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영혼의 중앙역   -박정대

키냐르, 키냐르……
부르지 않아도 은밀한 생은 온다
음악처럼, 문지방처럼, 저녁처럼
네 젖가슴을 흔들고 목덜미를 스치며
네 손금의 장강 삼협을 지나 네 영혼의
울타리를 넘어, 침묵의 가장자리
그 딱딱한 빛깔의 시간을 지나
욕망의 가장 선연한 레일 위를 미끄러지며
네 육체의 중앙역으로 은밀한 생은 온다
저녁마다 너를 만나던 이 지상의 물고기 자리에서
나는 왜 네 심장에 붙박이별이 되고 싶었는지
네 기억의 붉은 피톨마다 은빛 비늘의
지문을 남기고 싶었는지
내가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한 마리 외로운 몸짓으로
네 몸을 거슬러 오를 때도
내 영혼은 왜 또 다른 생으로의
망명을 꿈꾸고 있었던 것인지
생이 더 이상 생일 수 없는 곳에서,
생이 그토록 생이고만 싶어하는 곳에서
부르지않아도 은밀한 생은 온다
은밀해서 생일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확실한 생이
겨자씨처럼 작은 숨결을 내뿜으며
덜컹거리는 심장의 비밀을 데리고
저녁처럼, 문지방처럼, 음악처럼
네 영혼의 중앙역으로 은밀한 생은 온다
 
 
가을 저녁寺  -박정대
 
나는 걸어서 가을저녁寺에 당도합니다
한 사내가 물거울에 자신의 낯을 비추어보며 추억을 빨래하고 있는 가을 저녁입니다
잉걸불처럼 타들어가는 개심사 배롱낭구 꽃잎에는 어느 먼 옛날 백제 처녀의 마음도 하나 들어 있을 테지요
저녁 예불을 드리던 개심사 범종 소리는 서른두 번째에서 한참을 머뭇거립니다 마지막 종소리는 가을 저녁寺로 불어오는 바람에게나 내어주고요
가을 저녁寺에 호롱불이 돋는 地上의 유일한 저녁입니다
한 사내가 연못거울에 어두워지는 낯을 비추어보며 끝내 자신이 걸어가 당도할 집을 생각하는 참 고요하고 투명한 가을 저녁입니다
나는 걸어서 가을 저녁寺를 내려옵니다
 
장만옥  -박정대
 
    멀리 가는 길 위에 네가 있다
    바람 불어 창문들 우연의 음악을 연주하는 그 골목길에
    꽃잎 진 복숭아나무 푸른 잎처럼 너는 있다
    어느 날은 잠에서 깨어나 오래도록 네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랑은 나뭇잎에 적은 글처럼 바람 속에 오고 가는 것
    때로 생의 서랍 속에 켜켜이 묻혀 있다가
    구랍의 달처럼 참 많은 기억을 데불고 떠오르기도 하는 것
    멀리 가려다 쉬고 싶은 길 위에 문득 너는 있다
    꽃잎 진 복숭아나무들이 긴 목책을 이루어
    푸른 잎들이 오래도록 너를 읽고 있는 곳에
    꽃잎 진 내 청춘의 감옥,
    복숭아나무 그 긴 목책 속에

사곶 해안 -박정대
 
고독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
이곳은 마치 바다의 문지방 같다
주름진 치마를 펄럭이며 떠나간 여자를
기다리던 내 고독의 문턱
아무리 걸어도 닿을 수 없었던 生의 밑바닥
그곳에서 橫行하던 밀물과 썰물의 시간들
내가 안으로, 안으로만 삼키던 울음을
끝내 갈매기들이 얻어가곤 했지
모든 걸 떠나보낸 마음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
이렇게 넓은 황량함이 내 고독의 터전이었다니
이곳은 마치 한 생애를 다해 걸어가야 할
광대한 고독 같다. 누군가 바람 속에서
촛불을 들고 걸어가던 막막한 생애 같다
그대여, 사는 일이 자갈돌 같아서 자글거릴 땐
백령도 사곶 해안에 가볼 일이다
그곳엔 그대 무거운 한 생애도 절대 빠져들지 않는
견고한 고독의 해안이 펼쳐져 있나니
아름다운 것들은 차라리 견고한 것
사랑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에도
그 뒤에 남는 건 오히려 부드럽고 견고한 生
백령도, 백년 동안의 고독도
규조토 해안 이곳에선
흰 날개를 달고 초저녁별들 속으로 이륙하리니
이곳에서 그대는 그대 마음의 문지방을 넘어 서는
또 다른, 生의 긴 활주로 하나를 갖게 되리라
사랑이 빠져 나간 뒤 남은 부드럽고 견고한 생,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대 문지방을 넘어서는 또 다른 활주로는 무엇인가?
 
 
구름 저편에 있는 나  -박정재

  구름 저편엔 뭐가 있나, 하루 종일 나무를 바라보던 마음이, 나뭇가지에 날아든 새처럼, 딱딱한 입술로 중얼거리네, 새들은 날아다니는 저마다의 섬인 거, 그 섬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물결을, 공기의 물결을 밀어서, 누군가의 생각 한가운데로 몰아가고 있는 거, 구름 저편엔 뭐가 있나, 바다, 푸른 바다, 검은, 푸른 바다, 검은, 깊은 푸른 그녀, 어젯밤 누가 그녀를 헤엄쳐 건넜는가, 오늘은 또 누가 그녀 속에서 익사하는가, 추억의 헛간 같은, 구름 저편엔 뭐가 있나, 호수를 닮은 영혼들, 머리카락 휘날리며 바람 속을 달려가는 나무들, 물 속의 나무들, 나무들 속을 흐르는 격렬한 침묵들, 오래된 추억 때문에 태양은 더욱 더 뜨거워져가는데, 바다, 그녀의 정맥 속으론 왜 차가운 구름장들이 흐르는가, 구름의 발바닥들, 잎사귀의 무릎들, 아니 <나문닙>의 관절들, 그 동그란 발음 저편엔 도대체 뭐가 있나, 나와 나 사이엔 혹은 나와 나 사이엔, 뭐가 있나, 흐르는, 뭉쳐진 구름들, 흩어질 시간들, 저편엔 도대체 뭐가 있나, 거기에서 누가 침묵의 노래를 부르나, 도대체 누구인가, 도대체 깊은, 아주 먼, 먼 먼, 나. 
 

 
 
버찌는 벚나무 공장에서 만든다 -박정대
 
촛불을 켜들고, 나는 이제서야 내가 만든 음악을 듣는다
그녀는 지금 밥 딜런 공장에서 만든 노래를 듣고
그는 밤새도록 알베르 카뮈 공장에서 만든 책을 읽는다
맥주는 맥주 공장에서 만든 것이다, 휴일에 만든 맥주는 불량품이 많다
그 많던 벚꽃잎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저 나뭇잎 공장에서는 왜 백만 년 전부터 고독의 음악만 만들고 있나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사랑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나는 대답한다, 백년 동안 고독해지세요
누군가 다시 나에게 묻는다, 고독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백년 동안, 사랑을 하세요
그러나 지금은 버찌들도 다 떨어지고 벚나무 공장도 문을 닫을 시간, 노을이 지는 그대의 아름다운 공장으로 가서 누군가 밤새도록 고요히 촛불을 밝히는 시간
음악이 있는 곳에서, 음악이 다 떨어진 곳에서
촛불을 켜 들고, 그래도 버찌는 벚나무 공장에서 만든다
 

음악들- 박정대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눈물도 음악이 될수 있다면  -박정대

밥 딜런의 노래 듣고 싶어,
전속력으로 차를 몰아 42번 국도를 지나왔다.
지나오는 길에도 생은 내 갈비뼈 사이에서 푸른 잎들을 꺼내어
필사적으로 사랑을 흔든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눈물도 음악이 될 수 있다면,
난 참으로 오래간만에 음악을 들은 것이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불멸이 아니어서 -박정대
 
