 "길이, 너비, 깊이에 있어서의 확장(擴張)이 물체적 실체의 본성을 구성하고 있다"(「철학의 원리」제2부 4절)라고 말했다. 쉽게 말하면 물건이란 앞, 뒤, 위, 아래로 얼만큼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며, 우리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뻔한 사실을 철학적인 용어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이 단어 하나만으로도 사르트르가 말하는 사물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구체적인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맹목적 영속성(permanence aveugle)이란 무엇인가?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구체적인 물건으로서의 사물은 항상 "매번 이것"인 것이다.(une chose est toujours un〈chaque fois ceci〉.) ) 분필은 아침에 보아도 분필이고 저녁에 보아도 분필이며, 이 교실에 있어도 분필이고, 저 교실에 있어도 분필이다. 내가 거기서 눈길을 떼었다가 언제라도 다시 보기만 하면 그것은 매번 분필이다. 여기 있는 책상도 마찬가지이다. 언제 와 봐도 그것은 매번 책상이다. 그것은 우직하게 언제나 그것이다. 그래서 사물은 맹목적인 영속성을 갖고 있다. 사물은 또한 다른 사물들과 한결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 방안에 나란히 놓여있는 책상과 책꽂이는 언제나 한결같이 무심하게 나란히 서있다. 만일 두 인간이 방 안에 함께 있다면 그들의 관계는 증오일 수도, 사랑일 수도, 무심할 수도 있다. 그 어떤 것이건 간에 결코 돌멩이 같은 단단한 지속적인 관계는 아니며,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섬세한 변화의 관계이다. 따라서 다른 사물들과 맺는 영원한 관계(cette infinit de relations qu'elles entretiennent avec les autres choses;)는 사물의 속성이다. 비삼투성(imperm abilit )이라는 말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가령 인간의 의식은 마치 물을 빨아들이는 해면처럼 다른 인간의 의식 속에 스며들기도 하고, 또는 다른 인간의 의식에 침투 당하기도 한다. 두 의식의 대면은 삼투적이다. 그러나 방안에 놓인 두 개의 돌멩이는 그저 무심하게 각자가 돌멩이일 뿐 거기에는 서로 침투하고 침투 당하는 삼투작용이 없다. 따라서 비삼투성은 사물의 속성이다. '다른 사물과 맺는 영원한 관계', 또는 '비삼투성'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벌써 은연중에 실존철학의 용어를 언급한 셈이다. 실존철학에서는 모든 존재자를 대자적 존재와 즉자적 존재의 두 존재양식으로 가른다. 이때 대자(對自)(pour-soi)는 인간의 의식을, 즉자(卽自)(en-soi)는 사물의 존재양식을 지칭하는 것이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 보자면 대자는 인간의 의식과 비슷한 존재양식을, 그리고 즉자는 사물의 성질과 비슷한 존재양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 실존철학에서 인간의 의식이란 항상 의식 밖의 어떤 대상에 대한 의식이므로,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못하는 無(n ant)의 상태이다. 그 반면에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물은, 다른 대상이 있건 없건 무심하게 '그 자체로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그림 속의 색깔도 사물이라는 다음 문장 '그저 단지 초록색이 있고, 빨간색이 있을 뿐이다. 그것들은 사물이다. 그 색깔들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 )에서 '그것들은 사물이다'(ce sont des choses)와 '그것들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elles existent par elles-m mes)는 결국 동의어 반복이며, 뒤의 문장은 앞에 나온 chose의 성질을 설명하는 술어에 불과하다. 외재성(外在性)(ext riorit )이라는 것도 사물, 즉 즉자의 존재양식을 가리키는 실존주의적 용어이다. 그것은 의식의 밖에, 의식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번에는 또 다른 예문을 보자. 단어의 의미가 단어 속으로 들어가 하나의 사물로 굳어졌다는 다음의 설명에서도 사물의 성질을 나타내는 용어들이 나온다. "단어 속에 흘러 들어가, 그 단어의 소리와 시각적 형상에 흡수되어, 두터워지고, 추락한 이 의미는 그 역시 영원하고, 창조되지 않은 하나의 사물이다." ) 여기서 '창조되지 않은'(incr e)이란 말은 "누구에 의해서도 창조되지 않고 원래부터 있는"이란 뜻으로 역시 사물의 성질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추락한'(d grad e)이라는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실존주의의 체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뜻밖의 형용사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추락(d gradation), 하강(retomb e), 전락(chute )은 모두 사물을 지칭하는 말이다. 앞에서 인간의 의식이 대자존재이고, 사물이 즉자존재라고 말했거니와 대자존재가 사물의 상태로 떨어지는 것, 그것이 추락, 하강, 전락이다.「존재와 무」에서 그는, 인간이 즉자존재로 떨어져 타인의 시선 앞에 하나의 대상(물체)으로서 무방비 상태에 놓여졌을 때 수치심을 느낀다고 말하고, 이것을 기독교의 원죄(chute originelle)에 비교했다 ). 이때 "추락한 존재의 내 모습을 본다"(me reconna tre dans cet tre d grad ), 또는 "이 세계, 사물의 한가운데에 떨어져서"(je suis tomb dans le monde, au milieu des choses)라는 문장 속에 추락과 하강의 이미지가 사물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자기기만(mauvaise foi)의 분석에서도 즉자존재와 추락의 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자기기만이란, 원래 끊임없는 無化작용(n antisation)에 의해 자신의 企圖(projet)를 앞으로 투사하는 존재인 대자(對自)(즉 인간의 의식)가, 죽음 이전에는 결코 사물의 상태로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심리상태가 사물처럼 견고한 즉자존재가 된것인양 스스로 믿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존재와 무에는, "심리학자들은 원래 脫自的인 이 실존의 추락한 모습을 제시한다" )거나, 또는 "심리적 대상은…추락한 형태로서의 의식의 성격들을 간직하고 있다." )라는 문장들이 나온다. 이때 추락한 형태라는 것은, 원래 끊임없이 변화 생성하는 대자적 존재인 우리의 심리상태를 마치 사물처럼 굳어진 것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대자가 아래로 추락했을 때 즉자존재가 된다. 이것은 대자가 끊임없는 무화작용의 운동성을 갖고 있는 반면 즉자는 부동의 사물적 타성(inertie)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움직이려면 서 있어야하고 나무토막처럼 움직이지 않을 때는 바닥에 길게 눕지 않는가? 그런데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것은, 더군다나 그것이 기계적인 운동이 아니라 매순간의 선택을 통한 자유의 행사일진대, 그것은 엄청난 긴장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긴장은 피곤하고 불안한 것이다. 추운 겨울밤에 길을 잃고 황야나 산 속을 헤매는 여행자를 생각해보라. 쏟아지는 졸음과 아픈 다리 때문에 그는 그 자리에 쓰러져 편안히 눕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 유혹에 굴복하면 그는 얼어죽고, 그의 몸은 한갓 딱딱한 사물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이 대자와 즉자의 관계이다. 대자는 즉자를, 즉 사물의 상태를 원한다. ) 대자의 초월성(대상을 향해 자신을 무화시키는 성질) 자체가 원래 즉자를 지향하는 것이기도 한다. 그래서 대자는 끊임없이 즉자에게 이끌리고(hant ), 불리움을 받는다(appel ). 그리하여 자신의 존재양식인 無의 상태를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사물의 상태로 떨어졌을 때, 그는 전락한 것이다. 이처럼 즉자에게 덥석 물리거나, 즉자의 끈끈이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다시 말하면 사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대자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니까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대자는 팽팽한 긴장(tension)이며, 즉자는 느슨한 이완(d tente)이다. 그러나 사르트르 이전에 베르크송도 이미 인간의 심리와 물질을 긴장과 이완, 도약과 추락의 관계로 보았다. 그는 심리적인 긴장을 '생의 도약'( lan vital)으로 보고, 도약이 하강하여 추락한 상태를 물질로 규정했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플로베르의 성 앙트완느의 유혹 마지막 구절 '물질의 맨 밑바닥까지 내려가고 싶다. '물질이 되고 싶다.' )에서도 물질이 하강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이제 다시 정리를 해보면, 우리의 텍스트에서 사르트르가 정의한 사물의 성질은 '비삼투성', '맹목적 영속성', '외재성', '다른 사물들과 맺는 영원한 관계', '창조되지 않은 것', '추락한 것'등이다. 그리고 이 용어의 대부분이 은연중에 실존주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음악 속에 표현된 작곡가의 고통이 사물화한 고통이라는 대목에서 자신의 용어들이 실존철학의 그것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즉, "실존주의적 용어를 사용해 보자면 그 고통은 더 이상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 ) 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실존주의에서 실존(exister)과 존재( tre)는 각기 대자적 존재양식과 즉자적 존재양식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c'est une douleur qui n'existe plus, qui est.라는 문장은 고통이 인간의 의식과는 상관없는 하나의 사물로 되었다는 의미이다. 결국 사르트르가 의미하는 사물은 우리 주위의 구체적인 물체였다. 그렇다면 고통이나 감정, 말이나 색깔, 소리까지도 사물이라는 이야기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이런 추상적인 것들이 사물의 성질을 갖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를테면 비유이다. 그러면 이쯤에서 사물과 도구의 관계를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가 앞에서 한번 인용한(주 7을 참조)문장에서 사르트르는 '사물의 불투명성'(l'opacit des choses)이라는 말을 썼다. 불투명성, 이것이야말로 사물과 도구를 가르는 중요한 열쇠의 말이다. 원래 이것은 실존철학에서 즉자의 성질을 나타내는 여러 용어 중의 하나였다. 對自는 속이 텅비고, 실체가 없고, 無이므로 투명한데 반해. 즉자는 속이 단단히 차있는 충만한 존재로 우리의 시선이 거기에 가 탁 부딪친다. 그런데 이 불투명성이 사물과 도구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Ⅱ. 사물과 도구
사물은 불투명하다. 그런데 하이데거에게서, 그리고 사르트르에게서 사물은 도구와 대립되는 존재양식이다. 따라서 도구는 투명함일 것이다. 도구는 투명하고 사물은 불투명하다.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무엇이 사물이고, 무엇이 도구인가? 하이데거는 사물의 성질을 '눈에 띈다' )라는 말로 표현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는, 그것이 다른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므로 평상시에는 전혀 우리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가령 취사용의 가스 레인지나 진공 청소기를 사용할 때 우리는 전혀 그것들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음식을 조리하기 위해 기계적으로 가스레인지의 손잡이를 돌리고, 청소를 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청소기를 작동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일단 그것들이 고장이 났을 때 우리의 시선은 드디어 그 기계 자체에 머무른다. 청소기를 오래 써서 많이 낡았고 여기저기 긁히고 때가 끼어 더럽다는 것도 처음으로 '눈에 띈다'. 작동이 잘 되었을 때 그 기계는 마치 투명한 물체인양 전혀 우리 눈에 띄지 않았었다. 이제까지 눈에 띄지 않던 그 물체가 갑자기 집안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게 거추장스럽고, 빨리 치워 버려야 속시원할 것 같고, 나의 시선에, 또는 집안의 질서에 방해가 된다. 그것은 나의 시선을 통과시키는 투명성이 아니라 내 시선이 거기에 가 부딪치는 불투명성이다. 다시 말해서, 고장난 기계는 사물이 되었다. 이제 사물과 도구의 성질이 확연히 드러난다. 모든 도구는 '무엇을 위하여'(wozu)라는 성질을 갖고 있다. 구두는 사람의 발을 보호하기 '위하여' 있고, 청소기는 청소를 하기 '위하여' 있다. '무엇을 위하여'라는 용도성이 있고 없고에 따라 도구적 존재와 사물적 존재가 구별된다. 그런데 이처럼 '무엇을 위하여'를 갖고 있는 도구적 존재가 도구성을 상실할 때, 그때 비로소 거기에 가려져 있던 사물적 존재성이 나타난다. 그것이 아무짝에도 쓸데없다는 사실이 갑자기 그것의 존재를 새삼 눈에 띄게 하고, 거추장스럽게 느끼게 한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눈에 띔', '강제성', '저항성' )이라고 말했다. 고장난 도구는 갑자기 눈에 띄고, 우리에게 빨리 무슨 행동을 취하도록 강제하고, 우리의 시선이나 관심을 통과시키는 게 아니라 그것에 완강히 저항한다. 이것이 사물의 불투명성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도구적 존재성은 '눈에 안 띔, 재촉하지 않음, 방해되지 않음' )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것은 투명하다.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 도구가 사용불가능해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대상을 그것 자체로서 바라본다. 도구가 전혀 지장 없이 기능을 하고 있었을 때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두드러지게 나타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대상을 그것 자체로서 바라본다는 것은 그것을 인식한다는 이야기이다. 대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 우리는 그 대상의 형태나 상태 등을 알게되고 그것의 성질을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것을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과 그것을 주시하며 인식한다는 것은 정반대의 행동이다. "인식함은 어떤 것을 다루며 사용하는 양상의 결여태이다." ) 반대로 도구가, 그 도구적 존재양식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도구로 사용하는 행위 속에서이다. 망치를 손에 들고 사용할 때 그것은 우리가 단순히 그 형태와 성질을 멀건히 바라보기만 하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을 손에 잡고 활기차게 사용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그것의 도구적 존재성과 만나게 된다. 이러 저런 사물의 외양을 아무리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해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도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망치질을 함 자체가 망치의 독특한 유용성을 드러내 준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물로서 본다는 것은 그것을 인식한다는 의미이며, 도구로서 본다는 것은 그것을 사용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사물과 도구가 따로 정해져 있는가? 아니면 둘 중의 하나가 다른 하나에 선행해 있는가? 우선 도구란 무엇인가? 만년필로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을 상정해 보자. 이때 만년필은 글을 쓰기 위한 도구이다. 벽에 못을 치는 행위를 생각해 보자. 이때 망치는 못을 치기 위한 연장이다. 이처럼 도구는 우리가 무언가를 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도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그런데 도구는 결코 어느 하나만 고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도구는 본질적으로 무엇무엇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사물인데, "수단성이라는 구조 속에는 이미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시(指示)(renvoyer)가 숨겨져 있다" ). 이 말은, 어떤 수단의 목표가 또 다른 목표의 수단이며, 이런 무수한 목표와 수단의 고리들이 연결되어 도구연관성의 거대한 세계를 이룬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서 책꽂이는 책을 꼽기 위한 수단이다. 이때 책꽂이의 목적은 책이다. 그러나 한편, 책은 방 주인의 독서를 위해 놓여져 있으므로 그것은 독서행위라는 목적의 수단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을 지시(指示)한다. 그러나 또, 독서는 방 주인이 어떤 학문적인 연구를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런 이번에는, 그의 학문적인 연구는 최종 목표인가? 그것은 또, 어느 연구소의 연구를 위한다던가, 또는 그의 생계비의 소득원이라든가 하는 다른 목표의 수단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도구 복합체의 영원한 지시성(指示性)'(renvoi l'infini des complexes d'ustensilit ) )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이 세계의 모든 사물이 도구라는 결론이 나온다. "사물간의 근본적인 관계, 그것은 도구적 관계이다." ) 그렇다면 사물과 도구는 어떤 것이 먼저인가? 먼저 사물이다가 나중에 도구가 되는가, 아니면 먼저 도구이던 것이 나중에 사물로 드러나는가? 하이데거가 먼저, 그리고 사르트르도 나중에 이것을 강하게 부정했다. 사물은 언제나 동시에 도구인 것이다. 그러니까 『존재와 무』에 나오는 '사물-도구'(chose-ustensile) )라는 합성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그와 비슷한 다른 합성어들(mots-choses, phrase-objet)과 전혀 다르게 해석을 해야 한다. 여기서는 사물이 된 도구가 아니고, 사물과 도구가 서로 등가적인 관계이다. 모든 사물은, 그리고 모든 도구는, 사물이면서 동시에 도구이다. 땅 위의 돌멩이를 집어 벽에 못을 쳤다면 이때 돌멩이는 훌륭한 연장이 된 것이다.
 
