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그 어두운 길항

힘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에너지를 다른 에너지로 전화시킬 수 있다는 것, 삶이 있는 한 우리는 변화를 믿는다. 대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런 믿음을 갖게 한 것일까. 씨앗이 움트고 다시 그 움이 무성한 나무로 자라나는, 저 자연의 순환과 변전(變轉)이 내 몸 안에서도 차별 없이 구현되리라는 데서 오는 믿음일까.

가련하고 순진한 기대! 삶은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탐스럽게 변신시켜주지 않는다. 거대한 관성의 힘으로 삶은 오히려 우리를 옥죌 뿐이다. 성능 좋은 빨래집게처럼 삶이 우리를 놓아주지 않을 때, 그래서 우리의 삶이 병든 나무처럼 나부낄 때, 우리는 감히 삶의 사막인 죽음을 꿈꾼다. 내 심장은 감히 탄환을 동경한다.

자살은 실패의 고백이다

자살은 한 사람의 욕망과 좌절의 도저한 깊이를 보여준다.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분리공포증에 사로잡힌 아이들처럼 우리들은 익숙한 세계에 집착한다. 뜻하지 않은 사업의 몰락, 오랫동안 가슴속에 품어왔던 연인과의 이별, 사랑하는 가족의 급작스런 죽음은 한 사람의 익숙한 일상을 파괴한다. 인간들은 이 돌연하고도 낯선 세계에 공포를 느낀다. 이럴 때, 자살은 무차별적으로 내게 엄습하는 공포의 시간을 거부하고 과거의 안온했던 시간을 껴안으려는 한 나약한 인간의 안쓰러운 노력이다.

누구에게나 고통과 난관을 피해 시간의 자궁으로 회귀하려는 퇴행의 본능은 있다. 이런 퇴행은, 행복을 껴안음으로써 쾌락의 양을 늘리기보다 죽음을 껴안음으로써 고통의 양을 줄이기 위한,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쾌락 추구의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자살이란 아무런 준비도 없는 내게 해일처럼 닥쳐오는 고통의 시간들을 뿌리치려는 실패자들의 자구(自救) 행위다.

빠스칼은 말했던가.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한다. 스스로 목을 매려는 사람까지도." 죽음 이후가 불행과 고통이라면 의도적인 죽음은 없을 것이다. 죽음 이후가 낙원이 아닐지라도, 최소한 죽음 이후가 무(無)라면, 적어도 죽음이 고통스런 이승보다 못할 것이 없다는 계산이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들의 판단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고통을 멀리하고 행복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면 지독한 고통을 산뜻하게 끝낼 권리를 부정해선 안 된다. 문제는 언제나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또한 자살은 무언의 항의다. 자살자들은 죽음을 통하여 항상 무엇인가를 말한다. 그 목소리는 진지하다. (대체 진지하지 않은 자살이 어디 있을까?) 사랑을 잃은 자는 자살을 통하여 저의 연인에게 말한다. 상처를 입은 자는 자살을 통하여 상처를 준 자에게 말한다. 모든 피학자는 자살을 통하여 가학자에게 말한다. 심리학자 Erwin Stengel의 "타인을 살해한다거나 최소한 타인이 죽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자살을 하지 않는다"라는 발언은 이런 유의 자살에 이르러 비로소 적실성을 얻는다.

나를 파괴함으로써 당신을 파괴하고 싶다는 욕망, 피학의 열정은 가학의 욕망에 다름 아닌 것.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매저키즘은 내 주검을 바라보는 자의 내면이 오열과 참회 속에 찢어지기를 바라는 새디즘과 먼 거리에 있지 않다. 이런 자살을 택할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제 주검을 바라보며 태연자약한 가학자들의 모습이다.