그날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낡은 태양의 오후를 지나 또 무수한 상점들을 지나
거리에 갔으므로 너무나 지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등 뒤로는 음악 같은 나뭇잎들이 뚝뚝 떨어지고,
서러운 풍경의 저녁이 짐승처럼 다가오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성냥을 꺼내어 한 점의 불꽃을 피워 올렸다
영원은 그렇게 본질적인 불꽃 속에 숨어 있다가
어느 한순간 타오르기도 한다

그날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아니
그 날 내가 불멸을 찾아 나섰는지도 모른다.
뿌연 공기들을 헤치며 이 지상에는 없는 시간을
나는 찾아 나섰다

내가 한 마리의 식물처럼 고요했던 시간,
내가 한 그루의 짐승처럼 그렇게 타올랐던 시간,
바람과 불의 시간을 지나 공기의 정원에서 내가 얼음꽃을
피워 올렸던 그 단단한 침묵의 시간들 찾아 나섰다
그런데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늘 불멸을 꿈꾸었지만, 그렇게 불멸을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으므로, 나는 오히려 불멸이 너무 낯설었는데,
어쨌든 불멸은 내가 갔던 거기에, 그렇게 당도해 있었다
내가 불멸이니, 그때 너무나 당황했으므로 나는 속으로 그렇게
물어 보았는지도 모른다
불멸이 이제 나에게 당도했으므로 나는 어찌할 줄을 모른다.
오랫동안 불멸을 꿈꾸었지만 불멸이 나에게 당도했을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불멸 앞에서 이 세계의 본질적인 사랑을 생각한다.
불멸도, 사랑도, 내 사랑으로는 그저
저 스스로 존재하는 그 무엇일 뿐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나에게 또
불멸의 아름다운 시를 쓰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쓰지 않는다. 불멸의 아름다움이란,
느끼는 자의 내면 속에서 수시로 숨쉬고 존재하며,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가 아니다
시가 아니므로 불멸이 아니고 불멸이 아니므로,
이것은 불멸의 시가 된다
그렇다. 당신이 이글에서 시를 읽어내려고 했다면
당신은 이미 시인이다
그러나 시 아닌 그 무엇을 읽어냈다면
이미 당신은 또 하나의 불멸인 것이다.

그대를 찾아 나섰다가 나는 불멸을 만났다,
그러나 나는 아직 불멸이 몹시도 불편하고 어색하다
불멸이 나를 찾아 왔을 때 나는 불멸이 아니었지만
나도 언젠가는 내가 꿈꾸던 불멸에 닿을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저 별들에게로 돌아갈것이므로
나도 언젠가는 불멸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먼 훗날, 태양이 식어가는 낡고 오래된 천막같은
밤하늘의 모퉁이에서 서러운 별똥별로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나는 아직 살아 있으므로
나는 불멸이 아니라 오래도록 너의 음악이다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그때까지 불멸이여, 내가 사랑이 아니더라도 나를 꿈꾸어다오 
 
아무르 강가에서  -박정대
 
그대 떠난 강가에서
나 노을처럼 한참을 저물었습니다
초저녁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낮이
밤으로 몸 바꾸는 그 아득한 시간의 경계를
유목민처럼 오래 서성거렸습니다
 
그리움의 국경 그 허술한 말뚝을 넘어 반성도 없이
민가의 불빛들 또 함부로 일렁이며 돋아나고 발 밑으로는
어둠이 조금씩 밀려와 채이고 있었습니다, 발 밑의 어둠
내 머리 위의 어둠, 내 늑골에 첩첩이 쌓여 있는 어둠
내 몸에 불을 밝혀 스스로 한 그루 촛불나무로 타오르고 싶었습니다
 
그대 떠난 강가에서
그렇게 한참을 타오르다 보면 내 안의 돌멩이 하나
뜨겁게 달구어져 끝내는 내가 바라보는 어둠 속에
한 떨기 초저녁별로 피어날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초저녁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야광나무 꽃잎들만 하얗게 돋아나던 이 지상의 저녁
정암사 적멸보궁 같은 한 채의 추억을 간직한 채
나 오래도록 아무르 강변을 서성거렸습니다
별빛을 향해 걷다가 어느덧 한 떨기 초저녁별로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열대야 --박정대
 
곳은 창문 너머로
야자수 같은 게 흔들거리는 슬픈 열대야
아니 자세히 보면 수족관의 물풀들이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어
지금은 오래된 유행가처럼
어디선가 한 소절 바람이 불어온다
슬픈 열대야,
나 지금 대야에 찬물을 받아 세수를 하고 있어
지금은 안 보이는,
너를 보기 위해 눈동자를 씻고 있어
그러나 내 발밑
깊은 땅속으로는
스무 량을 단 밤열차가
기적도 없이 흘러가지, 전갈처럼
제 몸을 물어뜯어서라도
사랑하고 싶을 때가 있어, 사막을
통과하는 바람처럼
뜨거운 목울대로 울고 싶을 때도 있는 거야
가끔은, 인간이 창문 너머로 보이기도 한다
이곳은 슬픈 열대야 




Eva Cassidy - Ain't No Sunsh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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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2-22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은 들리지 않지만 시 좋아서 퍼갈게요.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비가 내리지, 하는 이 시인의 시가

생각나네요.^^
 

우울한 날에 읽는 백석은 큰 위로가 된다
그는 아무것도 과장하지 않는다
엄살떨지 않는다
바로 그 의연함에 위로가 있다
그러나 그 의연함은 얼마나 많은 우울을 품고 있는 것일까
피로한 자는 저렇게 말이 없는데........무참하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 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 인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elliott smith - miss misery

I'll fake it through the day
나는 시간을 통해  속일거야

With some help from Johnny Walker Red
Johnny Walker Red로부터의 약간의 도움으로

Send the poison rain down the drain
배수관밑으로 독 비를 흘려보내는 것

To put bad thoughts in my head
좋지 않은 생각들을 나의 머리에 넣은 것

Two tickets torn in half
두 표들은 반으로 찢겨졌어

And a lot of nothing to do
그리고 할 것은 없어 

Do you miss me, Miss Misery
미스 Miesery , 나를 그리워하니?

Like you say you do
당신이 말한것 처럼 행동해

A man in the park
공원안의 사람

Read the lines in my hand
내 손안의 글을 읽어

Told me I'm strong
나는 강하다고 내게 말해

Hardly ever wrong I said
내가 말한 것은 거의 틀리지 않아

"Man you mean--"
" 네가 의미하는 사람 -"

You had plans for both of us
너는 우리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어

That involved a trip out of town
그것이 도시 밖으로의 여행을 포함하지

To a place I've seen in a magazine
내가 잡지에서 봤던 장소

That you'd left lyin' around
당신이 주변에 lyin'를 떠난 것
I don't have you with me
나는 나와 함께인 널 가지고 있지 않아

But I keep a good attitude
그러나 나는 좋은 태도를 유지하지

Do you miss me, Miss Misery
미스 Misery , 당신이 나를 그리워하니?

Like you say you do
네가 말한것처럼 해

I know you'd rather see me gone
난 알아 넌 차라리 죽은 날 보길 바라겠지

Than to see me the way that I am
그리고 나를봐 그 길에 내가 있어

But I am in your life anyway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네 인생에 있어

Next door the T.V.'s flashing
이웃집 T.V.가 번쩍여

Blue frames on the wall
벽 위의 푸른 틀들

It's a comedy of errors you see
이건 네가 보는 잘못들의 희극이야

It's about taking a fall
이제 대략 가을이되고 있어

To vanish into oblivion
망각으로 사라지는 것

It's easy to do
하기엔 쉬워

And I tried to leave but you know me
그리고 내가 떠나려고 노력했지만 넌 나를 알아

I come back when you want me to.
나는 네가 나를 바랄때 돌아와

Do you miss me, Miss Misery
미스 Misery , 당신이 나를 그리워합니까

Like you say you do
네가 말한것처럼 너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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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a & the Rhythm -Iron an Wine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 송재학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홑치마 같은 기대였는데
치자향이 水路를 따라왔네
그는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무덤가 술패랭이 분홍색처럼
저녁의 입구를 휘파람으로 받아주네
결코 눈뜨지 말라
지금 한쪽마저 봉인되어 밝음과 어둠이 뒤섞이는 이 숲은
나비떼 가득 찬 옛날이 틀림없으니
나비 날개의 무늬 따라간다네
햇빛이 세운 기둥의 숫자만큼 미리 등불이 걸리네
눈뜨면 여느 나비와 다름없이
그는 소리 내지 않고도 운다네
그가 내 얼굴 만질 때
나는 새 순과 닮아서 그에게 발돋음하네
때로 뾰루지처럼 때로 갯버들처럼
 