 
Ⅲ. 예술적 질료의 사물성
여기 탐스러운 흰 장미꽃 다발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 장미를 보고 한 사람이 "이 장미의 꽃말은 '정숙'이야. 그래서 나는 이 꽃을 좋아해"라고 말했다고 치자. 그때 이 사람은 이 장미를 장미로서 보기를 그친 것이다. 그의 시선은 장미를 통과하여 그 뒤에 있는, '정숙함'이라는 추상적 덕성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흰 장미의 소담스러운 모습이나 은은한 향내에는 관심조차 없다. 마치 우리가 유리창을 통해 밖의 경치를 내다 볼 때 우리의 시선은 유리를 통과하지만 그 유리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과 똑같다. 이때 장미는 마치 유리창과도 같은 투명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정숙함'이라는 덕성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이 옆에서, 이 장미의 꽃말에는 아랑곳없이 꽃 자체의 고운 자태와 향기에 감탄했다면, 이 사람에게 있어서 관심의 대상 즉 목적은 장미꽃일 뿐 그 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장미꽃은 그의 시선을 가로막는 불투명성이다. 그의 눈길은, 마치 단단한 돌부리에 발이 걸리듯, 그렇게 그 장미꽃에 가서 탁 부딪친다. 그 장미꽃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멈춰 선다(il s'arr te). ) 이때 장미꽃은 그 어떤 것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다시 말하면 장미는 사물이 된 것이다. 장미는 원래 사물이지 않은가, 라고 의아해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리의 예를 들어보자. 커피나 홍차를 저은 후 찻숟가락을 찻잔 받침에 내려놓을 때 딸깍하는 소리가 들린다. 늘 무심히 지나쳐 버렸던 이 소리가 유난히 마음에 파고들며 뭔가 알 수 없는 잔잔한 감동을 준다. 나는 머리 속에서 아까 들었던 그 소리를 자꾸만 반추해본다. 다시 말하면 나는 그 소리에 자꾸만 다시 돌아와, 그 소리의 성질 앞에 멈춰 서서(il s'arr te la qualit du son) ), 그 소리 자체에 매료된다. 평소에 투명했던 그 소리는 지금 불투명하게 되었고, 그것은 사물이 되었다. 이번에는 화폭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생각해 보자. 추상화는 말할 것도 없고 구상화의 경우에도 화가가 초록, 빨강, 노랑 등의 색깔을 칠하는 것은 단순히 나뭇잎이 초록색이니까, 또는 꽃이 빨간색이니까 그런 것은 아니다. 마티스의 빨간 카페트는, 그가 그린 방의 카페트가 실제로 빨간색이어서가 아니다. 만일 그가 현실 속의 어느 방을 그대로 딴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 방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면, 화폭 위의 그 방은 현실의 어느 방을 지시하는 하나의 기호일 것이다. 그러나 화폭 위의 색깔은 전혀 그런 의도에서 선택된 것이 아니다. 화가는 그 색깔 자체에 매혹된 사람이다(il y revient sans cesse et s'en enchante). ) 그리고 그는 자신을 매혹시킨 그 색깔을 내기 위해 고심하며 색배합을 하고, 그것을 화폭에 옮겼을 것이다. 이때 색깔은 사물이 되었다. 무엇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그 앞에 와서 머무르는 불투명의 사물이 된 것이다. '물체가 된 색깔'(couleur-objet) )이라는 합성어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색깔만이 아니다. 형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화가는 날아가는 새, 접시 위의 물고기, 또는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집을 화폭 위에 그릴 수 있다. 이때 그는 단순히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새나 물고기 또는 집을 그대로 화폭에 옮겨 그리기 위해 그것들을 그린 것은 아니다. 모델로 삼은 새나 물고기 혹은 집이 실제로 있었을지 몰라도 그의 그림은 그대로 그것들을 형상화한 것은 아니다. 그 대상들을 그대로 옮겨 그린것이라면 사진이 더 낫지 않겠는가? 이 말은 물론 이 그림들이 사실 속의 물건과 닮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닮고 아니고가 무의미하다. 이 세상의 어떤 물건을 그림으로 나타내려는 것이 화가의 의도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다시 말하면 화가가 종이 위에 선을 그린 새나 물고기나 집은, 새를, 물고기를, 또는 집을 지시하는 기호가 아니다. 만일 새를 지시하기 위해 새의 그림을 그렸다면 우리는 그 화폭 앞에서 화폭을 유리창처럼 통과하여 그 뒤에 있는 어떤 새의 모습을 연상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화폭을 통과하지 않고 그 앞에 머물러 그 새의 순수한 형태와 색깔에 한없이 감탄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새의 형태는 사물이 되었다.
 
화가는 자기 화폭에 기호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을 창조하기를 원한다.
(le peintre ne veut pas tracer des signes sur sa toile, il veut cr er une chose;) )
 
물론 이렇게 창조된 '색깔-물체'가 화가의 은밀한 경향을 반영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의 말이나 표정이 우리의 분노나 고통, 또는 기쁨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주듯이 그렇게 그의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는 기호는 아니다. 틴토레토의 그림을 예로 든 것도 그런 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골고다 언덕 위의 하늘을 노란색으로 칠한 틴토레토는 예수의 고뇌를 의미하기(signifier)위해, 또는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고뇌를 야기하기 위해 이 색깔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가 어떤 고뇌를 느끼며 이 색깔을 칠했다 해도 이 노란색은 고뇌의 기호는 아니고 차라리 '사물로 굳어진 고뇌'일 뿐이다. 만일 화가가, 또는 음악가가 자신의 어떤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작곡했다면 이때 색과 소리는 완전히 언어와 똑같은 기능의 기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미 예술은 아니고 도로 표지판이나 광고 차원의 실용적인 기술일 것이다. 따라서 단순하게 말해본다면 예술가는 색깔이나 소리를 언어로 보지 않고 ) 사물로 보는 사람이다. 그럼 언어 자체를 재료로 예술작품을 만든 시의 경우는 어떠한가?
 