자살은 평가의 문제가 아니라 결단의 문제

광야에서 크게 한번 외치고 자신의 삶의 문을 쾅 닫아거는 순교자들의 자살도 있다. 생물학적 죽음이란 엄격히 내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필연에 군말 없이 복종하는 일, 내 의지와 아랑곳없이 나를 이끌어 가는 저 운명의 무시무시한 힘에 고스란히 끌려가는 것이다. 절로 가고 절로 오며, 절로 태어나며 절로 죽는 것이 삶이고 죽음일진대, 순순히 때를 기다려 떠남에 무슨 구차스런 호들갑을 두리요, 하는 식의 도사적(道士的)인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겠지만, 삶이 내 의지와 자유의 연장선상에 있어주지 못할 때, 하다못해 죽음만이라도 철저한 내 기획과 의지의 결실이기를 원하는 자가 있다면, 굳이 말릴 일은 아니다.

굳이 계몽적이고 수다스런 언변으로 삶을 홍보할 일만은 아니다. 하얼빈 역으로 향하는 안중근 열사에게, 제 몸에 휘발유를 끼얹는 전태일 열사에게 '생명은 순교보다 더 거룩하다'는 훈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문익환 목사의 말대로 열사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생명의 아낌없는 완전연소", 총체적 투입이다, 제가 가진 판돈을 한번에 거는 배팅이다, 그리고는 끝이다, 침묵이고 적막이다. "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毁傷孝之始也"라는 효경의 덕목이 있긴 하지만 순교자들이 누군가. 그들은 더 큰 원칙을 위해 자잘한 상식쯤은 성큼 뛰어넘는 자가 아니던가. 어떤 종교적 만류도 이들을 막을 수는 없다. 순교자들은 종교적 원칙을 뛰어넘음으로써 오히려 종교를 완성한다.

하지만 순교의 죽음을 이기적인 자살보다 윗길로 치는 데에는 생산성이나 효용성으로 사물의 가치를 재단하려는 실용주의가 그 저변에 깔려 있다. 한 개체의 죽음마저도 '쓸모'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이런 식의 평가란 온당하기나 한 것인지. 왜 우리의 죽음은 고상한 대의명분에만 바쳐져야 하는 것인지. 왜 집단을 위한 이타적 죽음만이 '희생'이란 이름으로 기림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순교에서 개죽음까지', 왜 죽음마저도 철저하게 등급화시키고 위계화시켜야 하는 것인지.

물론 이런 식의 논변이 순교자들의 죽음을 폄하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대의명분을 향한 순교자들의 죽음이 여타의 뭇죽음을 깎아내릴 수는 없다. 어떤 죽음이든 그 죽음엔 실존의 총중량이 얹혀 있는 것이므로. 그러므로 우린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자살은 결단의 문제이지 평가의 문제가 아니라고. 결단의 비장함과 그에 이르기까지의 명징한 선택이 문제인 것이라고. 명징한 선택? 그렇다. 오류를 밥 먹듯 하는 범인(凡人)들에게 죽음이란 삶보다 더 난해한 법이다.

자살은 삶이 쏘아올리는 폭죽이다

한편 죽음으로써 미를 완성시키고자 하는 탐미적 충동이 자살을 종용한다. 파트리스 르콩트의 영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The hairdresser's husband)]에서 안나 갈리에나는 행복의 정점(頂點)에서 뛰어내린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그녀는 나이 들어 추하고 사랑 없는 삶을 살까봐 두려워한다. 자신이 사랑 받을 수 있는 절정의 순간에 삶을 마감하려고 생각한 듯, 어느 비오는 날 거친 강물의 흐름 속으로 뛰어 내린다.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행복을 화석화할 수 있다는 그녀의 믿음이 죽음을 종용한다.

죽음을 생각하는 자는 삶을 생각하는 자가 아니던가. 그녀에게 있어서 죽음은 종말이 아니고 삶의 연장이다. 그녀의 죽음은 현재의 충만한 삶을 내세에까지 확장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늙은 그레타 가르보 또한 늙어가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혼자만의 세계에 칩거하며 한때 세인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제 아리따운 청춘의 미모를 화석화시킨다.