* 산벚나무가 씻어낸다 - 송재학

다 팽개치고 넉장거리로 눕고 싶다면
꽃핀 산벚나무의 솔개그늘로 가라
빗줄기가 먼저 꽂히겠지만
마음 구부리면 빈 틈이 생기리라
어딘들 곱밉든 군식구가 없겠니
그곳에도 두 가닥 기차 레일 같은 운명을 종일 햇빛이 달구어내지
먼저 온 사람은 나무둥치에 파묻혀 편지를 읽는다
風磬이 소리내는 건 산벚나무도 속삭일 수 있다네
달빛이나 바람이 도와주지만
올해 더욱 가난해진 산벚나무家

울어라 울어라, 꽃핀 산벚나무가 씻어내는 아우성
봄비가 준비된 밤이다



* 풍금
   - 송재학

풍금 소리가 유리창을 깬다
그 뜰은 개망초로 덮였다
약한 내 뼈는 굽었고
나는 그늘만 골라 다닌다
슬픔조차 없는 집에 풍금이 울린다
깊은 잠을 기웃거리는 明暗의 건반을 거슬러 가면
아직 어린 내가 있다
거미는 누추한 머리 속과 무덤을 집으로 만든다
빈 방의 영혼마저 불태우는 날들이 지나가고
희게 부서지는 저 햇빛 사이 먼지들이 나의 밥이던 때!
쓸쓸함을 거쳐야만 닿을 수 있는
그 집까지의 발자국 소리를 위해 어둠은 있다
몇 십 년이 지나도 검고 흰 건반은
푸르고 맑은 물소리를 찾아낸다
그 집의 방들은 늘 비어서 나를 기다린다


* 얼굴을 붉히다
    - 송재학

임하댐 수몰지구에서 붉은 꽃대가 여럿 올라온 상사화를 캤다 상사화가 구근을 가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놀랍도록 크고 흰 구근을 너덜너덜 상처 입히고야 그놈을 집에 가져올 수 있었다. 아무도 없었지만 얼굴은 붉어지고 젖은 신문지 속 구근의 근심에 마음을 보태었다 깊은 토분을 골라 상사화를 심었어도 아침에 시들한 꽃대를 들여다보면 저녁에는 굳이 외면하고 말았다 여기저기 물어 비료며 살충제며 잔뜩 뿌리고 잔손을 대었지만 상사화의 꽃을 보고자 함은 물론 아이었다 살릴 수만 있다면 꽃은 아주 늦어도 대수롭잖다고 다짐했다 상사화 꽃대가 차례로 시들어갈 때 내 귀가는 늦어졌다 한밤중에 일어나 바깥의 상사화를 들여다보고 한숨쉬는 내 불안을 알아보는 식구는 없었다 나는 꽃 필 상사화에 기대어 이제는 물 아래 잠긴 땅으로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언젠가 이곳도 물에 잠기리라 결국 내가 시든 줄기를 토분에서 뽑아냈을 때 상사화는 그러나 완전한 구근과 수많은 잔뿌리를 토해 내었다 그 아래 두근거리는 둥근 세계가 숨어 있었으니, 시든 꽃대 대신 뽀족한 푸른 잎이 구근과 무거움을 딛고 겨울을 준비하였으니! 내 근심은 겨우 꽃의 지척에만 머물렀던 것이다 나는 얼굴을 붉히고 상사화가 스스로의 꽃대를 말라죽인 이유를 사람의 말로 중얼거려보았다


* 봄 밤 
  -송재학

봄밤은 비애를 만진다
며칠 내내 빗소리
그 집은 지붕이 낮다
다리 저는 늙은 남자는 이불을 펴고
나이 찬 딸을 기다린다
딸이 엊그제 들여논 약장의
서랍은 스무 개도 넘는 약장의
옻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약장의
서랍마다 빗물을 채우고도
비는 오래도록 그치지 않는다
도둑괭이가 암컷을 쫓아가버린 밤
연탄냄새마저 비에 막혀 고인다
마당 구석의 꽃들이 피우는 것은 봄


* 격렬함을 감추다
  - 송재학

나는 바다를 달래려 합니다 어리석은 줄 알면서 해뜨는 바다를 급히 보러 왔습니다 영산홍이 꽃 피어 며칠을 대신 버텨주기도 했습니다 그 붉은 꽃이 시들기 전 도망치듯 이곳에 오고야 말았습니다 영산홍 밖에 나오면 무엇도 감추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마음의 시작된 아우성임을 깨닫습니다 내 격렬함을 통과하던 영산홍의 만개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영산홍 가득 핀 세상이란 얼마나 답답합니까 가장 붉은 꽃 한송이 꺾어 화병에 꽂았습니다, 아닙니다 이 꽃은 역시 제 붉음이란 운명 사이에 휩싸여야 합니다 그것은 영산홍의 오랜 비밀입니다


* 목계 길에 물어보면
  - 송재학

목계 길에 물어 보면
아픈 사람 달래는 적막한 은빛을 볼 수 있다
눈 내리는 목계쯤 오면
대처의 제 새댁 대신
늙은 여자와 사는 그를 볼 수 있다
늙은 여자와 버릇없는 아이들 등쌀에 떠밀려
그믐치에 기대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내가 있다


* 동백
   - 송재학

한때 이른봄은 천산북로의 사막길이었다
지금 이른봄은 동백이 병을 다스리는 일에 간섭한다

봄 강이 열어놓은 빛의 체 속으로
슬픈 일이 계속되면서
봄 하늘마저 문득 어두워질 때
동백이
그 빛깔만으로 우레 앞에 나선다
누군가 이곳에 되돌아와
흰옷을 갈아입음도 동백이 부추긴 일이다


* 산
  - 송재학

겨울 내내 사내는 물만 마신다네
갸름한 손이 천천히 살을 발겨 뼈만 남기면
그 눈빛을 마주하기 어렵다
결가부좌 사내의
마지막 옷을 벗겨,
동안거의 묵언 위로
얇고 검은 빌로드 천의 바람을 덮어주면
밤새 눈 내려,
높은 곳은 구름의 무구(無垢)를 껴안고
낮은 곳은 까마득하게 추락하는
흑백의 주월산


* 마흔 살
  - 송재학

미나리와 비슷하게 습지 따라가거나
잎과 줄기를 삶아 먹기 때문에 나온
미나리아재비란 이름에는 마흔 살의 흠집이 먼저다
제 이름 없이 더부살이한다는 의심이 먼저다
다섯 장의 꽃잎이 노란 것도
식은 국물같이 떠먹기 쉬운
약간은 후줄근한 아재비란 촌수 탓이다
저 풀의 독성이란 언젠가 다시 켜보려는 붉은 알전구들
돌아갈 수 없는 열정이
저 풀을 이듬해에 또 솟구치도록 숙근성으로 진화시켰다
노란 꽃 찾는 꿀벌의 항적(航跡)도 명주나비 얼룩무늬도
미나리아재비 살림의 쓴맛 단맛
막무가내 번식하는 미나리아재비 군락을 지나간다면
일장춘몽 쓸개는 곰비임비 햇빛에 널어라
양지에 피어난 것이 어디 미나리아재비뿐이냐
누구를 기다리지도 않고 누군가 다가오지도 않는
마흔 살 너머!