도망치자, 저리로 도망치자, 새들이 취한 것 같다.
하지만, 오, 내 마음이여 수부(水夫)들의 노래 소리를 듣자.
(Fuir, l -bas fuir, je sens que des oiseaux sont ivres.
Mais mon coeur entends le chant des matelots.) )
 
여기서 둘째 연의 '하지만'(Mais)은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을 연결해 주는 기능이 전혀 없다. 그저, 마치 마을 입구에 우뚝 서있는 거석처럼 문자의 앞에 버티고 서있을 뿐이다. 말은 사물을 지시하는 대표적인 기호이지만, 시에서는 말조차 기호가 아닌 사물이 되고 있다. 또 한편을 더 보기로 하자.
 
오 계절! 오 城들이여!
결점 없는 영혼이 어디 있는가?
(O saisons! O ch teaux!
Quelle me est sans d faut?) )
 
이 시의 둘째 연은 의문형으로 되어있으나, 이 질문을 한 사람은 누구이고, 또 질문을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이 질문은 대답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차라리 이 질문 자체가 스스로의 대답인 듯 하다. 다시 말하면 이 질문은 절대적 질문이며, 사물이 된 질문이다(주8을 참조할 것). 독자는 이 질문을 넘어서서 어떤 의미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단지 이 문장 앞에 멈춰 서서 그것을 소리내어 읽을 때의 아름다운 울림과, 그것이 주는 어떤 이미지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 산문에서 말들은 어떤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 다시 말해서 기호이지만, 시에서의 말들은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물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사물이 된 단어들'(mot-chose), '물체가 된 문장'(phrase-objet)이라고 썼던 것이다. 시 속에서 단어들은 마치 사물처럼 서로 끌어 잡아 다니거나 밀치기도 하고, 혹은 서로 상대방을 무시하고 지나치기도 한다. 이처럼 사물이 된 단어들이 모여 이루어진 문장은 그 역시 '물체화한 문장'일 수 밖에 없다.
 
 
Ⅳ. 언어의 도구성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색깔이나 소리 같은 추상적인 것도 사물성과 도구성을 동시에 갖고 있음을 앞에서 보았다. 그렇다면 언어는 무엇인가? 언어는 대자존재의 의식의 소산이므로 그 자체가 현존재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차적으로 기호이다. 기호는 도구이며, 그 도구의 성격은 표시성이다. 도로표지, 경계석, 항해용폭풍우표지, 신호, 깃발, 상장(喪章)등이 모두 기호이다. 행사장에 표시된 화살표는 사람들을 그리로 안내하기 위한 표시이다. 그 화살표는 방향을 가리키기 위해서만 존재할 뿐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언어학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어떤 대상을 지시(renvoyer)하고 있다. 우리의 언어도 무엇을 지시한다. '책상'이라는 말(그것을 음성으로 말했건, 종이 위에 글로 썼건 간에)은 책상을 지시하기 위한 기호이지, 그 자체로 무슨 물건은 아니다. 우리는 매번 무거운 책상을 대화 상대방 앞에 들고 나오지 않기 위해 '책상'이라는 말을 만들어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다. 바로 윗글에서 우리는 '무엇을 지시하기 위하여', 또는 그것을 '편리하게 사용'한다는 말을 썼다. '위하여', 또는 '편리하게 사용'은 무엇을 상기시키는가? 바로 도구성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기호는 '가리킴의 목적'을 갖고 있는 도구이며, 기호의 존재론적인 근원은 지시성(指示性)에 있다. ) 그런데 언어는 과연 기호인가, 만일 그렇다면 기호로서의 언어는 도구인가 아니면 현존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하이데거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하이데거가 사물을 동시에 도구적 존재로 규정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언어를 사물성과 도구성으로 파악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뭔가 급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는 옆에 있는 물건을 아무거나 집어든다. 위험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아까 집어든 물건이 망치인지 나무 막대기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마치 우리 신체의 연장(延張)이라도 된다는 듯이, 여섯 번째 손가락, 또는 세 번째 다리라도 된다는 듯이 그것을 전혀 대상으로 의식하지 못한다.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타인 앞에서 우리를 보호해주거나, 타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등, 마치 우리 감각의 연장같기만 하다. 우리는 그것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그 뒤의 다른 목표를 향해가느라고 (en le d passant vers d'autres fins) ) 언어 자체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언어 앞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처럼 언어는 도구이며, 이 도구의 목적은 의사소통이다(la fin du langage est de communiquer). ) 언어가 이처럼 도구인 것은 근원적으로 그것이 사물에 대한 명명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직 동물적 상태로 살고 있으면서 처음으로 말을 한 두 마디씩 만들어 내던 때를 한번 상상해 보자. 매번 꽃을 꺾어 상대방 앞에 들고 오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언젠가 누구인가 꽃 한 송이를 들고 "앞으로는 이것을 꽃이라고 부르자. 내가 꽃이라고 말하면 언제나 그것은 이 물건을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말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만들어진 '꽃'이라는 말은 빨간색의 어떤 예쁜 형태를 가진 물건을 가리킬 뿐(指示) 그것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무엇을 이름 지을 때 이름은 이름지어진 사물을 위해 자기 스스로를 희생시킨다. 헤겔이 말했듯이, 본질적인 사물 앞에서 그 사물의 이름은 비본질적이다. ) 그러니까 '꽃'이라는 말이 지시하는 빨갛고 예쁜 어떤 형태의 실체, 그것이 중요하지 '꽃'이라는 말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시선은 마치 햇빛이 유리창을 통과하듯이 말을 통과해, 그 말이 가리키고 있는 현실 속의 어떤 사물을 향해간다. 이처럼 언어는 도구이다. 모든 도구가 그렇듯이 언어도 투명하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말을 다른 누구에게 전할 때 그 사람의 말을 글자 그대로 옮기지 못하면서 그 내용은 정확히 옮길 수 있는 것, 이것이 언어의 투명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벽에 못을 박기 위해 망치를 사용하듯이, 우리는 머리 속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 또는 세계 속의 어떤 사물을 지시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 텍스트에서 사르트르가 '사용한다'(utiliser, 또는 se servir de)라는 말을 이탤릭체로 쓴 것은 '그것을 도구로 사용한다'라는 도구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Ⅴ. 산문과 시
언어는 투명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끔 불투명하기도 하다. 어떤 말이나 글 앞에서 내용보다 언어 자체에서 문득 마음이 빼앗겨 "그 표현이 참 아름답다"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언어가 도구 아닌 사물로 드러나는 순간인 것이다. 이처럼 언어의 물질성에 매료된 사람, 그는 아무리 예술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이 순간에 이미 예술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참여예술의 경계를 설정한 것도 바로 이러한 구분에서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음악, 미술, 문학 등의 영역구분이 무의미하다.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을 그는 단지 두 개의 카테고리로 나누는데, 그것은 오로지 예술의 질료를 사물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도구로 생각하느냐의 기준에 의해서이다. 그래서 산문과 똑같이 말이라는 질료를 사용하는 시가 오히려 음악, 미술과 같은 카테고리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음악, 미술, 시를 예술이라고 지칭하고, 소설, 에세이, 팜플렛등 말을 사용하는 모든 글을 산문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현실참여는 말을 도구로 사용하는 장르, 즉, 산문만이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산문으로 된 소설이 반드시 언어의 도구성에만 의존하고 그 사물적 측면은 도외시하는가에 대한 논란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이와 같은 단순한 이분법이 그의 문학론을 좀더 유치한 단계에 머무르게 했으며, 나중에『집안의 백치』에서 그 자신도 이것을 부정하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는 그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가 보자. 작가는, 만일 그가 원한다면, 누추한 집을 묘사함으로써 그것을 이 사회의 불의의 상징으로 삼아 독자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 언어에서 사회 비판적인 말을 직설적으로 하는 것과 같은 차원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작가는 '말을 하는 사람이다'. 그에 비하면 시는 어떠한가? 산문도, 시도 똑같이 언어를 질료로 사용하여 작품을 만든다. 소설가도 손에 힘을 주어 원고지 위에 글씨를 쓰고, 시인도 그렇게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통점은 거기에서 그친다. 작가는 자기 머리 속의 생각을 나타내기 위해 말이라는 수단을 사용한다. 그러나 시인은 마치 화가가 팔레트 위에서 색깔을 이것저것 골라 합성을 하듯이, 또 음악가가 이런저런 높낮이의 음을 합성하여 노래를 만들 듯이, 그렇게 단어를 이리저리 합하여 '시'라는 작품을 만들어낸다. 산문이 의미작용의 작업이라면 시는 낱말이라는 구슬을 가지고 노는 천진난만한 유희이다. 언어를 기호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는 차라리 미술이나 음악의 영역과 가깝다.
 
기호의 왕국, 그것은 산문이다. 시는 회화, 조각, 음악의 편이다.
(l'empire des signes, c'est la prose; la po sie est du c t de la peinture, de la sculpture, de la musique.) )
 