10대 후반에 이미 자신의 천재를 완성한 뒤 무기상(武器商)이 되어 이디오피아로 떠난 랭보, 그는 늙고 추하고 지리멸렬한 예술적 삶을 택하기보다 급격한 단절을 통해 저의 가장 빛나는 청춘이 보여주었던 예술적 천재를 완성한다. 바이런, 랭보, 버지니아 울프, 마야코프스키, 실비아 플라스, 가깝게는 기형도 이후로 모든 예술가들은 한번쯤 꿈꾸어 본다. 아름다움의 정점에서 뛰어내리는 섬광과도 같은 요절을.

랭보나 그레타 가르보에서처럼,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자살만이 자살은 아니다. 과거와의 급격한 단절을 통해 주체의 연속성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을 살해하는 심리적 자살도 있을 수 있다. 복수의 모티프를 소재로 한 멜로드라마에서 버림받은 여주인공은 청순가련형에서 일체의 감상을 용납하지 않는 냉혈동물로 자신을 변신시키기도 한다. 잘 나가는 엘리트에서 술로 연명하는 염세적 룸펜으로 변하는 비련의 남자 주인공도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내는 변혁을 꿈꾸던 혁명가에서 성과 이름을 갈고, 술과 마약으로 하루를 연명하는 폐인으로 자신을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이럴 때 변신은 세상에 대한 극도의 절망과 분노의 표현이다.

그러나 모든 자살은 사회적 사건이다

신체적 자살을 감행하든 심리적 자살을 감행하든 죽음은 내 개체만의 사건이 아니다. '나'란 이미 관계이기 때문.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치명적이고도 마약과도 같은 관계. 삶이 관성의 힘으로 흘러가는 것이라면, 그 관성의 힘은 관계의 질김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들뢰즈처럼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리든, 미지근한 욕조 속에서 손목을 긋든, 다량의 몰핀을 사용하든, 자살이란, 관계들의 가지를 쳐버리는 일. 그러므로 죽음이란, 타자로 향한 모든 관계의 망을 잘라버리고 '나'라는 순수한 개체성으로 온전하게 복귀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죽음만이 진정한 놓여남이므로.

그러나 스스로의 목숨을 끊기도 전에 우리는 다시 한번 관계의 악착같음에 절망할 것이다. 몇 번이나 죽음을 생각했지만 '저 강아지 같은 새끼들 때문에…'라고 생각하며 유서를 찢는 사람들, 죽음의 문턱에서 씁쓸하게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 인연인즉슨 곧 업이 아니던가(緣卽業), 생각해보면 얼마나 악착스런 관계들이 죽음으로 다가서는 우리들의 발목을 잡아채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기어코 죽음을 선택한다. 단호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 죽음으로 뛰어든다. 그들은 모든 관계가 이미 끝장났다고 판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하나의 관계가 끝장남과 동시에 모든 관계가 의미가 없어졌다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이 도저한 삶의 무의미성 앞에서 어떤 만류의 손길도 무기력할 뿐. 네가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아니라는 이 비합리적 열정의 주인공들, 그들은 노래할 것이다.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청춘은 끝이 났다고, 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고. 그리하여 나는 터널처럼 어둡노라고. 아무도 내게 이별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노라고. 더이상 아무것도 나를 이승에 주저앉힐 수 없으므로, 세상으로 향한 내 몸의 모든 문을 닫아걸겠노라고.

냉정하고 합리적인 선택과 판단에 의한 고상한 자살을 옹호했다던 몽테뉴는 말했다. "죽음은 우리와 관계가 없다. 우리의 죽음과도 관계가 없고 또 우리의 삶과도 관계가 없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에는 죽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은 우리의 삶과는 관계가 없으며, 우리가 죽을 때에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은 우리의 죽음과 관계가 없다."

무신론적인 자살자들은 믿는다. 죽음은 없다. 오직 무(無)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고통의 유(有)를 대체하는 무(無), 그것을 가질 권리가 나와 당신에게는 있다. 모든 이승의 관계를 책임질 의무가 당신에게 있듯이. 긍휼함이 있다면 마땅히 그것은, 살아있어 이 모든 딜레마를 짊어질 자들에게 바쳐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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