* 튤립에 물어보라
        - 송재학

지금도 모차르트 때문에
튤립을 사는 사람이 있다
튤립, 어린 날 미술 시간에 처음 알았던 꽃
두근거림 대신 피어나던 꽃
튤립이 악보를 가진다면 모차르트이다
리아스식 해안 같은
내 사춘기는 그 꽃을 받았다
튤립은 등대처럼 직진하는 불을 켠다
둥근 불빛이 입을 지나 내 안에 들어왔다
몸 안의 긴 해안선에서 병이 시작되었다
사춘기는 그 외래종의 모가지를 꺾기도 했지만
내가 걷던 휘어진 길이
모차르트 더불어 구석구석 죄다 환했던 기억
……튤립에 물어 보라.


* 소래 바다는
 - 송재학

돌아가신 아버지를 소래 포구의
난전에서 본다. 벌써 귀 밑이 희끗한
늙은 사람과 젊은 새댁이 지나간다
아버지는 서른 여덟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지난 날
장사를 하느라 흥해와 일광을 돌아다니며 얻은
병이라 하지만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소래에 오고 싶어 하셨다
아니 소래의 두꺼운 시간같은 뻘과 협궤 쪽에 기대어 산
새치가 많던 아버지, 바닷물이 밀려나가는
일몰 끝에서 그이는 젊은 여자가 따르는
소주를 마신다, 그이의 손이 은밀히 보듬는
그 여자의 배추 살결이
소래 바다에 떠밀린다
내 낡은 구두 뒤축을 떠받치는 협궤 너머
아버지는 젊은 여자와 산다


* 흰색과 분홍의 차이
  - 송재학

겨울 노루귀 안에 몇 개의 방이 준비되어 있음을 아는지 흰색은 햇빛을 따라간 질서이지만 그 무채색마저 분홍과의 망설임에 속한다 분홍은 흰색을 벗어나려는 격렬함이다 노루귀는 흰 꽃잎에 무거운 추를 달았던 것, 분홍이 아니라도 무엇인가 노루귀를 건드렸다면 노루귀는 몇 세대를 거듭해서 다른 꽃을 피웠을 것이다 더욱이 분홍이라니! 분홍은 病의 깊이, 분홍은 육체가 생기기 시작한 겨울 숲이 울고있는 흔적, 분홍은 또 다른 감각에 도달하고픈 노루귀의 비밀이다


* 서풍이 젖은 나를 말릴 때
  - 송재학

비오면 넓어지는 고요의 얼안을 견딜 수 없으므로 정혜사지 십삼층 석탑에 머물지 못한다
봄날의 위 쪽에서 피는 꽃을 따라잡기 위해 솟구친 찰주
엉컹퀴에는 탑으로 올라가는 입구가 있을 것이다
내 어느 날처럼 떨어지기 위해 높이 올라갔던가

두 눈동자를 파 버리고 물끄러미 서서 기약없이 다리품 파는 내 水面에는 탑 그림자가 눈물의 방향으로 누웠다
체온이 떨어지는 서늘함, 머리칼은 허옇게 바뀐다
팔다리를 석탑 일부와 이어주는 가랑비 속

탑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 빈터란 더 큰 절을 꿈꾸면서 숨가쁜 늑골 몇 개로 두리 기둥 세우는 곳이다
서풍이 젖은 나를 말릴 때 탑에서 내 미간까지 느린 진자가 움직인다
점점 말라가는 못은 구겨진 금박지 같은 노을을 퍼 담는다


* 빈틈
- 송재학

마흔 나이의 네 출가 소식으로
내 등 뒤 문이 삐걱거림을 안다
때마침 해국 화분에서
생게망게하게 하늘매발톱이 슬며시 솟아오른다
네 갠지스강 엽서가
아픔 몸 곳곳의 빈틈을 찾아온다
범람하는 갠지스강과 같은 방향이다
하늘매발톱이 보랏빛 꽃을 피울 땐
금은이 부딪치는 소리 들었느냐
아니면 극락왕생극락왕생 중얼거리는
네 梵語와 비슷하지 않느냐
네 환속의 풍문이 다시
내 시신경의 눈물, 등과 절벽 사이
천 개도 넘을 빈틈을 찾기 시작한다


* 빈집
- 송재학

나는 오래 폭설을 기다렸다

해평마을의 빈집은 해면처럼 나를 빨아들인다
받아들일 수 없던 사랑, 낙동강의 결빙음, 매지 구름은
내 육체가 붙들던 난간이었다
간유리문을 지날 때 어딘가 지독하게 아프다가
물바람마저 사금파리 빛 띄우면
히말라야시다는 가지 꺽고 귀로를 가로막는다
입술이 닿은 성애꽃에 매달린 내 청춘이
온기 한 점 구하지 못할 때
빈 집은 폭설로 무너진다

그 사랑에는 육체를 피한 흔적이 있다


* 노인
- 송재학

1
벼랑에 뿌리 내린 배배 꼬인 소나무같이 뼈가 살과 힘줄을 바싹 끌어당긴 셈이다 뼈는 무엇이든 버거워 벼랑으로 떠밀어 버리고 싶다 웃음은 눈 주위의 움푹 꺼진 웅덩이에서 지친 달처럼 떠오르지만 월식에 가깝다 울음에는 물 퍼담을 바가지 하나 없다 바늘로 푹푹 찔러도 몸은 공수병처럼 물곬을 피할 뿐

2
삶이란 살 속에 파묻은 고무 호수 통해 빨아들인 몇 밀리미터의 공기를 몸의 칸수만큼 천천히 나누는 일, 뼈와 살의 틈으로 활자처럼 물줄기가 쏟아졌을 때 살은 울음에 내면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이제 뼈는 느린 걸음을 떠받치는 보도 블록의 단조로움만 견딘다 어떤 생각도 목구멍 위로 떠올리지 말자 지금 갑작스럽게 토하는 청년도, 눈에 띄게 부른 저 임산부의 배도


* 금호강
- 송재학

강은 오랫동안 내 안에 있었다
세상 모든 그림자가 어룽지던 물의 박수와
갈대 서걱인 갈채
그때 강은 스스로 몸을 바꾸어 갔다
이제 강은 수문을 열지 않는다
폭우 뒤의 햇빛이 흙탕물을 피해
염소떼를 핥는 새 나는 달개비꽃에 떠밀려
붉은 물가에 내려오곤 한다
저 산 아래까지 고요의 부피가
우레가 딸린 강물이
저 산 아래까지 범람했다는 흔적이다
이끼와 고지랑물에 가까운 내 불면이란
홍수나 가뭄과 싸울 수 없다는 금호강에
다름 아니다


* 애인
- 송재학

너는 악을 통해 다가왔다
석류꽃 향기를 밀어 내는 밤이
흰 손가락으로 타이프라이트처럼 찍는 너의 발자국은
내 체온을 따라와 흑백으로 인화되어 있다
섭씨 39도 쯤에서
너의 고백이 나를 불심검문하리라
너는 곧 알게 되겠지
왜 내 두 손이 붕대를 가고 있는지
내가 만졌던 너는 벌건 숯덩이 이전에
악의 두께였다
심장에서 손바닥까지 흐르는 피를 보듯
사랑을 시작할 때가 있다
너는 나의 애인이니
너 안에서 불탄 몸을 밟고 가던 나를 보았겠지
참담하여라, 그러고도 너는 출렁거리는 호수이다


* 고요가 바꾼 것
- 송재학

대비사 대웅전 돌 계단 앞에 남풍이 머물면
고요는 돌 계단을 상승이 아니라 하강으로 바꾼다
고요가 붙잡는 정지의 힘!
맞배 지붕의 대웅전이 옥빛 손뼉을 치면서
계단 너머는 팽팽해져 알 수 없는 깊이까지
나는 빛의 속도롤 다녀온다
돌 나간에 향기처럼 새겨진 안동초는
꽃피우는 순간의 정지에서 벋어 나왔다
그때 물 소리는 폭우에서 뿜어져 나왔고
물봉선은 모든 씨앗을 바람의 난간에 맡긴다
그때 저녁의 저수지에서 찰랑거리는
종소리는
느림에서 정지 사이의 돋을새김