이때 우리는 시인의 말을 이 세계의 어떤 양상을 가리키는 기호로 생각하지 않고 다만 그 속에서 이미지만을 본다. 시인이 버드나무, 또는 물푸레나무라고 했을 때 그 말들은 반드시 이 세상에 실재하는 버드나무와 물푸레나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인이 말을 기호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말들이 가진 의미마저 완전히 공중 분해되어 버렸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의미가 없었다면 말들은 그저 소리와 철자로 모래알처럼 흩어졌을 것이다. '보라빛'이라는 세 글자가 하나의 통일성으로 단단히 묶일 수 있는 것은 어느 특정의 색깔을 지칭하는 그 말의 의미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시인이 그 말을 썼을 때는 현실 속의 진짜 보라빛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의미가 환기시키는 이미지를 추구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시어는 사물이다. 이처럼 언어를 사물로 보는 태도를 사르트르는 '시적(詩的) 태도'라고 부른다.
시인은 단숨에 도구-언어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말을 기호가 아니라 사물로 보는 시적인 태도를 단호하게 선택했다.
(le po te s'est retir d'un seul coup du langage-instrument; il a choisi une fois pour toutes l'attitude po tique qui consid re les mots comme des choses et non comme des signes.) )
그러니까 아주 간단한 공식이 세워졌다. 소설가 또는 산문가는 말을 도구로 생각하고 사용하는 사람, 그리고 시인은 말을 도구가 아니라 사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시인의 유일한 관심사는 '사물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일'(contempler les mots de fa on d sint ress e) )일 뿐이다. '바라보다'라는 것은 그대로 하이데거의 인식과 도구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사물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것은 그것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과 정반대의 행위이며, 단지 그 대상을 인식하는 행위일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르트르를 앞질러서, 시인은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그것을 인식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Ⅵ. 언어의 실패로서의 시
언어가 1차적으로 도구임에 틀림없다면, 그것을 사물로 관조한다는 것은 언어의 도구성이 훼손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도구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그것은 언어 본래의 목적인 의사소통이 실패한 것이다. 여기서 실패( chee)가 사르트르 미학의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한다. "시적 언어는 산문의 폐허 위에서 솟아오른다"(le langage po tique surgit sur les ruines de la prose.) )라는 문장의 뜻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자진해서 언어의 도구성을 거부한 사람이므로 그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실패가 그대로 구원이 된다. 애당초 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이와 같은 수단과 목적의 전도가 아닐까? 예술이 아닌 현실 생활 속에서 인간의 행동은 언제나 어떤 목적의 수단이다. 내가 책상 위에 있는 연필을 잡으려고 손을 뻗칠 때, 손을 앞으로 내뻗는 행동은 연필이라는 목적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도구성의 고찰에서 보았듯이 모든 수단은 투명하여 우리 눈에 안 띄고, 우리의 관심도 끌지 못하다. 중요한 것은 연필일 뿐, 그것을 잡기 위해 손을 뻗치는 행동은 부차적이고, 덜 중요하고, 비본질적인 가치일뿐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목표에 의해 소외되어 있다. 그러나 예술은 이 관계를 전도시킨다. 원래의 목표가 흐릿해지고 중간 단계의 수단만이 남은 것, 그것이 그 옛날의 무훈담이나 춤이 아니었던가? 시(詩)야말로 이러한 전도의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실제 생활 속에서라면, 항아리는 물긷는 처녀가 그 속에 물을 채우기 위한 목적이지만, 시에서는 그것이 물긷는 처녀의 우아한 자태를 위해 존재한다. 실제의 역사 속에서는,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헥토르나 아킬레우스가 용감하게 싸웠겠지만, 시(詩)에서는 헥토르나 아킬레우스의 영웅적인 행동을 보여주기 위해 트로이 전쟁이 존재한다. 이렇게 수단과 목적을 전도시킨 시인에게 있어서 말은 더 이상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망가진 연장이다. 도구에서 도구성이 벗겨지면 거기에는 사물이 남는다. 유용성이 우리 행동의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이라면 무용지물은 우리 행동의 실패를 뜻한다.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말은 이제 더욱 분명하게 그것의 실재성과 개별성을 되찾고, 이번에는 인간의 실패의 도구가 된다. 의사소통의 수단이었던 말의 의미는 그 자체가 순수한 소통불능성이 된다. 말을 도구로 사용하려는 계획은 말에 대한 순수직관으로 대치되고, 오히려 실패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현상이 생긴다. 사르트르 미학의 또 하나의 주요 개념인 '지는 자가 이기리라'(Qui perd gagne.)의 의미가 그것이다.
시는 '지는 자가 이기는' 게임이다. 진정한 시인은 승리하기 위해 자기 몸을 죽일 정도로 패한다.
(La po sie, c'est qui perd gagne. Et le po te authentique choisit de perdre jusqu' mourir.) )
이 개념은 나중에 플로베르를 다룬『집안의 백치』에서 좀더 심화되고 확대되어, 19C의 '예술을 위한 예술'의 사조를 설명하는 중요한 용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19C의 예술만이 아니라 산문과 대비된 시 전체에 이 개념을 적용하고 있다. 시인은 예술에서의 승리를 위해 실제 인생에서는 패배하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흔히 상식적으로, 시인은 현실을 잘 모르기 때문에 실제의 인생에서 실패한다고 말하는데, 사르트르는 현실에서의 실패가 시인의 원초적인 선택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단순히 언어를 망가진 도구로 간주하는 행위가 어떻게 인생 전체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는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던 도구연관의 세계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책꽂이는 책을, 책은 독서를, 독서는 연구를, 이런 식으로 이 세계는 촘촘한 망상(網狀)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도구연관의 세계이다. 그 어느 것도 고립적으로 있는 것은 없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시의 연속이다. 그런데 나를 둘러싸고 있는 도구란 결국 모두가 나에 의해 행해져야할 어떤 과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책은 내가 읽어주기를 기다리고 있고, 빗자루는 내가 쓰레질을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세계의 도구성의 전체는 정확히 나의 가능성과 일치하는 요소이다. 그런데 대자존재인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내 가능성의 총화이다. 그렇다면 도구란, 사물에 투사된 내 가능성의 이미지일 뿐이다. ) 다시 말하면 사물 속에 각인된 나의 존재 그 자체이다. 그리고 세계는 도구연관의 거대한 사슬로 이어져 있으므로 그 중의 어느 고리 하나만을 끊어도 전체의 구조가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따라서 이 세계의 도구적 질서를 거부한다는 것은 세계-내-존재인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며, 결국 세계 안에서의 내 인생의 실패를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언어라는 도구가 결코 완벽하게 쓸모 있는 연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말은 우리의 생각을 그대로 전달해 주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왜곡하는 매체이다. ) 일상언어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섬세한 감정이나 사상을 전달하는 문학 작품에서 시인의 머리 속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마치 용암처럼 들끓어 오르는, 언어 이전의 어떤 생각을, 시인은 언어라는 기성품의 주물 속에 집어넣어 시를 만든다. ) 따라서 그의 시 작업은 애초부터 실패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실패( chec)라는 말은 도구연관의 세계 속에서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일 뿐, 시인이 추구하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패배하지만 美를 종교처럼 생각하는 저 피안의 세계에서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다. 보들레르의 시에 나오는 '불운'(Guignon)이나 '저주'(mal diction)라는 말의 의미가 그것이다. 『집안의 백치』를 읽지 않은 많은 독자들을 오해하게 만들었던「문학이란 무엇인가?」제1장의 주(註)4번의 마지막 문장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산문의 이의제기는 좀더 성공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반면, 시의 이의제기는 패배의 이름으로 행해 진다. 그러나 그 패배는 모든 승리를 은닉하고 있는, 숨겨진 패배일 뿐이다.
(Mais la contestation de la prose se fait au nom d'une plus grande r ussite et celle de la po sie au nom de la d faite cach e que rec le toute victoire.) )
 
이 문장을, 산문은 문학의 성공이고, 시는 문학의 실패라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도구적 측면과 사물적 측면에서 고찰한 언어의식의 결과이며, 또, 열렬한 참여문학의 외피로도 감추지 못했던 사르트르의 은밀한 미의식의 내비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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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뮈와 함께 탄 KAL기
 

2000년 7월 17일, 김포공항을 떠난 비행기 안에서 나는 까뮈를 꺼냈다. 까뮈 연구가인 김화영 교수의 『문학상상력의 연구』, 아름다운 책이다, 자칫 딱딱할 수 있는 학위논문이 김화영 교수의 특유의 미문 속에서 더 이상 이론서이길 그친다. 나는 이 책을 여섯 번을 읽었다. 바슐라르와 까뮈, 김화영, 이름만 들어도 감성의 현(鉉)을 떨게 하는 대가급 에세이스트들의 유혹적인 문장이 이 책엔 얼마든지 있다. 이 책에서 바슐라르는 말한다. 「자기가 본 것을 미리 꿈꾼 적이 없다면 이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 제대로 보려면 미리 꿈꾸지 않으면 안된다.. 김화영은 바슐라르에 이런 주석을 달고 있다. 「참으로 꿈꾼다는 것은 딴 데 정신이 팔린 상태가 아니라 거기에 충만하게 현존하는 것이며 빛 가득한 하늘의 거대한 꽃을 바라보는 것이며 세계의 광대한 육체를 시선의 살로 껴안는 것이다.」 나는 미국을 내 시선의 살로 껴안을 자신이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미국을 미리 꿈꾸었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처음부터 미국이 내키지가 않았다. 너도 미국, 나도 미국일 때, 나 하나라도 삐딱할 수 있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The die is cast, 주사위는 던져진 셈, 어쨌거나 비행기의 항로를 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

여행, 행복을 찾아 떠나는 여정
 
「티파사, 그곳에서는 세계가 언제나 새롭기만한 빛 속에서 매일같이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까뮈가 그의 수필 「여름」에서 말한 이런 곳을 누군들 마다하랴. 관습의 때를 벗겨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땅, 모든 기존의 룰들이 지배와 구속의 힘을 잃어버리고 존재들이 자신의 독자성을 당당히 드러낼 수 있는 땅. 내가 나로서 비로소 호흡할 수 있는 곳. 작품「이방인」에서 뫼르쏘는 한 사내를 해변에서 쏘아죽이고 돌아오면서 비로소 행복의 의미를 이렇게 음미한다. 「활짝 열린 공기와 풍요한 하늘 속에서, 그는 인간이 해야 할 유일한 임무는 사는 일, 행복해지는 일이라는 것을 느꼈다,」불행의 표정이 마치 영혼의 고상함을 말해주는 척하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용케도 까뮈는 행복이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임무임을 역설한다. 까뮈는 칙칙하지 않다. 불행을 과장하지도 않는다. 나의 여행용 가방 속에 까뮈를 대동한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까뮈는 내슝이나 청승을 떨지 않는다. 동기야 어쨌든 여행은 행복을 만나러 가는 여정이 아니겠는가.
 

기내에서
 
좁다. 쪼그리고 있자니 불편하다. 옆에 아리따움에 교양까지 겸비한 아가씨라도 있다면 12시간 넘는 비행거리가 짧게 느껴지겠지만 길어도 이건 너무 길다. 바깥 바람이라도 쐬고 싶지만 나중에 스튜어디스에게 욕먹을 걸 생각하니 그럴 수도 없다.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최성도 선생도 잘 견디는데, 까뮈나 축내면서 버티는 거다. 가끔 허리 라인이 나긋나긋 맵시 있는 스튜어디스들이 시각에 삽상한 느낌을 준다. 12시간 이상의 비행시간을 버텨내면서 푸대자루 같은 스튜어디스를 본다는 것도 고문일 것이다. 스튜어디스들이 필요 이상의 미모를 가진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거로구나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여행엔 이런 의외의 깨달음이 있다.
 

샌프란시스코
 
졸다 깨다 졸다 깨다 보니 샌프란시스코다. 비가 많고 습한, 이 도시는 축축하고 끈끈하다. 자살율이 높은 도시라는 것도 일리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곳은 미국인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도시란다. 바슐라르는 「물은 우리로 하여금 완전하게 죽을 수 있도록 해준다」라고 했다. 금문교에는 자살을 만류하는 권고문이 쓰여있다. 금문교 아래의 물은 완전히 죽을 수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키기 좋다. 여행의 첫날이라면 금문교에서의 자살은 일단 보류하는 것이 좋다. 아직은 더 보아야 할 것들이 많다.
 
