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롬웰의 기도


청교도 혁명을  주동한 크롬웰은  식사 때마다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신이여, 제게 음식과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식욕을 함께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현상학자  홋설이 말했던가. 모든 의식은 곧  '무엇'에 대한 의식이라고. 의식의 한 형태인 욕망의 존재 양식  또한 그런 것은 아닌가. 대상에 의해  비로소 촉발되는 욕망, 욕망은  반드시 무엇에 대한  욕망이지 않은가. 욕망이, 욕망의  대상이 없이도 그  자체로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을까. 결국 당신이 없으면 내 욕망도 없다. 이  세계의 푸른 하늘과 삽상한  바람과 청초한 젖가슴과 푸른 사과 한  입의 시큼함과 첫눈의 설레임인 모든 당신들.
 
혹 신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려고 인간이라는 흙인형에 욕망이라는  가스(gas)를 주입한 것은 아닐까. 그런 인간의 욕망이 바벨탑을 쌓았을 때 징벌의 철퇴를  내리고, 먹구름의 양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엄청난 특권을 남용해서 대홍수로 인간에게 물을 먹이는 神에겐  과연 반성적 사고란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누군가는 대뜸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욕망이 끼어들 수 없는 순수한  아름다움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일백 프로의 진실을 담아낼 수 있는  명제가 존재한다면 논란은 그만큼 발붙일 곳이 없을 것이다.) 그런 반문은 정당하다. 그러나 욕망으로 똘똘 무장한 인간들에게  그게 쉬운 일인가.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인간이 어디 가능한 법이기나 한가. 내심 老子然, 부처然, 君子然 해보지만 돌로 찍어누를 수 없는 욕망의 바이러스란 분명 있는 것이 아닌가. 가만 수수방관하고 있자니  이 놈들은 무한증식한다. 그렇다고 해서 돌로  눌러 죽이자니 뻗세기가  닭 뼈다귀다. '열흘  굶어 도적놈  아닌 사람 없다'라는 속담은 어떤 철학자의 인간관보다  인간의 이해에 훨씬 더 접근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사람이 있다. 지질학자나  해양학자나 고고학자나 천문학자가 되었으면 하는 사람. 지질학자가 된다면 먼 시간의 단층들을 캐러 다닐 것이고, 해양학자가 된다면 깊은 바다를  탐사할 것이고, 고고학자가 된다면 시간의 심연 속을 헤집고 다닐 터이고, 천문학자가 된다면 1만 광년 이상의 먼 거리에 시선을 돌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욕망이 단층 속에, 해저 속에, 시간의 심연 속에 1만 광년 바깥의 우주 속으로 멀어져 갈 것인가.
 
불행하게도 욕망은 기생충처럼 인간의 몸을 숙주로 한다. 이 기생충들이 왜 인간을 마다할 것인가. 이 고집 센 기생충들을 제대로 통어할 수 있는 관리자가 있을 수 있을까. 이 기생충들로 해서 몸은 언제나 조금씩은 삐걱대고 징징거리는 것이다. 이 삐걱대고 징징거리는 몸을 아름답다고 해야할지 징그럽다고 해야할지.
 
 
자전거를 탄 풍경-너에게 난 나에게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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