* 애월 바다까지
- 송재학
- 제주시편 2

바다를,
물빛을,
가만히 내버려둘 것
한눈으로 붙잡지 못하는 부피가 버겁다
아무리 퍼내도 걷잡을 수 없는
코발트 물빛이다
방파제와 정적이 서로 혀 들이미는 오후,
내 꿈을 유채꽃 대궁 위에 올려놓는다
가까이 다가가면 애월 길은 미끈거리는 食道
검은색의 비애에 사로잡힌 건 내 소용돌이다
칼날이 된 바다가 옆구리에 박힌다
천천히 서 있는 전신주들,
느낌표처럼,
터질 듯 부푼 어떤 생의 입구마다 꽂혀 있다
애월 바다는 파랑 주의보에 익숙했으리
검은색 따라간 며칠 새
몇 개의 부음을 받았다
길 전체가 목관 악기인 애월에서의 해미 같은


* 동백나무는 흉터를 남기지 않는다
- 송재학

붉은 색의 극점까지 가서 난분분 떨어지는
붉은 꽃잎이 결국 내 핏속으로 튀어 들어오고 말 듯
나는 붉은 색을 닮을 수 없는 것이더냐
나는 아직 광기를 다 말하지 못했다

이월이면 사람의 병이 옮겨 가는 동백나무에는 매듭이 없다
그 나무의 여성성은 잘려진 가지를 둥글게 감싼다 (몸에 화살을
맞았다 바깥쪽 화살만 부러뜨려 없앤다 몸 안의 화살을 살 속
깊이 집어 넣는다 몸이 더 아프지 않느냐) 어떤 흉터라도 부드
러운 껍질로 감싸 버리는 동백의 힘은 희망을 되풀이하면서 두
터워졌는가


* 비명
- 송재학

그의 발자국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발자국을 보려면 밤새 눈이 내려야 한다
그의 발자국은 종기처럼 번져서
함박눈도 함부로 지우지 못한다
대설주의보에 귀기울이면
그의 길이 천산남로로 향했음을 알리라
얼마나 많은 밤이 그를 따라왔는지
이제 심지마저 다 타 버린 깜부기불을 보라

봄이 오기 전에 피는 꽃의 향기가 진한 것은
눈의 무게를 이겨낸 나뭇가지가 휘어지는 것은
울음을 디딘 발자국과 발자국 사이
뼈가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육체가 되어 버린 낭떠러지 아래
그는 커다란 비명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 모슬포 가는 까닭
 - 송재학
- 제주시편 1

나 할 말조차 앗기면 모슬포에 누우리라
뭍으로 가지 않고 물길 따라 모슬포 고요가 되리
슬픔이 손 벋어 가리킨 곳
모슬포 길들은 비명을 숨긴 커브여서
집들은 파도 뒤에서 글썽인다네
햇빛마저 희고 캄캄하여 해안은
늙은 말의 등뼈보다 더 휘어졌네
내 지루한 하루들은 저 먼 뭍에서 따로 진행되고
나만 홀로 빠져나와 모슬포처럼 격해지는 것
두 눈은 등대 불빛에 빌려 주고
가끔 포구에 밀려드는 눈설레 앞세워 격렬비도의
상처까지 생각하리라



* 나비 사이의 혼례는 나비 날개의 무늬로 결정한다
- 송재학

벌써 잊어 버렸던가
등짝의 흉터는 그의 귀가를 부추긴다
서까래가 무너지기 시작한 낡은 집의 문지방을 떠올릴 때
옛 집은 다시 낮은 곳부터 물 차 오르듯 천천히 불을 켠다
오랫동안 비워 둔 방마다 창이 먼저 부서지면서
옛 집은 눈먼 사람처럼 캄캄해졌던 것
어둔 잎으로 바뀐 것이 얼마나 많기에
저 자귀나무는 피칠갑하듯 쉼 없이 꽃을 피우는가
울타리 높이 따라 꽃은 다른 빛깔이었으니
그 집 떠날 때 열린 방문은 가면의 구멍인 양 조용했다
이제 돌아가야 하는 걸까
나비들이 서로 날개 아래 숨어드는 거기
여우비 틈새 환해지는
아자창의 창호지 뜯고 자귀나무 잎새로 매달리고픈 날,
그는 물살에 흉터를 떠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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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선 금요일/문정영 


        한 쪽 팔이 저리는 이유는 내가 그를 미워하기 때문이다
        미워하다 미워하다 어느 사이 피가 돌지 않은 사랑을 한 것이다
        그가 어두워지고, 내가 붉어지지 않는 날들은
        물관이 잘린 나무의 꽃이 피지 않은 가지와 닮을 뿐이다
        
        聖금요일, 내게 눈설게 다가오는 神의 이름을 불러본다
        神은 내게 낯선 금요일이다, 말을 듣지 않는 한 쪽 날개를
        부러뜨리고 억지 고해성사를 시키는 그는 사실 미움의
        대상이 아니다 유행을 이끄는 누드의 사진, 거기에서 벌거벗고
        뛰쳐나오는 이 시대의 얼굴인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를 믿고
        피 멈춘 사랑을 하고 있다니, 어제 내가 거울을 보고 한 행위는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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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와 사랑1)
            ―「쥐인간」을 중심으로
`
                                           
무서운 것은 사랑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데 있지 않고 애초에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네가 내 손을 잡아 줄 수 없듯이, 내가 네 손을 잡아 줄 수 없음.
-이성복, 「그대에게 가는 먼길」

0. 시작하며

라깡은 스무 살 무렵부터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철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충분히 공감할만하다.
우리의 사랑의 관계는 욕망의 방식과 유사하다. 아니 차라리 우리의 욕망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형태가 사랑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욕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라깡의 말대로라면 인간은 말하는 존재이므로, 혹은 상징계라는 계약(질서, 법)속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이므로 결여된 존재이고 이 결여를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대상(기표)들을 찾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분리, 사물과 언어의 분리, 의식과 무의식의 분리, 아버지의 금지와 법에 의해서 모성적 만족 혹은 충만함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분리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며 자신의 분리를 결여로서 경험한다.2) 그리고 이 결여를 메우기 위해 환상 속에, 욕망 속에 살기 시작한다.
그러나 환상으로 혹은 욕망으로 분리는 메울 수 있는 것인가? 물론 대답은 ‘아니오’이다.
만약 메울 수 있다면 차라리 행복할 것이다.
욕망의 환유적 운동은 결코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욕망의 은유적 고착을 통해서 ‘그래 바로 이것이야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그것이야’라고 응답하는 순간 ‘정말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었을까?’라는 뭔가 결여됨을 또다시 느낄 수밖에 없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젝은 욕망은 질문이며 욕망의 주체는 기본적으로 히스테리적 주체라고 말한 것일 게다.