이탈리아 어부들의 선박지였다는 Fisherman's Wharf에서 관광선을 타고 금문교 아래를 지나다 보면 멀리 알카트라즈 섬이 보인다. 영화 「The Rock」에서 숀코네리와 니콜라스 케이지가 눈부신 액션을 보여주었던 섬, 알카트라즈는 연방정부의 형무소가 있어 '악마의 섬'으로 불려졌다는 곳이다. 그 이유는 물살이 거세어 탈출이 불가능한 점도 있지만 거기서 바라보는 샌프란시스코의 야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죄수를 참을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전설적 갱스터 알 카포네도 그곳에 갇혀 있었다던가.
 
샌프란시스코는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곳이라 안개로 유명하다. 안개는 보여주면서 동시에 가린다. 안개는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보여준다. 나타나는 듯 하면서 사라지는 것이 안개다. 내 가방 속의 김화영은 『문학상상력의 연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안개는 탈출, 혹은 출발이라는 의미 자체를 말소시킨다. 물의 감옥은 한계가 없는 감금의 공간이다. 안개의 지옥은 천국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밖으로 나간다는 말은 무의미하다. '밖'이란 것을 무화시키는 것이 안개이기 때문이다.」
안개는 알카트라즈보다 더 지독한 감옥이었다. 그 감옥에서 빠져나오려고 무수한 사람들이 금문교 아래로 자기 몸을 던졌는지도 모른다. 윤회의 수레바퀴가 금문교 아래에서 덜커덕 멈출 수만 있었다면 그들의 선택은 현명한 것이었으리라.
 
1박을 하다. 10팩이면 충분하다는 소주를 첫날 다 마셨다. 그래서인지 이후 내 두개골 속을 샌프란시스코의 안개가 줄곧 따라다녔다. 醉生夢死!!!
 

고속도로, 프리웨이
 
줄곧 길이다. 영화 「아이다호」의 풍광이 그대로 펼쳐진 길을 버스는 줄곧 달린다. 끊임없는 화물차들의 질주. 그것은 내가 본 가장 미국적 풍경이었다. 세이지 브러쉬 sage brush라는 풀이 사막에 지천으로 피어있다. 길은 지평선에서 지평선으로 이어진다. 하늘엔 구름 한점 없다. 바로 이곳이 미국의 서부다. 끝없는 평원,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는 아몬드 숲과 포도밭이 미국의 풍요를 말없이 웅변한다. 미국은 무궁한 엽록소의 공장이다. 그 공장에서 생산된 과실들은 이미 세계인의 입 안에 침투한 지 오래다. 선키스트 sun-kissed = sunkist 태양이 입맞춤한 포도와 오렌지가 그것. 한 점의 구름도 볼 수 없었다. 까뮈는 티파사가 태양과 대지가 결혼하는 곳이라고 했지만 캘리포니아 또한 빛의 사원이었다. Mamas(엄마)와 Papas(아빠)는 이미 늙어 Grandmamas와 Grandpapas가 되었겠지만 그들의 노래 <캘리포니아 드리밍>은 늙지 않았다. 캘리포니아 드리밍은 아마도 캘리포니아의 투명한 햇살에 바쳐진 송가(頌歌)였으리라. 왕가위의 영화 「중경삼림」에서 왕정문이 그토록 갈망했던 것도 그 무구한 햇살이 아니었을까.
 
이글스(Eagles)의 <호텔 캘리포니아>도 매력적이다. 12현 기타로 시작되는 도입부부터 마지막 솔로와 앙상블은 가히 환상적이다. 이 땅위의 젊은이들에게 이국적 동경을 불러일으켰던 Eagles의 <호텔 캘리포니아>. 호텔이라는 단어와 캘리포니아라는 단어의 낭만적 어울림, 거
기에 물 흐르듯 이어지는 기타의 선율, 그 선율 속에서 캘리포니아는 구체적 지명이 아니라 꿈 너머 피안의 지명이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
 
요세미티는 미국인의 식성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곳이다. 산에서는 식욕이 돋는 우리네 민족과 미국인들의 식욕은 사뭇 다르다. 미국의 국립공원엔 우리나라의 북한산에서와 같은 카페도 없고 음식점도 없으니 말이다. 좋은 산과 계곡이면 어김없이 도토리묵과, 오리탕, 붕어찜, 사철탕, 송어회집이 즐비한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한국인들에게 자연은 먹고 마시고 두들기고 피박 쓰고 설사하고 노래하는 곳이다. 계곡마다 고기 굽는 냄새요, 쩍쩍 화투패가 짝맞는 소리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자연을 가만 내버려 둔다. 조금이라도 자연에 손상을 가하면 가차없이 벌금형을 가한다. 참으로 동방예의지국의 한 신민(臣民)이 볼 때 불경스럽기 짝이 없다. 자연은 너그러운 것인데 자연에 조금 손상을 가했다고 벌금형이라니 그건 오히려 자연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를 보라. 강을 죽이든 살리든, 강물에서 물고기의 씨를 말리든 말든 얼마나 관대한가. 환경이야 어떻든 일단 짓고 보는 것이 한국의 골프장이 아닌가. 자연이 조금 상한다고 해서 호들갑을 떨지 않는 그런 관대함과 대범함이 미국인들에는 없다.
 
콜로라도 강에서는 팔뚝만한 고기들이 논다. 그래도 물고기에 관심이 없는 미국인들은 물고기들을 가만 내버려둔다. 우리네 민족은 그에 비해 얼마나 활달한가. 그물을 치든지, 어항을 놓든지, 아니면 밧데리에 철선을 연결해 냇가의 고기를 싹쓸이까지 하지 않던가. 일찍이 인디언의 영토를 빼앗은 이 인정 없는 민족은 다람쥐에게도 먹이를 주지 않는다. 내 짧은 영어 실력은 요세미티 공원에 있던 푯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저렇게 살게 내 버려둬. 인간의 

음식은 야생동물을 망칠 뿐이야. 제발 게네들을 먹이지 말라구.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동양철학자 김용옥은 Let it be로 풀이했던가. 노자도 읽지 않은 저들은 자연을 내버려 둔다........
 
 
프레즈노에서 2박

칼리코 기념품점에서 전갈을 산 이유
 
3일 째, 아침엔 칼리코 은광촌에 들러 기념품 가게에서 전갈을 샀다. 자그마치 15 개를 샀다. 물론 죽은 전갈을 플라스틱으로 코팅을 해놓은 것이다. 동료들에게는 한국에 돌아가 전갈 패밀리에게 하나씩 돌리려고 샀다고 둘러댔지만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황지우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온몸에 번진 적의(敵意)여, 전갈은 독이 올랐을 때, 가장 아름답다.> 젊음이 지어낼 수 있는 노래다. 조금 여유 있는 나이가 되면 헐거운 것, 조금 맥빠진 것도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나이가 있다. 발라드류의 감미로움보다 메탈류의 강렬함이 아름답고, 은근하고 우아한 것보다 섬광과도 같이 폭발하는 것이 아름다울 때가 있는 법이다. 자상한 이야기보다, 달콤한 속삭임보다 하나의 외침과 절규가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니이체는 진리는 미풍처럼 오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이 반드시 진리일 필요는 없다. 때로는 한 잔의 독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전갈이 제 몸 속에 구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음지의 덕이다. 독poison이다. 패키지투어가 아니라면 그런 독과 만날 수 있는 곳이 사막이다. 그러나 사막의 기념품 가게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불행하게도 박제된 전갈이다. 『문학상상력의 연구』에서 김화영은 이렇게 적고 있다. 「모든 것을 메마른 광물로 탈바꿈시켜 버리는 저 무서운 힘의 위협을 받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 목마른 공간 속에서 한발한발 인간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삶, 혹은 생명 바로 그것이 그(까뮈)를 매혹시키는 것이다. 요컨대 사막의 이미지 속에서 그가 포착하여 찬미하는 것은 다름아닌 향일성의 생명의지인 것이다.」청마 유치환은 그의 시 「생명의 서」에서 노래하고 있다.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하게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희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패키지투어에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다. 그런 여행은 안락하지만 깨달음의 깊이는 없다. 하긴 득도를 하려고 미국에 온 것은 아니다. 더구나 4박 5일로선 어림도 없다. 예수는 광야를 적어도 40일은 방황하지 않았던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라스베가스의 입간판 중에서 흥미를 끄는 것이 있다, 내용인즉슨 이렇다. Life is short. 돌려 말하면 인생은 짧으니 먹고 마시고 노름하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흥청망청 써대란 것이다. 교묘한, 그러나 속내가 분명히 들여다 보이는 뻔한 마케팅 전략이다.마이크 피기스 감독은 이곳을 배경으로 「리빙 라스베가스」를 제작했다. 모든 것을 포기한 할리우드의 극작가 벤은 의사도, 가족도 포기해버린 중증의 알콜중독자다. 그런 그의 앞에 창녀 세라가 나타난다. 그들의 비극적 러브스토리가 라스베가스를 무대로 선택한 것은 썩 훌륭한 배팅이다. 라스베가스에서 어떤 형이상학적 깊이도 찾아선 안 된다. 그곳에 있는 것은 도저한 절망의 깊이요 환락의 깊이다. 나는 그 깊이를 단지 냄새 맡을 수 있을 뿐이다. 라스베가스 어느 곳이라도 호텔 밖은 퍽퍽 찐다. 이 열기를 피하려면 조용히 호텔로 들어가 머시인에 코인을 넣는 수밖에 없다. 대박을 터뜨리고 싶다는 야망도 없는 나는 일찍 잠든다.
 
잠자리에서 생각하니 호텔의 이름이 사하라다. 사하라, 死하라. 늙지 않는 욕망이여 사하라.
 

그랜드 캐년
 
오전에 후버댐을 지났다. 이런 웅장한 스캐일 뒤엔 반드시 숨겨진 희생이 있게 마련, 엄청난 중국인들이 그 댐의 건설에 희생되었단다. 근처의 기념품 가게에 들러 또다시 전갈을 샀다. 전갈만 보면 사족을 못 쓴다고 동료들은 놀려댄다. 그랜드 캐년, 이런 풍경 앞에선 입을 닫고 가만 있으면 된다. 꼭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저녁엔 라플린이란 곳에 가서 잤다. 조그만 휴양도시고 도박도시다. 콜로라도 강이 흐르는 야경이 볼 만했다. 그래도 한 번 땡겨야 하지 않겠느냐는 동료들의 충고를 따랐더니 20불을 잃었다. 안 하는 게 따는 거란 생각에 맥주 먹고 잤다. 아침에 주머니에 25센트 짜리 동전이 하나 있길래 넣고 당겼더니 80배가 터졌다. 이런!
 