사랑 또한 이러한 욕망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사랑의 대상은 이러한 결여를 메울 수 있는 존재로서 상상되며 우리는 우리의 결여를 메워줄 대상기표로서 남자, 혹은 여자를 선택한다. 거꾸로 우리가 어떤 대상(기표)을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의 결여를 보여준다(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왜 어떤 대상들을 원하는 것일까? 습관적으로?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어떤 사람은 그러한 선택을 끊임없이 반복한다3). 상대방이 자신의 결여를 메우거나 혹은 상대방의 결여를 메우기를 바라면서. 자신(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해 주거나 혹은 자신(상대방)을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온전히 사랑 받기를 환상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원한다. 욕망 한다.
서로의 결여를 메우는 행복한 합일(혹은 완전한 합일감이 서로의 결여, 차이를 메우는)이야말로 낭만적 사랑의 정점이 아닌가. 물론 고난과 장애가 그러한 합일을 위한 배경으로 드리워져야만 하지만.
그리고 이런 식의 합일, 충만함은 아닐 지라도 상대방을 자신의 거울, 또 하나의 자신으로 투사시키는 경우에, 즉 상대방에게서 자신의 이상적 자아(자신이 되고 싶었던 완전한 모습)를 발견하고 이 이상적 자아에게 자신의 자아이상을 확인하려고 한다(자신이 아름답다던지, 착하다던지, 현명하다던지, 혹은 불행하다던지).
자신의 결여를 메우려는 환상이든, 혹은 자신의 자아이상을 확인하려는 환상이든 일단 사랑은 매혹에 근거한다. 실제 이런 매혹의 지점에서야 환상은 소급적으로 구성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지도.
바로 이 매혹의 원인이 욕망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내가 원하는 그 무엇(대상 a)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은 언제나 그 사람과 내 속에 있는 것을 넘어서는 과잉이다. 그래서 이 무엇(대상 a)은 욕망의 원인일 뿐 아니라 또 한편으로 충동이 맴도는 지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목소리, 응시 등은 욕망을 누비며 환상을 구성하지만 또한 그 환상을 넘어서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구멍 속으로 유혹하기도 한다.
사랑 혹은 욕망이 지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아마 이 치명적인 유혹 때문이리라.
우리는 이 사랑이라는 우리의 증상을 통해서 불가능성(향락)의 한 복판에 서는 것이다.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무엇, 그 얼룩들, 구멍들과 대면하는 것이다. 사랑의 향락은  바로 이런 불가능성, 고통이지 않을까.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을 때에도 내 몸은 당신을 보고 있소. 당신의 벌거벗은 나체를. 그리고 그 말할 수 없는 나체를 말하려 하면, 당신의 몸은 다시금 ‘그리움’에서 ‘고통’으로 돌아오고 말아요. 당신의 몸은, 무어라 말로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든, 그렇지 않든, 고통이오. 고통은, 그래요 고통은…… 편지를, 더 이상, 쓸수가 없소. 고통은…… 영원히 읽혀지지 않을 것이오.
-채호기의 「가벼운 편지」중(『밤의 공중전화』, 문학과지성사)

우리는 욕망의 회로 속에서 이 고통들을 보지 않고 지나치지 않게 자신의 욕망(사랑)에 충실하며 자신의 증상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지니…….


1.

사랑할 때 우리는 도착증자이고 강박증자이며 히스테리자이다. 왜냐면 우리의 결여를 메우기 위한 모든 시도, (분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불가능한 시도들은 욕망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특히 강박증은 상대를 무화시키려는 기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타자는 그의 결여를 확인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강박증자냐, 히스테리자냐, 정신병자냐 등의 비하적인 낙인이나 두려운 의심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식의 낙인이나 의심은 오히려 더 심각한 신경증을 초래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신경증자이며 정상/비정상의 구분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정신분석의 담론들은 좀 더 냉정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한다.

여기에서는 프로이트가 들려주는 ‘강박증자들은 어떻게 사랑을 하는가 혹은 사랑의 방식이 어떻게 고착되었는가’를 출발점으로 삼아 라깡주의자(특히 지젝)의 얘기들을 참조하면서 그의 사랑의 방식(혹은 욕망의 방식)과 그 증상 그리고 증상의 해소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강박증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론은 사랑과 미움, 존경과 비웃음 등의 양가감정을 기본 축으로 해서 강한 부정이 강한 긍정이 될 수 있는 전치의 과정처럼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무의식의 엉킨 실타래를 보여준다.
 강박증은 사랑의 대상에 대한 양가감정의 혼란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증상으로 보인다. 도대체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일까? 미워하는 것일까? 프로이트는 강박증에 있어서는 미움이 어쩌면 더 강한 본능일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프로이트는 그의 방식대로 과거, 어린 시절로 회귀한다. 어릴 적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벌어진 원장면에서 강박증적 사랑의 방식은 고착되었다. 어떻게? 쥐인간의 사례를 통해서 살펴보자.


2. 아버지, 그리고 여자

프로이트에 의해서 ‘쥐인간’이라 명명된 어떤 남자가 그의 진료실에 찾아왔다. 그의 고통은 자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망상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수께끼 같은 쥐인간의 망상:
“돈을 갚으면 여자와 아버지에게 쥐를 이용한 벌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A중위에게 3.80크로넨을 갚아야 한다.”

쥐인간은 군대에 있을 때 한 중위(N중위)로부터 쥐를 이용한 끔찍한 벌에 대한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벌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행해지는 이상한 망상에 스스로 놀라게 된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망상에 대한 죄의식으로 수수께끼 같은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우체국 아가씨에게 돈을 간접적으로 빌린 일이 있는데 이 아가씨는 그가 얼마 전부터 마음에 들어한 아가씨였다. N중위가 돈을 A중위에게 갚아야 한다라고 실수 한 것을 근거로 그는 사실은 우체국아가씨에게 갚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A중위에게 돈을 갚아야 한다는 맹세를 계속 지키려고 하며 심지어는 우체국아가씨에게 돈을 갚고 난 뒤에도 그 맹세를 실행하려는 유혹을 계속 받았다.
이 망상은 아버지에 대한 양가감정과 여자에 대한 양가감정을 동시에 보여준다.
쥐인간이 실수한 N중위의 말을 따른다는 것은 N중위와 아버지를 동일시함으로써 아버지가 실수할 리 없어, 라는 아버지에 대한 복종과 또 한편으로는 실수한 명령(불가능한 명령)을 따름으로써 아버지를 조롱하는 양가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것은 자신의 성적 만족(우체국여자를 만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물론 그가 자신의 성적 만족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죄의식 때문이다. 그리고 이 죄의식은 성적 만족을 추구함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이 성적 만족을 추구하는 방해자로 아버지와 자신의 연인4)을 증오함으로써 오는 죄의식이라 함이 더 타당할 것 같다. 그는 이런 죄의식5) 때문에 불가능한 맹세를 함으로써 자신에게 제재를 가한다.

쥐인간은 어릴 적 자신의 성적 만족(리비도)을 억압하는 아버지에게 극단적인 미움을 드러낸다. 그러나 쥐인간은 자신의 과도한 증오에 스스로 놀라 자신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자신을 벌하거나 혹은 반대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증오를 억압한다.
이후에도 쥐인간의 사랑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계속 흔들리는데 그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 때문에 그 여자를 사랑하지만 또 한편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혹은 사랑) 때문에 그 여자를 미워한다. 그는 아버지의 흔적이 부재한 곳에서만 정상적인 성관계가 가능하다.
연인에 대한 그의 사랑의 감정은 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반복한다. 사랑과 미움, 특히 그 중에서 미움의 감정은 너무 과도해서 억압되지만 죄의식으로 혹은 과도한 애정으로 변화된다. 강렬한 미움과 강렬한 사랑이 한 쌍으로 붙어 있어 강박증자는 우유부단해지고 자신의 사랑조차 의심하게 된다.
길을 가다가 돌을 발견해도 쥐인간은 고뇌한다. 자신의 연인이 지나 다니는 이 길에서 그녀가 다치지 않게 돌을 치웠다가(과도한 사랑) 다시 돌아와 자신에 행동에 어이없어 하며 돌을 되가져 놓는다(프로이트는 이것을 미움의 승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사랑의 방해자는 모두 죽기를 바라는(애인이 돌보는 병든 가족, 그리고 애인과 친밀한 관계인 사촌)망상을 하고 또 한편 그러한 자신에게 제재를 가하기도 한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프로이트의 쥐인간 사례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해서 그의 사랑의 방식이 결정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 쥐인간의 증례에서는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이 어머니와의 결합을 방해하기 때문이라는 식의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위행위와 같은 자신의 만족을 방해하는, 혹은 금지하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더 부각된다6). 이러한 그의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갖고 있기 때문에 쥐인간은 신경증자인 것이라고 라깡은 말했을 것이다7). 이제 여기에서 프로이트와는 강박증을 분석하는 방법이 좀 차이가 있는 라깡은 강박증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쥐인간의 사례에서는 어떻게 분석될 수 있을까?
라깡은 강박증자는 분리(결여)를 마찬가지로 환상 속에서 메우는데 그는 자신이 결여된 혹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고 고집하면서이다. 그는 자신에겐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의식이란 없으며 모든 것이 그의 의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이다. 따라서 그에게 대상이란 자신의 결여를 메워 줄지도 모를 ‘대상 a’를 가진 존재로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요구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그는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무화되는 순간(대표적으로 오르가즘)을 극도로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대상과 거리를 두려한다. 그래서 그는 대부분 스스로 교묘한 방법으로 사랑에 빠지지 않게 하거나 혹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사랑을 한다.
라깡 식으로 보자면 쥐인간은 자신의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방해자 아버지를 불러온다. 그리하여 자신의 사랑을 방해자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사랑(죄의식)으로 대체하여 자신의 사랑(혹은 만족)을 불가능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자신의 사랑을 위하여 아버지가 죽었으면 했던 상상도 결국 아버지의 죽음을 상상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신의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노력이며 자신의 애인의 가족이 죽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도 애인이 보고 싶은 그의 과도한 애정이라기보다 자신의 애정을 방어하기 위해 죄책감을 발동시키려는 전략이다. 그가 길가의 돌과 관련된 에피소드에서 자신의 애인을 미워하는 감정이 승리했다고 프로이트는 말하지만 라깡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미워하는 것으로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방어하는 것이다(그녀를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 혼란하게 함으로써 사랑을 불가능하게 하는 전략. 음 이렇게 보니 놀라운 전략가로군.). 전반적으로 죄의식의 승리. 아니 방어의 승리인가?
그러나 스스로를 분리되지도 금지되지도 않았다고 생각하는 강박증자가 금지와 억압의 아버지를 떠올린다는 것은 자신은 이미 금지 당한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는 꼴인데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 졌을까? 대상(혹은 대상 a)의 유혹이 너무 강해서인가? 아니면 아버지는 벌써 죽었다고 안심해서인가?
자신의 리비도를 억압했던 아버지(실제의 아버지가 그러했는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단지 한 두 번의 가벼운 질책이 그에게 그러한 확신을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른다.)를 미워하는 것으로, 사랑하는 것(죄의식)으로 자신의 만족을 억압하려는 쥐인간.
그런 의미에서 쥐인간의 욕망의 원인을 ‘아버지’ 혹은 ‘아버지의 목소리(초자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8) 그러나 실제 쥐인간은 아버지의 목소리에 충실하다기보다 자신의 만족을 방어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목소리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한다.
오히려 욕망의 고착을 ‘아버지’라고 볼 수 있으며 그렇게 본다면 욕망의 환유적 흐름으로 이끄는 대상 a는 ‘쥐를 이용한 잔인한 벌(증오의 기표)’정도일 것이다. 이 증오의 기표를 통해 죄의식을 촉발시키고 결국에는 자신의 사랑, 만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증상은 타협형성이며 억압이 되돌아오는 것이다. 타협이란 만족과 억압의 타협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증상은 만족을 유혹하기도 한다는 얘기를 한 것이다.
자, 그러면 만족을 가능하게 하는 쥐인간의 리비도적인 충동은 어디를 맴돌고 있을까? 아마도 신체대상으로서는 항문이며 정념은 미움, 가학적인 것이 아닐까한다. ‘쥐를 이용한 벌’이 항문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얘기를 듣고 난 뒤 쥐인간의 증상이 심해진다는 것은 그 이야기가 자신의 어떤 것(충동)을 건드렸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쥐인간은 제한적인 만족(향락)이라는 증상을 드러내게 된 것이라고(증환으로서의 증상9)).
왜 그것이 만족인가? 쥐인간은 벌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갖가지 방법으로 자신에게 제재를 가하는데? 그러나 그럼에도 이미 그의 그런 망상자체가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고, 암호 같은 메시지로 언어화하는 것(증상)에 성공함으로써 만족을 가능하게 했다. 비록 그것이 강박증자의 특징적인 망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지만 강박증자는 생각하는 것 자체로 성적인 것을 대체하기 때문에 그가 만족을 얻었다는 것은 가능한 가정이 아닐까한다.


3. 신경증, 강박증의 해소

프로이트는 분석치료란 “의식에 의해서 무의식을 대체하는 일, 혹은 무의식을 의식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10)”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번역은 분석가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하게 해야한다. 그러나 의식으로 떠오를 수 없기 때문에 무의식으로 남아 있는 것을 어떻게 의식으로 떠오르게 할 수 있는가?
프로이트는 전이 작업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분석가는 먼저 ‘전이’가 가능하도록 해야 하며 억압이 이루어졌던 장면을 다시 분석가와의 관계 속에서 반복하게 하고 “자신의 동원 가능한 모든 심리적 힘들을 통해서 갈등이 다른 방식으로 결말이 나도록 이끌어야11)”한다.
이렇게만 말하면 상당히 모호하기도 하다. 특히 동원 가능한 모든 심리적 힘들이라니 이것이 말하는 바가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자아나 초자아를 지칭하는 것들이 아닐까한다. 다시 말해 금지와 억압의 잣대를 구성하는 이 심리적 힘들이 “좀 더 유화적이 되고 일정한 만족을 허용할 정도로 융통성을 발휘(프로이트, 『강의』 645쪽)”하게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융통성을 발휘하지 않던 자아가 왜, 어떻게 융통성을 발휘하게 되는가? 프로이트는 여기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정신분석의 성과(정상이냐 비정상이냐의 구분은 상대적이며 인간은 누구나가 심지어 어린아이까지도 성욕을 가지고 있다. 등등)를 같이 공유함을 통해서 새로운 자아를 만들 수 있는 과정12)을 자신의 분석치료에서 실행하고 있었다.
쥐인간의 분석치료 중에도 이러한 ‘전이’가 일어나며 쥐인간은 프로이트를 아버지의 위치에 갖다놓고 그를 과도하게 사랑했으며 그러면서도 그를 자극하고 급기야는 자신의 미움을 폭발시켰다. 그리고는 프로이트(아버지)가 화가 나서 자신을 때리려 일어선다고 생각하며 두려워했다(물론 프로이트는 일어섰을 뿐…….). 그리고 자신의 반응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던지며 이해하게 된다(어 내가 왜 그랬지? 왜 일부러 프로이트를 화나게 만들려고 했을까? 내 무의식이 정말 원하는 것은 뭐지? 나는 정말 아버지를 미워했나 ).
이것을 라깡적인 언어로 표현하면, 그는 자신의 환상을 무대화하면서 자신의 환상을 해석하고 욕망의 타자성과 그 타자의 결여를 체험함으로써 횡단한다.
그러나 주체는 어떤 식으로든 ‘대리만족을 주는 자신의 증상(프로이트)’을 포기하려고 할 것인가?
지젝은 여기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쥐인간의 사례에서처럼 증상은 ‘만족(향락)’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결여된 주체에게 주어진 간헐적인 만족(향락)을 포기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런데 도대체 이 만족이란 무엇인가? 물론 최초의 만족, 충만함은 아닐 것이다. 지젝은 이것을 실재계의 잔여물, 찌꺼기로서의 (잉여)향락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또 이 실재계란 무엇인가? 실재계는 사후적으로 전제된 것이면서 또 한편으로 상징화에 저항하는 상징계의 빈 구멍, 불가능성이다. 바로 이런 상징화되지 않는 불가능성(외상적 중핵)으로 인해 (잉여)향락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회피하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
우리의 욕망은 이러한 만족을 방해하기 위한 것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욕망 속에서 어떻게든 이러한 구멍, 결여를 메울 환상을 구축하며 환상-대상을 뒤좇는다. 그러나 모든 방해와 더불어  구멍, 결여, 불가능성, 향락은 증상을 통해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증상은 억압과 만족, 봉합(환상)과 결여가 뒤엉켜 있는 고리이다.
이러한 증상의 해소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증상은 상징화될 수 없는 외상적 중핵(향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 증상의 해소란 곧 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억압(상징계)이 없는 세계는 곧 정신병적 세계(죽음충동에 굴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증상과 자신을 동일화하는 것, 환자가 자기 증상의 실재 속에서 자기 존재의 유일한 실정물을 인정 할 수 있는 순간에 분석과정은 종결된다(지젝, 『숭고』 136쪽)”는 것은 당연하다.