 
인디언의 사막, 백인들의 로스엔젤레스
 
올드 팬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서부영화는 개척자인 백인은 선하고 인디안들은 괴성을 지르며 포장마차를 습격하기가 일수였다. 포장마차를 구하는 명사수역은 게리 쿠퍼와 존 웨인이 맡고 나섰으며 나팔을 울리며 극적으로 당도하는 기병대는 관객들의 박수를 받아내기에 족했었다. 그러던 것이 1991년에 케빈코스트너가 주연을 한 영화 「늑대와 함께 춤을(Dances With Wolves)」에 와서야 비로소 인디안들은 피와 눈물이 있는 인간으로 그려진다. 이제는 적이 안되겠다 싶었던가 보다. 미국의 인디안들은 더 이상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 이제는 동정의 대상이 된 것이다. 멸종되어 가는 버팔로의 운명과 다를 바가 없는. 시애틀 추장이 1800년대에 미국 정부에 보냈다는 편지는 저간에 인디언의 이미지가 백인들에 의해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보여준다. < 우리는 우리의 핏줄 속을 흐르는 피처럼 나무 속을 흐르는 수액을 잘 안다. 우리는 이 땅의 한 부분이며 땅 또한 우리의 일부다. 향기 나는 꽃은 우리의 자매다. 곰과 사슴과 큰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다. 바위, 수풀의 이슬, 조랑말의 체온, 사람 이 모든 것이 한 가족이다. 시내와 강을 흘러내리는 반짝이는 물은 단순히 물이 아니다. 우리 조상의 피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땅을 팔면, 이 땅이 신성하다는 것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호숫물에 비치는 모든 것은 우리 민족 삶 속의 사건과 기억을 말해준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목소리다. 강은 우리의 형제다. 우리의 갈증을 달래주고 우리의 카누를 옮겨주고 우리 아이들을 키운다. 그러니 당신들은 형제를 대하듯 강을 친절히 대해야 한다. > 그러나 인디안 추장이 썼다는 위의 구절 또한 백인들에 의해 윤색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일방적 악의는 일방적 호감 못지 않게 위험하다. 우리가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본 것은 백인들에 의해 윤색된 인디안, 백인들의 굴절된 의식을 거친 황인종이었다. 문화적 제국주의, 할리우드는 이미 우리의 대뇌를 단단히 장악하고 있다.
 

유니버셜 스튜디오?
 
말만 유니버셜universal 스튜디오지 따지고 보면 영락없는 아메리칸 스튜디오다. 아메리카의 자본과 테크놀로지가 결합해 막강한 판타지를 만들어 내는 곳이 유니버셜 스튜디오다. 입체 영화를 보고나오는 최성도 선생님의 한 마디가 의미심장하다. 볼수록 기가 질리는 민족이군.

가상이 현실의 기가 질리게 하는 곳, 바야흐로 시뮬레이션의 천국이 유니버셜 스튜디오다. 가상인지 뻔히 알면서도 기가 질린다. 터미네이터란 입체영화는 말 그대로 끝내준다.(terminate) 존재하지도 않는 괴물이 눈 앞에 아른거릴 때, 현실은 증발해 버린다. 형이상학이고 인문학이고 스펙터클과 판타지 앞에선 발 붙일 자리가 없다. 괴성을 지르고 환호를 하면 그만이다. 왠지 그리하고 나니 뒷맛이 개운치 않다. 이건 여행이 아니라 영락없는 관광이다.
 

다시 기내에서
 
여행이 아니라 관광이었다. 득도를 하러 간 게 아니라 구경을 간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기엔 일정이 너무 짧았다. 무언가를 배우고 곰삭이기엔 너무 빨리 스쳐 지나왔다. 동료 일행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기에도, 여행지에서의 로맨스를 만들기에도 터무니없이 짧았다. 사막의 열렬한 고독 속에 옷자락을 나부끼며 영웅처럼 서있기에도 4박 5일은 너무 짧았다. 하지만 내 나라가 얼마나 힘겨운 땅인가를 알기엔 4박 5일은 충분히 길었다. 비행기에서 두 밤을 세웠으니 일주일이면 가족을 그리워하기에도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 요세미티, 후버댐, 라스베가스, 콜로라도, 캘리포니아, 그 이름들이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알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워 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것을 알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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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을 찾아서
-서산 개심사

떠나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 행인지 불행인지 일상은 적당히 견 딜 만하다. 더구나 고여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늑한 일인가.(경우에 따라서는 한 자리에 둥지를 틀고 썩어 가는 일도 과히 나쁘지는 않을 터) 여기서 더 뭘 바라겠는가 생각해버리면 지금 이곳이 그대로 극락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때로는 내 안에서 어떤 반역의 힘들이 솟구친다. 어떤 쇄신, 어떤 충전이 필요하다. 가끔은 낯선 시간과 공간 속에, 때로는 예측할 수 없는 위험 속에 나를 던져 보고도 싶은 것이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낯섬과 위험'은 존재를 불안하게 한다. 부와 명예도 이 앞에선 오금을 못 편다. 존재에의 각성(覺醒), 오직 '내가 있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격렬하게 인식된다.

여행이란 단어가 탈출과 모험의 욕망을 자극하고 위험과 불안의 감정을 환기시키지 않는다면 대체 여행이란 무엇인가. 탈출과 모험의 욕망, 위험과 불안이 거세된 여행은 여행이라기보다 차라리 '관광'으로 불려야 하지 않을까. 관광에는 열락은 있어도 각성은 없다. 그러나 각성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질 좋은 열락임에 틀림없다. 고통을 스스로 찾아나서는 구도자들과 고행자들이 권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런 종류의 열락이다.

절을 찾아간다는 것, 그것도 비신자인 '내'가 절집을 찾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먼저 그것은 고요를 맞는 것, 침묵을 내 몸 안에 침투시키는 일이다. 아무런 실용적 관심 없이 아침의 전나무숲을, 황혼녘의 산사를 바라보는 일이다. 너무 많은 말을 반성하는 일이다. 그냥 묵묵 히 하나의 풍경 속에 녹아버리는 일이다. 그럴 때 나는 얼마나 사소한 것인지. 끽해봐야 나는 풍경 속의 일부인 것이다.

서산 개심사(開心寺)는 침묵을 만나기에 좋은 절이다. 얼마나 많은 명산 대찰들이 이미 침묵을 잃어버렸는가를 상기해 보라. 그곳들은 이미 여행의 절이 아니요, 순례의 절이 아니다. 그곳들은 관광의 절이다.
가령 수덕사의 대웅전은 장중·엄숙하고 유려한 깊이를 가졌지만 그곳으로 오르는 '뺀질뺀질한' 대리석 석재들은 대웅전이 그 고색창연한 맞배지붕으로 애써 벌어 둔 침묵들을 깎아 먹어버린다. 그러나 개심사로 오르는 돌계단에서 마주치는 것은 좋은 침묵이다. 풍우에 깎이고 시간 속에 풍화된 암석들이 넉넉한 역사를 전해준다.

개심사 입구에서 세심동(洗心洞)이라는 표지와 만난다. 마음을 씻으라니, 무엇으로 씻으라는 말인가. 울창한 홍송들이 그 답을 말해준다. 숲이다. 절들은 그 입구에 울울창창한 숲을 세워 오탁에 찌든 속인들의 마음을 씻어준다. 오대산의 월정사, 조계산의 송광사가 그러하던가.

개심사로 오르는 돌계단에서 엄격한 직선을 찾을 수는 없다. 모든 것이 여기에선 알맞게 꺾이어 있다. 홍송이 그렇고 앞머리를 외로 튼 길이 그렇다. 절로 가기 위해선 얼마동안을 우회해야 한다. 무엇인가를 단축해야겠다는 것은 문명이 우리들에게 가르친 못된 버릇이다. 삼천 배는 아니더라도 조금의 수고로움도 없이 대웅전을 보겠다는 심사도 나쁜 버릇이다. 그러나 나를 만나려거든 응당 뼈를 깎는 수고로움을 거쳐야 하느니라, 하는 오만한 자의식도 개심사로 오르는 돌길에는 없다. 1㎞ 남짓, 어느 정도 숨이 가쁘다 싶을 때, 당도하는 곳이 개심사다. 봄이라면 돌계단을 올라온 쌔근거리는 숨결에 왕벚꽃의 향기가 물씬 풍겨 올 것이지만 겨울의 개심사에는 도심에선 호흡할 수 없었던 서늘하고 청량한 대기가 있다.

오솔길 모퉁이를 돌아 경내로 들어서면 경지(鏡池)라 이름한 연못이 객들을 반긴다, 몸소 져내려야 할 낙하의 때를 알고 제 몸을 내려 앉히는 낙엽들이 가을이 깊었음을 말한다. 초여름이면 이곳에서 소담스럽게 핀 수련을 볼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으리라.

외나무 다리를 건너면 안양루. 상왕산개심사(象王山開心寺)라는 안양루 현판의 글씨도 어눌하고 굼떴다. 획의 삐침이 없어 밋밋하지만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묵직한 맛을 준다.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의 유흥준은 그 글씨가 일제시대의 서화가인 해강 김규진의 예서체임을 말해준다. 개심사에서 가장 좋은 전망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안양루다. 이곳에서는 한 번 밑을 바라볼 일이다. 아옹다옹거리던 일상의 날들을 멀찍이 거리를 두고 바라볼 일이다.

안양루를 끼고 돌아 해탈문으로 들어서면 대웅보전, 그 앞에는 소박한 오층석탑이 있다. 대웅보전은 푸근한 느낌을 주는 맞배지붕집. 단정하고 기품이 있다. 수다스럽지 않다. 서정주의 시를 빌어온다면 '내 누님 같이 생긴' 집이랄까. 푸근하며 호들갑스럽지 않다. 넉넉하고 따스한 느낌이다. 부안 내소사의 대웅전은 팔작지붕으로 세련되고 날렵한 인상을 주지만 개심사 대웅전의 맞배지붕은 단순하고 장중한 무게감을 전해준다.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 하던가. 지극히 교묘한 것은 졸렬함과 같다는 말은 개심사 대웅전의 지붕에 와서 그 실례를 하나 더한 다. 한 마디로 맞배지붕은 어눌하다. 굼뜬다. 그런 우직함, 웅숭깊음을 상왕산이 깊게 껴안고 있다. 분분한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뭐라 해도 절은 산에 있어야 한다. 뭐 하나라도 제대로 고고한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종교가 있어야 할 자리는 거기다.

해탈문으로 들어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무량수각'이라는 당호를 붙인 곳이 나타난다. 이곳은 스님들이 기거하는 곳. 침묵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발뒤축을 들지 않으면 안 된다. 조심스럽게 그곳을 지나면 명부전이다. 이곳에는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의 시왕과 역사상이 모셔져 있다.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194호로 지정된 명부전의 인상은 공포스럽다기보다는 친근하다. 마치 우리 민담의 도깨비들이 공포보다는 친근감을 주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까.

심검당(尋劍堂)은 천연덕스럽고 꾸밈이 없다. 자연 속에 도드라지지 않게 인간의 삶을 살짝 들어 앉히는 동양의 지혜와 미학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작은 깨달음을 주는 곳이다. 뒤틀린 것은 뒤틀린 대로, 휘어진 것은 휘어진 대로 모지라진 것은 모지라진 대로 그 천연덕스러운 질서에 참여한다. 있는 것을 있는 대로 수용하겠다는 투 다. 어느 하나 내치거나 버리지 않겠다는 투다. 그래서 편안하다. 1962 년에 해체·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1477년에 세 번 중창하였고 영조 때까지 여섯 번이나 중창을 거쳤다고 한다. 여러 번의 수리 과정 속에서도 심검당은 그 자연스러운 멋을 잃지 않았으니 함부로 원형에 손대지 않으려는 우리 조상들의 겸허함에 마음을 줄 만하다.
상량문에는 중창을 할 때의 연대뿐만 아니라 시주자의 이름과 함께 ' 박시동(朴時同'이라는 목수 이름까지 들어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단다. 조선 초기 건물로 몇 안 되는 유적일뿐더러 전남 송광사의 하사당과 경북 환성사의 심검당과 함께 초기 요사채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건축물이라고도 한다. 바로 이곳에서 한 시대의 선지식인 경허가 거처했단다. 그러나 개심사에선 경허라는 한 인물을 도드라지게 상기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은 경내의 고요함이다. 아늑함이다. 가을의 개심사는 단풍이 너무 고와 경지(鏡池)의 외나무 다리를 건널 때는 조심을 해야 한다. 주위의 풍광에 눈이 어두워 마음과 몸의 중심을 동시에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을의 개심사도 개심사지만 봄의 개심사는 벚꽃으로 성장(盛裝)을 한 모습이 일품. 사시(四時) 중에 한 계절을 택해 절도 그런 호사를 누리는가 싶다. 그러나 아무래도 절은 늦가을부터서야 비로소 절다워진다. 일체의 수식을 벗어버린 적막함 속에서만 풍경이 운다. 그 적막함은 부처와 조사를 친견하려는 신도들만이 독점적으로 누려야 할 것은 아니다. 소음 세상을 벗어나 귀를 씻으려는 사람들에게 그 침묵은 고루 분배돼야 마땅하다. 세상이 자꾸 소음을 만들어 낸다면 어디에선가에서도 역시 침묵을 생산해내야 하지 않겠는가. 바다와 숲이, 산과 계곡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침묵이 다. 우리가 한겨울에도 바다와 산을 찾는 것은 바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이 또 그렇게 침묵하기 때문이다. 다정스러운 말이 인간을 위로하기도 하지만 때로 인간은 침묵 속에서 상처를 다스리기도 하는 것이다. 혼자 있고 싶을 때는 분명 어딘가가 병들어 아플 때 이리라. 혼자가 된다는 것, 여행의 밤 기차에 몸을 싣는다는 것은 나의 환부를 응시하는 일이리라. 바로 그때 내 옆에 있는 것은 차창에 비쳐 진 '나의 모습과 침묵'뿐. 내가 기댈 곳이 있다면 '나의 모습과 침묵' 뿐이다. 그렇다. 내가 찾아가는 곳, 성전(聖殿)과 사원을 '침묵의 공장' 이라 불러도 되겠다.

운산에서 647번 지방도로를 따라 해미 쪽으로 7㎞쯤 가면 신창리의 길 왼쪽에 신창주유소가 나온다. 그 주유소 약간 못 미쳐 가게 옆으로 개심사로 들어가는 시멘트 길이 있다. 이 시멘트 길을 따라 4㎞쯤 가면 개심사 입구에 닿는다. 신창리 쪽으로 방향을 틀면, 운전대를 잡지 않았다면 가급적 눈을 감는 것이 좋다. 주변의 볼썽 사나운 풍광이 시각을 유린한다. 목장을 조성하기 위해 산을 깡그리 밀어 밀어버린 불경스러움을 피해가려면 말이다. 삼화목장, 개심사 입구 야산의 수목들 을 베어버리고 거대한 초지를 조성하였다. 산에는 나무가 자라고 수풀 이 무성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지만 여기에서 그런 상식은 통 하지 않는다. 자연을 내 뜻과 필요에 따라 변형시키고 굴복시키겠다는 인간의 오만함이 역설적인 장관을 연출한다. 그러나 여행에선 그런 꼴사나운 풍광마저도 두 눈을 부릅뜨고 보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

개심사에는 숙박시설 하나 없지만 개심사 주변으로는 위락시설이 많다. 온양온천 도고온천, 덕산온천, 아산온천이 이곳에서 멀지 않다. 충남 제일의 사찰이라는 수덕사도 이곳에서 멀지 않다. 특히 수덕사는 대가람다운 위용과 웅자를 자랑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질 좋은 침묵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는 곳이 수덕사다. 숙박업소와 주차장은 절보다 더 위풍당당하다. 노래방도 버젓하다.

개심사를 찾아가는 여정 중에 빠뜨릴 수 없는 곳이 해미읍성. 북쪽에 가야산과 역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남문인 진남루 앞으로 해미천이 흐르니 이를 일러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이라 하던가. 조선 시대에는 충청병마절도사영이 있었으며 인근의 중심이 되던 고을이었다. 읍성으로는 가장 잘 보존된 성 중의 하나라는 이곳은 특히 그 일 몰이 아름답다. 성벽에 늘어진 담쟁이 덩굴이 꽤나 상긋한 운치를 더해준다. 1866년 병인양요에 이어진 박해 때에는 이 지역 천주교인들이 이곳 해미영에 끌려와서 처형을 당했다고 한다.

해미읍성 근처, 황락리에는 미륵불상이 있다. 황락리 미륵은 세련과는 거리가 먼 질박함이 민중의 날것 그대로의 숨결을 전해준다. 둥근 눈에 주먹코, 재료의 원시적 살결이 그대로 드러나는 조야한 돌피부는 모던한 디자인에 피로해진 눈에 생기를 준다. 개심사와 함께 서산군 운산면 용현계곡의 국보 84호 마애삼존불과 절터인 보원사지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여유가 있다면 온천이 몰려 있는 온양이나 도고 쪽보다는 서해 쪽으로 빠져도 좋을 듯하다. 어차피 집을 나온 목적이 관광이 아니라면 말이다. 뉘엿뉘엿 해가 기운다면 더욱 제격이다. 서해의 황혼은 여행을 가장 여행답게 한다. 침묵 속에서 사라지는 태양의 입적(入寂)을 지켜보아야 한다. 밤이 도둑처럼 오고 별들이 하나 둘 돋아날 때 어둠 속 에 서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서둘러 숙박업소를 찾아야 한다면 아무런 장식도 없는 방 하나를 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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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 2005-04-15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사진 , 글 너무 좋네요 . 잘 보고 갑니다.
 

삶과 죽음, 그 어두운 길항

힘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에너지를 다른 에너지로 전화시킬 수 있다는 것, 삶이 있는 한 우리는 변화를 믿는다. 대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런 믿음을 갖게 한 것일까. 씨앗이 움트고 다시 그 움이 무성한 나무로 자라나는, 저 자연의 순환과 변전(變轉)이 내 몸 안에서도 차별 없이 구현되리라는 데서 오는 믿음일까.

가련하고 순진한 기대! 삶은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탐스럽게 변신시켜주지 않는다. 거대한 관성의 힘으로 삶은 오히려 우리를 옥죌 뿐이다. 성능 좋은 빨래집게처럼 삶이 우리를 놓아주지 않을 때, 그래서 우리의 삶이 병든 나무처럼 나부낄 때, 우리는 감히 삶의 사막인 죽음을 꿈꾼다. 내 심장은 감히 탄환을 동경한다.

자살은 실패의 고백이다

자살은 한 사람의 욕망과 좌절의 도저한 깊이를 보여준다.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분리공포증에 사로잡힌 아이들처럼 우리들은 익숙한 세계에 집착한다. 뜻하지 않은 사업의 몰락, 오랫동안 가슴속에 품어왔던 연인과의 이별, 사랑하는 가족의 급작스런 죽음은 한 사람의 익숙한 일상을 파괴한다. 인간들은 이 돌연하고도 낯선 세계에 공포를 느낀다. 이럴 때, 자살은 무차별적으로 내게 엄습하는 공포의 시간을 거부하고 과거의 안온했던 시간을 껴안으려는 한 나약한 인간의 안쓰러운 노력이다.

누구에게나 고통과 난관을 피해 시간의 자궁으로 회귀하려는 퇴행의 본능은 있다. 이런 퇴행은, 행복을 껴안음으로써 쾌락의 양을 늘리기보다 죽음을 껴안음으로써 고통의 양을 줄이기 위한,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쾌락 추구의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자살이란 아무런 준비도 없는 내게 해일처럼 닥쳐오는 고통의 시간들을 뿌리치려는 실패자들의 자구(自救) 행위다.

빠스칼은 말했던가.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한다. 스스로 목을 매려는 사람까지도." 죽음 이후가 불행과 고통이라면 의도적인 죽음은 없을 것이다. 죽음 이후가 낙원이 아닐지라도, 최소한 죽음 이후가 무(無)라면, 적어도 죽음이 고통스런 이승보다 못할 것이 없다는 계산이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들의 판단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고통을 멀리하고 행복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면 지독한 고통을 산뜻하게 끝낼 권리를 부정해선 안 된다. 문제는 언제나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또한 자살은 무언의 항의다. 자살자들은 죽음을 통하여 항상 무엇인가를 말한다. 그 목소리는 진지하다. (대체 진지하지 않은 자살이 어디 있을까?) 사랑을 잃은 자는 자살을 통하여 저의 연인에게 말한다. 상처를 입은 자는 자살을 통하여 상처를 준 자에게 말한다. 모든 피학자는 자살을 통하여 가학자에게 말한다. 심리학자 Erwin Stengel의 "타인을 살해한다거나 최소한 타인이 죽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자살을 하지 않는다"라는 발언은 이런 유의 자살에 이르러 비로소 적실성을 얻는다.

나를 파괴함으로써 당신을 파괴하고 싶다는 욕망, 피학의 열정은 가학의 욕망에 다름 아닌 것.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매저키즘은 내 주검을 바라보는 자의 내면이 오열과 참회 속에 찢어지기를 바라는 새디즘과 먼 거리에 있지 않다. 이런 자살을 택할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제 주검을 바라보며 태연자약한 가학자들의 모습이다.

자살은 평가의 문제가 아니라 결단의 문제

광야에서 크게 한번 외치고 자신의 삶의 문을 쾅 닫아거는 순교자들의 자살도 있다. 생물학적 죽음이란 엄격히 내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필연에 군말 없이 복종하는 일, 내 의지와 아랑곳없이 나를 이끌어 가는 저 운명의 무시무시한 힘에 고스란히 끌려가는 것이다. 절로 가고 절로 오며, 절로 태어나며 절로 죽는 것이 삶이고 죽음일진대, 순순히 때를 기다려 떠남에 무슨 구차스런 호들갑을 두리요, 하는 식의 도사적(道士的)인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겠지만, 삶이 내 의지와 자유의 연장선상에 있어주지 못할 때, 하다못해 죽음만이라도 철저한 내 기획과 의지의 결실이기를 원하는 자가 있다면, 굳이 말릴 일은 아니다.