다시 0
시인의 말처럼 사랑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사랑이 서로의 결여를 메우려는 욕망이라면 오직 착각(나르시즘적인) 속에서만13) 두 사람의 합일, 충만함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음, 사랑은 역시 욕망의 허기진 배를 채우는 환상이야”라고 냉소적으로 코웃음치고 돌아서 버릴 것인가?
사랑(혹은 욕망)이 이런 식의 환상에 근거한다는 말은 단지 그것이 허위의식, 가짜의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런 식의 환상을 통한 오인이나 착각은 필연적이며 이런 오인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자체가 오히려 치명적인 착각이다.
진리는 환영을 통한 오인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은 사랑에 있어서도 유효하다14).
그러므로 돌아선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 환상을 횡단하지 않는다면 정말 돌아서는 것은 불가능하다(실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왔다).
부연하자면 환상은 역설을 가능하게 한다. 타자(상징계) 혹은 주체의 결여,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 만들어졌던 것이 오히려 자신의 결여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환상은 상징계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공백을 중심으로 구조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실재는 바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부재하는 원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오인의 형식을 통해서만 다시 말해 환상(욕망)을 통해서만이 진실15)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환상을 횡단하기란 “라깡이 환상을 횡단하기라고 부른 것은 정확히 환상-대상에 대한 그러한 전도의 경험에 있다. 주체는 언제나 결여되어 있는, 욕망의 대상-원인이 어떻게 그 자체로 결여를 객체화하고 구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지를 체험”(지젝, 『숭고』, 329쪽)하는 것이다.

환상을 횡단한 다음은 증상이 사라지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증상은 우리의 실정적 조건이며  횡단할 수 없는 향락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우리의 증상 속에서 결여를, 분리를, 차이를 메우려는 환상, 욕망만이 아니라 바로 그 욕망(환상)속에서 ‘내 속에 있는 나 자신보다 더한 것’, ‘네 속에 있는 너 자신보다 더한 것’을 대면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사랑은 불가능하다가 아니라 불가능이다.
사랑에 대한 얘기들은 문학 속에서, 영화 속에서, 그리고 개인적인 인간관계속에서 끊임없이 지칠 줄 모르고 등장한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열병이 우리를 인간, 자신, 타자에 대해서 들여다보게 만드는 계기를 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계기를 통해서 어떤 사람은 냉소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열정적으로 사랑에 대해서 말한다. 정신분석학은 냉소적이지도 열정적이지도 않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사랑의 증상 속에서 보여지는 의미화할 수 없는 기표들을 아슬아슬하게 어떤 문형으로 포착해놓은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사랑의 증상과의 동일시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책이다―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음미하면서 이 글에 잠정적인 마침표를 찍을까한다.

“나는 그가 던지는 질문을 결코 풀어헤칠 수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외디푸스가 아니다. 따라서 내게 남은 일이라곤 내 무지를 진실로 바꾸는 일뿐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은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그의 불투명함은 어떤 비밀의 장막이 아닌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되는 어떤 명백함이라는, 그런 지혜를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미지의 누군가를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남아있을 그 누군가를 열광적으로 사랑하게된다. 신비주의자적인 움직임:나는 알 수 없는 것의 앎에 도달한다.”

1) 사실 이 글은 사기에 가깝다. 라깡의 글을 간접적으로만 읽고 마음대로 혹은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다. 물론 프로이트의 글도 다 읽지 못했다. 그럼에도 내가 그들에 대해 알고 있다고 가정하는 지식을 모두는 아니겠지만 최대한  동원해서 해석한 잠정적 결론이다. 주로 참고한 텍스트는 프로이트의 「쥐인간」(『늑대인간』,열린책들), 『정신분석강의 하』(열린책들), 브루스 핑크의 『라깡과 정신의학』(민음사), 김상환․홍준기 『라깡의 재탄생』(창작과 비평사),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삐딱하게 보기』(시각과 언어)

2) 이러한 결여는 전제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후적으로 구성된 것이기도 하다. 상징계는 자신은 결여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처럼 ‘컵은 컵이고 법은 법이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배제/결여를 감추기 위한 베일/환상인 것이다. 환상은 자신의 결여를 감추는 형식, 그렇기  때문에 그 형식 속에 자신의 결여를 포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징계의 결여는 환상을 통해서 봉합되지만 바로 또 그 환상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3) 반복하지 않는 일이 있을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대상에 대한 고착이 일어나 한 대상만을 고집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대상을 찾지 못해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이지 않을까?

4) 여기에서 그의 연인은 위치는 다중적이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의 축에 서기도 하고 또 한편 아버지와 동일하게 자신의 만족을 방해하는 자의 위치에 서기도 한다.

5) 프로이트는 ‘자아와 이드’에서 양심, 죄의식이라 불리는 것들은 초자아의 명령에 의한 것인데, 초자아는 이드의 첫 번째 대상리비도 집중이나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흔히 알고 있듯이 초자아가 자아에 의해 의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형성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형성되며 그렇기 때문에 초자아는 의식보다는 이드의 영역에 가까이 있다. 그런데 왜 초자아가 자신을 현시하는 것은 주로 죄의식을 통해서인가. 프로이트는 그것이 이드 안에 있는 파괴본능(죽음충동)때문이라고 한다.(정신분석 세미나 쥐인간팀 발제문 중에서)

6) 그래서 쥐인간은 자신의 만족을 방해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한밤중에 일어나 거울을 보며 자위행위를 하는 이상한 행동을 계속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망상, “내가 이런 짓을 하면 내세의 아버지에게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할 것이다.”라는 죄의식, 제재에 의해서 중단된다.

7) “라깡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곧 (신경증)증상이라고까지 말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고(원인), 이것 때문에 주체가 신경증자가 된 것이 아니라(결과)이 아니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곧 신경증에 걸려 있다는 뜻이다.”  홍준기,「자끄 라깡, 프로이트로의 복귀」『라깡의 재탄생』,창작과 비평사 2002. 48쪽

8) ‘쥐 인간’의 환상이나 강박증적 관념 속에서 표현되는 아버지의 존재를 해명하는 것이 브루스 핑크의 지적처럼 쥐 인간의 욕망의 원인에 접근하는 데 용이할 것 같다. ‘아버지’라는 타자는 ‘쥐인간’에게 최초의 타자이면서 브루스 핑크에 의하면 바로 그의 아버지가 ‘쥐인간’에게 욕망의 원인인 대상 a라는 것이다. 대상 a란 내가 어떤 남자에게 강하게 끌렸을 때. 여기서 말한 어떤 남자는 나의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어떤 남자 안에 바로 주체가 욕망을 일으키는 대상 a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정신분석 세미나 쥐인간팀 발제문 중에서)

9) 증환으로서의 증상에 대해서 지젝은 “향락이 스며있는 기표물이며 사회적인 유대의 네트워크 속에 포함될 수 없는 얼룩,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네트워크를 가능케 하는 실정적 조건(지젝, 『숭고』, 137쪽)”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실재계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기표물이라는 것이다. 어떤 언어, 상징적 그물에도 걸려들지 않음으로 그것은 주체에게 만족(향락)을 가능하게 하며 또한 동시에 그것을 중심으로만 상징계가 구조 지어짐으로 상징계의 실정적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충동이라는 것도 증환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실재계의 압력을 사후적으로 구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0) 프로이트,「전이」,『정신분석강의 하』,임홍빈․홍혜경옮김, 열린책들 1997. 615쪽

11) 프로이트, 「분석요법」, 『정신분석강의 하』, 임홍빈․홍혜경옮김, 열린책들 1997. 643쪽

12) 새로운 자아라는 것은 라깡 식으로 표현하면 새로운 상징계를 의미하는 것이지 않을까? 따라서 분석치료란 단순히 기존의 질서로 의식화하는, 혹은 언어화하는 의미라기보다 의식화와 언어화의 외연을 넓히는 작업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3) 혹은 죽음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바타이유에게 에로티즘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나?)

14) 오직 오인을 통해서만 타인의 본성에 도달하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서만 달시는 자신의 그릇된 오만으로부터 벗어나고, 엘리자벳은 자신의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는 것이다.「증상에서 증환으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수련 옮김, 인간사랑 2002, 117쪽.

15) 어떤 진실? 주체와 타자가 결여된, 분리된 존재라는 것. 바로 이 지점에서 분리가 인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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