굳이 계몽적이고 수다스런 언변으로 삶을 홍보할 일만은 아니다. 하얼빈 역으로 향하는 안중근 열사에게, 제 몸에 휘발유를 끼얹는 전태일 열사에게 '생명은 순교보다 더 거룩하다'는 훈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문익환 목사의 말대로 열사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생명의 아낌없는 완전연소", 총체적 투입이다, 제가 가진 판돈을 한번에 거는 배팅이다, 그리고는 끝이다, 침묵이고 적막이다. "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毁傷孝之始也"라는 효경의 덕목이 있긴 하지만 순교자들이 누군가. 그들은 더 큰 원칙을 위해 자잘한 상식쯤은 성큼 뛰어넘는 자가 아니던가. 어떤 종교적 만류도 이들을 막을 수는 없다. 순교자들은 종교적 원칙을 뛰어넘음으로써 오히려 종교를 완성한다.

하지만 순교의 죽음을 이기적인 자살보다 윗길로 치는 데에는 생산성이나 효용성으로 사물의 가치를 재단하려는 실용주의가 그 저변에 깔려 있다. 한 개체의 죽음마저도 '쓸모'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이런 식의 평가란 온당하기나 한 것인지. 왜 우리의 죽음은 고상한 대의명분에만 바쳐져야 하는 것인지. 왜 집단을 위한 이타적 죽음만이 '희생'이란 이름으로 기림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순교에서 개죽음까지', 왜 죽음마저도 철저하게 등급화시키고 위계화시켜야 하는 것인지.

물론 이런 식의 논변이 순교자들의 죽음을 폄하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대의명분을 향한 순교자들의 죽음이 여타의 뭇죽음을 깎아내릴 수는 없다. 어떤 죽음이든 그 죽음엔 실존의 총중량이 얹혀 있는 것이므로. 그러므로 우린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자살은 결단의 문제이지 평가의 문제가 아니라고. 결단의 비장함과 그에 이르기까지의 명징한 선택이 문제인 것이라고. 명징한 선택? 그렇다. 오류를 밥 먹듯 하는 범인(凡人)들에게 죽음이란 삶보다 더 난해한 법이다.

자살은 삶이 쏘아올리는 폭죽이다

한편 죽음으로써 미를 완성시키고자 하는 탐미적 충동이 자살을 종용한다. 파트리스 르콩트의 영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The hairdresser's husband)]에서 안나 갈리에나는 행복의 정점(頂點)에서 뛰어내린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그녀는 나이 들어 추하고 사랑 없는 삶을 살까봐 두려워한다. 자신이 사랑 받을 수 있는 절정의 순간에 삶을 마감하려고 생각한 듯, 어느 비오는 날 거친 강물의 흐름 속으로 뛰어 내린다.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행복을 화석화할 수 있다는 그녀의 믿음이 죽음을 종용한다.

죽음을 생각하는 자는 삶을 생각하는 자가 아니던가. 그녀에게 있어서 죽음은 종말이 아니고 삶의 연장이다. 그녀의 죽음은 현재의 충만한 삶을 내세에까지 확장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늙은 그레타 가르보 또한 늙어가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혼자만의 세계에 칩거하며 한때 세인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제 아리따운 청춘의 미모를 화석화시킨다.

10대 후반에 이미 자신의 천재를 완성한 뒤 무기상(武器商)이 되어 이디오피아로 떠난 랭보, 그는 늙고 추하고 지리멸렬한 예술적 삶을 택하기보다 급격한 단절을 통해 저의 가장 빛나는 청춘이 보여주었던 예술적 천재를 완성한다. 바이런, 랭보, 버지니아 울프, 마야코프스키, 실비아 플라스, 가깝게는 기형도 이후로 모든 예술가들은 한번쯤 꿈꾸어 본다. 아름다움의 정점에서 뛰어내리는 섬광과도 같은 요절을.

랭보나 그레타 가르보에서처럼,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자살만이 자살은 아니다. 과거와의 급격한 단절을 통해 주체의 연속성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을 살해하는 심리적 자살도 있을 수 있다. 복수의 모티프를 소재로 한 멜로드라마에서 버림받은 여주인공은 청순가련형에서 일체의 감상을 용납하지 않는 냉혈동물로 자신을 변신시키기도 한다. 잘 나가는 엘리트에서 술로 연명하는 염세적 룸펜으로 변하는 비련의 남자 주인공도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내는 변혁을 꿈꾸던 혁명가에서 성과 이름을 갈고, 술과 마약으로 하루를 연명하는 폐인으로 자신을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이럴 때 변신은 세상에 대한 극도의 절망과 분노의 표현이다.

그러나 모든 자살은 사회적 사건이다

신체적 자살을 감행하든 심리적 자살을 감행하든 죽음은 내 개체만의 사건이 아니다. '나'란 이미 관계이기 때문.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치명적이고도 마약과도 같은 관계. 삶이 관성의 힘으로 흘러가는 것이라면, 그 관성의 힘은 관계의 질김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들뢰즈처럼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리든, 미지근한 욕조 속에서 손목을 긋든, 다량의 몰핀을 사용하든, 자살이란, 관계들의 가지를 쳐버리는 일. 그러므로 죽음이란, 타자로 향한 모든 관계의 망을 잘라버리고 '나'라는 순수한 개체성으로 온전하게 복귀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죽음만이 진정한 놓여남이므로.

그러나 스스로의 목숨을 끊기도 전에 우리는 다시 한번 관계의 악착같음에 절망할 것이다. 몇 번이나 죽음을 생각했지만 '저 강아지 같은 새끼들 때문에…'라고 생각하며 유서를 찢는 사람들, 죽음의 문턱에서 씁쓸하게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 인연인즉슨 곧 업이 아니던가(緣卽業), 생각해보면 얼마나 악착스런 관계들이 죽음으로 다가서는 우리들의 발목을 잡아채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기어코 죽음을 선택한다. 단호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 죽음으로 뛰어든다. 그들은 모든 관계가 이미 끝장났다고 판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하나의 관계가 끝장남과 동시에 모든 관계가 의미가 없어졌다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이 도저한 삶의 무의미성 앞에서 어떤 만류의 손길도 무기력할 뿐. 네가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아니라는 이 비합리적 열정의 주인공들, 그들은 노래할 것이다.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청춘은 끝이 났다고, 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고. 그리하여 나는 터널처럼 어둡노라고. 아무도 내게 이별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노라고. 더이상 아무것도 나를 이승에 주저앉힐 수 없으므로, 세상으로 향한 내 몸의 모든 문을 닫아걸겠노라고.

냉정하고 합리적인 선택과 판단에 의한 고상한 자살을 옹호했다던 몽테뉴는 말했다. "죽음은 우리와 관계가 없다. 우리의 죽음과도 관계가 없고 또 우리의 삶과도 관계가 없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에는 죽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은 우리의 삶과는 관계가 없으며, 우리가 죽을 때에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은 우리의 죽음과 관계가 없다."

무신론적인 자살자들은 믿는다. 죽음은 없다. 오직 무(無)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고통의 유(有)를 대체하는 무(無), 그것을 가질 권리가 나와 당신에게는 있다. 모든 이승의 관계를 책임질 의무가 당신에게 있듯이. 긍휼함이 있다면 마땅히 그것은, 살아있어 이 모든 딜레마를 짊어질 자들에게 바쳐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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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롬웰의 기도


청교도 혁명을  주동한 크롬웰은  식사 때마다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신이여, 제게 음식과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식욕을 함께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현상학자  홋설이 말했던가. 모든 의식은 곧  '무엇'에 대한 의식이라고. 의식의 한 형태인 욕망의 존재 양식  또한 그런 것은 아닌가. 대상에 의해  비로소 촉발되는 욕망, 욕망은  반드시 무엇에 대한  욕망이지 않은가. 욕망이, 욕망의  대상이 없이도 그  자체로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을까. 결국 당신이 없으면 내 욕망도 없다. 이  세계의 푸른 하늘과 삽상한  바람과 청초한 젖가슴과 푸른 사과 한  입의 시큼함과 첫눈의 설레임인 모든 당신들.
 
혹 신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려고 인간이라는 흙인형에 욕망이라는  가스(gas)를 주입한 것은 아닐까. 그런 인간의 욕망이 바벨탑을 쌓았을 때 징벌의 철퇴를  내리고, 먹구름의 양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엄청난 특권을 남용해서 대홍수로 인간에게 물을 먹이는 神에겐  과연 반성적 사고란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누군가는 대뜸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욕망이 끼어들 수 없는 순수한  아름다움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일백 프로의 진실을 담아낼 수 있는  명제가 존재한다면 논란은 그만큼 발붙일 곳이 없을 것이다.) 그런 반문은 정당하다. 그러나 욕망으로 똘똘 무장한 인간들에게  그게 쉬운 일인가.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인간이 어디 가능한 법이기나 한가. 내심 老子然, 부처然, 君子然 해보지만 돌로 찍어누를 수 없는 욕망의 바이러스란 분명 있는 것이 아닌가. 가만 수수방관하고 있자니  이 놈들은 무한증식한다. 그렇다고 해서 돌로  눌러 죽이자니 뻗세기가  닭 뼈다귀다. '열흘  굶어 도적놈  아닌 사람 없다'라는 속담은 어떤 철학자의 인간관보다  인간의 이해에 훨씬 더 접근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사람이 있다. 지질학자나  해양학자나 고고학자나 천문학자가 되었으면 하는 사람. 지질학자가 된다면 먼 시간의 단층들을 캐러 다닐 것이고, 해양학자가 된다면 깊은 바다를  탐사할 것이고, 고고학자가 된다면 시간의 심연 속을 헤집고 다닐 터이고, 천문학자가 된다면 1만 광년 이상의 먼 거리에 시선을 돌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욕망이 단층 속에, 해저 속에, 시간의 심연 속에 1만 광년 바깥의 우주 속으로 멀어져 갈 것인가.
 
불행하게도 욕망은 기생충처럼 인간의 몸을 숙주로 한다. 이 기생충들이 왜 인간을 마다할 것인가. 이 고집 센 기생충들을 제대로 통어할 수 있는 관리자가 있을 수 있을까. 이 기생충들로 해서 몸은 언제나 조금씩은 삐걱대고 징징거리는 것이다. 이 삐걱대고 징징거리는 몸을 아름답다고 해야할지 징그럽다고 해야할지.
 
 
자전거를 탄 풍경-너에게 난 나에게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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